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효찰 대본산 화산 용주사(龍珠寺)

왕마구리 2009. 12. 15. 19:15

◀ 용주사(龍珠寺) ▶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효찰대본산 용주사를 월요일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오후에 지나는 길에 방문을 하였다. 현릉원(사도세자의 능으로 후에 융릉으로 승격)의 능사(陵寺)로 신라 문성왕16년(854년) 창건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던 갈양사 폐사지에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세워 원찰로 삼으며 용주사라 이름 지어졌으니, 용주사와 인근의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사도세자인 장조와 혜경궁홍씨인 헌경황후의 합장묘인 융릉,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묘인 건릉)을 함께 둘러 볼 계획이었으나 매주 월요일이 융건릉이 휴관일이라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 방문일자 】2009년 12월 7일(월)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용주사 소개 】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854년)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게 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전국 5규정소(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하였으며, 팔로도승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수원, 안양, 용인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화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용주사 가람 배치의 특징을 살펴보면 창건 당시 용주사의 건물구성은 대웅보전 9칸, 선당 39칸, 승당 39칸, 천보루 15칸, 칠성각 6칸, 향로전 12칸, 제각 6칸, 좌우종루 4칸, 외삼문 3칸, 좌우익랑 3칸, 동문 9칸, 춘가 2칸, 우물 2곳 등 도합 140여 칸으로 되어 있다. 이들 건물들은 현재에도 커다란 변화없이 당시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어 조선후기 능사로서의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지형은 비교적 평탄하지만 석축을 쌓아 네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삼문이 있는 첫번째 단, 천보루와 승당, 선당이 있는 두번째 단, 대웅보전이 있는 세번째 단, 그리고 칠성각과 제각이 있는 네번째 단이다. 이처럼 네 단으로 나누어진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남북의 직선축 위에 대웅보전과 천보루, 외삼문을 정연하게 두고 대웅보전 앞 중정의 왼쪽과 오른쪽에 대칭으로 口모양의 승당과 선당을 천보루와 같은 단에 두고 있으며, 이 승당과 선당을 천보루와 행각으로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칠성각과 제각, 대웅보전, 승당과 선당, 천보루와 외삼문을 중심골격으로 하여 가람이 구성되었고,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을 대웅보전으로 하고 거기에는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좌우에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아미타여래와 무병장수를발원하는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용주사가 능사이기는 하나 여타의 사찰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 용주사 입구의 표석

 

용주사 역사

용주사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문성왕16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폐사지이다. 갈양사터는 천여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이 가꾸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844년)이 창건했던 것은 분명하다.

 

용주사에 남아 있는 국보 제120호인 범종 오른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연기 성황산 후신 화산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 5월에 창건되었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

불기 2950년 7월 주기 석 송굴 대련(大蓮)"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1923년 당시 주지였던 강대련(1875~1942)스님이 적은 것으로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다.

범종 뒷면에는 창건주 염거화상의 명문도 새겨져 있는데

 

"성황산 갈양사 범종 한 구를 석 반야가 2만5천근을 들여 주성하였다. 금상 16년 9월 0일 사문 염거"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넣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금상십육년(今上十六年)이라는 연기표현은 신라시대에는 없었던 표기법이고, 더우기 범종은 양식이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명문은 범종이 만들어진 후에 나중에 추각했다는 결론이다.

염거화상 이후 갈양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인데, 고려 제4대 광종21년(970) 혜거국사가 수주부(수원의 옛 이름)의 갈양사가 산수가 빼어나 국가대만대의 복지(福地)를 위하여 국가의 영원한 축원도량으로 삼으라 하여 임금이 이에 따라 갈양사를 고려왕조의 원찰로 승격시켜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으며, 혜거국사는 이곳에서 참선수행에 몰입하고 조계종풍을 드날리다 974년 12월 15일 입적하였다.

국가의 지원과 보호에 의해 법등이 끊이지 않고,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을 것이 분명하나 안타깝게도 갈양사는 잦은 병난의 과정에서 절 자체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조선 50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으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성리학은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인식됨과 동시에 정치 철학의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잡아 불교가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 즉 종교로서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정조의 용주사 창건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가 용주사를 창건한 직접적인 배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지극한 효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용주사의 창건 배경 인물인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섭, 자는 윤관, 호는 의재였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였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딸로 '한중록'의 저자인 유명한 혜경궁홍씨(1735~1815).

사도세자는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그의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가 사십을 넘긴 시점이라 어린 나이에 세자의 책봉을 받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때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다고 하며, 7세때에는 '동몽선습'의 내용을 완전히 익혔으며, 수시로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이미 군왕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지만 당파의 정략적인 음모와 계략으로 갑작스러운 기행과 패륜을 일삼게 되었다.

영조25년(1749년)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세자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심화되어 부왕인 영조와 세자의 원만했던 관계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되었다.

어린시절부터 노론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세자가 정사를 맡게 되자 노론과 그 동조세력인 계비 정순황후, 숙의문씨 등이 세자를 계속 모함하였으며 영조도 이에 동조하여 수시로 세자를 꾸짖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으며 계속되는 비행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세력의 영수 이종성이 탄핵을 받았고, 이어 영조37년(1761년)과 그 이듬해에 걸친 나경언의 상소로 인해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정조는 11살의 나이로 이 비극을 목격했으며, 비록 할아버지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즉위 이후에 보여준 그의 효성스러움을 본다면 얼마나 부친의 죽음을 비통스러워 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1776년 25세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먼저 부친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당쟁의 탕평을 위해 진력, 즉위하자 곧 부친을 장현세자로 추존하고, 노론의 당론을 앞세우던 벽파의 일당인 홍인한, 정후겸,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부친의 죽음을 정치와 혼동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외조부 홍봉한을 홀로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해주었고, 노론에 세력기반을 둔 북학파의 젊은 관료들도 적극 등용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세자시절부터 큰 은혜를 입었던 홍국영마저 제거하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탕평의 노력으로 정치, 사회, 문화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이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 부흥기'라 평가하기도 한다.

 

정조의 효성과 용주사 창건

양주땅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긴 정조는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진 아버지를 항상 생각하였다. 불현듯 부왕이 그립다거나 전날밤 꿈자리가 고약하면 효성이 지극하였던 정조는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환궁길에 꼭 용주사에 둘러 능사를 당부하곤 했다.

(일화)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정조는 바쁜 국사를 잠시 물리고 현릉원을 참배하고 주위를 둘러 보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눈에 띄자 순간 정조의 눈에서는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에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하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히느냐"하고 송충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정조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은 모두 당황해 하다가 달려들어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융건릉 주변에는 송충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위와 같은 일화에서 보듯이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성을 느낄 수가 있으며, 용주사의 창건 또한 정조의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이룩된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용주사가 '효의 근본사찰'로 인식되고 있음도 정조의 정신이 사찰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주사 창건의 또 다른 배경은 정조의 왕권 강화의 노력과 불교관의 변화에 있었으며, 수원성의 축조, 사도세자의 천릉, 용주사의 창건 등의 사례가 왕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와 무관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왕실의 능침사찰 건립이 100여년 이상 중단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용주사 창건하였다는 사실과 용주사 이후에는 능침사찰의 건립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없이는 창건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또한 재위 초기에 억불의 성향을 보이던 정조가 불교관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가 있다.

 

지극한 효성을 간직한 정조는 즉위 이후에 부친을 추모하는 일과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첫번째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강등된 부친의 신분을 세자로 복원시켰으며 장헌이라고 존호를 고쳤다.

두번째 영조40년(1764년) 봄에 북부의 순화방이라는 곳에 세웠다가 같은 해 여름 동부의 승교방으로 옮겨 지었던 사도세자의 사당을 정조가 즉위하며 다시 지어 그 이름을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부친의 묘가 원이라는 이름으로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효성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묘가 이전된 것은 1789년, 정조 즉위 후 13년이 되어 시작되었으니, 여기에 약간의 의문이 남지만 그가 수원지역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면서 여러 대규모 공사를 추진하여 행궁을 짓고 도읍까지 옮기려 했다는 점을 본다면 부친의 묘를 둘러싼 일종의 웅대한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는 추측이 든다.

특히 수원성은 당대의 북학파를 중심으로 한 실학사상가들이 동원되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법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용주사의 창건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그 이름을 현릉원(1789년 10월 7일)이라 한 후로부터 4개월 뒤 용주사의 창건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묘 이전과 동시에 추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정조는 처음에 불법을 탄압하고자 하였으나 우연히 장흥 보림사의 보경이라는 스님을 만났는데, 그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設大報父母恩重經)'을 바치자 그것을 읽고 느끼는 바가 컸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번째,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두번째,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세번째,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네번째,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

다섯번째,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

여섯번째,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것

일곱번째, 더러워진 몸을 씻어 주시는 것

여덟번째,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번째,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것

열번째,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 등 이다"

 

이에 감동받은 정조는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절을 세울 것을 결심했으며, 보경을 팔도도화주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토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경을 팔도도승통과 용주사도총섭을 겸하게 하였다. 또한 '은중경' 판목을 새겨 용주사에 소장하게 하였다. -'조선불교통사'에서 발췌-

이리하여 용주사는 대단히 큰 규모의 공사가 진행되었고, 창건자료집 '각항택일'과 '조선사찰사료' 두 자료를 종합하면 7개월여 공사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찰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7개월이란 공기는 대단히 단축된 것이다. 또한 창건에 동원된 인적 구성과 재물의 양을 통해 쉽게 알려주는 대시주진신안에는 큰 시주를 한 96명의 고위관료들의 명단과 관직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용주사건축시각도화주승'이라는 자료에는 용주사 창건을 위해 각 지방의 책임을 맡은 승려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보경당 사일과 성월당 철학이 활약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용주사의 창건 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에는 제목 그대로 궁조, 호조, 병조 등의 중앙관청, 그리고 한양의 각 가게에서 전국에 이르기 까지 분야별로 시주한 내용이 실려있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가히 범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진 역사라 할 수가 있다.

 

절의 모습은 창건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며, 원래의 건물에 낡고 기운 것을 바꾸고 바로잡아 큰 골격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와서 많은 전각이 새로 들어섰다.

1983년 서경대 주지스님이 취임하여 1985년 불음각의 신축을 시작으로 1986년 중앙선원, 1987년 매표소, 1988년 효성각 그리고 1993년에 천불전을 조성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특히 중앙선원은 침체된 선종의 맥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스님의 각별한 원력이 이룬 결실이다.

 

 

▲ 사천왕문 지나 용주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

 

【 용주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 용주사 사천왕문(四天王門)

▲ 사천왕문

 

불법을 보호하고 악귀의 출입을 막아 사찰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지국천왕, 광목천왕, 중장천왕, 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용주사의 입구로 일주문을 겸하는 건물이다.

 

♧ ♧ 홍살문 

▲ 용주사 홍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황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황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고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한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 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 홍살문과 삼문

 

 

♧ ♧ 삼문

절 입구인 일주문(용주사에서는 사천왕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대하게 된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 양식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 안순환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 삼문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이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 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이다.

 

"용(龍)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珠)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寺)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佛)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한다.

 

♧ ♧ 천보루(天保樓)

*문화재자료 제36호

▲ 천보루와 오층석탑

▲ 좌측 측면에서 바라본 회랑과 천보루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천보루

 

삼문을 지나 절 경내로 들어서면 한 눈에 오층석탑(부처님 사리 2과가 봉안) 뒤로 커다란 누각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천보루이다. 1790년 절의 창건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 쾌성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팔정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 천보루 

 

▲ 천보루 앞 오층석탑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개의 목조기둥 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을 알게 해 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 서쪽에 만수리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외정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의 전통방식 그대로 이다.

 

♧ ♧ 불음각(佛音閣)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 있다. 범종의 네면에는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다.

1985년 조성된 이 범종은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띈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다.

 

♧ ♧ 대웅보전(大雄寶殿)

*문화재자료 제35호 

▲ 대웅보전

▲ 대웅보전과 좌측으로 보이는 천불전, 범종각

▲ 대웅보전과 우측으로 보이는 호성전과 법고각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르킨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 하고 이를 줄여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 이름하였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 사임스님이 팔도도화주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정조의 명에 의해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치던 이덕무(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대계로 다 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은 남아 있지 않다.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 총섭이 중수하고 1931년 강대련 주지, 1965년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하였다.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고,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 비운, 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절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융릉과 용주사가 불가분의 인연을 가졌던만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하였던 공장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인 셈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여 가람이 마치 갓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되었다.

 

▲ 대웅보전 앞 당간지주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에 삼세불과 후불탱화를 웅휘하고 있는데, 닫집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불전이다.

원래 불전은 참배객이 들어설 수 없는 부처님만의 신성공간이다.

 

부처님은 한없이 존귀하고 성스러운 분이므로 감히 세속의 중생이 부처님 코앞에 다가간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으므로 전각 내의 불전과 오늘날과 같이 부처님이 뒤쪽으로 물러나 앉은 모습이 아니라 건물의 정중앙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부처님을 더욱 더 가까이서 뵙고자 불전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뒤로 물러나게 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원 건축에서 새로이 누각과 배례석이 등장하였고, 참배객이나 기도를 올리고자 하는 사람은 문전에서 멀리 떨어진 누각이나 불전앞의 배례석에서 예를 올려야 했다.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는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다.

불단,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닫집도 또 하나의 불국토를 의미한다.

결국 이 셋이 조화를 이루어 보다 넓은 공간으로서의 불국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대웅보전에 관한 기록은 홍천보가 편찬한 '대웅전상량문'과 닫집 내부에서 발견된 대웅보전 원문이 남아 있다.

 

♧ 대웅보전 내 삼세불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대웅보전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상, 아미타불이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으며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cm로 2006년에 개금하였다.

대웅보전의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을 보면 불상조성의 시말을 알 수가 있는데, 불상조성은 상계, 설훈, 계초, 보현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하여 1790년 8월 16일 시작하여 9월 30일에 완성하였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 1일에 나라안의 명승을 초빙하여 점안식을 거행하였고, 또한 위의 기록보다 후에 작성된 '본사제반서화조각등제인방함'에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차근사 통정 봉현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가 각 조성하였다. 삼세불상은 이처럼 조각자가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다만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상호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크게 박혀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 파순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쥐고 있다. 한편 대구 동화사 승려였던 인악대사 의첨(1746~1796)스님이 왕명으로 삼세불상의 복장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을 지었는데, 국왕의 성은을 칭송하고 왕실의 안락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기록과 함께 스님이 찬한 '용주사제신장문', '경찬소'가 '인악집'에 전하는데 정조가 이 글을 읽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석가, 약사, 아미타부처님은 우리나라 불교사의 흐름을 보면 민중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신앙되어 왔다.

특히 약사신앙은 중생의 질병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신앙은 염불 만으로도 서방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행도로서 크게 신앙되었다.

 

♧ 대웅보전 내 탱화 및 기타 유물들

▷ 후불탱화

 

대웅보전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로 가로 350cm, 세로 440cm의 비단에 채색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 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중장천왕과 광목천왕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보살, 보현보살 사이에 은자서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암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주상전하 수만세  자궁저하 수만세

 왕비전하 수만세  세자저하 수만세"

(정조와 생모인 혜경궁홍씨, 왕비인 효의황후 김씨, 왕세자 순조를 뜻함)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과 다문천왕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를 두광 좌우에는 화불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 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불화의 전체적인 특징은 먼저 색조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 녹색 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선의 처리는 다소 필력이 약하여 박진감과 생동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불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적, 도식적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과장없는 인체비례, 사실적인 얼굴표현, 침착한 설채법 등이 불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인물의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불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후불탱화의 인물표현에 음영을 나타냈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는 전문적인 화승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불화의 제작자는 과거부터 김홍도(1745~?)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는데, 이는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 중에 '민관, 상겸, 성윤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김홍도가 아닌 25인의 화승에 의해 그려졌다고 하지만 다소 무리가 따르는 이설이다.

후불탱화의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는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으로 '대웅보전보탑후불탱삼세여래채탱 화원 연풍현감 김홍도'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먼저 대웅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은 1790년 10월 7일 대웅전에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시말을 적은 것인데 민관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고 했지 구체적인 제작과정을 생략하였고, 두번째의 자료는 정확치는 않으나 부모은중경 석판, 동판이 봉안된 1802년 직후의 기록으로 추정되고 내용은 각 전각의 도편수와 단청장, 탱화와 불상의 제작자 등을 자세하게 실고있다.

일반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앞선 기록물이 중시되어야 하지만 여기서의 경우는 몇가지 점에서 뒤늦게 작성된 후자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그 예로서 첫째, 제작에 참여한 인물과 화풍의 문제로 후불탱의 제작에 참여하였다는 상겸은 당시 정조대의 유명한 화승으로 이보다 앞선 1782년에 충남 예산 향천사의 지장보살도를 그렸는데 1790년 용주사의 후불탱화와는 그 화풍이 전혀 다르다. 또한 상겸과 함께 후불탱화의 제작에 참여하였다는 민관스님은 용주사 삼장탱화 조성자의 명단에도 들어있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후불탱과 비교해 볼 때 화풍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후불탱이 지니고 있는 화풍이 그의 다른 도석인물화와 거의 같다는 점이다. 미술사가 최완수 선생에 따르면 우선 탱화에 표현된 불보살 및 그 권속들의 얼굴표현이 바로 단원풍의 얼굴모습들이며, 길쭉한 정도로 긴 윤곽에 우리 얼굴치고는 코가 너무 크다고 할 만큼 우뚝 솟은 콧날을 가진 청수한 용모가 그것인데 이 얼굴 모습은 아마 단원 스스로의 용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연하고 날렵하게 젖혀지는 손목의 표현이나 그에 비해 무미하다고 할 만큼 아무 변화없이 미끈하게 처리하는 팔뚝표현도 단원만이 가지는 인체표현의 특징이며, 세장한 손가락과 고운 발 맵시 역시 단원 인물화에서 보이는 품위있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맞은 옷자락인 듯 우려하게 휘날리는 당풍세의 옷자락 표현이 또한 단원 인물화임을 증명해 준다.

이처럼 정조대에 최고의 화가로 왕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가 용주사 창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은 당연한 일이고, 1796년에는 '불설부모은중경판'의 변상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또한 절에 소장되어 있는 4폭의 김홍도가 그린 병풍도는 이 무렵에 왕이 하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후불탱의 규모가 거대하여 김홍도 혼자서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더욱이 그 당시 최고의 화가이기는 했지만 불화를 그리는데는 경험이 부족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가 밑그림과 기본적인 구도를 맡고 기타 채색이나 장식 등은 원문에서 밝힌 25인이 담당하였을 것이다.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은 사자관 글씨체인데 김홍도가 주관자였으므로 그가 직접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삼장탱화

 

대웅보전 오른쪽 벽면에 위치한 탱화로 지장탱화가 발전하여 확대된 형태로 여겨지는 불화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불화로 삼장보살도라고도 불리며 지장도, 십왕도, 지옥계 불화가 이에 속한다.

 

삼장은 천장, 지장, 지지보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세보살의 법회를 동시에 한 화면에 도설한 것으로 조선중엽 이후 후기에 걸쳐 유행하였으며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가로 318cm, 세로 173cm 크기로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화면은 수평으로 이등분하여 상단에 세분의 보살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권속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이 권속들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점이 다른 삼장탱화와 구별된다.

 

화기에 따르면 이 불화의 제작에는 민관, 관인, 처성 등 8인의 화승이 참가하였다.

 

 

 

 

 

▷신중탱화

 

대웅보전의 좌,우측 벽면에 봉안된 불화이다.

신중탱화에 묘사된 호법신들은 부처님의 세계, 불법의 세계를 보호하는 신들이다.

특히 우리의 재래신들이 포함되어 있어 다른 불화들과 비교할 때 전통적인 특성이 강한 편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화엄신중신앙에 바탕을 둔 39위 신중탱화가 원형을 이루는데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104위 신중탱화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용주사 대웅보전내의 신중탱화는 대예적금강신을 주축으로 하는데 1913년 가로 210cm, 세로 198cm 비단에 채색한 작품이다.

 

 

 

▷감로왕탱화

 

조상숭배 혹은 영혼숭배의 신앙을 중심으로 묘사된 불화로 영화의 극락왕생을 위한 신앙내용을 도설하였기에 영단탱화라고도 하고, 아귀나 지옥의 중생에게 감로미를 베푼다는 뜻에서 감로탱화라고도 한다.

감로왕은 바로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이며 감로는 부처님의 교법을 이르는 것이다.

 

고려시대 시작되어 조선중기 이후부터 많이 봉안된 이 감로왕탱화는 불교의 여섯 세계를 묘사한 불화로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을 아귀의 세계에서 구하는 것을 주제로 한 '우란분경'에 근거한다고 해서 우란분탱화라고도 한다.

 

정조는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이 감로왕탱화를 봉안하였던 것이다.

가로 309cm, 세로 156cm로 비단에 채색하였고, 1790년 용주사 창건과 함께 제작되었으며 상훈, 성완 등 11인의 화승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현재는 도난당하여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어 정조의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앗아 간 것 같아 비어있는 감로왕탱화 자리를 보는 이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괘불

 

대웅보전 불단위 괘불함속에 보관되어 있다.

괘불함의 명문에 따르면 이 괘불은 강원도 유점사 낭은경천 스님과 용주사 성덕, 성봉스님이 금어를 맡아 1939년 5월 26일에 시작하여 6월 30일 완성한 종이 재질에 가로 398cm, 세로 734cm의 규모이다.

 

괘불은 야외에서 법회 때 사용하는 의식용 불화인데 초파일이나 큰재와 같이 십대제자, 각종 성종, 권속 등을 모두 생략하고 다만 석가모니불과 제자인 가섭존자, 아난존자만을 도상하였다.

 

▷목조감실

6각 당형의 목조감실 2개가 대웅보전에 소장되어 있는데 너비 82cm, 높이 223cm로 지장전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감실은 감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불상 등을 안치하는 구조물이다.

석탑의 탑신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처럼 건축물의 일부로서 마련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웅보전의 감실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기는 하였지만 정교한 조각술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상부의 절병통은 활짝 핀 연꽃봉우리 모양이고 지붕은 급한 경사로 내려오다가 처마끝에서 큰 반전을 이루고 있다. 처마 끝의 공포는 건축물의 그것과 같이 세밀하고 견고하게 짜맞추었고, 모서리는 여섯 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기둥의 중간을 난간처럼 구획하여 마치 2층의 누각처럼 보인다.

감실은 원래 축성전에 있었으나 이후 지장전으로 옮긴 것으로 축성전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이곳에는 군왕의 위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2개의 동일한 형태와 규모의 감실이므로 두 분의 위패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아마 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위패일 가능성이 크며. 혜경궁 홍씨가 돌아가신 해가 1815년이므로 제작시기는 그 무렵일 것이다.

현재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 법고각(法鼓閣)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층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다. 북고는 홍고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도 한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낸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은 조석예불에 쓰이므로 대개 사물과 함께 보관되나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마주보고 서있다. 이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옥중생을 위한 범종, 축생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천보루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조류를 위한 만수리실의 운판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중생을 지혜의 세계로 인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용주사에는 늘 각종 새들이 끊이지 않고 날아들고 있다.

 

 

▲ 법고각 

 

▲ 범종각 

 

♧ ♧ 범종각(梵鐘閣)과 범종(梵鐘)

*국보 제120호

*소재지: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번지

범종은 사원에서 쓰는 종이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하여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범종위 소리는 중생의 마음속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합니다. 이처럼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난다고 하여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과 마주 보고 있는 범종각이 있는데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이라고 하였으며, 전각안에 있는 범종은 고려시대 양식으로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는데, 고려 초기의 범종이라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시대의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린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으며 여섯 단으로 구분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 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 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무늬를 독립하여 배치하고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 띠 주변에 연주무늬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무늬 띠를 둘렀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개씩 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띠를 돌렸으며,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의 띠에도 연주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감하였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보살의 천의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 사이에 추각한 명문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854년에 주조한 것이라 하는데, 종의 형태가 고려 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 범종의 명문 내용 ))

성황산 갈양사 범종 한 구 석 반야가 2만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 16년 9월 일 사문 염거 연기

 

화산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선왕16년 5월에 창건하였고, 동시에 이 범종도 주조하였다. 불기 2950년 7월 주지 석 송굴 대련종의 크기는 총 높이 144cm, 입지름 87cm, 두께 5.8cm, 상대너비 11cm, 하대너비 12cm, 당좌 지름 17cm이며 900여 년전의 이른 새벽 막 동터오는 화산에 울러 퍼졌을 그 우렁차고 은은한 소리는 아마도 무명에 헤매이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일깨웠을 것이다.

 

♧ ♧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탑

 

 

 

정조대왕께서는 일반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릉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황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 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푼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절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 호성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 효의황후의 위패

 

 

 

♧ ♧ 천불전(千佛殿)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 또는 향로전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19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이라고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 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아홉번째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여 대웅보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 하여 조성하였다.

 

♧ ♧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한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 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하여 발전시켜 나간 신앙이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된 것이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하고, 각각의 신을 따로 모신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이라고 하여 이들 세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절의 창건 당시에는 칠성각이 있었으며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의 설잠스님이었고, 전각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을 경옥, 연홍, 설순스님 등이 제작하여 봉안하였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덕무가 지은 '이만리 아유타국 돌우물에는 공덕수가 널리 젖어들고, 팔십경 기타원 좋은 밭에는 길상화가 가득 피었네'라는 주련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면적 18평의 아담한 규모이며 문은 띠살문이다. 건물외부 측면에는 산신과 독성을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가로 270cm, 세로 150cm로 1935년 제작), 오른쪽에 독성탱화(가로 120cm, 세로 130cm로 1942년 제작), 왼쪽에 산신탱화(가로 120cm, 세로 130cm로 1942년 제작)가 있고 최근작인 소규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 있다.

 

♧ ♧ 지장전(地藏殿)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용주사에서는 지장전이라 이름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측면에는 주심포 양식 특유의 도리가 노출되는 가구 형식을 가지고 있다. 건물 정면의 좌우에는 빗살무늬의 창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 한칸에만 출입문이 있다. 이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 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마주하게 된다.

 

♧ ♧ 전강대종사 사리탑 

 

전광선사는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어 불조의 해명을 밝히신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다.

2006년 입멸 30주기를 맞아 사부대중의 뜻을 모아 수행과 위덕을 기리는 사리탑을 조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