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한 산 비봉능선 & 진관사계곡 |
높 이 |
비 봉 560m 향로봉 535m |
소 재 지 |
서울 은평구 |
▲ 불광공원지킴터로 하산하는 길에 전망대에서 조망된 406암봉
【 개 관 】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끝 자락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높게 솟은 수려한 명산으로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불려온 북한산은 주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뿔처럼 솟아있어 과거에는 삼각산이라 불렀다.
세 암봉을 비롯하여 노적봉이 거대한 바위 군락을 이루고 그 위로 상장봉, 아래로 보현봉에 이르기까지 20여개의 화강암봉이 산 전체에 산재되어 높이로 치자면 태산준령이 아님에도 우람한 산세와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산계곡(백운동계곡),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구기계곡, 정릉계곡, 우이계곡 등 10여개의 골짜기가 굽이쳐 맑고 수려한 경관을 자아낸다.
서울의 총 면적 중 26%가 산지인데, 산지 면적 중 약 25%에 달하는 39.71㎢를 점하는 북한산은 북의 백두산, 남의 지리산, 동의 금강산, 서의 묘향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오악에 포함되는 명산으로 북한산에 오르면 도봉, 북악, 남산, 관악산 등 서울 근교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쾌청한 날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서해바다와 강화도, 영종도 등의 섬들까지 조망할 수 있다.
2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 안에는 원효암, 상운사, 태고사, 국녕사, 봉성암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지인 진흥왕순수비, 국가 보물인 승가사의 마애석가여래좌상, 승가대사상, 삼천사의 마애여래입상, 태고사의 원증국사탑비, 보우국사사리탑 등 수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도심 속 자연공원이자 '녹색 허파'로 불리는 북한산은 1983년 도봉산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1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산행코스 】
'삼천사입구'버스정류장→진관사입구/북한산둘레길 '마실길'→진관공원지킴터→진관사→Y자갈림길/향로봉갈림길→비봉/비봉능선→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안부사거리→향로봉→기자촌공원지킴터 갈림길/안부사거리→선림공원지킴터 갈림길/송전탑있는 사거리→족두리봉갈림길→406암봉&폭포 전망대→정진공원지킴터 갈림길→정자+체육시설1→정자+체육시설2→불광공원지킴터/불광사--→'불광중학교'앞 버스정류장
* 이정표 기준 산행거리 : 약 4.8km
진관공원지킴터-(2.3km)-비봉/비봉능선-(0.4km)-향로봉-(2.1km)-불광공원지킴터
【 산행일자 】2010년 12월 18일(토)
【 산행시간 】총 3시간 50분 소요(후미기준, 휴식 : 1시간 34분 포함)/실제 산행시간 : 2시간 16분 소요
【 날 씨 】맑 음
【 참 석 자 】총 8명(달구산악회)
【 교 통 편 】대중교통 이용
* 구파발역(3호선) 1번출구에서 7211번 버스 이용하여 '삼천사입구' 하차
* '불광중학교'앞 버스정류장에서 7720번 버스 이용하여 불광역 하차
【 산 행 기 】
전날 내린 눈과 영하의 날씨 때문인지 참석률이 저조하여 총 8명이 참석(6회:1명, 12회:1명, 13회:2명, 14회:2명, 18회:1명, 27회:1명)한 재경대구고 달구산악회의 12월 산행은 지난 11월 삼천사계곡과 의상능선 산행에 이어 북한산국립공원 탐방 시리즈 제2회로 진관사계곡과 비봉과 향로봉을 잇는 비봉능선을 오르는 코스에서 실시가 되었으며, 향로봉에서 하산은 큰골계곡을 끼고 불광공원지킴터/불광사 방향으로 진행을 하였다.
이번 코스를 살펴보면 진관사에서 비봉 서쪽 아래의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가파른 바위길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쇠줄난간 등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완만한 바위지대 몇 곳은 안전시설없이 릿지로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 전날 내린 눈 때문에 미끄러워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향로봉에서 불광공원지킴터로 내려서는 하산길은 살짝 내린 눈들이 모두 녹아 별 불편없이 쉽게 내려설 수가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북한산둘레길 변에 위치한 '토담집'에서 옻닭과 엄나무닭, 그리고 닭죽으로 약 1시간 30여분간 뒤풀이와 식사를 하고 2010년 달구산악회 산행을 모두 마무리하였다.
뒤풀이비용은 13회 이말용 선배가 전액 찬조하였다.
산행날머리에서의 뒤풀이가 끝나고, 4명의 회원은 13회 석호덕 달구산악회 전 회장의 연락을 받고 종로5가로 자리를 이동, 2차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09:57=>'삼천사입구'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건너 진관사 방향으로 은평뉴타운 택지 개발지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한산 둘레길 '마실길'과 만난다.
▲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진관사입구에서 바라본 진관사로 이어지는 도로(사진 上)
진관공원지킴터 앞 전경(사진 下左)
진관사 일주문(사진 下右)
이정표가 설치된 ┤자 둘레길 갈림길인 '진관사입구'에서 직진의 도로를 따라 0.5km 떨어진 진관사로 올라가면 진관공원지킴터(10:07)를 지나게 된다.
진관사계곡을 가로 지르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면 진관사이다.
다리 입구 우측으로 계곡을 따라 나무데크 산책로가 보이는데 이 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향로봉 서쪽, 기자촌공원지킴터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 이르게 되는 향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10:15=>진관사
누각 건물인 '홍제루'를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 그 우측으로 명부전, 독성전, 삼신각이 차례로 자리를 하고 있으며 칠성각 앞으로는 나한전이 절 마당을 바라보며 위치해 있다.
또한 경내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범종각이 있고, 경내 앞 마당 좌측으로 나가원, 동정각, 요사채 등 여러 동의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진관사(津寬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히는 이름난 사찰이며, 수륙도량으로 유명하다.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의 혼령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륙재(水陸齋)가 매 윤년 윤달에 크게 열리는 수륙도량 진관사는 비구니스님의 단아한 수행처로 북한산 국립공원내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일상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는 사찰이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2년(1011년)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중창된 고찰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라는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이 편찬한 '북한지'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975~981재위)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 경종이 서거하자 성종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964~1029)는 그의 아들 송이 왕위에 올라 목종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성종년간에 김치양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는데 마침네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와 태도의 아들인 욱의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 순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승경사에 가두고 죽임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된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었고,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9대 현종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했던 굴을 신혈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로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말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하여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하였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과 명월요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일으켰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볍회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 책봉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왕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선종7년(1090년) 10월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성대하게 봉행하였고, 숙종4년(1099년) 10월에는 숙종이 천관사에 친행하였으며, 그 후 예종5년(1110년) 10월에는 예종이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의 참바\ㅐ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어는데, 특히 수륙재의 근본도량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권근이 저술한 '수륙사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태조6년(1397년)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과 조선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되었고,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 지상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되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을 겸하고 있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직접 행차도 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들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된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태종13년(1413년)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세종3년(1421년)에는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다. 그리고 세종24년(1442년)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 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다.
문종2년(1452년)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세조9년(1463년)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었으며, 성종원년(1470년) 벽운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철종5년(1854년)과 철종9년(1858년)에 중수, 고종16년(1879년)에는 당두화상 경운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근대에는 1908년 송암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선사에 의해 대웅전 삼존불을 개금하고,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 보수하는 등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의 자금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6.25 전란으로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현 회주이신 비구니 최진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1965년 현재의 대웅전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는 후불탱 및 신중탱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을 여법하게 일신하였다. 1968년에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1969년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 1972년에는 나가원 신축, 1974년에는 범종 조성, 1975년에 동정각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이 복원되었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하였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다.
▲ 진관사 담장 옆 산길을 따라서...
경내를 빠져나와 계곡을 우측에 끼고 산길을 따라 약 3분여간 들어가면 좌측으로 쇠줄난간이 설치된 가파른 오르막의 바위길이 시작된다.
▲ 쇠줄난간이 설치된 가파른 바위길(사진 上,中)
첫번째 위치표시목(사진 下)
위치표시 '북한산61-01'(10:20)을 지나면 가파르던 오르막길은 완만한 경사로 바뀌어 이어지는데 안전시설인 쇠줄난간이 설치된 바위사면길이다.
▲ 쇠줄난간이 설치된 바위 사면길
공터(10:30~10:42)에 도착하여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12분여를 기다린다.
▲ 바위길이 끝나고 나타나는 흙길
▲ 두번째 위치표시목이 나타나는 등산로
공터에 이르면 바위길이 끝나면서 완만한 흙길의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위치표시 '북한산61-02'를 지나면 100여m 떨어진 곳에 향로봉갈림길이 나타난다.
▲ 향로봉갈림길 전경과 이정표
10:53~10:59=>향로봉갈림길
이정표(↑비봉 1.2km/→향로봉 1.4km)가 설치된 갈림길이다.
▲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완만한 오르막의 산길
▲ 쇠줄난간이 설치된 오르막길
직진의 길을 따라 3분여 완만하게 올라가면 쇠줄난간이 설치된 바위길이 잠시 나타나며 산길은 급경사를 이룬다. 쇠줄난간이 설치된 가파른 바위지대가 3곳 나타나는데 전날 내린 눈들이 덮여있어 미끄러워 위험하기까지 하다.
▲ 비봉능선으로 오르며 조망된 남쪽 비봉능선 방향의 전경
▲ 쇠줄난간이 설치된 바위구간
3곳의 쇠줄난간 바위지대를 통과(11:15~11:17)하면 굵은 밧줄이 매여진 바위에 오르게 되고, 큰 바위 사이의 홈통을 지나 바위 위에 오르니 눈이 덮여 바위사면길이 미끄러워 발걸음을 옮기기가 부담이 된다.
▲ 굵은 밧줄이 매여진 바위지대(사진 上)
커다란 바위 사이의 등산로(사진 下左)
눈 덮인 바윗길(사진 下右)
바위위에 나무 뿌리가 있어 도움을 받아 위험한 바위지대를 벗어난다.(11:22)
바위지대를 벗어나 완만한 오름막길을 약 11분여 이어가면 비봉 서쪽 아래 비봉능선에 오르게 된다.
▲ 비봉능선에서 바라본 좌측의 능선길과 비봉(사진 上)
비봉능선에 설치된 이정표(사진 中)
비봉능선에서 바라본 우측의 가야할 향로봉 직전의 전망암봉과 향로봉(사진 右)
11:33~12:02=>비봉(560m)/비봉능선
이정표(←청수동암문 2.0km/↓진관공원지킴터 2.3km/→불광공원지킴터 2.5km)가 설치된 능선에 서면 좌측으로 비봉이, 우측으로는 향로봉이 조망이 된다.
우측의 좁은 공터에 자리를 깔고 후미가 도착할 때 까지 정종 두어 잔을 마시며 30여분간 대기를 한다.
후미와 합류하여 우측의 비봉능선을 따라 향로봉으로 향하여 잠시 내려서면 이정표(←비봉탐방지원센터 1.3km/↑향로봉 0.3km/↓사모바위 0.95km/→진관공원지킴터 2.3km)가 설치된 안부사거리인 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 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의 이정표
12:04~12:07=>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
이정표와 위치표시 '북한산61-04'가 있는 사거리를 뒤로 하고 잠시 오르면 바위전망대(12:10~12:14).
▲ 향로봉 직전 전망암봉에서 비봉쪽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 향로봉 직전의 전망암봉에서 뒤돌아본 비봉과 비봉능선(사진 上)
의상능선과 백운대 일대의 전경(사진 中)
전망암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향로봉(사진 下)
비봉과 북한산 주능선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능선길을 잠시 따르면 향로봉 입구에 이르게 된다.
▲ 향로봉 입구 전경과 이정표
12:17=>향로봉 입구
이정표(↑불광공원지킴터 2.1km/↓청수동암문 2.3km, 비봉 0.4km)와 향로봉 푯말이 설치된 향로봉 입구이다. 향로봉을 오르는 직진의 길에는 출입을 제한하는 밧줄과 안내문이 있다.
향로봉을 우회하는 우측의 사면길을 따라 내려가면 향로봉 아래 서쪽의 암봉 전망대(12:23~12:38)에 이르게 된다.
▲ 향로봉 서쪽 전망대에서 뒤돌아본 향로봉과 비봉능선
후미 그룹이 간식시간을 갖지 않아 선두 그룹을 먼저 하산시키고, 약 15분간 후미그룹만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한다.
▲ 바위전망봉에서 뒤돌아본 향로봉과 비봉(사진 上)
산 아래로 펼쳐진 은평뉴타운 일대(사진 下)
휴식 후 안부(12:43)에 내려섰다 잠시 오르면 바위전망봉(12:45). 본격적인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바위길을 내려서면 기자촌공원지킴터 갈림길인 안부사거리이다.
▲ 기지촌공원지킴터 갈림길인 안부사거리와 이정표
12:53~13:07=>기자촌공원지킴터 갈림길/안부사거리
이정표(↑기자촌공원지킴터 1.3km/↓향로봉 0.68km/←선림공원지킴터 1.5km)가 설치된 안부사거리로 직진의 기자촌공원지킴터 방향의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선림공원지킴터 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향로봉 서쪽 암봉 전망대에서 함께 하산을 시작한 후미에게 하산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다시 대기를 하게 되는데, 15분을 산행하고 14분을 대기하였으니 후미의 산행 속도가 2배가 걸리는 셈이다. 후미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좌측으로 약 7분여를 내려가면 송전탑을 지나 이정표(←불광공원지킴터 1.2km/↓향로봉 1.04km/→선림공원지킴터 0.9km)가 설치된 사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선림공원지킴터 갈림길이다.
▲ 송전탑이 있는 안부사거리 전경과 안부사거리의 이정표와 위치표시목
▲ 송전탑이 있는 안부사거리에서 불광공원지킴터로 내려가는 산길 입구와 안부사거리의 송전탑
13:14~13:22=>선림공원지킴터 갈림길/송전탑있는 사거리
이정표와 위치표시 '북한산63-02'가 있는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후미에게 마지막 하산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약 8분여를 대기하고 좌측의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간다.
▲ 송림숲길
▲ 족두리봉 갈림길
이정표(↑불광공원지킴터 1.0km/↓향로봉 1.29km/←족두리봉 0.98km)가 설치된 ┤자 갈림길인 족두리봉 갈림길(13:25)을 지나 마른 계곡을 건너 잠시 오르면 406암봉과 거대한 화강암 바위 사면에 형성된 폭포가 시원하게 조망이 되는 전망대(13:30)에 이르게 된다.
▲ 406암봉과 폭포
쇠줄난간이 설치된 완만한 경사의 바위길을 두 차례 지나 돌계단길을 내려서면 ┤자 갈림길에 이정표(↑불광공원지킴터 0.4km/↓향로봉 1.76km/←정진공원지킴터 0.5km)가 설치된 정진공원지킴터 갈림길(13:38~13:39)에 이르게 된다.
▲ 쇠줄난간 설치 바위길
▲ 돌계단길
▲ 정진공원지킴터 갈림길
첫번째 정자 쉼터와 체육시설(13:41),
▲ 정자쉼터와 체육시설
▲ 큰골계곡
두번째 정자 쉬터와 체육시설(13:45)을 차례로 지나 계류를 가로 지르는 다리를 건너 내려가면 불광공원지킴터가 나타난다.
▲ 등산로 입구인 불광공원지킴터
13:47=>불광공원지킴터/불광사
불광공원지킴터에 내려서며 산길은 끝이 나고, 포장길이 이어진다.
마을길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면 불광중학교가 자리를 하고 있는 ┬자 도로삼거리에 이르게 되고, 길 건너 '불광중학교앞'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이용, 6호선 독바위역이나 3호선 불광역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선두그룹이 불광중학교 방향의 마을길에서 좌측으로 살짝 벗어나 북한산둘레길' 변에 위치한 '토담집'에 자리를 잡고 있어, 뒤풀이를 하고 가기로 하며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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