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성곽돌기

백제의 역사를 간직한 옛 도읍지! 공산성

왕마구리 2010. 6. 15. 20:26

◀ 공주 공산성 성곽 돌기 ▶   

 

▲ 공산성 서쪽 성곽위에서 내려다본 금서루  

 

【 공산성(公山城)의 역사 】

*사적 제12호

*소재지: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서기 475년 한강 유역의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긴 후 새로 정한 백제의 도읍이 공주였다. 개로왕21년(475) 9월에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 공격으로 7일만에 북성이 함락되고 다시 한성이 함락되며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를 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 문주는 신라로부터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으나 그가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강유역이 고구려군의 수중에 들어간 후 였다. 이에 문주는 왕위에 오르고 10월에 조미걸취, 목협만치 등 중신의 보필을 받아 부득이 남쪽의 웅진(공산)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구마니리' 또는 곰나루'로 불리던 웅진은 삼진왕, 동성왕, 무령왕을 이어 성왕16년(538)에 부여로 다시 천도할 때 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처음 웅진성(熊津城)이었으나, 고려시대 초엽에 공산성으로 바뀌었으며, 조선 인조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도 불리었다.

북으로 금강을 띠처럼 두르고, 해발 110m의 나지막한 능선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인 이 성은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며, 성곽 길이 총 2,660m로 능선과 계곡을 따라 이어진 포곡형으로 토성을 제외하면 2,193m이다.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현재의 성벽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3m이다.

 

 

◆ 공산성의 4대 성문인 금서루(左上), 진남루(右上), 영동루(左下), 공북루(右下)

 

 

곳곳에 역사적 사연이 깃들어 있는 누각이 자리를 하고 있는 성곽을 한바퀴 돌아보면 성을 감싸고 흐르는 백제의 옛 향기뿐만 아니라 금강과 공주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자연경관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한가롭게 산책을 할 수 있는 성곽길과 우거진 숲 사이의 산책로, 그리고 계룡산과 금북정맥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 등이 가족, 친구, 연인들과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명소로 만들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일시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나당연합군에 대항한 백제 부흥군이 부흥운동을 벌리기도 한 곳이었다. 또한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국내,외에 선양하기 위해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의해 제작된 의상과 소품을 이용하여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한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매년 4월~6월, 9월~10월에는  매주 토, 일요일 11:00~16:00 )이 열린다. 주차장은 무료 개방이며, 입장료는 어른 \1,200/청소년 \800/어린이 \600(공주시민은 무료)이고 개방시간은 09:00~18:00(동절기 09:00~17:00), 휴관일은 설, 추석 당일(년2회)이다.

성내 유적은 금서루, 진남루(문화재자료 제48호), 공북루(유형문화재 제37호), 쌍수정(문화재자료 제49호), 명국삼장비, 쌍수산성사적비, 영은사(전통사찰 제2호, 원통전:문화재자료 제51호), 연지 및 만하루, 임류각, 광복루(문화재자료 제50호) 등이 남아 있다.

 

【 소 재 지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2외

【 공산성 성곽 돌기코스 】공산성주차장→금서루/서문→쌍수정/왕궁터+연못→진남루/남문→치성→임류각지→영동루/동문→임류각+공산성 장대지+명국삼장비→광복루→연지 및 만하루/영은사→공북루/북문→송산정→금서루/원점회귀 

 

 

【 탐방일자 】 2010년 6월 7일

【 소요시간 】총 3시간 18분 소요(휴식 및 답사시간 포함)

【 날     씨 】 맑 음

【 탐 방 기 】

충청남도에 위치한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을 찾아 보는 이번 탐방길은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 옹진(공산)성과 부여 사비성(부소산성)을 둘러 볼 계획이었으나, 공주 공산성 답사를 끝내고 남쪽에 위치한 부여로 이동을 하게 되면 답사시간 부족과 집으로 돌아오는 거리가 더 멀어지게 되어 인근(약 46km 거리) 지역에 위치한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던 예산의 임존성을 택해 2곳의 백제 산성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공산성은 공주 시내에 위치해 있고, 주차장에 도착하면 1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금서루(서문)에서 바로 성곽을 따라 성곽돌기를 실시할 수가 있어 편리하다. 공산성 돌기는 금서루를 시작점으로 하여 시계 반대방향인 오른쪽으로 성곽을 따라 돌았으며, 성 내부의 유적지도 돌아보고 곳곳에 설치된 누각에도 올라가 보았다. 또한 광복루를 지나면서 금강을 끼고 이어지는 성곽길의 전경이 너무 아름다워 곳곳에 설치된 벤치 등 쉼터에서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며 더위를 피하느라 일반적인 진행이라면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면 족할 탐방시간이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공산성 탐방기는 각 지점별 소요시간은 의미가 없어 기제하지 않고 진행방향 순서대로 각 유적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 매표소가 있는 성 진입도로 입구에서 바라본 공산성 금서루

   

주차장 옆의 대형안내도를 검토해 보고 진행 방향을 결정하여 서문인 금서루를 출발지로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금서루로 되돌아 오기로 한다.

성 안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오래 전에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을 문헌과 발굴조사를 통해 1993년에 복원한 금서루로 올라가는 도로가 매표소부터 남아있어 이를 따르면 도로 우측으로 선정비등 비석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비석군내 많은 비석들 중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제민천교 영세비'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인 '목사 김효성 비'에 안내문이 있어 이를 소개하고 금서루를 출발하기로 한다.

 

♧ 제민천교 영세비(濟民川橋 永世碑)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

*소재지:충청북도 공주시 금성동 금서루 입구

조선 순조17년(1817)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1817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져 그 수리를 하고자 하였으나 비용이 막대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지울 수 없었기에 비변사에 보고하고 충청수영의 군자미, 부여, 연기의 공전과 자체 자금을 합하여 자금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다리의 복구는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 쌓은 일은 이듬해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 이름도 적혀있다.

 

▲ 공산성 금서루 진입도로변의 비석군

 

▲ 제민천교 영세비(左)와 목사 김효성 비(右)

 

♧ 목사 김효성 비

*문화재자료 제71호

*소재지:충청북도 공주시 금성동 금서루 입구

조선시대 공주목사로 부임하였던 김효성(1583~1651)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순조28년(1828)에 세운 비이다.

원래 옥룡동 363번지에 있었으나 현재 공산성 금서루 입구 비석군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비신과 이수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거북 모양의 비석받침인 귀부는 없어져 사각형의 대좌로 대신하고 있다.

김효성의 본관은 경주로서 광해군7년(161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길주로 유배되었고, 이후 진도로 옮겨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발탁되어 공주목사를 지냈다.

 

 ♧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 성밖에서 바라본 금서루

▲ 공산정에서 내려서며 바라본 금서루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성안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오래 전에 파괴되어 터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에 문헌의 기록과 동문의 유구를 조사한 결과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철종10년(1859)에 편찬된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한다.

 

▲ 금서루에서 바라본 공산정으로 이어지는 공산성 서쪽 성곽

▲ 공산성 서문 입구 성밖에서 바라본 공산성 서쪽 성곽

▲ 금서루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서쪽 성곽길

 

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복원된 금서루가 있는데, 포장도로는 금서루 밑의 남문을 지나 성안으로 이어진다. 좌측으로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누각이 보이는데 '공산정'으로 성곽돌기 마지막 누각이다.

반대쪽인 우측의 성곽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성곽돌기를 시작하여 올라가면 복원된 성곽 아래로 공주시가지가 펼쳐진다.

 

▲ 공주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나무벤치가 있는 첫번재 쉼터 전망대

 

첫번째 나무벤치가 설치된 쉼터 전망대에 오르면 공주시가지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오르막 길이 끝나면서 공산성 서쪽 성곽은 좌측으로 완만하게 활처럼 휘어지며 이어진다. 

 

 

 

▲ 편안한 성곽길

▲ 뒤돌아본 성곽

 

편안하게 성곽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넓은 공터가 보인다. 축구장보다 넓은 공터로 들어가면 4곳의 건물터가 보이는데 왕궁터이고, 우측 끝으로는 정자처럼 보이는 지붕이 있는 건물이 있는데 공산성 연못이다.

좌측으로 약간 높은 언덕위에 정자가 보이는데 이곳이 쌍수정이며, 쌍수정 오르는 계단 입구에 '공산성 쌍수정'과 '인절미의 고장 공주'란 안내문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 쌍수정 앞에 서면 옛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연못들이 펼쳐지고, 쌍수정 옆 이괄의 난으로 이곳 공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인조의 가슴아픈 애환을 지켜보몄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 한그루를 돌아 우측으로 내려서면 작은 전각안에 '쌍수정 사적비'가 있다.

 

♧ 공산성 쌍수정(雙樹亭)

*문화재자료 제49호

*소재지: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1

 

 

▲ 쌍수정

 

영조10년(1734)에 관찰사 이수황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인조2년(1624) 이괄의 난을 피하여 왕이 공산성에 머물렀을 때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되자 왕은 쌍수에 정삼품 통훈대부를 명하고, 성을 쌍수성이라 부르도록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영조 때에 이수황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 쌍수정 사적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소재지: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4-4

 

▲ 쌍수정 사적비가 보관된 전각

 

이 비는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새긴 것으로 숙종34년(1708)에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해게 된 사실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쓴 것이다.

비의 총 높이는 365cm이다.

 

♧ 인절미의 고장 공주

인절미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어 조그맣고 네모지게 잘라 고물에 묻혀 만든 떡이다. 그런데 왜 인절미라 불렀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조2년(1624)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당시의 서울인 한양을 침공하여 왕은 하는 수 없이 이 고장 공주로 피난하였다. 피난 도중 우성면 목천리 근방 임씨 댁에서 푸짐한 음식을 왕에게 진상하였다. 조심스럽게 덮은 보자기를 걷어내니, 콩고물을 묻힌 떡이 가득하였다. 왕은 시장하던 차에 덥썩 입에 넣었는데 쫄깃쫄깃한 게 맛이 있어 왕은 연거퍼 몇개를 잡숫더니 "맛이 있구나. 그런데 떡은 떡인 모양인데 대체 이름이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떡 이름이 있을텐데 아무도 모르니 그 참 기이한 일이오. 근데 이 떡은 어느 댁에서 만들어 왔소?" 라고 물으니, "임씨 댁에서 만들어 진상했습니다."라고 신하가 답하였다. 왕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임씨라... 임씨라... 그것 참 절미로다. 절미로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임씨가 진상했다 하여 이때부터 '임절미'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임의 'ㅁ'이 'ㄴ'으로 바뀌어 '인절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추정 왕궁터

백제가 한성에서 옹진으로 수도를 옮긴 옹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된다.

1930년대에 쌍수정 광장으로 불리던 넓이 약 1,600㎡를 운동장으로 만들 때에 건물의 주춧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1985~1986에 걸친 발굴조사 때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방식인 굴건식 유구가 확인되어 백제가 수도를 옮기기 전에도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왕궁터와 연못

 

♧ 공산성 연못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초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터 연못이다.

공산성은 1985년 8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3회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왕궁건물터, 나무로 만든 저장시설, 저장구덩이 등과 같은 유구와 백제와 당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못은 본 건물의 정면에 지면을 깊게 파고 자연석을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고, 규모는 깊이가 3m, 지표면 지름이 7.3m, 바닥 지름이 4.78m에 이른다. 특히 연못의 호안석 뒷부분에는 물이 밖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위해 1m 너비의 점토를 다짐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 왕궁터 입구에서 뒤돌아본 서쪽 성곽

▲ 공산성 성곽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꺾이는 곳의 곡성

 

왕궁터를 한바퀴 돌아나와 다시 성곽길을 이어가면 서쪽 성벽이 끝나며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곡성을 이루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성곽을 따라 내려서면 공산성 남문인 진남루에 이르게 된다.

 

 

▲ 진남루로 이어지는 공산성 남쪽 성곽

▲ 뒤돌아본 서쪽에서 남쪽으로 성곽이 꺾이는 곡성

 

성벽은 대다수의 산성에서 나타나는 내탁공법을 사용한 것이다.  

남문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이 도로는 남문인 금서루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며, 좌측으로 올라가면 쉼터와 도로를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다. 또한 쉼터앞 Y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쌍수정이 있는 왕궁터와 연결이 된다.

 

♧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 남문의 누각이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은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1971년 해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은 돌 축대 위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 성밖에서 바라본 남문인 진남루

▲ 동문으로 향하다 뒤돌아본 진남루 전경

  

성안의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성밖으로 나가 지나온 성곽을 되돌아 보고, 진남루에 올라 가야할 성곽도 한번 확인을 해 본다.

 

▲ 남문 밖에서 바라본 지나온 성벽

▲ 진남루 누각에서 바라본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 남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오르막 성곽길

▲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공산성 성곽이 남쪽 성벽에서 동쪽 성벽으로 꺾이는 모서리에 위치한 치성

▲ 동쪽 성곽에서 뒤돌아본 공산성 성곽이 남쪽 성벽에서 동쪽 성벽으로 꺾이는 모서리에 위치한 치성

 

계단식의 성곽길을 따라 가파르게 오르면 남쪽 성벽이 끝나고 좌측/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성곽 모서리는 치성을 이루고 있다. 좌측 숲속으로 임류각지가 보이고 정면으로는 동문인 영동루가 보인다.

임류각지를 확인해 보고 동문지에 이른다.

 

♧ 임류각지(臨流閣址)

 

▲ 치성이 있는 곳 좌측에 위치한 숲속의 임류각지

 

백제 동성왕22년(500)에 지은 임류각이 있었던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조의 기록에 의하면 왕이 왕성 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건물 높이가 5장(약15m)이었다고 한다. 1980년의 공산성 발굴조사에 의하면 현재 남아 있는 기둥의 주춧돌은 동성왕 당시에 사용된 것이라 하는데 42개 중 9개 없어졌다.

거의 장방형에 가까운 건물로 한변의 길이가 약 10.5m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건물터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인 중요한 유적이다.

복원된 임류각은 동문인 영동루에서 성 안으로 100여m 떨어진 공산성 장대지 옆에 세워져 있다.

 

▲ 뒤돌아본 치성과 동문 사이의 성곽

 

♧ 공산성 동문지

 

▲ 복원된 동문과 '영동루' 누각

▲ 토성위에서 뒤돌아 내려다본 동문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 발굴조사하여 건물의 밑부분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는 원래의 문을 지탱하였던 돌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와 철종10년(1859)에 편찬된 '공산지'의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영동루 迎東樓)을 복원하였다.

 

동문에서 좌측 성 안쪽으로 100여m 떨어진 넓은 터에 복원된 임류각이 있고, 그 좌측에는 공산성 장대지, 우측에는 '명국삼장비'가 보관된 전각이 자리를 하고 잇다.

임류각은 공산성 내의 가장 큰 규모의 복원된 누각으로, 실제 위치하였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복원이 된 건물이다. 또한 우측의 '명국삼장비'도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 임류각

백제 동성왕22년(500)에 왕궁 동쪽에 지은 건물로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로 임류각터를 발견하고 1993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현실의 벽돌에 있는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 복원된 임류각

 

▲ 측면에서 바라본 복원된 임류각과 임류각 좌측에 자리한 장대지

 

♧ 공산성 장대지

조선시대 장대가 있었던 터이다. 장대는 성안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다.

1980년 발굴조사 때에 건물의 기둥을 놓았던 주춧돌 자리가 확인되었다. 공산성 안에 있었던 군사시설 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

 

 

▲ 명국삼장비를 보관하고 있는 전각과 전각 안의 삼장비

 

이 비는 정유재란 때 충주에 주둔하면서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나라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사은 송덕비이다.

그들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선조32년(1599)에 금강변에 비석을 세웠는데 홍수로 비석이 매몰되어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자, 숙종39년(1713)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 침략기에 일인들이 왜구 등의 글자를 지워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었던 것을 1945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위치에 옮겼다.

 

 

▲ 동문부터 나타나는 토성

 

동문으로 되돌아 나와 오르막 산성길을 따르게 되는데 이곳부터 금강이 조망되는 북벽까지는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산성에 남아 있는 토성의 길이는 467m이다.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을 하면서 이 구간은 석축을 하지 않고, 백제시대 때 쌓은 토성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석축을 하였는데 허물어져 토성 형태를 띄고 있는건지 안내문이 없어 확인을 할 수가 없다.

토성을 따라 오르막을 거의 극복하면 좌측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누각이 보이는데 광복루이다. 공산성 동쪽의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누각이다.

 

♧ 공산성 광복루(光復樓)

*문화재자료 제50호

 

 

원래는 계상루(繫桑樓)라 하여 공산성 내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의 문루이다. 일제 침략기 초에 일제가 공산성 북쪽 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문루를 이곳으로 옮기고 웅심각 또는 해상루라 하였다.

1945년 공주 주민들이 보수하였고, 1946년 4월에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이라 하여 광복루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잇다.

 

토성의 최정상부에 이르면 좌측으로 휘어지면서 공산성 북벽이 시작되는데 또 다른 광복루 입구에 이르면 발 아래로 금강이 조망되면서 토성이 끝나고 다시 석축의 성벽이 나타난다.

석성이 시작되는 곳에 나무벤치 한 개가 설치되어 있어 금강의 전망을 내려다 보며 잠시 쉬어가기 안성마춤이다.

편안하게 우측 발 아래 펼쳐지는 금강을 감상하며 우측으로 살짝 돌아 내려가는 성곽을 따라 내려갔다 잠시 오르면 다시 성곽이 좌측으로 휘어지는 곳에 나무벤치가 설치된 쉼터로 약간의 공터를 이루며 세 방향(동,서,북쪽)으로 시야가 확트이는 전망대이다.

 

▲ 나무벤치가 설치된 전망대 쉼터

▲ 전망대에서 금강을 배경으로...

 

▲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금강 상류 방향(上)과 하류 방향(下) 전경

 

이 전망대가 공산성에서 금강 주변의 풍경이 가장 잘 조망되는 지점으로 나무벤치에 앉아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쉬어 가는 최적의 쉼터 전망대이다.

 

 

 

 

 

 

 

▲ 만하루와 연지가 위치한 금강변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는 성곽길

 

쉼터 전망대를 뒤로 하면 공북루와 연지, 그리고 영은사가 위치한 금강변까지 가파르게 떨어지는 내리막 성곽길이다.

금강변에 내려서면 성 안쪽으로 영은사가 자리를 하고 있고, 성벽 밑 암문 형태의 문을 빠져 나가면 공산성 연지와 만하루가 있다.

 

 

▲ 성곽위에서 내려다본 만하루와 연지

▲ 영은사 앞 성곽에서 바라본 만하루와 연지

 

♧ 만하루(挽河樓)

 

▲ 만하루

 

공산성의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 건물로 조선 후기 영조시대에 건립되었다.

그간 홍수로 붕괴, 매몰되었던 것을 1982년 건물터를 발견하면서 1984년 정면 3칸(2.7m), 측면 2칸(1.8m)의 목조건물로 중건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주위의 기단석,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그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 공산성 연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

 

 

▲ 공산성 연지

 

공산성 북쪽의 금강과 영은사 사이에 있는 연못이다. 공산성에는 3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 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 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시설을 하였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로 깊이는 약 9m이다. 백제 동성왕22년(500)에 만들어 졌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연못 중 하나이다.

 

♧ 영은사(靈隱寺)

 

*전통사찰 제2호

영은사는 '공산지'에 의하면 조선 세조4년(1458)에 지은 사찰이며, 광해군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짐작케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과 강당인 관일루가 있다.

 

▷ 원통전(문화재자료 제51호)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익공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1933년 12월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관일루

    주심포 계통의 팔작지붕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영은사 원통보전과 영은사 입구 도로에서 바라본 전체 전경

 

주변으로는 오래된 고목(古木)들이 눈에 많이 띄는 성곽을 따라 오르면 '공주잠종보호고'가 좌측으로 있고 이를 지나 잠시 내려서면 금강변에 공산성 4대문의 마지막 문인 북문, 공복루에 내려서게 된다.

성 안에는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 성곽 주변의 古木들

 

♧ 공산성 공북루(供北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

 

▲ 공산정에서 내려다본 북문

 

조선 선조36년(1603)에 건축한 공산성의 북문이다.

옛 망북루가 있던 터였으나 금강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는 문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아래는 성으로 통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위는 마루를 만들어 네 면을 개방하여 강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건물 안에 중수기와 시서 등이 걸려있어 풍취를 더해주고 있다.

 

▲ 북문 밖에서 바라본 성곽과 공산정

▲ 북문에서 공산정으로 오르는 성곽길

▲ 공산정 직전 오르막이 끝닌 성곽길에서 뒤돌아본 전경

 

다시 오르막 성곽길을 오르면 북쪽 성곽 끝에 오르게 되는데 이곳에 '공산정(公山亭)'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 공산정

▲ 공산정에서 바라본 금강 전경

 

2층 누각인 정자에 오르면 금강 일대와 북문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 공산정에서 금서루로 이어지는 성곽길

 

▲ 금서루로 내려가며 뒤돌아본 전경

 

좌측으로 돌아 내려가면 처음 출발지였던 금서루인 서문이다. 서문을 빠져 나오며 공산성 성곽돌기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