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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탐방 시리즈(5) 창덕궁(昌德宮) 내전과 외전

왕마구리 2011. 2. 9. 00:35

◀ 왕에게 사랑받은 창덕궁(昌德宮)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산을 뒤로 하고 앞에 물을 두는 '배산임수', 앞에는 집무 공간, 뒤에는 생활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 여러 전각과 여러 겹의 담장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구중궁궐', 세자와 대비의 거처는 동쪽에 둔다는 '동궁동조'의 원칙을 따랐으며, 기본적으로 공식 업무 공간인 정전, 일상 업무 공간인 편전, 생활 공간인 침전을 갖추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창덕궁은 지연환경과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궁궐 건축과 전통 정원의 원형을 잘 간직한 궁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창덕궁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다.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제일의 궁궐이 되었다.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궁궐다운 규모와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 왕조의 오백 년 역사를 놓고 보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다.

너른 평지 위에 직선의 축을 따라 전각들이 들어선 경복궁에서 위엄과 권위, 질서와 절제가 돋보였던 것과 달리, 창덕궁은 전각들이 산과 언덕 등 지형을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고, 규모도 배치된 공간과 쓰임에 걸맞게 지어졌다. 조선시대 왕들이 창덕궁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친환경적인 매력,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공간의 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에서도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자연의 지형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최소한의 손길만을 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솜씨가 절묘하다. 자연미를 중요시한 조선시대의 미감이 잘 드러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의 전용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혁신 정치를 펴서 조선시대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다. 정조에게 규장각은 세종의 집현전에 버금가는 큰 힘이 되었다. 후원의 부용지에 자리한 주합루 1층이 규장각이다.

부용지에 서면 왕과 신하들이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면서 함께 시를 짓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활기차고 이상적인 모습이 절로 눈앞에 펼쳐진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1820년대 후반에 그려진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에도 잘 드러나 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둘러싼 주변 지세와 전각, 담장, 각종 기물들을 상세하게 또한 사실적으로 그려낸 궁궐 기록화이다. 궁궐의 현재와 옛 모습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역사의 흐름 속에 변화해온 궁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궁궐로 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지켜본 궁궐이기도 하다. 한일병합을 결정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과 중전인 순정효황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창덕궁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쳤다.

 

【 방문일자 】2011년 02월 2일(수)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자유 관람 4월~10월 09:00~18:30/11월, 3월 09:00~17:30/12월~2월 09:00~17:00(매주 월요일 휴궁)

  -후원 시간제 관람(2시간 소요) 10:00~15:00 매시 정각, 15:30, 16:00, 16:30/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람

*관람요금 :

  -자유 관람 어른(19~64세) \3,000/청소년(7세~18세) \1,500

   -후원 시간제 관람 어른(19~64세) \5,000/청소년(7세~18세) \2,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종로3가역(1,3,5호선) 6번출구 도보 10분/안국역(3호선) 3번출구 도보 5분

  - 버스 : 109번, 151번, 162번, 171번,172번, 272번, 7025번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창덕궁 탐방코스 】

돈화문-회화나무-금천교-궐내각사-구 선원전 일원-인정문-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 일원-성정각 일원-낙선재 일원-후원(부용지와 주합루 일원-애련지와 의두합-존덕정과 폄우사-옥류천 일원-연경당)

 

 

1.돈화문 2.금천교 3.진선문 4.인정문 5.인정전 6.선정전 7.희정당 8.대조전 9.경훈각 10.내의원 11.어차고 12.낙선재 13.연경당

 

【 창덕궁 소개 】

*사적 제122호(1963년01월18일 지정)

*면적:583,516.3㎡ 

조선 태종5년(1405)에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세워졌으며,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으며,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어졌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어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며,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역사

창덕궁은 태종5년(1405)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 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 1408년 조선 태조는 이 창덕궁에서 죽었다.

태종11년(1411)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38년(1605)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원년(1609)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25년(1647)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 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가녕전과 그 앞의 동ㆍ서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으로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하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건축과 구조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 창덕궁의 문화재들 】

◎ 돈화문(敦化門)과 주변

 

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도로가 거듭 포장되면서 우선 돈화문 월대는 그 앞을 지나는 율곡로에 막혀 있는데다, 월대 앞 지반을 높게 돋워 도로를 내는 바람에 월대는 도로면보다 낮아 마치 땅에 파묻힌 모습이다.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 도로공사로 지반이 낮아 보이는 돈화문 앞 월대

 

또 돈화문 양 옆에 궁궐 문을 지키는 관청인 수문장청이 있는 행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돌담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궁궐에서 빠져나온 금천의 시냇물이 문 오른쪽 담장을 따라 흘러 나왔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창덕궁 서쪽 담장을 따라 남쪽에는 금호문(金虎門), 북쪽에는 경추문(景秋門)이 있는데,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 쓰이던 상징적인 문이었으므로 평소에 신하들은 금호문으로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추문은 평소에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에만 쓰였다. 금호문은 1926년에 금호문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창덕궁의 첫 번째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서쪽으로는 금호문을 중심으로 행랑이 늘어서 있고, 동쪽으로는 진선문(進善門)과 그 행랑, 북쪽으로는 내각(內各)과 옥당(玉堂)의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금호문을 중심으로 한 서쪽 행랑은 궁궐 외부와 경계를 이루며 의장고(儀仗庫), 무비사(武備司), 수문장청, 위장소(衛將所), 남소(南所), 훈국군파수직소(訓局軍把守直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장고는 의식에 쓰이는 물건이나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이며, 무비사는 궐내 순찰을 담당한다.

위장소와 남소 군사를 지휘하여 궁내를 순시하거나 조정에서 연회나 경축 행사가 있을 때 그 주위에 정렬하는 오위장이 숙직하는 곳이며,

훈국군파수직소는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숙직하는 곳이다. 이렇듯 궁궐의 첫 번째 마당에서 외부와 접한 행랑은 주로 궁궐의 호위 임무를 맡은 장수와 군사가 머물렀으며,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는 완충 공간으로서 기능하였다.

진선문과 연결된 동쪽 행랑에는 결속색(結束色), 정색(政色), 전설사(典設司)가 마당 쪽으로 들어서 있었다.

결속색은 임금이 행차할 때 주변을 경호하여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막으며, 정색은 무관, 군사, 잡직을 임명하는 일 등을 담당한다.

전설사는 나라의 제사 때 필요한 장막을 공급하는 일 등을 맡았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돈화문 밖 월대에서 시작된 어도가 돈화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뻗다가 오른쪽으로 꺾여 궁궐의 두 번째 문인 진선문을 향해 나 있다.

 

           ▲ 돈화문을 들어서면 마딩 좌측에 자리잡고 서 있는 천연기념물 제472호인 회화나무

 

마당 가장자리에는 괴목이라 불리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고, 이 앞을 지나면 궁궐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명당수를 가로지르는 금천교가 있어 진선문으로 이어진다. 금천은 풍수적인 의미로 궁궐의 배산임수를 이루며, 주술적으로는 나쁜 기운이 이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궁궐을 보호한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금천교의 네 모서리에 산예(山猊)라 하여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들이 조각된 것도 금천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돈화문 주면 마당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돈화문과 금호문, 금천교 정도이다. 진선문과 그 행랑, 내각과 옥당의 행랑, 어도 등은 모두 1991년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호(1963년01월21일 지정)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12년(1412)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40년(1607)에 재건하여 광해군 원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완공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 5칸 가운데 3칸은 2짝씩 문짝을 달았지만 양쪽 끝칸은 모두 벽을 쳐서 실제로 3칸만 이용할 수 있다. 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이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이나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데, 그 이유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궁궐 정면에는 북악의 매봉이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는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인 종묘가 있어 창덕궁의 정문이 들어설 수 없었다. 또 정궁인 경복궁과 위치상 가까우며, 옛 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는 기법과도 관련이 있다.

돈화문은 화려하게 단청된 이층집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月臺,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돌로 쌓은 널찍한 대)위에 서 있다. 문 좌우로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장청(守門將廳)을 두었다 돈화문 월대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노둣돌이 두 개 놓여있고, 가마를 올려놓는 목마 두 개가 버티고 있었다. 계단을 밟고 월대에 오르면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가 돈화문까지 한가운데로 뻗어있다. 궁궐의 정문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까닭은 문이라는 기본적인 기능과 더불어 이곳이 궁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13년(1413) 문에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기사가 있다. 문에 종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정오와 인정 때에는 종을 울리고, 파루 때에는 북을 쳤다고 하는데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만, 모두 없어지고 지금 있는 문은 다시 세운 것이므로 실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 금천교(錦川橋)

 

금천교(禁川橋)는 태종11년(1411)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동궐도에 보면 옛날에는 금천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말라서 건천이 되었다.

돈화문에서 어도를 따라 가보면 서쪽으로 금호문이 있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꺾여서 창덕궁 내부로 향하게 되어 있다. 꺾인 길 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금천이라고 하는데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라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였는데, 이 다리가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창덕궁에서, 다른 궁궐을 통틀어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건조물로써 1411년(태종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이다.

 

 

 

금천교는 돌다리 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이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 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있다. 다리 밑에는 홍예를 두 틀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한편 금천교는 현재 진선문과 숙장문의 축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통해보면 일직선상의 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001년 현재 금천교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의 위치에서 일제 때 현재의 위치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길이가 12.9m, 폭이 12.5m 이다.

 

              ▲ 금천교와 진선문

 

♧ 진선문(進善門)

 

건립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9년(1409)년에 처음 진선문과 관련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창덕궁이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던 것을 1996년 복원을 착수, 1999년 완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선문에는 태종대와 영조대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선문은 남북축의 돈화문이나 인정문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어, 돈화문으로 들어와 북측으로 진행하다 동측으로 꺾어서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게 되며 다시 북측으로 꺾어서 인정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외행각의 동측 진선문에 대응하는 위치에는 숙장문이 세워져 있어 진선문과 함께 동서축을 이루고 있다. 진선문 북측 행각 끝에는 동으로 정청(政廳)을 연결시키고 남측 행각 끝에서는 동으로 내병조가 연결된다.

한편 진선문 현판 글씨는 1999년 복원 당시 서예가 정도준씨가 썼다.

 

              ▲ 진선문을 통해 바라본 '인정전 외행랑 뜰'과 숙장문

 

♧ ♧ 궐내각사(闕內各司)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라 불렀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 돈화문 앞 마당에서 바라본 궐내각사(사진 上)

                 구 선원전과 궐내각사의 경계를 아루는 금천(사진 中)

                 구 선원전과 궐내각사의 경계를 아루는 금천 위의 연결 통로(사진 下)

 

가운데를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弘文館, 玉堂),

 

 

정신 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奎章閣, 內閣),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內醫院, 藥房),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藝文館)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이 외에도 

 

검서청(檢書廳),

 

봉모당(奉謨堂),

 

책고(冊庫) 등의 건물들이 있으며 봉모당 앞 마당에는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향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 궐내각사 내 봉모당 앞 마당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향나무(사진 上)

                궐내각사 내 검서청 뒷편에서 바라본 금천 건너의 구 선원전(사진 下)

 

◎ 선원전(璿源殿) 일원

 

♧ 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

*보물 제817호(1985년1월8일 지정)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원래 춘의전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7년(1656)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모시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새 선원전을 후원 깊숙한 곳에 건립히여 제사기능을 옮기면서 선원전은 빈 곳이 되었고, 신 선원전에 옮겨 모셔진 어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부속 건물들은 2005년에 복원하였다.

 

 

              ▲ 선원전 우측의 내찰당(사진 左)

                 양지당(사진 右)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9칸의 몸채 앞 좌우로 진설청(陳設廳)내찰청(內察廳)을 덧붙였고, 재실인 양지당(養志堂)을 앞쪽에 설치해 제사의례에 사용했다.

선원전 영역 뒤편에 있는 의풍각(儀豊閣)은 일제강점기에 신축된 것으로 전하며 제사용 그릇과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 선원전 일원 건물 사이의 통로와 협문

 

◎ 자연을 그대로 따른 편안함 - 외전(外展)과 내전(內展)

한국의 아름다움, 그 참모습을 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조회뿐만 아니라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전각이다. 경복궁 근정전에 비해 소박한 규모이지만 정전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인정전의 용마루에 있는 오얏꽃 문양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장식으로, 1897년 이후부터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내부에 설치된 커튼과 샹들리에는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궁궐에 들여온 서양식 실내 장식이다.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업무를 보던 편전이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전각으로 주목받고 있다. 청기와로 지붕을 이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그런데도 광해군이 인정전과 선정전에 청기와를 이도록 지시하자, 사관이 사치한 궁궐을 조성하는 조치라며 비판하고 나섰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궁궐을 검소하게 꾸미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희정당대조전은 각각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 공간인 침전이다. 그렇지만 희정당은 침전보다는 편안한 업무 공간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전각의 이름도 '전'이 아니라 그 아래 서열인 '당'이다. 왕비가 늘 거처하는 대조전의 뒷마당을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꾸민 것은 왕비의 단조로운 궐내 생활을 위한 배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 외전(外展)

돈화문 주변 마당 동쪽에 나 있는 진선문으로 들어서면 궁궐의 두 번째 마당이 나온다. 이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도 부른다.

 

              ▲ 인정전 외행랑 뜰

 

마당의 서쪽 행랑은 첫 번째 마당 쪽으로 서향하고 있으며, 남쪽 행랑에는 내병조(內兵曺),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이 있으며, 동쪽 행랑에는 배설방(排設房)이 있다. 북쪽 행랑은 모두 인정전 마당을 향하고 있으며, 남쪽 행랑의 내병조 역시 남향하고 있어 진선문 쪽에서는 벽만 보인다.

호위청은 궁중의 호위를 맡아보는 군영으로 인조1년(1623)에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상서원은 새보, 발병부, 마패, 절부월 등 각종 증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배설방은 전설사에 소속된 관청으로 궐내에서 임금이 주관하는 행사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인 차일(遮日)과 휘장을 치는 일을 맡았다.

인정전 외행랑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마당은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이다. 첫 번째 마당에서 이어진 어도가 진선문을 지나 두 번째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절제 덕분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어도의 방향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 마당은 북쪽의 인정문을 통하여 궁궐의 으뜸 공간인 인정전 마당으로 이어지고, 또한 동쪽 숙장문을 통해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이어지는 전이의 공간이다.

 

 

이곳 두 번째 마당은 그 모양이 정형화된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진선문이 있는 서쪽 행랑은 길고, 숙장문이 있는 동쪽 행랑은 그보다 짧다. 이렇듯 건축 구조를 대칭적이고 반듯하게 세우는 일반적인 궁궐 건축과 달리 마당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룬 까닭은, 동쪽 숙장문 쪽 바로 뒤에 종묘에 이르는 산맥이 뻗어 있어, 이곳으로 더 넓힐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며, 따라서 종묘를 받치고 있는 산의 뿌리를 훼손하면서 궁궐을 짓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넓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사다리꼴 마당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세종1년(1419)에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이 인정문 밖 마당이 반듯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창덕궁 건설을 현장에서 지휘한 박자청을 하옥시킨 바 있다. 태종은 행랑을 다시 새우는 대신 담만 쌓게 하였는데, 그 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자청이 본래 의도한 대로 사다리꼴로 배치된 행랑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인정전 외행랑 뜰과 인정전 마당을 연결하는 인정문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임금이 세상을 뜬 후 엿샛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임금이 나와서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건물인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창덕궁에서는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진선문과 인정문 주변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1996년부터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은 사방이 모두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 복원된 행랑은 현재 기둥만 서 있고 빈 공간이나, 원래 이곳은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등 관청이 있던 곳이라 행랑에는 방과 마루로 채워져 있었다.

 

 

♧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국보 제225호(1985년1월8일 지정)

 

 

인정전은 태종5년(1405)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세워졌으나 몇 차례 화재가 일어나 다시 지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3년(1803)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 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는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조각, 채색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1908년 무렵에 내부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1418년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였다.

 

 

인정전의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라 하여 평평한 돌에 도드라지게 문양을 새겨 장식을 하였다. 답도에는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서 있으며 봉황이 조각되어 천상의 세계로 묘사되는데, 이는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암시한다.

인정전 내부의 바닥은 원래 진흙으로 구운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는 쪽마루가 깔려있다. 이는 인정전에 설치된 전기, 커튼, 유리창문 등과 더불어 구한말에 들어온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인정전 지붕 용마루에는 구한말부터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으로 쓰였던 오얏꽃 문양 다섯 개가 금동으로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데, 원래는 없던 것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정전 서쪽 행랑에는 향실(香室)과 내삼청(內三廳)이 있다.

향실은 궁중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던 곳이다. 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 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 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이다.

내삼청은 금군삼청(禁軍三廳)이라고도 하며,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삼청을 이른다.

북행랑에는 과거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관광청(觀光廳)이 있었다. 이곳에 관광청이 있는 것은 인정전 마당이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마당에서는 주로 문과의 전시(殿試)가 거행되었고, 무과의 전시는 후원에 있는 춘당대에서 시행되었다.

동행랑에는 악기고(樂器庫), 육선루(六仙樓), 서방색(書房色)이 있으나, 모두 동족을 향하고 있어 인정전 마당을 등지고 있다.

인정전과 인정전 마당(조정)은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외국 사신의 접견, 신하들의 조하(朝賀), 세자 책봉식, 왕실의 큰 잔치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인정전 마당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차일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마당에 미리 쇠고리를 묻어 두어 여기에 줄을 묶어 쉽게 차일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차일은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주로 인정전 월대 위에 설치하여 의례의 주관자인 임금과 왕실 가족이 햇볕과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 또 차일 밖의 공간과 구별하여 행사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다.

인정문을 통해 들어온 어도는 인정전 마당에서 삼도로 바뀌어 월대로 이어지며, 마당 나머지 부분은 모두 자연석으로 된 박석(薄石)을 깔았다. 삼도 옆으로는 정조가 재위 1년(1777)에 세운 품계석(品階石)이 두 줄로 세워져 있어 문신과 무신을 구분하며, 이곳이 위계와 권위를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인정전 마당의 박석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어 잔디밭이 되었다가, 최근에 화강암을 가공한 박석을 깔아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인정전의 마당을 이루는 건물 중 인정전과 인정문만 원래 있던 것으로, 1910년대에 일제가 주위 행랑과 함께 일본식을 가미하여 변형한 것을 1988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

 

'仁政'이란 '어진 정치'를 뜻한다.

태종 5년에 인정전과 같이 창건되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수하였고, 영조 20년(1744)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3월에 재건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전시장 출입문의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벽체와 바닥의 구성이 변형된 것이다. 또 인정문 좌우로 접속되는 월랑도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동궐도형'에서 인정문의 가로 방향 중심축에 맞춰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는 인정문의 내측 칸에 맞게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인정문의 월랑과 연결되는 인정전의 동행각, 서행각도 원래는 2칸 폭의 복랑인 것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3칸 폭으로 변형되었고 인정전 좌우로 연결된 회랑도 없던 것을 추가한 것이어서 전반적으로 변형된 현재의 모습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구조의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지붕 양식은 돈화문과 같으나 잡상의 수가 돈화문보다 적다. 정전의 대문으로는 조선시대의 궁궐이 모두 인정문과 같은 팔작지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정문의 편액(가로 200cm, 세로 80cm)은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 때의 명필인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의 월대 위에 서 있는 인정전(仁政殿)이 보인다.

 

 

♧ 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

*보물 814호(1985년01월08일 지정)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으로 쓰인 곳으로, 인정전 바로 동쪽에서 인정전과 나란히 남향하고 있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기도 하고,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선정전은 인조반정 때 불에 탄 뒤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옮겨 지은 전각으로, 지붕은 청색 유리기와를 덮었는데, 강화에서 육연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다른 건물에도 있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고, 조선 중기 건축 재료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을 '정전'이라 하고, 선정전처럼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을 편전(便殿)이라 하였다.

정전인 인정전에 비하여 선정전은 건물이나 마당의 규모가 매우 작다. 정면 3칸·측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볼 수 있다. 다만 지붕을 청기와로 덮어 다른 건물과 구분했을 따름이다.

 

 

              ▲ 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이어지는 전면의 복도각(사진 左)

                 인정전 뒤편에서 선정전으로 연결되는 복도각(사진 右)

 

선정전은 특이하게도 정면에 지붕, 기둥만 있고 벽체는 없는 복도가 붙어있어 인정전으로 이어진다. 선정전 앞에 돌출된 전면 복도는 정조 사후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인 것과 관련이 있다. 선정전은 순조 즉위년(1800년)에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선정전에도 혼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

순조 이후 선정전이 혼전으로 빈번하게 쓰이자, 편전의 기능을 잃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정전 바닥에는 지금은 마루가 깔려 있으나, 원래 방전(方專)이라 하여 네모난 벽돌이 깔려있었다. 선정전 바닥이 언제 마루로 변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기록이 없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

선전관청에 근무하는 선전관은 숙직을 하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임금이 긴급하게 군사 지휘관을 소집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하였다.

장방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내시를 일컫는 말로, 이들이 있던 곳도 장방이라고 하였다.

선전관청 남쪽으로 인정전 동쪽 행각에 붙어 남북으로 나란히 마당이 두 개 있다. 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우사(右史)와 당후(堂后)가 있으며 마당 중간에는 문서고(文書庫)가 있다.

우사와 당후는 임금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을 일컫는 말로, 사관이 머물던 곳이다. 사관은 임금 가까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남겼다. 사초는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위하여 비록 임금이라도 볼 수 없도록 금하였다. 우사와 당후에서는 임금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날마다 기록하여 사초를 쓰는 곳이었으므로, 계속 생산되는 사초를 보관하고자 옆에 문서고를 세웠다.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 육선루와 악기고, 대청(臺廳)이 사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은대와 상서성은 도승지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다.

육선루는 승정원의 다락이다.

육선루와 나란한 누마루에는 악기고가 있었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손쉽게 악기를 꺼내 쓸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곳에 보관한 것이다.

대청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의 옳고 그름을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이던 곳이었다.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오른쪽에는 장방, 궁방(弓房), 주원(廚院), 공상청(供上廳), 서리방(書吏房),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촉방(燈燭房), 사알방(司謁房), 소주방,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자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주원은 사옹원(司甕院)의 다른 이름으로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다.

궁방은 활과 화살촉,

등촉방은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내시부(內侍府)에 속한다.

사알방은 액정서에 소속된 정6품 잡직 관원으로 항상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사알(司謁)하는 곳이었다. 서리방은 궁궐 내 각 기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머물던 곳으로, 이들은 문서 처리, 기록, 연락 등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정청은 이조의 당상관 및 병조판서 등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사무를 보던 곳이다.

소주방은 임금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내반원은 환관들의 관청인 내시부의 다른 이름으로, 궐내 음식물 감독, 명령 전달, 궁문 수직,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궐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했던 이런 기관들이 임금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에 조밀하게 모인 까닭은 임금의 거처를 여러 겹의 마당과 건물과 에워싸기 위해서였다. 이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하는 동시에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이들의 역할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관청이 있는 전각이 모두 없어지고 빈 땅으로 남아 선정전이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현재 이곳에는 선정전만 원래대로 남아있고 선정전 앞의 정자각과 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홑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 ♧ 내전(內展)

선정전 동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임금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침전이 있는 곳으로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선정전 동쪽으로 맨 앞에는 임금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이 자리 잡고 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

 

 

              ▲ 희정당 안내도(사진 上)

                 희정당 외부 모습(사진 下)

 

 

♧ 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

*보물 815호(1985년01월08일)

 

 

 

              ▲ 희정당 전면(사진 上)

                 희정당과 대조전을 연결하는 복도각(사진 中)

                 희정당 후면(사진 下)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선정전과 더불어 임금의 집무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희정당은 선정전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으로, 선정전은 건물의 최고 위계를 나타내는 '전'(殿)인데, 희정당은 그 다음 위계인 '당'(堂)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희정당의 규모는 정면 11칸·측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 희정당 내부(사진 左)

                 희정당 후면의 복도(사진 右)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翼工) 양식을 썼다. 임금의 거처답게 거의 담 높이에 이르는 높은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어, 이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 행랑과 확실히 구별되었으며, 그리 넓지 않은 마당 한쪽에 하월지(荷月池)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고 등을 두어 밤에 마당을 밝힐 수 있게끔 하였다.

희정당 남쪽에는 숙종13년(1687)에 세워진 제정각(齊政閣)이 있었다. 여기에 천체를 관측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설치하고 임금이 천체를 관찰하여 하늘의 도를 본받기에 힘썼다고 한다.

동궐도에서 희정당은 정면 5칸 규모의 건물이 높은 돌기둥 위에 서 있고, 기단 서쪽 한 곳에는 아궁이가 보이며, 건물 동쪽에는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현재의 전각은 정면 11칸 중 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로 툇간을 설치하여 통로(복도)로 썼다. 정면에서 가운데 3칸의 주칸은 좌우의 주칸보다 넓고 우물마루를 깔아 전체를 튼 통칸으로 서양식 응접실로 만들었고, 서쪽 3칸도 통칸으로 만들어 회의실로 꾸몄으며,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고, 동서쪽 양 옆칸 뒤쪽에 골방과 목욕탕 등을 설치하여 용도에 맞게 썼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도, 해금강도 등의 벽화가 걸려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 외부에서 바라본 희정당과 성정각 전경

 

어차고(御車庫)

인정문에서 내의원 쪽으로 올라가는 도중 오른쪽에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하던 어연과 주정소(국왕의 능향 등 행차 때에 잠시 쉬기 위한 용도의 구조물), 외바퀴의 초헌, 마차와 승용차들이 전시된 건물이 있어 승용차의 변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어 흥미롭다.

여기는 본래 내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던 숙장문의 안쪽이며 동시에 편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동궐도'에서는 빈청이라 하였고 <궁궐지>에서는 비궁당이라 하였다. 대신과 비변사(국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당상관이 국왕을 만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며 때로는 외국의 사신이 임금을 접견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초익공 양식의 건물로서 현재는 내부의 벽체를 철거하여 진열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좌우쪽의 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이 부분의 지붕이 맞배지붕으로 대청부의 지붕에 직각으로 구성됨으로써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결합된 일종의 공자 형태의 독특한 지붕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실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1910년부터는 이곳을 궁내의 차고 사용하였다고 한다.

 

 

♧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

 

 

 

 

 

궁 밖에서 대조전까지 가려면 돈화문과 진선문, 숙장문을 지나 적어도 5개 이상의 문을 더 통과해야만 하였다.

희정당에서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宣平門)까지는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선평문에서 대조전 월대까지는 어도가 깔려있어 두 건물 사이를 오가는 데 배려하고 있다.

 

대조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었다. 대조전은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좋은 날을 골라 임금과 왕비가 동침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인조과 효종, 순종을 비롯하여 성종이 승하하였으며, 순조의 세자로 나중에 추존된 익종이 태어난 바 있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인 36칸으로 줄었다.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은 통칸으로 하여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ㆍ서쪽으로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칸으로 하여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거실의 앞 퇴칸은 월대로 출입하도록 하였고, 뒤 퇴칸은 후원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침실 측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종들의 처소로 삼았다.

 

 

 

 

 

              ▲ 대조전 거실의 큰 의자(사진 左)

                 대조전 침실의 침대(사진 右)

 

* 대조전의 침대

-규격 : 길이 224cm x 폭 154cm x 높이 113.5cm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사용했던 것이다.

1988년경 일부 수리가 한차례 있었으나 매트리스 중앙부가 함몰되고 덮개천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어 보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보수하기로 결정하고, (주)에이스침대의 기술과 자본으로 2008년 10월부터 2009년 6월까지 4차례 자문회의를 통해 수리,복원하였다.

 

현재 거실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큰 의자를 두었으며, 침실과 작은 방은 온돌로 꾸몄다.

대조전에는 희정당보다 훨씬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다. 대조전의 높고 넓은 월대는 삼면이 모두 화려한 휘장문이 있는 녹색 판장(板牆, 나무판으로 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왕비의 활동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가렸다. 대조전의 뒷마당은 넓고 화려하다. 여기에 징광루와 집상전이 있고, 대석 위에 올려 진 세 개의 괴석과 석분에 심은 작은 소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경사지에는 큰 돌을 다듬어 계단식 석축을 쌓고 꽃나무를 심는 화계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갇혀 지내는 왕비의 단조로운 생활을 배려하였다.

 

 

 

              ▲ 대조전 뒤 정원에서 바라본 부속건물(사진 上)

                 대조전 뒤편의 계단식 정원(사진 下)

 

 

              ▲ 대조전 뒤편 담장과 출입문, 그리고 굴뚝

 

대조전 뒤쪽으로는 이층집인 징광루(澄光)와 경훈각(景薰閣), 그 바로 오른쪽에는 대비의 처소인 집상전(集祥殿)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광해군 15년(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모두 불탄 뒤 인조 25년(1647년)에 옛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로 위쪽 건물은 징광루라고 하였다. 이 건물은 높은 월대 위에 올려 진 이층집으로 청기와로 지붕을 덮어 모습이 화려하였다. 경훈각은 1층이므로 온돌방이 있으나, 징광루는 2층이어서 마루로 되어 있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온돌로 따듯한 경훈각을 주로 이용하고 봄과 여름에는 시원한 누마루가 있는 징광루를 썼다.

순조33년(1833)에 까닭 모를 화재로 희정당과 대조전을 비롯하여 징광루, 양심합(養心閤) 등이 불타 재건된 바 있다. 현재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화재로 불타 1920년에 새로 지었다. 불이 나고 나흘 뒤 이왕직에서는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새 궁전은 "조선식으로 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결정하고, 건물을 다시 짓되 경복궁에 있는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강녕전은 대조전으로, 교태전은 대조전으로, 건순각은 흥복헌으로, 만경전은 경훈각으로 옮겨다 지었다. 당시 화재로 주요 전각 뿐 아니라 궁중의 가구와 집기와 오래된 유물도 모두 소실되었다. 원래 대조전은 지붕이 일자형식이 아닌 솟을지붕 형식이었으며 뒤에 집상전도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집상전 자리에 현 대조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화계 뒤로 후원으로 가는 문이 있다. 이 문 뒤에는 잔디밭이 있고 그 한가운데 덕수궁에서 옮겨온 가정당(嘉靖堂)이 홀로 외로이 서있다.

 

경훈각(景薰閣)

 

대조전 서북쪽에 위치한 경훈각은 현재는 단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이었으며 위층을 징광루라고 하고 아래층을 경훈각이라 하였다. 그 뒤로 인조반정 때에 소실되고 인조 25년에 중건되었다가 순조 33년에 소실되고 또 다시 이듬해에 중건된다. 순조 때 화재가 발생하기 전인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에서는 경훈각이 2층에 청색 기와로 그려져 있으므로 인조 연간의 중건 때에 청기와로 지붕을 이은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에 창덕궁의 화재로 불타 버린 경훈각도 대조전과 함께 1920년에 중건된다. 현재의 경훈각은 바로 이때에 경복궁의 자경전 북쪽에 있던 만경전을 철거하여 단층으로 건립된 것이다.

본래 경훈각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건물이며 초익공계의 물익공 양식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정면 동쪽에서 두 번째 칸에서 복도각 4칸으로 대조전 서쪽 뒷면과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앞뒷면 툇간은 복도와 부속실로 이용되고 정면 9칸에 측면 2칸을 동서로 3칸씩 나누어 가운데 칸이 대청으로 되었다. 나머지는 동 온돌방과 서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의 동쪽 벽에는 '조일선관도'가 서쪽 벽에는 '삼선관파도'가 그러져 있는데 대조전과 희정당이 그림과 같이 1920년에 제작된 것이다.

 

              ▲ 대조전 우측으로 붙어 있는 건물인 흥복헌

 

 

              ▲ 흥복원 뒤쪽으로 붙어 있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청향각(淸香閣)

 

함원전(含元殿)

대조전의 뒤편 동쪽에 있는 건물인 함원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에 접속되었던 건순각과 같은 모습이지만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은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의 건물과는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본래는 함원정 대신에 그 동쪽으로 별도의 건물인 집상전이 있었는데, 인조 25년(1647)에 집상당을 건립하였고 그 뒤 현종 8년(1667)에 모후인 인선대비를 위하여 경희궁의 집희전을 옮겨 짓고 집상전이라 하였다. 궁궐에서는 대비전을 중궁전의 동북쪽에 세우는 규범에 따른 것이다. '동궐도'에선는 집상전도 대조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빈 터만 표현된 것과 <궁궐지>의 기록을 참조하면 순조 33년의 화재로 소실된 뒤로는 중건되지 않았으며, 1920년의 중건 때에는 집상전 대신에 함원전을 세운 것이다.

함원전은 2칸 폭으로 6칸이 북쪽으로 뻗어나가고 그 북쪽 칸에서 동쪽으로 2칸 폭에 2칸 길이로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미고 누마루의 3면에는 쪽마루와 아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양식은 운공을 사용한 이익공 형식의 물익공 구조로서 대조전의 이익공 양식과 차이가 있다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을 두르고 누마루 부분만은 한벌대의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누마루를 구성하였다.

건물의 계단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소씩 설치하여 앞뒤의 툇마루로 올라서도록 하였으며 평면 구성상의 정면부는 동쪽 면이 되어 동북쪽의 화계와 가정당 뜰로 통하는 천장문이 보이도록 하였다.

 

가정당(嘉靖堂)

대조전 뒤뜰 화계 위의 담장에는 전돌로 축조된 추양문과 천장문이 있고 그 북쪽의 넓적한 뜰에 가정당이 있다.

이 건물은 '동궐도'와 <궁궐지> 그리고 '동궐도형'에도 표현되지 않은 건물이며 조선시대 건물을 일제강점기 초에 옮겨 세운 것으로 보고 있으나 덕수궁에 있던 가정당을 이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각기둥을 사용한 5량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굴도리에 소로수장을 한 간소한 건물이지만 외관은 아주 단정하여 궁궐의 별당으로서 손색이 없는 건물로 정면 5칸 가운데 양 측칸은 통칸으로 하여 온돌방을 두고 중앙의 3칸은 전면에 퇴를 둔 대청으로 구성하였다. 굴뚝은 건물 뒤쪽의 담장 부근에 배치되어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의 주위는 수목과 경관이 수려하고 궁궐 내전의 뒤쪽에 높직한 대지에 자리하면서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아 한적하고 밝은 분위기가 별당지로서는 건물과 함께 일품이다.

 

 

♧ 성정각과 관물헌 일대

내의원(內醫院) 과 성정각(誠正閣)

 

희정당 동남쪽에 남향으로 자리하여 문간채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현재 내의원으로 소개되고 있는 건물은 성정각으로 원래 동궁이 학문을 배우던 곳이다. 올바른 것을 공경한다는 뜻의 건물 이름에서도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던 곳으로 인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동궐도'에서는 "약방"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 "내국"이라고도 하였다. 내의원은 고종 32년(1895)에 폐지되고 전의사로 개칭되었으므로 그 뒤에 성정각을 내의원 용도로 사용한 것 같다. 1917년의 화재로 임시 침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 1920년대의 중건 때에 내의원으로 바뀐 것 같다. 마당에는 약재를 다루던 돌절구가 남아 있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 그려진 성정각의 그림과 현존하는 건물과는 모습이 부합된다. 그런데 정조 이후의 중수 기록이 없으며, 성정각 현판이 정조 어필 이라는 기록과 성정각 동쪽의 중희당을 정조 6년에 세우는 등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건물은 정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은 정면 6칸에 측면 2칸이며 동쪽 칸에는 반 칸이 돌출되어 뒤의 2칸과 같이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누마루 아랫부분은 개방되어 있다.

누마루 서쪽에 반 칸의 마루방이 있고 그 옆 2칸이 방, 다음이 대청, 다음 앞뒤로 방 2칸이 있고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반 칸 마루방 앞퇴에 설치되어 있다.

'동궐도'에서는 성정각 앞으로 널찍한 월대가 있고 누마루 밑에도 벽과 창문이 설치되고 누마루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담장이 세워지고 이 담장 중앙부에 일각 대문인 보춘문이 있다. 북쪽으로는 누마루의 한 칸 옆에서 북쪽으로 판장이 설치되는 등 마당이 세분되는 상태로 보아 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의 신분과 직책에 따라 통로를 구분하여 동궁이 한적하게 면학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의 판장들은 필요에 따라 이동시킬 수 있는 조립식 판장으로 그려진 특색이 있다.

성정각의 문간채는 5칸이 남아 있으며 서에서 두 번째 칸이 영현문이며 문간채 동쪽에 담장과 연결되어 있는 행각은 '동궐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동편에는 희우루라는 2층 누각이 있으며 1층은 현재 개방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닫힌 공간이었다.

 

 

 

              ▲ 성정각 뒤편의 건물인 집희(緝熙)(사진 上)

                 성정각 앞에서 바라본 인정전 일대(사진 中)

                 성정각 외부 모습(사진 下)

 

♧ 칠분서(七分序)

육각정인 삼삼와에서 북쪽으로 한 칸 폭의 6칸 건물로서 초익공 구조에 분합문을 설치하고 난간을 두른 복도각인데 건물 이름의 의미는 잘 알 수 없으며 현재는 없는 건물인 중희당과 삼삼와를 연결하는 건물이다.

승화루 일곽의 건립 연대도 불명확하지만 <궁궐지>에 승화루를 가리키는 소주합루와 의신각 그리고 삼삼와와 칠분서가 기록되어 있다. 중희당이 정조 6년(1782)에 건립되었고 편액이 정조어필이었으며, 순조 어제 가운데 의신각 시가 있다는 점과 중희당의 북행각인 유덕당이 순조 27년(1827)에 중수되었고, 유덕당 북쪽의 자선재의 편액이 순조 어필이라 한 점, 또 '동궐도'에 중희당과 승화루 일곽이 연결된 상태로 그려진 점을 종합해 보면 중희당 일각이 정조 6년에 건립되고 순조 27년에 중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승화루 일곽의 건물은 정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관람이 허용되지 않은 지역이라 외부에서 바라본 칠분서, 삼삼와, 송화루 영역

 

 

♧ 삼삼와(三三窩)

건물 이름이 독특하게 삼삼와로 부르는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부용정 남쪽에 있던 개유와는 중국 서적을 수장하였던 건물이며, 그 의미는 '모든 것이 있는 움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삼삼완는 '여섯 모 움집'이라는 뜻이며 승화루의 의신각과 함께 귀한 서적을 보관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육각정인 삼사와는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기둥 하부로 2단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초석과 고막이를 돌려놓고 그 위의 아래층 벽에는 전돌로 귀갑문 장식을 하였다.

바깥쪽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르고 상중하의 삼단으로 구획된 살 난간을 두르고 이 난간이 칠분서의 난간과 계단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육각형의 기둥을 사용한 초익공 겹처마로 지붕의 정상부에는 나지막한 절병통을 설치하고 있다. 현재는 위층의 창호가 세살 분합문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는 아자살 분합문이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이것도 후대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