내가 찾은 관광명소/서울,인천&경기권

38번국도 여행! 미륵불의 고장 안성시 북부지역을 찾아서...

왕마구리 2010. 3. 24. 12:55

◀ 안성시 북부지역의 관광 명소(죽주산성, 고산호수, 운수암 등)를 찾아서... ▶

 

▲ 죽주산성 서벽길 

 

▲ 죽주산성 북치성과 포루

 

이번 안성 여행은 2009년 8월 3일 안성의 3대 명찰(칠장사, 청룡사, 석남사) 탐방에 이어 두번째이다. 물론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 금북정맥의 3정맥 분기봉인 칠장산이 안성에 위치해 있어 정맥 종주와 선운산 시산제 등으로 10여차례 넘게 산행을 위해 방문하였지만 순수 여행을 목적으로 방문을 하게 된 것은 이번에 두번째가 된다.

38번국도를 따라 안성시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는 관광지를 찾아 탐방을 하였으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곳을 찾게 되어 수박 겉 핦기 식이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죽주산성과 운수암을 애워싸고 있는 무한성 등 2곳의 산성을 성돌기를 하며 최대한 내용에 충실하려 하였고, 덕봉서원은 문이 잠겨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대문의 빗장을 손가락으로 열어 서원 내부를 구경하는 등 최대한 방문지를 제대로 둘러 볼려는 노력을 경주하였었다.

다만 김기덕 감독의 '섬' 촬영지였던 고산호수만은 전체를 일주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다음 일정을 고려, 일부 구간만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탐방기에 기재하는 각 관광지의 설명은 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문과 인터넷에서 조사한 자료들을 조합하여 기재를 하였으며, 일부 내용들은 현지의 안내문과 조사한 자료가 상이한 것들도 있어 이는 작성자의 판단으로 기재를 하였음을 밝혀 둔다.

 

 

【 일 정 표 】2010년 3월 21일(일)

                         죽주산성(10:15~12:00)-(12.60km)→도솔산 쌍미륵사(12:19~12:42)→국사봉 국사암(12:48~13:20)-(7.30km)→아트센터 '마노'(13:40~13:50)-(5.90km)→안성향교(14:04~14:22)-(7.20km)→대농리석불입상-(3km)→고삼호수(14:50~15:06)-(10.70km)→덕봉서원(15:22~15:42)-정무공오정방고택(15:48~15:58)-(3.40km)→운수암 & 무한성(16:07~16:45)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탐 방 기 】  

▷10:15~12:00=>죽주산성 성돌기 및 탐방

죽주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동문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38번국도 매산삼거리에서 17번국도를 타고 용인 방향으로 올라오면 좌측으로 죽주산성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비보호 좌회전을 하여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죽주산성 내에 위치하였던 절이 성밖으로 이전하여 자리를 잡은 '성은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절 입구에 주차장은 아니지만 10여대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이곳에 주차를 하고, 안성시 관광안내도와 '죽주산성'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좌측의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르면 죽주산성 동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 갈 수가 있다.

성 안으로 들어서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넓은 대지가 눈 앞에 펼쳐지고, 우측으로 약 50여m 떨어진 곳에 '죽주산성 현황도'가 있다.

성벽 위를 걷게되는 성돌기는 현재 현황도상에 표시된 복원된 성벽을 따라 걷게 되며, 성벽 위를 따르다 보면 곳곳에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좌측 방향의 길은 지름길이거나 성 안의 분지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이므로 성벽 위의 길만 고집하면 복원된 성벽 전체를 따라 돌게 된다.

물론 좌측의 길을 따라 진행하여도 되지만 성벽을 따라 전체를 한바퀴 돌더라도 전체 거리가 길지 않고,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힘든 구간이 없어 별 부담이 없다.

 

▲ 죽주산성 성돌기의 출발점인 동문지

▲ 새로 복원된 죽주산성 동벽

 

▲ 남문지2 

 

▲ 남문지2로 이어지는 성벽

 

▲ 남문지2에서 서문지로 이어지는 성벽

▲ 서문지로 가는 소나무 숲길

 

▲ 서문지로 이어지는 성벽

 

▲ 성안에서 바라본 서문지 

 

▲ 성밖에서 바라본 서문지 

 

▲ 외성과 이어지는 서문지에서 뒤돌아본 지나온 성벽 

 

▲ 외성과 이어지는 서문지에서 뒤돌아본 지나온 성벽  

 

(( 죽주산성 성돌기 탐방 코스 ))

동문지-북치성/포루-남문지2/암문-'충의사'/송문주장군 사당-서문지/암문(외성 연결지점)-(서벽따라 진행)-남치성/산불감시초소-남문지-각루터-동문지/원점회귀-성은사약수터-옛 성은사대웅전과 요사-동문지-성밖 성은사

 

▲ 남문지로 향하다 뒤돌아본 서벽

▲ 남문지 직전 남치성 자리의 감시초소

 

♧ ♧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일명 '고죽주성(古竹州城)'이라고 불리어지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해발 370m의 비봉산 아래 위치해 있으며 복합식 산성으로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구조를 하고 있다.

성내 해발 250m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퇴뫼식의 내성과 내성을 둘러싼 중성, 그리고 동북쪽으로 형성된 골짜기를 포함하여 축조된 포곡식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류와 삼국시대 토기, 기와류가, 중성에서는 고려, 조선시대의 토기, 자기, 기와류가, 외성에서는 이들 유물이 혼재하여 나타나고 있어, 시대에 따라 공간구조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중성은 정상부와 동쪽으로 단을 이루며 내려가는 대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계곡을 감싼 성벽의 둘레는 1,688m 정도이다. 이같은 체성 외에 서벽에 깃대어서 북쪽으로 뻗은 외성이 있는데 그 길이는 1,500m 가량이고, 안쪽의 내성 길이는 270m 정도이다. 성벽 높이는 2.5m 내외이다.

시설물은 문지, 치성, 각루, 포대 등이 있다.

 

 

▲ 북치성에서 내려다본 주변의 전경

 

문지는 중성에 3개소, 외성에 2개소를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문지는 성벽의 중간부에 두었으나 남문은 중앙부가 완만한 경사의 능선임을 감안하여 서벽 가까이에 시설하였고, 서문은 본성을 약 20m 정도 벗어난 지점의 외성에 설치하였다. 이는 정상부 바로 아래를 지나가는데다가 주변 지세가 험한 서벽의 특성상 성벽의 효용가치가 적고 방어에도 불리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이 꺾이는 곳에는 각루를 두었으며, 군데군데 치와 포대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는 비교적 넓은 대지가 많은 편이며, 장대지를 비롯하여 각종 건물지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몇 차례 수개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통일신라말인 진성여왕 때에는 기훤이 이곳에서 군사를 모아 크게 세력을 떨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죽주산성이 기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고려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23년(1236) 몽고의 침입이 있자 이곳의 방호별감 송문주는 백성들을 이끌고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송몽주는 이미 구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의 공격방법을 경험한 적이 있으므로, 몽고군의 갖가지 공격에 대해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치며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이에 몽고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포위한 지 15일만에 물러가 백성들은 송문주 장군을 '귀신' 또는 '신명'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 죽주산성에서 변이중, 황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다. 

 

 

▲ 남문지 

 

▲ 동문지 전 치성의 건물(각루)지 흔적 

 

▲ 남문지에서 동문지로 이어지는 성벽길

 

♧ 송문주 장군 이야기

 

◀ 죽주산성내의 송문주 장군 사당

 

송문주장군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커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이에 어머니가 송장군을 너무 총애하자 여동생 송희는 질투와 시기를 하여 동생을 죽이고 자기가 성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하루는 다음과 같은 내기를 하였다.

송문주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개성에 갔다가 다음 날 아침밥 먹기 전에 돌아오고, 송희는 밤부터 성을 쌓기로 하되 지는 사람이 죽기로 약속을 하였다. 송문주는 개성을 향하여 떠나고, 그 다음날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다가 보니 송희는 벌써 성을 다 쌓고 성의 남문을 달때인데 개성에 간 송문주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송문주의 천성이 한번 약속한 일은 목숨을 내놓고라도 실현하고야 마는 까닭에 만일 내기에 지는 때는 죽음으로 맹약을 어기지 아니할 것이지만 송희는 여자라 진다고 할지라도 죽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일을 위하여 준비해 둔 뜨거운 팥죽을 가지고 송희를 찾아서 먹고 하라고 권하였다.

송희는 끝난 후에 먹겠다고 재삼 고사하다가 배가 고프던 차에 어머니의 강건을 막지 못하고 그 팥죽을 받아 먹고 성문을 달려고 하는 즈음 송문주가 돌아왓다.

송희는 그제서야 어머니에게 속은 것을 알았으나 지는 사람이 죽기로 약속을 한 것이므로 여장부인 송희는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그 목에서 선혈과 함께 푸른 새 한 쌍이 나와서 이상한 비명을 지르고 날아 갔는데 송장군이 몽고군에게 패하기 삼일 전 진문 앞에 푸른 새 한 쌍이 날아와 송희가 죽을 당시 날아갈 때 낸 소리와 똑 같은 비명을 내며 날아갔다. 그 후 송장군은 몽고군에게 패하였다. 후인들은 말하기를 송희의 원혼 때문에 진 것이라하며 남문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라 전해진다.

(이러한 오누이의 성쌓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이야기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죽산 지역의 설화이다. 송문주 장군은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에게 승리하였으며,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에 임명되었다)

 

 

▲ 성내에 있는 성은사약수터 전경

 

▲ 성은사약수터 

 

▲ 성은사약수터에서 바라본 성 내부 전경

▲ 성은사약수터에서 옛 성은사 대웅전가는 길

 

▲ 성내에 남아있는 옛 성은사 대웅전 

 

▲ 옛 성은사 절 마당에 남아있는 장독대 

 

♧ 성은사

죽주산성 입구에 있는 사찰로 연혁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꽃절로 유명한 사찰이다.

성오 주지스님은 연꽃을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이다.

 

▲ 죽주산성 입구에 위치한 성은사

 

▲ 성은사 대웅전

 

▲ 성은사 범종각 

 

 

죽주산성에서 17번국도로 내려서고 우측 매산삼거리로 다시 내려가서 38번국도 안성 시내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삼죽삼거리를 지나 동아방송대학 직전 우측의 2차선 포장도로로 들어 약 5분여을 진행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의 길을 따라 들어가게 된다.

 

▲ 쌍미륵사와 국사암 갈림길

 

잠시 들어가면 다시 Y자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나고 좌측 길은 쌍미륵사 가는 길이고, 우측 길은 국사암 가는 길이다.

어느 곳을 먼저 가더라도 다시 이곳 삼거리롤 되돌아 나오게 되므로 편한대로 진행을 하면 된다. 그러나 국사암 가는 우측 길은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인데다 국사암이 가까워질수록 가파른 오르막이라 맞은 편에서 오는 차량이 있을 경우에는 차량을 피하는 것이 쉽지가 않으므로 여유가 있는 갓길을 지날 때는 잠시 멈추어 섰다가 맞은 편에서 진행하는 차량이 있는지를 살피고 진입을 하는 것이 좋다.

참고로 두 대의 차량이 지나기 어려운 경우에는 국사암으로 들어가는 차량이 후진을 하여 적당한 장소를 찾아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차량에게 양보를 하여야 한다. 

▷12:19~12:42=>도솔산 쌍미륵사 석불입상(가솔리석불입상)

 

♧ 법상종의 본산 '쌍미륵사(雙彌勒寺)'

▲ 쌍미륵사의 용화전

 

▲ 쌍미륵사의 천불전

 

▲ 쌍미륵사의 산신각

 

인도의 유가법상학의 창시자인 무착보살을 연원조로 중국의 유가법상학 개척자인 현장법사를 원조로 하고, 신라의 유가종조인 태현법사를 개종조로 신라말 진표율사를 중흥조로 하여 그 종지와 법통을 계승한 종파가 법상종이다.

미륵 삼부경을 정전으로 해심밀경 유식법상종요 유가론종료 릉가경 점찰선악업보경을 겸전으로 하고, 기타 경전연구 및 지송 등을 제한하지 않는다.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의 기본교리 바탕위에 유가교관을 수증하여 만법유식의 진리를 체득하고, 미륵신행을 실천함으로서 업장을 소멸하고 복혜를 증진하며 심선운동을 전개하여 국민도의를 앙양하고 사회복지를 개척함으로써 지상천국 융화세계를 실현함을 근본이념으로 한다.

1969년 3월 15일 '대한불교 법상종'으로 창종하였고, 총본산은 쌍미륵사'(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33-1)이며 총무원장은 해월스님이다.

 

▲ 나뭇가지에 매달아둔 풍경 

♧ ♧ 기솔리 석불입상(基率里 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33-1 

 

 

▲ 남미륵불 

 

▲ 여미륵불 

 

미륵부처(보살)란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을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커다란 돌기둥에 불상 2구가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어 남북으로 놓여 있는데 매우 길어 보이는 느낌을 준다. 이 석불들은 모두 민머리로 그 위에 지혜를 상징하는 상투 모양의 옥계가 튀어 나와 있으며, 얇은 자연석을 둥글게 가공하여 갓으로 사용하였다.

사각형의 비대한 얼굴에 가는 눈, 삼각형의 짧은 코, 두터운 입, 짧은 귀 등 윤곽이 뚜렷하고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가 선명하다.

법의는 두 어깨를 가린 통견으로 원통형의 신체를 감싸고 있다.

수인은 중생의 모든 불안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의 자세를 하고 있으나 손 모양이 약간 어색하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지방 양식으로 도선국사가 조성하였다고 전하며, 안성지역에는 이러한 석불입상이 다수 남아있다. 동쪽을 향한 두 미륵 중 북쪽에 위치한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높이 5.4m의 미륵을 남미륵불(男彌勒佛), 남쪽에 위치한 날씬한 높이 5m의 불상을 여미륵불(女彌勒佛)이라 부른다.

 

쌍미륵사에서 삼거리로 되돌아 나가 우측의 시멘트 포장 좁은 길을 따라 오르면 '차량진입금지'란 푯말이 있는 국사암 입구에 이르게 되며, 우측으로 넓은 공터가 있어 주차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 국사암 주차장에서 국사암 오르는 가파른 시멘트 길

▲ 국사암에서 내려다본 국사암 오르는 길

 

도보로 가파른 경사의 길따라 약 200여m를 오르면 국사암에 도착을 하게 되는데 우측에 '된장, 고추장 판매'라 장독에 표시를 해 둔 장독대가 있고 뒤돌아보면 시야가 트이고 주차장에서 올라온 꼬불꼬불한 길이 인상적이다.

국사암가는 길은 국사봉 정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에 바위 틈새를 비집고 앉아 있어 도로 폭이 좁아 겨울철 눈이 내린 때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12:48~13:20=>국사암(國師菴)

 

▲ 국사암

 

▲ 대웅전

 

▲ 극락전 

 

▲ 궁예미륵 우측 바위위에 모셔진 야외 불상

 

▲ 국사암의 장독대

 

입구에 서면 극락전 불전이 보이고 그 뒤로 대웅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웅전 옆 바위 위에는 산신각이나 삼성각에서 볼 수있는 불상이 모셔진 야외 불전. 그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인 극락전 뒷편에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세 개의 아담한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석조여래입상 우측 커다란 바위 위에는 또 다른 불상이 모셔진 야외 불전이 자리를 하고 있다.

 

♧ ♧ 국사암 석조여래입상(國師菴 石造如來立像)

*향토유적 제42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산2-2 

 

이 미륵은 미륵이라기보다 석인상에 걸맞을 정도로 몸의 전체적인 비례에 비해 모자가 거대하고 손모양도 수인이 아니라 선비들이 합장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목도 지나치게 짧으며, 얼굴의 윤곽에는 불상이 주는 이미지나 친근미가 나타나 있지 않는다.

석불의 발목 이하는 땅에 매몰되어 있다. 지상에 노출된 본존의 높이는 310cm이고(실제로 느끼기에는 그렇게 높지 않았음), 3단의 원형보개를 육계부분에 끼워 놓았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모으고, 왼손은 배에 대고 손가락을 꽉 쥐고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양팔에 도식적인 주름을 새기고 있다. 하반신에 U자형으로 주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의를 가슴 부위에서 묶은 것으로 보는데 허벅지 위에 커다란 연화문을 새겨놓았다. 본존불의 높이 310cm, 두고 74cm, 두폭 36cm, 견폭 66cm이다.

우협시와 좌협시 역시 둥근 보개를 쓰고, 본존과 동일한 표현 자세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간 작고, 들고 있는 지물 육화장과 합이 다를 뿐이다. 불상의 후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가하지 않았다. 우협시 높이 230cm, 두고 63cm, 두폭 34cm, 견폭 55cm이고, 좌협시 높이 245cm, 두고 63cm, 두폭 36cm, 견폭 59cm이다.

조각수법이나 형태를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바위를 뚫고 자라고 있는 국사암 앞의 나무 한그루

 

국사암을 뒤로 하고 안성시내에 위치한 안성향교로 향하다 가는 길목에 자리를 하고 있는 '아트센터 마노'를 찾아 가 본다.

주변은 안성시에서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으며, '아트센터 마노' 옆에는 매주 토요일 남사당 공연이 있다는 남사당전수관 건물과 야외 공연장이 있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트센터 마노'는 다양한 목조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집이 뒤집어진 형태의 건물인 전시관, 방갈로, 야외 예식장, 창문이 옆으로 설치가 되어 있어 집이 누워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레스토랑 등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시설물 관리가 되지 앟은 탓에 일부 건물들은 폐가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고, 레스토랑만 영업을 하고 있었다.

▷13:40~13:50=>아트센터 마노

 

▲ 거꾸로 선 건물인 갤러리 

 

▲ 방치된 건물들 

 

10여분간 주변을 둘러보고 비봉산 아래 안성시내 도로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안성향교로 향한다.

▷14:04~14:22=>안성향교

길게 일자형으로 배치된 누각 형태의 풍화루 입구 '下馬'란 표지석 옆 계단을 통해 풍화루 밑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명륜전'과 좌,우로 동재, 서재가 자리를 잡고 있는 교육 공간에 들어서게 되고, 명륜전을 끼고 돌아 내삼문을 지나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는 마당에 이르게 된다.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향교이다.

향교를 두고 좌,우로 비봉산(229.1m) 산책로가 있어 주변의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나지막한 산이라 산책로를 따라 비봉산 정상까지 다녀와도 괜찮은 곳으로 생각이 들었으며, 정상에 오르면 안성시가지와 주변의 경치가 막힘없이 조망이 될 것 같다.

 

♧ ♧ 안성향교(安城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7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명륜동 118 

 

경기도 향교재단 소유의 건물로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교육기관이다.

조선 중종27년(1532)에 처음 설립되었으나, 그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고 1932년, 1986년, 1988년에 보수하였다.

건물 배치는 아래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서재, 풍화루가 있고, 윗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어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성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명륜당 

 

▲ 대성전 

 

명륜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이며, 익공 양식으로 지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 서재는 기숙사이다.

수평성이 매우 강조된 풍화루는 그 규모가 전면 11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으로 외관이 장엄하다. 1층은 통로로 쓰이며 2층은 학생들의 휴식공간으로 한층 높게 만든 누마루를 설치해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건물의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독특한 건축 양식과 짜임새 있는 공간 구조를 갖춘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향교이다.

공자의 정위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등 사성위공문 10철, 송조 6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매년 춘계 및 추계 석전제를 올린다.

안성향교는 그 규모가 크며, 다른 향교에서 찾아보기 힘든 풍화루가 있어 전성시대의 향교의 규모를 알 수 있으며 지금도 타 향교보다 많은 유림이 있다.

 

안성시내를 벗어나 38번국도를 지나 70번지방도를 따라 고산저수지 방향으로 향한다. 38번국도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약 3.2km 정도를 70번지방도 따라 진행하면 Y자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70번지방도를 버리고 우측의 도로를 따라 약 2km 정도를 들어가면 대농리 입구이다.

▷14:39~14:42=>대농리석불입상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을 끼고 우측의 농로를 따르면 150여m 지점에 작은 소나무숲이 보이고 그 앞에 큰 노목을 지붕삼아 오랜 세월 사시사철 모진 풍파를 견디며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석불입상이 하나 외롭게 서 있는데 '대농리석불입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 ♧ 대농리 석불입상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6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대농리 91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부처와 보살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가지 형태로 제작되는데 이 유물은 불상으로 만들어졌다. 석불입상은 한 마디로 둥그스런 외모에 후덕한 인상이 특징이며 마치 달관한 노인처럼 푸근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머리는 신체보다 크게 보이며 머리에는 중절모 모양의 갓이 씌워져 있다. 벙거지형 갓에는 보개가 얹혀 있고, 민머리에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눈과 오뚝한 코, 입 등이 표현되어 있고, 귀가 어깨에 닿는다. 법의는 두 어깨를 가린 통견이다. 왼손으로 약병을 잡고 오른손으로 이를 아래서 받쳐든 모습이 가지런하다.

아양동미륵이나 태평미륵처럼 '미륵부처'라 불리는 높이 2.2m의 석불입상도 하반부가 묻혀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가 없다.

그 옆에 문인석이 미륵불의 바지춤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함께 놓여 있는 것이 익살스러우며 조각과 수법면에서 해이해진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석불을 뒤로 하고 2000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의 주무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1960년에 준공한 94만평 규모의 고삼저수지를 둘러보고 해주 오씨 충정공 오두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덕봉서원과 정무공 오정방고택을 방문을 한다.

▷14:50~15:06=>고삼호수

차를 타고 호수가의 길을 따라 일부 구간을 돌아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 ♧ 고삼호수 

 

 

 

경기도 안성에 자리한 고삼호수는 1960년에 준공된 94만평 규모의 저수지이다.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신비감을 간직한 천혜의 장소로 김기덕 감독이 제작한 다섯번째 영화 '섬'의 주 무대로 푸른 물과 그 위에 떠있는 좌대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영화 제목처럼 고삼호수는 마치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또 다른 공간인 셈이다.

고삼호수는 낚시터로 유명하지만, 2000년 영화가 개봉된 후 관광코스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서울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리적 덕분에 당일코스 관광지로 인기가 있다. 영화에서는 호수 모두를 오픈세트화 해 원형 그대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깨끗한 수질에 수심이 얕고 연안에 수초가 잘 형성되어 있어 붕어와 잉어가 특히 많다.

 

 

♧영화 '섬'

2000년 4월 22일 개봉한 우리나라에서 '파란대문'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잘 알려진 김기덕 감독의 네번째 작품이다. 김기덕 감독은 7년간 미술을 공부한 덕에 영화에서 미술부분도 담당하여 그의 미적 감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스타급 배우를 쓰지 않고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을 주연으로 전격 기용한 점이 주효한 작품으로 '박하사탕'에서 '미스 김' 역을 맡았던 신인 배우 서정의 눈빛 연기와 '강원도의 힘'에서 조연으로 출연하였던 김유석의 연기가 돋보였다.

신인배우들의 정형화하지 않은 이미지가 영화의 몽환적 분위기와 신비감을 살리려는 연출 의도와 맞아 떨어진 작품으로 김기덕 감독의 특유한 미징센과 상징을 통해 치명적인 사랑 중 하나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15:22~15:42=>덕봉서원

♧ ♧ 덕봉서원(德峰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덕봉서원은 양곡 오두인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백성의 교육을 위해 숙종21년(1695)에 지어졌으며, 숙종23년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양곡 오두인(1624~1689)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를 가다가 죽었으며, 사후 숙종20년(1694)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공이다.

바리봉을 뒤에 두고 넓은 농경지를 내려보는 언덕에 남동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외삼문, 정의당, 내삼문, 사우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아래쪽 낮은 곳에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정의당과 생활공간인 동재, 서재가 있고, 정의당(14.9평)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민도리 팔작지붕이다, 좌우 양끝 뒷편으로 각 1칸에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았으며 초석은 장초석으로 하여 마루는 바닥을 높이었다. 숙종이 하사한 현판이 남아 있다.

 

 

▲ 정의당 

 

▲ 정의당 담장옆 노목 한그루 

 

▲ 정의당과 덕봉사우 사이의 내삼문 

 

▲ 사당인 덕봉사우 

 

정의당 뒷편 내삼문을 들어서면 위쪽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덕봉사우'가 정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우(14.9평)는 정면3칸, 측면 1칸반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1벌의 자대석 기단 위에 원통형의 큰 초석을 놓았는데, 초석의 형상이 특이하여, 높이는 약 1척, 원통의 지름은 약 2척인데 측면이 곡선을 이루고 있다.

기둥은 원형이며 등머리에 앞면은 이익공을 경구하고 기둥사이는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화반을 올린 평범한 구성을 하고 있다. 반면 뒷면은 초익공으로 단순히 처리되고 처마도 홑처마이다. 양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벽체는 정면 되간은 개방되고 그 뒤는 빗살 4분합문을 달았으며 양측면과 뒷면은 중방이하는 기와를 3치 간격으로 나란히 얹은 화방벽으로 하고 그 위는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소장 유물은 오두인이 지은 '양곡집'과 숙종7년(1681) 김창협이 그린 오두인의 초상화 1점 등이 있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있게 구성되어 있다. 사당인 사우와 강당인 정의당은 부재의 사용으로 미루어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15:48~15:58=>정무공오정방고택 

♧ ♧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75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246 

 

 

이 한옥 민가는 문간채, 안채겸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겸 사랑채를 붙여서 한채로 건립한 곱은자형에 1고주 5량 집이다.

사랑채 뒤에는 2칸 사당이 있고, 본래의 사랑채는 없어졌다고 하며 외곽에 별도의 행랑채와 문간채, 담장 등이 가옥 외부와 경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연대는 약 2백년전까지로 올라 갈 수 있으나 그 동안 수차례 걸쳐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안채만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을 연결하여 단일채로 구성하였는데 특히 ㄱ자 몸채에서 一자 부분을 길게 연장하고 중간에 사윗담을 두어 안팎으로 나누는 수법은 연경당과 비교되는 이 가옥의 특징이다. 

본래 이 집은 중종5년(1510)에 처음 지어진 후 정무공 오정방(1588~1634), 천파고 오상(1512~1573)에서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 까지 해주오씨 명인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으로 전해 내려온다.

특히 충정공은 이 집에서 성장하여 나라에 크게 공헌을 떨친 바있어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덕봉리 252번지에 세워졌던 것이나 효종1년(1650)에 현 위치로 이전해 왔다고 하며, 건물은 1935년 중수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지 224평에 사당 5.62평, 안채 31.12평, 사랑 6.52평 규모의 3동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때 치목수법, 건물의 베치 및 구성 수법이 우수하여 조선 중,후기의 주택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무공 오정방(명종7년<1552>~인조3년<1625>)

본관은 해주, 자는 영언, 호는 퇴전당이다.

호군을 지낸 오수천의 아들이며 수군 우후를 지낸 숙부 오수억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중기의 무인으로 안성 출신이다.

선조16년(1583) 무과에 장원급제하자 이이로부터 영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당시 북쪽에서 이탕개가 중성지방을 자주 침범하자 대사마 이일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도사로 영흥지방에서 의병 수천명과 힘을 합쳐 전공을 세웠으며, 이어 부령 부사, 정평 부사를 지녔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 포도대장, 군기시 제조, 서북 순변사 등을 지냈으며, 1603년에 가선대부에 승품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병사가 되고, 이어 경상우도 병사 겸 진주 목사와 황해도 병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직당하였다가 인조1년(1623) 인조반정 후 포도대장으로 둥용되었으며, 경상좌도 병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왕을 따라 공주에 까지 호종하였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무이다.

 

덕봉서원과 오정방고택이 있는 321번지방도를 따라 내려오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운수암이 위치해 있다.

운수암은 고성산(298.1m)의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주변에 거주하는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탐방에서는 운수암에서 왕복 약 1시간 거리인 1.7km 떨어진 고성산 정상까지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운수암을 애워싸고 있는 무한성을 한바퀴 돌아 본 것으로 만족을 하기로 하였다.

▷16:07~16:45=>운수암과 무한성 성돌기

절 입구 우측의 등산로따라 계단길을 오르면 '→고성산 1.7km'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가 있다. 우측의 능선길이 고성산가는 등산로이고, 좌측이 운수암을 좌측 아래에 두고 원을 그리며 한바퀴 돌게되는 산책로이다.

 

▲ 고성산 등산로 갈림길

 

 

▲ 무한성 성돌기길 

 

▲ 고성산 이정표 

 

▲ 무한성길의 삼각점 

 

잘 나있는 무한성으로 추정되는 폭 1m 내외의 산책길을 따르면 삼각점(용인474/1983재설)이 있는데 백운산 정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호젓한 산길을 잠시 더 따르면 넓은 공터 우측 절벽 위에 나무벤치가 있는 쉼터 전망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곳에 서면 안성시가지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공터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진행을 하던 운수암 경내로 내려서게 된다. 소요시간은 10여분이면 충분하다.

 

♧ ♧ 운수암(雲水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85 

 

 

 

 

일명 운적암이라고도 하는 운수암은 백운산의 무양성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 영조26년(1750)에 장씨 부인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청상과부가 부처를 모시려고 무양산성 밖에 터를 닦았는데, 꿈에 노승이 나타나 성 안에 절을 지어라고 말하여 그 자리에 가서 쓰러진 풀과 나무를 치우니 절터로 적합하여 이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종7년(1870)에 흥선대원군이 시주하여 중건되었고 운수암이라고 쓴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1986년에는 대웅전이 중건되었다.

현재 암자의 중앙 높은 터 위에 대웅전이 있고 그 옆에는 비로전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요사채는 비로전의 주축과 직교되게 위치하고 있다.

 

♧대웅보전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은 운수암의 주 불전으로 중심 마당 뒤편 중앙에 동남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1982년 공사를 시작하여 1986년 주지 현암(정병우) 큰스님에 의해 완성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내9외7포의 다포식 팔작지붕 전각이며, 가구는 1고주7량가이다.

 

 

▲ 대웅보전 

 

▲ 비로전 

 

♧비로전

비로전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으로 대웅전 옆에 나란히 위치를 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천장은 중앙 3칸에만 우물반자가 있고 좌우에는 빗반자가 있다. 익공에 연봉이 장식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되는데,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운수암이 중건될 무렵 또는 그 얼마 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곳에 모셔져 있는 탱화인 아미타회상도나 현재 삼성각에 모셔져 있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이 모두 187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 비로전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로전은 흥선대원군의 시주에 의해 운수암이 중건되던 1870년에 지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畿內寺院誌'에는 비로전이 옛 대웅전으로 되어 있고, 1980년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그 안에 모셔져 있던 석조불상이 마모가 심하고 깨진 부분도 있어 땅에 묻어버렸던 사실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현재 비로전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2호)이 모셔져 있는데, 60여년 전 이곳으로 옮겨 봉안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로전은 창건 후 대웅전으로 편액 되었다가 약 60여년 전 비로자나불을 더불어 모셨으며, 1986년 그 옆에 대웅전을 신축하게 됨에 따라 묻었던 비로자나불을 다시 찾아 모시고 비로전으로 편액을 바꾸었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비로자나불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2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2-1

비로전 안에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에 다른 곳에서 옮겨와 모셨다고 한다.

나말여초(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중부지역 석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전체 높이 109cm, 두고 37cm, 두폭 25cm, 어깨폭 52cm, 무릎폭 80cm이다.

하나의 큰 돌을 조각하여 만든 불상으로 일부 파손된 부분이 있으나 백분을 발라 손상된 부분을 감추었다. 광배를 망실하였으나 불신과 대좌는 비교적 손실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연화로 장식된 화강암 대좌를 지니고 있으며 불상이 위에 모셔져 있다. 아래에 8판의 양련이 조각되어 있고, 잎 사이에 장식적인 구름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적당한 크기의 육계를 지니고 있으며 머리는 나발이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붙은 편이며, 턱에는 주름 한 줄이 표현되어 있다. 이목구비는 뚜렷한 편인데, 코는 마멸된 후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귀는 도톰하게 목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으며 삼도가 있었으나 마멸되었고 목 아래 부분은 갑자기 튀어나와 보수한 것으로 보이며 이질감이 느껴진다.

법의는 통견이며, 층단식으로 옷 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왼손을 아래 두고 검지를 폈으며, 오른손은 그 위에 가슴 부근에 올려 오른손은 검지를 잡고 있다, 손 역시 비교적 통통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다리는 오른 발을 올려 결가부좌 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는 꽃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귀볼이나 목 등을 보수하였으나 조각 솜씨가 뛰어난 편이다.

1986년 5월 안성시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가 2006년 6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삼성각

운수암 뒤편 산 언덕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별도로 마련된 영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870년에 조성된 칠성탱을 비롯하여 산신탱, 독성탱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익공식 맞배지붕이다.

 

 

▲ 삼성각

 

▲ 범종각 

 

♧범종각

대웅보전 옆에 나란히 배치된 범종각은 1997년에 조성된 전각이다. 3x3간의 방형 평면으로 외5내7포의 다포식이며, 사모지붕을 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1997년에 조성된 북과 목어, 1998년에 조성된 범종과 운판이 있다. 범종에는 '統一大鐘'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무한성 위에서 내려다본 안성시가지와 주변 전경

♧무한성 

 

 

*향토유적 제2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0

 

이 성은 산정 고원지에 둥글게 쌓은 석성으로서 이러한 산성은 고대에 많이 축성해 온 형태이다.

이 성은 일명 '무양성'이라고 현지에서 불리어 지기도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현 고적조 및 성지조에 분명히 '무양성: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305척이며 성안에 못 하나가 있다.'고 했고, 광무3년(1899)에 간행된 '양성읍지'에도 '무한성 남단 아래 고성이 있어 속칭 옛 고을터가 완연하다'고 적혀있어, 기록으로 미루어 무한성 또는 백운산이라는 명칭이 보다 옳을 것이다.

 

아마도 무한성이란 이름은 무양이라는 사람이 운수암을 보호하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는데서 유래된 것 갗이 전해오고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속전에 불과할 뿐이다.

 

성은 산의 정상부에 쌓은 퇴뫼식 산성으로 일부 파손되기도 하였지만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또한 산성내의 건물지 흔적과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성곽의 길이나 하단부터의 석축 규모로 보아 이 성은 개인의 힘이 아닌 관에 의해 장기간 집단적인 대규모 노역공사로 조성된 것임이 확실하다.

길이 약 120m, 높이 약 2m, 폭 약 1m로 성곽의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