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성곽돌기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Ⅲ) 연천은대리성

왕마구리 2010. 8. 5. 22:54

이번 탐방은 경기DMZ트레킹 연천지역 3개 코스를 걷기 위해 연천군 문화관광과에 연천군 트레킹코스 안내 리플렛과 관광안내도를 신청하였는데 신청 5일만에 우편으로 집에 도착하여 그 내용들을 검토하다가 트레킹 코스 주변에 많은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 31일(토) 첫 연천 제1코스(황포돛배~숭의전)를 걸으면서 인근에 있는 유적지와 관광지를 찾을 계획이었으나 정규 도보코스의 거리가 접근거리 포함 약 24km에 달해 트레킹 코스에서 벗어나 4~5km 이상 떨어진 곳(경순왕릉과 연천호로고루)에 위치한 유적지를 추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포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정규 코스 종착지에 포함된 숭의전도 개관시간(오전10시~오후5시)에 맞추지 못해 탐방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경기DMZ트레킹 연천 제1코스의 숭의전과 다음에 탐방 예정인 연천 제2코스(숭의전~군남홍수조절지)에 포함된 고구려 유적지인 연천당하성과 강의 침식작용에 의해 생성된 임진강 주상절리 등을 별도로 미리 방문하여 탐방함으로서 다음에 걷게될 제2코스의 소요시간을 줄여 볼 예정으로 승용차를 이용하여 이번 탐방을 실시하였다.

 

이번 탐방은 임진강 주변에 산재해 있는 유적지를 위주로 실시하였으며 고구려3대성의 하나인 은대리성만 한탄강을 끼고 위치해 있었다.

탐방기는 각 유적지별 나누어 게제를 하기로 한다.(유적지명을 클릭하면 바로 연결됨)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Ⅰ) 연천호로고루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Ⅱ) 연천당포성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Ⅲ) 연천은대리성

- 고려를 만나다! 숭의전

-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을 만나러... 신라경순왕릉

- 천혜의 자연성벽! 임진강 주상절리

 

【 탐방경로 】 신라경순왕릉/장단고랑포→연천호로고루→숭의전→연천당포성→임진강 주상절리→연천은대리성

【 탐방일자 】2010년 8월 2일(월)

소요시간 】 총 5시간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연천은대리성(漣川隱垈里城) ▶

 

  

▲ 은대리성 동쪽 성벽(외성)의 발굴 당시의 내벽 모습

 

은대리성은 전곡읍에 위치해 있으나 도로변에 이정표나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찾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은대리성을 찾지 말고 연천군 보건의료원을 찾으면 쉽게 위치를 확인할 수가 있다. 연천군 보건의료원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서 보건의료원 건물 좌측으로 돌아 보건의료원 뒷편으로 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타나는데 주차장 뒷편이 은대리성이다.

한탄강을 끼고 자리를 한 은대리성은 연천 고구려3대성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데 단애를 이용한 남벽과 북벽을 제외하고 인공적으로 축조한 동쪽 성벽이 호로고루나 당포성보다 낮은 편이었으나, 성 내부는 상대적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호로고루나 당포성처럼 발굴 당시에 발견되었던 석축 흔적이나 유구, 문화재 등은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성의 남쪽과 북쪽의 성벽 역할을 하는 한탄강과 장진천의 수직 절벽도 잡목 등이 뒤덮고 있어 전혀 조망을 할 수가 없었다.

 

은대리성(隱垈里城)의 역사 】

*사적 제469호(2006년 1월 2일 지정)

*면적:33,750㎡

*소재지: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번지

▲ 북쪽에서 바라본 외성인 동쪽 성벽

 

연천은대리성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1995년에 발간된 '연천군사료집'에 의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95년부터 2003년 사이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구려 토기 일부가 발견되는 등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 성으로 추측된다.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위에 마여울을 통제하는 방어시설로 축조된 성으로 한탄강과 합류하는 곳이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점차 넓어지는 형태이다.

남벽과 북벽은 각각 단애를 활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지만 동벽은 동쪽에 형성된 개활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크게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외성은 현재 길이 약 60m 정도 동벽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남벽은 한탄강에 접하여 50~60m 정도의 수직단애에 축조되었고 북벽도 15~20m 정도의 단애가 급경사를 이루는 지역에 축조되었다.

연천 고구려3대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현재 동측 성벽, 문지, 유구 등 모든 발굴조사된 문화재는 발굴조사 후 다시 흙을 덮어 보존 처리된 상태라 실제의 모습은 볼 수가 없으며, 석성이 아니라 마치 토성인 것으로 착각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를 없애기 위해 참고로 이곳에 일부 게제하는 사진들은 발굴 당시에 촬영한 잔존하는 연천은대리성 유적으로 문화재청과 연천군에서 공개한 자료 사진들임을 밝혀둔다.

 

▲ 동쪽 성벽의 남쪽 성내부 진입로에 드러난 석축 흔적

▲ 동쪽 성벽의 북쪽 성내부 진입로에 드러난 석축 흔적

 

▷ 연천지역 고구려유적의 지리적 배경

남한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유적은 93개소에 달하며 이중 대부분이 경기도 북부지역에 63개소로 집중 분포하고 있다.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유적은 크게 세 개의 권역으로 구분되는데 임진-한탄강유역, 양주분지일원, 아차산일대이다.

임진-한탄강유역의 고구려유적은 덕진산성 1개소를 제외하고 모두 연천군에 분포하며 현재까지 고구려유적으로 확인된 곳은 신답리고분(경기도기념물 제210호)과 성곽 12개소이다. 이 유적들의 대부분은 임진-한탄강의 북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울목, 나루터 등 강을 건널 수 있는 길목에 입지하고 있다.

연천군은 지리적으로 서해의 뱃길을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통해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상의 교통의 요지로 임진-한탄강을 따라 수십km에 걸쳐 15~20m 높이의 강안 절벽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요충지를 장악할 경우 신라,백제 세력의 북진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고구려의 최남단 국경방어선의 군사시설물들이 강을 따라 다수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 고구려3대성인 호로고루(사적 제467호), 당포성(사적 제468호)과 은대리성(사적 제469호)은 동일한 입지 조건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성의 남쪽과 북쪽은 강의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높이 15m 이상의 수직 절벽이 성벽 역할을 하며 진입이 가능한 동쪽에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에 형성된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남한지역의 대표적인 고구려성들로 고구려의 임진-한탄강 방어선을 관장하는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던 곳들로 추정된다.

 

▲ 성 안에서 바라본 외성인 동쪽 성벽의 남쪽 성 진입로

▲ 성 안에서 바라본 외성인 동쪽 성벽의 북쪽 성 진입로

 

▷ 성의 지형적 구조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는 두께 10~30m 정도의 용암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강물이 흐르면서 용암대지를 침식하였다. 용암은 주상절리라고 하는 물리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침식이 이루어지면 수직기둥 모양으로 돌이 떨어져 나가면서 강의 양안에는 수km에 걸쳐 높이 10~15m 정도의 수직절벽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별도의 성벽을 구축하지 않더라도 능히 적을 막아 낼 수 있는 천혜의 전략적인 요충지를 제공하고 있다.

 

▲ 한탄강변의 남벽 모습

▲ 장진천변의 북벽 모습

 

그런데 군데군데 이러한 석벽이 사라진 곳이 있는데 임진강과 한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석벽을 뚫어 출입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수직단애가 사라져 방어가 취약한 지점에는 성곽이 구축되어 있다.

연천은대리성 역시 한탄강으로 유입되는 장진천으로 인하여 석벽이 끊어진 지점에 구축되어 있다. 한탄강과 장진천이 예각을 이루며 만나게 됨으로써 동-서 방향으로 좁고 길쭉한 지형이 형성되고 있는데 그 정상부의 동쪽 부분을 남북으로 막아 삼각형의 성곽을 구축하였다.

 

▷ 은대리성의 구조

은대리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의 성이다.

서쪽 단구의 꼭지점 부분에 언덕을 중심으로 내성을 쌓고 그 외부에 다시 성벽을 쌓아 외성을 만들었다. 외성의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 총 둘레 1005m이며, 면적은 26,497㎡이고 현재 동벽에는 남쪽과 북쪽에서 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진입로가 개설되어 있다.

 

▲ 동쪽 성벽 위 남쪽에서 바라본 동쪽 성벽의 모습

 

인공적으로 축조한 동측 성벽(외성)은 기본적으로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축조방법이 유사하나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막자른 현무암을 이용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우선 지표면을 편평하게 한 후 그 위에 30~50cm 정도 높이로 점토를 다져서 기초부를 만든 후 중심부에는 현무암을 잘게 부수어 흙과 섞어 차곡차곡 다지면서 쌓아 올렸다. 이 다짐층 안쪽과 바깥쪽에 막자른 현무암을 쌓은 후 다시 석축벽의 바깥쪽과 위쪽을 점토로 30~50cm 정도 다져 성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은대리성의 외성은 외관상으로 토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은대리성이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성을 기울여 만든 성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비교적 단기간에 성벽을 구축했거나 주변에서 양질의 석재를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내성의 총 길이는 230m이며, 외성과 유사한 삼각형의 평면형태로 축조되었고 내부 시설물로는 문지 3개소, 대형건물지 1개소, 치성 2개소가 확인되었다.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삼각형이고 외성안에 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당포성과 같다.

문지는 북쪽에 2개소, 남벽에서도 1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제일 규모가 큰 문지는 북문지로 북벽과 내성벽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성 북쪽의 장진천쪽으로 통하는 곳으로 강을 건너는 길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벽의 한탄강으로 내려가는 작은 문지는 문지 외부로 절벽을 따라 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동벽에는 통행에는 편리하나 방어에 취약한 곳이어서 문을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중앙부에는 대형 건물지가 있는데 남벽에 접하여 폭 3m 정도의 긴 돌무더기가 외부를 감싸고 있다. 그 안에서는 건물지 벽체에 사용되었던 불에 탄 진흙이 확인되고 있다. 기와편은 발견되지 않았고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는 판단할 수가 없다.

대형 건물지 동쪽의 넓은 평지에도 여러가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굴조사 결과 시설물이 있었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경작지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원 지형이 없어지고 유적도 함께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성 내부 한탄강쪽 남벽위에 설치해 둔 목책

▲ 성내부 전경

 

 

▷ 은대리성의 출토유물과 축조시기

은대리성의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이며, 기와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는 백제와 고구려 토기로 구분되며 신라 토기는 출토되지 않았다.

백제 토기도 수량이 적고 작은 파편으로 출토되어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럽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와 비교할 때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토기는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양식과 별 차이가 없으며 바탕흙은 고운 점토를 사용하였지만 호로고루나 아차산 출토 토기보다 거칠다. 표면 색조는 회색이 많지만 흑색, 황색 등도 있다. 대부분 항아리 종류가 많지만 동이류와 시루도 섞여 있다.

은대리성 출토 고구려 토기의 특징은 표면에 여러 종류의 문양이 새겨진 토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종류의 토기는 몽촌토성에서도 출토되었으며 남한지역 출토 고구려 토기중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하며 대체로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은대리성은 일부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만 이루어져 축조시기와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현재까지 조사결과로 대략적인 축조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은대리성을 축조하고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로 추정된다. 출토 토기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처음 축조한 시기는 대체로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고 향후 조사가 더 이루어지면 정확한 축조시기와 사용기간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