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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를 찾아서...(Ⅱ) 여주 고달사지

왕마구리 2010. 4. 10. 14:47

◀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여주 고달사 폐사지를 찾아서... ▶ 

 

절은 사라지고 넓은 폐사지에 건물을 떠받들던 기단과 석축, 그리고 한두 개의 탑들 만이 남아 번성했던 옛 시절의 영화를 대변해주고 있으며, 인적마저 끊어져 해질녘의 쓸쓸함과 황량함을 더해주는 폐사지를 2009년 3월 원주지역의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탐방에 이어 두번째로 여주 고달사지를 찾았다. 

지난 원주지역의 폐사지 방문은 늦겨울 찬바람과 함께 인적마저 드물어 더욱 쓸쓸한 마음을 자아내며 '고독'을 즐기며 쓸쓸함에 취하여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 또 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면, 이번 고달사지의 탐방에서는 황량한 폐사지의 쓸쓸함은 계절을 달리한 초 봄의 방문이었음에도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와 보물 제7호로 지정된 원종대사혜진탑의 석조부도 조각 표현들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선인들의 뛰어난 예술감각에 찬사를 보내며 흡족한 만족을 얻고 돌아온 탐방길이었다.

현재도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상태라 전체 규모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지만 고려시대 5대 가람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으며,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전체의 규모가 확정되면 다시 한 번 방문을 하여 세세히 탐방을 하고 싶은 곳이다.

 

전국에 남은 폐사지는 2,000여 군데로 추정되며, 이 중 충청도에 700여 곳, 경상도에 600여 곳, 경기도에 160여 곳이 분포되어 있다(이지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유명한 폐사지는 주로 경주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어 수도권에서는 먼 거리라 쉽게 방문하기가 어렵지만 경기도지역은 당일 답사지로는 마음만 먹으면 초행자에게도 별 부담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작년(2009) 3월 원주지역에 흩어져 있는 100여 곳의 폐사지 중에서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 3대 폐사지를 탐방한데 이어 2010년 4월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1200여년 전인 신라시대에 창건되고 고려시대 5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전하는 고달사지를 찾았다.

 

【 탐방코스 】 고달사지주차장-원종대사혜진탑-고달사지 부도-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이수-고달사지석불좌-주차장

【 탐방시간 】 57분

【 날     씨 】 맑 음  

【 탐 방 기 】

고달사지 주차장에 도착하면 고달사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게가 하나 있다. 그러나 늦은 시간(탐방시간:17:19~18:16)이라 그런지 아니면 휴일이 아닌 평일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게 문이 닫혀 있고, 텅 빈 주차장에 인적마저 끊어진 상태라 나 혼자라는 생각에 쓸쓸함이 밀려온다.

진입도로를 따라 약 100여m를 들어가면 정면으로 절은 사라지고 빈터만이 넓게 자리한 고달사지가 보인다.(폐사지 끝 산록에 새로 '고달사'  절 건물과 정자가 세워져 옛 고달사의 부흥을 시도하고 있다)

고달사지 종합안내도와 이정표가 나그네의 발길을 이끌지만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수고 18m, 나무둘레 4.2m의 보호수) 한 그루가 융성했던  옛 고달사의 영화를 지켜 보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지금의 고달사지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다가가 나그네의 방문을 신고하고 탐방을 허락받는다.

1998년부터 6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로 대가람의 윤곽을 어렴픗이 짐직케 하지만 그 넓은 폐사지의 황량함이 서서히 혜목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와 조화를 부리는듯 시간이 지날수록 전체 분위기를 더욱 더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이정표의 안내를 받아 '원종대사혜진탑-고달사지 부도-현 고달사 암자/'다향루'정자-원종대사헤진탑비 귀부&이수-고달사지 석불좌' 순서로 고달사지 현장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을 둘러본다.

 

폐사지를 좌측에 두고 길 따라 올라가면 원종대사혜진탑이 나타나는데 석조부도로서는 이제까지 대하였던 것들에 비해 장식의 장중함과 섬세함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선인들의 예술적인 감각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원종대사혜진탑을 뒤로 하고 숲속의 계단길을 따라 오르면 고달사지 북쪽 능선에 조용히 숨어 있는 이름모를 석조부도인 고달사지 부도를 대하고 경악과 황홀함에 발길이 저절로 멈추어진다. 방금 보았던 원종대사혜진탑과 형식이나 양식면에서는 거의 흡사하나 장식의 표현이 더 섬세하고 구도가 잘 갖추어져 있어 조각된 용두형의 거북과 4마리의 용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아 지금까지 보아온 부도 중 가장 거장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찬사를 받아도 어느 누가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였고, 이 이상의 석조부도 작품은 보기 힘들다는 생각에 호흡이 멈추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 멋진 걸작품을 대하게 되어 이미 대하였던 원종대사혜진탑으로 되돌아 가 두 작품을 다시 비교를 해 보지만 역시 고달사지 부도가 원종대사혜진탑 보다 뛰어난 작품이란 것을 문외한이지만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원종국사혜진탑도 뛰어난 걸작품에는 틀림이 없지만...

 

폐사지에서 약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두 석조부도를 감상하고, 폐사지에 남아있는 나머지 문화재를 감상하기 위해 폐사지로 향한다.

폐사지 제일 상단에 고달사의 영화를 재현하기 위해 대한조계종에서 '고달사'란 표석을 세우고 스님이 상주하는 일반 주택처럼 보이는 절을 세워 두었고 발굴조사가 끝나는대로 새로운 정비사업과 함께 불사를 일으킬 계획인 모양이다.

 

 

 

▲ 고달사 푯말과 표석 

 

 

▲ 현 고달사와 절 앞마당의 '다향루' 정자 

 

현 고달사 건물 앞으로 들어가니 고달사의 또 다른 수문장인지 개 한마리가 나그네의 방문을 환영하는지 꼬리를 흔들며 조용히 다가왔다 암자쪽으로 사라진다. 앉아서 쉬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는 운치가 있는 '다향루'라는 정자가 암자 앞에 있다. 그러나 늦은 시간이라 여유가 없어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 그리고 석불좌가 있는 폐사지로 발길을 옮긴다.

 

 

발굴조사가 완료된 넓은 절터에는 건물지였음을 알 수있는 초석들이 곳곳에 보이고 2개의 석조와, 이름모를 고승의 비신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깨어진 귀부가 황량한 벌판에 자리를 잡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겨져 보관중인 비신을 향해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에 새겨진 용머리의 거북과 4마리의 용이 이수를 등에 업고 떨어져 있는 짝을 찾아 날아갈 듯 꿈틀거리며 폐사지의 상단부에 위치해 있으며, 그 아래로 건물 안에 모셔져 석불을 받치고 있었던, 지금은 주인(석불)과 집(불전)마저 잃어버린채 석불좌가 주변의 건물터에 남아있는 주춧돌을 거느리고 쓸쓸히 주인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 건물터의 낮은 돌 축대

▲ 건물터에서 발견된 석조

 

  

 

석불좌를 뒤로 하고 석조와 건물터 그리고 낮은 축대 들을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향하며 고달사지 탐방을 마무리한다.

 

【 고달사(高達寺) 소개 】 

*사적 제382호

*소재지: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 고달사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절터로 남쪽 기슭의 계곡에 평지를 이루어 사방이 막혔고 동남방 수구만이 틔어있다.

신라 경덕왕23년(764) 봉황암으로 창건되어 고려시대 5대 사찰의 하나로 고려 초 광종의 왕사인 원종대사가 우거한 이래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던 대가람이었으며 고달사 또는 '고달원'이라고 하였다.

고려 광종1년(950) 원감국사가 중건하고, 고종20년(1233)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원종1년(1260)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

그후의 기록이 없어 그토록 융성했던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다만 고려말의 중신 유항 한수가 이 사찰을 찾고 그의 중년에 지는 시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 원종대사혜진탑에서 바라본 고달사지

 

▷ 고달사와 봉림산파(鳳林山派, 혜목산문)

신라 말기와 고려 초 사이에 성립된 선종 구산문(禪宗 九山門) 가운데 하나로, 고달사를 중건하였던 원감국사 현욱(788~869)의 제자인 진경대사 심희(854~923)가 효공왕 때 지금의 경남 창녕군 상남면에 봉림산사를 창건하여 선풍을 선양함에 따라 성립된 종파이다.

원감국사 현욱은 헌덕왕 때 당나라에 가서 마조의 제자인 장경으로부터 법인을 받고 희강왕2년(837)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지리산 실상사에서 지내다가 나중에 혜목산 고달사로 가서 설법을 크게 폈다. 그때부터 혜목산선사라 불리었는데, 거기에서 민애왕,신무왕,헌안왕,경문왕 등의 존경과 귀의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현욱의 뒤를 이은 심희는 효공왕 때 봉림산에 절을 세우고 제자들을 일깨우며 종풍을 크게 선양하였으므로 봉림산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문하에는 경질, 융제 등 수백명의 제자가 있어서 그 뒤를 이었다.

융제의 제자 원종대사 찬유(869~958)가 봉림산파를 크게 선양하였는데, 그는 처음 융제로부터 심희의 도화를 듣고 혜목산으로 심희를 찾아가서 정진, 수도하다가 진성여왕6년(892)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투자산의 대동으로부터 심인을 얻었으며, 고려 태조4년(921)에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에서 선법을 크게 떨쳐 큰 선림을 이루었다. 그의 문하에는 흔흥, 동광, 행근, 전인 등 500여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혜목산 및 봉림산파의 선풍을 크게 떨쳤는데 그 뒤의 법맥 및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참고 : 선종구삼문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에 의해 성립된 종파로, 그 후예(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 배출된 대표적인 산문들이다.

①희양(봉암)산문 ②가지산문(북악) ③실상산문(남악) ④봉림(혜목)산문 ⑤동리산문 ⑥성주(승엄,승암)산문 ⑦사자산문 ⑧사굴산문 ⑨수미산문

 

【 고달사지에 남아있는 문화재들 】 

 

▲ 원종대사혜진탑있는 곳의 고달사지 부도 이정표 

 

▲ 고달사지 부도로 올라가는 계단길 

 

♧ ♧ 고달사지 부도(高達寺址浮屠)

*국보 제4호  

 

  

  

 

 

고달사지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조부도로 높이 340cm, 8각원당형의 기본 구조를 따른 승탑으로 상륜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보존이 양호하며 거작에 속한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인 8각 지대석 위에 2단의 8각 굄대가 있고, 그 위에 하대석 각 측면에는 안상이 2개씩 나란히 새겨져 있으며, 안상 내부 중앙에는 귀꽃모양을 하나씩 양각하였다. 하대석 윗면에는 겹으로 된 내림연꽃 16잎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정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두형의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어우러져 부조되었다. 거북의 몸체는 형식화되었으나 용머리 부분이나 구름에 싸인 용의 몸체 표현은 조각이 깊고 생동감이 있다.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의 전면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의 후면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의 옆면   

 

▲ 고달사지 부도 옥개석과 상륜부   

 

 

 

 

상대석은 8잎의 올림연꽃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하대석의 내림연꽃에 비해 잎이 크고 두터우며 잎 끝의 반전도 힘이 있어 중대석의 운룡조각과 조화를 이룬다.

탑신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고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을 앝게 돋을 새김한 것은 당시 부도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껍고 서까래나 기왓골의 모각은 없다. 지붕 윗면에는 8개의 우동선이 도드라져 있고 추녀 끝에 높은 귀꽃을 장식했다. 옥개석 정상부에 내림연꽃을 둘러 상륜부와 연결시켰으며, 현재 상륜부에는 복발과 8각의 옥개석 모양 보개석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승탑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되고 조각 장식이 대담한 걸작으로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혜진탑과 형식이나 양식면에서 유사하여 같은 시기이거나 좀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혜진탑은 탑비의 내용에 의해 97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이 고달사지부도는 일설에 경문왕8년(868)에 입적한 고승 원감대사의 묘탑이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 ♧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보물 제7호 

 

 

고려 초기인 975년도 작인 석조부도로 높이 450cm, 8각원당형 부도의 기본구조를 따랐으나 기단부가 방형인 점이 특이하다.

4매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24잎의 외겹 내림연꽃을 조각한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갑석형을 조각한 판석을 두었다.

중대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이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부조했는데, 거북은 머리만 오른쪽으로 돌리고 몸은 정면을 향한 자세이다. 세부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 원종대사혜진탑 중대석의 전면 

 

▲ 원종대사혜진탑 중대석의 후면  

 

▲ 원종대사혜진탑 중대석의 옆면   

 

▲ 원종대사혜진탑 옥개석과 상륜부 

 

 

 

중대석 위의 갑석은 팔각형이며, 그 위에 잘록한 받침대 위로 8잎의 외겹 올림연꽃을 조각하였다. 8각의 탑신 4면에는 문짝을,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조각했으며 그 위로 8잎의 옥개석이 놓여 있다. 옥개석 밑에 이중의 받침을 새겨 서까래를 대신했다. 추녀는 수평이나 여덟 모서리에 귀꽃을 달아 약간 위로 반전되어 있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기왓골의 표현이 없고 8개의 우동이 표현되었으며, 정상부에 이르는 경사도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8각 노반과 꽃 모양이 조각된 복발, 귀꽃이 화려한 팔각의 보개, 보륜과 보주를 얹었다.

 

비문에 의해 나말려초의 고승 원종대사 찬유(868~958)의 묘탑임을 알 수 있고, 광종26년(975)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대석의 조각이나 하대석의 연판 형태는 고려 초기 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체 구성을 볼 때 중대석이 다소 비대해진 감이 있고, 기단부가 4각인 점은 고달사지에 있는 또 다른 석조부도가 8각기단인 점과는 차이가 있다.

규모나 각 부분의 비례, 장식면에서 장중함과 섬세함을 갖춘 10세기 부도의 걸작품이다.

 

 

♧ ♧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귀부(龜趺) 및 이수

*보물 제6호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 귀부는 높이 91cm, 길이 321cm이고, 이수는 높이 109cm, 너바 233cm이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비의 명칭은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이다.

비신은 191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근정전에 있고, 고달선원의 옛터인 고달사지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수국사신 김정언이 글을 짓고, 내의승지 장단열이 썼다고 한다. 아울러 원종이 신라 문경왕9년(869)에 태어나서 13세에 출가하여 불도를 닦은 행적을 간략하게 적었다.

이 비는 지대석과 귀부가 커다란 하나의 돌덩어리로 만들어졌고, 육각갑 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비좌는 운 무늬를 새긴 연화좌 위에 각출되엇고, 윗면 둘레에는 복련 무늬를 조각하였다.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이고도 예리하게 조형되었으나, 용형의 귀두에 비해 면상이 너무 크고 기이하다.

그 거대함과 사실성에서 고려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을 읽을 수 있다.

 

♧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된다.

 

▲ 국보 제25호인 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 ♧ 고달사지 석불좌(高達寺址石佛座)

 

 

 

 

 

 

 

*보물 제8호 

 

고려시대 석불대좌로 높이 157cm이다.

상,중,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4각대좌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상대석에는 겹으로 된 올림연꽃 24잎을 조각했고 그 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중대석의 간석은 4각이며, 각 면에 안상을 하나씩 가득차게 새겼다. 

하대석에는 3단 받침이 간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겹으로 된 내림연꽃 24잎을 상대석과 같은 배열로 새겼다.

하대석 밑에는 턱이 진 각형받침 한 단이 있는데 그 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4개씩 나란히 새겼다.

넓은 지대석은 대좌 전체를 안정감있게 받쳐주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대좌는 예천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425호)의 대좌 등 고려시대의 예가 몇 점 더 전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것 같다.

 

연잎의 형태가 좌우로 갈수록 비스듬히 배열된 것은 고려 초기 석물에서 보이는 연화무늬의 시대적 특징으로 같은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서도 보인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한 10세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며, 대좌의 규모나 제작수준으로 보아 그 위에 놓였던 불상의 규모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예천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대좌 ▶

 

▲ 석불좌가 있는 건물터의 주춧돌 

 

▲ 석불좌가 위치한 건물터 

 

♧ ♧ 고달사지 쌍사자석등(高達寺址雙獅子石燈)

*보물 제282호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복궁내

사찰에서 법등을 밝히던 고려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이형 석등으로 높이 243cm이다. 고달사지에 넘어져 있던 것을 주민이 수습하여 보관하다가, 1958년 5월 서울시 종로구 종로 4가 동원예식장 뒤뜰로 옮겼다. 그 뒤 1959년 봄 당시 문교부의 주선으로 경복궁 경회루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정하여 복원하였다.

발견 당시 옥개석과 상륜부는 없고 화사석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2000년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옥개석이 출토되어 2001년 석등의 제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의 쌍사자석등과는 달리 사자들이 서 있는 입상이 아니라 엎드려 있어 간주석이 아닌 하대석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성은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화사석,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대석은 직사각형으로 그 판석의 일부가 고달사지 옛 석등터에 남아 있고, 다섯 조각으로 부서진 상태로 윗면과 양쪽 옆면만 다듬고 지면에 묻히는 부분은 거칠게 다듬어졌으며, 그 하부는 잡석으로 채워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하대석 역시 직사각형으로 두 장의 석재를 앞뒤로 연결시켜 상하에 각대를 각각 1단씩 돌출시키고, 그 측면에는 각각 2구의 안상이 부조되어 있다. 위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있는데 얼굴은 서로 중앙 쪽을 향하고 있다. 육중한 체형과 험상궂은 얼굴의 표정, 갈귀 등의 세부 장식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사자상의 등위에 사각형 중대석 받침대인 운문대가 마련되어 있다.

중대석은 두 장의 돌을 포개어 얹어 놓았는데 크게 4단을 형성하여 다소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으나, 기본은 평면 사각형이며, 네 면을 귀죽임한 상태이다. 아랫단이 넓게 퍼져 있어 안정감이 있는 형태이지만, 위로 갈수록 네 귀를 귀죽임한 사각형으로 줄어들다가 한 단 낮은 각대를 가로로 돌출되게 하여 간주석을 아래,위로 양분시킨다. 그 위에 간주와 대칭되게 다소 큰 형태의 귀죽임한 사각형 돌을 역방향으로 세워 상대석을 받치게 하였다. 표면 전면에는 보상화문 등의 화려한 화문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네 변이 길고 네 변이 짧은 팔각형으로, 하단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고 상단에는 화사석 받침대가 1단으로 높게 마련되었으며, 표면에는 8엽의 복판 연화문이 조각되었다.

팔각면의 화사석은 한 장의 돌로 되었는데 네 면에 화창을 두었다. 특히 모서리에 우주를 낮게 각출하고, 한 단 낮게 깎은 화창 윤곽대가 있어 입체감을 더하고 있다.

옥개석은 상,하면이 관통되지 않은 둔탁한 통재이나 지붕선은 비교적 날엽한 팔각지붕이다. 현재 그 외곽 대부분이 깨진 상태이며 팔면 역시 모두 부등변이 아니라 네 면은 길고 그 사이의 네면은 짧다. 상,하면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형성되어 있고, 상면에는 8엽 단판 연화문이 중첩되어 장식되어 있다.

지대석, 하대석은 4각형이며, 중대석, 상대석, 화사석은 부등변 8각형으로 신라시대의 기본형인 8각에서 4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양식이며, 그 밖에 하대의 인상이나 상대석의 연판도 신라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구름과 사자 등 각부의 조각이 다소 둔중한 느낌을주어 고려 초기인 10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