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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탐방 시리즈(3) 덕수궁(德壽宮)

왕마구리 2010. 11. 24. 13:12

◀ 전통과 근대가 만난 덕수궁(德壽宮)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공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개회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하여 몹시 혼란한 정국 속에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의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릉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에 이르렀다.

드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헤 왕위에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은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관헌은 고종이 러시아 건축가를 불러 새롭게 지은 연회와 휴식의 공간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고 커피 애호가가 된 고종은 정관헌을 자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정관헌이 서양 건축에 전통 양식을 섞어 지은 전각이라면, 석조전은 서양식으로만 지은 건물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손도손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선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방문일자 】2010년 11월 21일(일)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09:00~21:00(매주 월요일 휴궁)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청소년(7세~18세) \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시청역(1호선) 2번출구, (2호선) 12번출구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58

【 덕수궁 탐방코스 】

대한문-금천교-중화문-중화전-석어당+즉조당 일원-함녕전+덕홍전 일원-석조전-(돌담길 산책로)-정관헌-궐내각사터/지당(연못)-대한문

 

 

【 덕수궁 소개 】

*사적 제124호(1963년1월21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제작시기:조선 선조, 고종

- 덕수궁의 역사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서, 면적은 63,069㎡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1906년 대안문(大安門) 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 즉위 후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611년~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 장(懿敬世子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수빈 한씨가 출궁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월산대군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성종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행궁 시기

월산대군이 사망한 지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의주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음력 10월 한성으로 돌아와서 승하할때까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지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시대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으므로,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광해군은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음력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배알하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음력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인조 이후

그 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 : 60년이 3번, 곧 180년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에 불이 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후 중건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정치 상황이나 재정 여건상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맞지 않은 축소가 있었다.

1907년 12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수”(德壽)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 덕수궁 전각의 연혁

고종 순종 시대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 궁은 다시 궁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해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것은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 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에 화재가 났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仁化門 : 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과 관명전도 완공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그러나 1904년 2월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실수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도 화재가 났으며, 화재를 면한 전각으로는 준명당·수옥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이 있었다. 고종은 그 날로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비서승(秘書丞)이며 풍수(風水)의 대가인 유시만(柳時滿)이 “국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대안’을 ‘대한’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純宗)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태황제궁(太皇帝宮)을 덕수궁이라 함으로써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순종은 그해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移御)하였다가 11월 13일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태황제는 양위 후 일시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환어하여 1919년 1월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태황제인 고종이 승하하게 되자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수명이 끝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빈 궁궐로 남아 있다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되었다.

 

 

독립 이후

한국전쟁 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은 그 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四塊石)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문인 대한문도 여러 차례 뒤쪽으로 밀려들어가게 되어 성기(盛期)에 즐비하던 전각들은 상당수 철거된 반면, 세종대왕의 동상 등 새로운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 덕수궁의 문화재들 】

◎ 황제의 자존심을 보인 - 외전(外展)

근대의 문을 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덕수궁(당시 경운궁)을 다시 세워 일으키며 대한제국의 위상이 깃들도록 정성을 쏟았다.

정전인 중화전 천장의 용 문양이나 기단부 계단 중앙의 답도에 새긴 용 문양, 황색으로 칠한 창호 등이 그 예이다. 중화전도 궁궐의 위용을 갖추어 중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큰 불이 난 뒤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중화전 마당을 감싸도록 중화전 둘레에 지은 행각들도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약간의 형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경희궁의 흥화문이 그렇듯이 모든 궁궐의 정문은 남쪽에, 그리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은 '화'자를 이름에 넣었다. 덕수궁의 본래 정문인 '인화문'도 정전의 정문인 중화문 앞 남쪽에 두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환구단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측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원활한 기능 수행을 위해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본래 이름은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화전 건립 후 편전으로 쓰인 즉조당석어당은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으로,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을 때부터 사용되었다. 석어당은 덕수궁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층 전각이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하였다. 다른 전각과 달리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아래층에는 고종 어필의 현판이 걸려 있다.

 

♧ ♧ 덕수궁 중화전(德壽宮의 中和殿) 일원

♧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 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시켜 놓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 덕수궁 금천교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 대한문에서 중화문가는 길의 단풍

 

♧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의 中和殿 및 中和門)

*보물 제819호(1985년01월0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 덕수궁 중화전(德壽宮 中和殿)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임시 정전으로 사용되던 즉조당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원래 중층이었던 것을 단층의 규모로 줄여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1906년 재건 당시 중화문과 행각을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의 규모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 부재의 형태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것은 조선 후기 수법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 중화전 내의 어좌

▲ 중화전 천장 중앙의 용무늬 조각

  

▲ 중화전 천장(左), 창호(中) 그리고 귀공포(右)

 

안쪽에는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임금님이 앉는 자리)를 더욱 위엄있게 꾸미기 위해 화려한 닫집을 달아 놓았다.

중화전과 그 앞마당인 조정은 국가의례를 치루기 위한 상징공간이고, 2단으로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과 삼도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 격식을 따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중화전 월대 위에 설치된 '정'과 '드므'

 

((참고))

- 정(鼎)

향로처럼 생긴 세 발 달린 솥인데, 이는 예로부터 왕권(王權)을 상징하는 징표이다.
- 드므

'넓적하게 생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 말이다. 두무(豆撫), 길상항(吉祥缸)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문해(門海)'라고 부른다.

궁궐의 건물들이 대부분 목재로 되어 화재가 잦았으므로 이를 예방하고자 놓아 둔 벽사시설로서 설치되었다고 한다. 추운 날씨에는 담아 둔 물이 얼지 않도록 저어 주었으며, 드므 밑에 불을 지펴 어는 것을 방지하였다 전한다.

궁궐의 주요 건물 월대와 그 마당에 설치하고, 물을 담아 두는데 이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람이 담겨 있기도 하다.

 

▷ 덕수궁 중화문(德壽宮 中和門)

 

 

▲ 덕수궁 중화문

 

▲ 중화문의 어도와 석조 장식들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 양식은 중화전과 같이 조선 후기 수법을 가진 다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원래 좌우로 복도건물(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동쪽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참고)) 인화문(仁化門)

인화문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는데 대안문(大安門)(현재의 대한문)주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후 1905년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 자리에 건극문(建極門)이 새로 세워졌었다. 대안문의 현판은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극문도 없는 상황이다.

 

▲ 즉조당 일원 배치도

 

♧ ♧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祚堂) 일원

♧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祚堂)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으로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1623년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즉조당과 석어당만은 보존하여 경원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 즉조당 뒤편의 굴뚝

 

♧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

 

▲ 중화전 월대 위에서 바라본 석어당 정면 모습

▲ 즉조당 앞에서 바라본 석어당 측면 모습

▲ 덕홍전 뒤편 유현문 안에서 바라본 석어당 측면 모습

▲ 석어당 후면의 툇마루

 

석어당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현존하는 유일한 목조 2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었다.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로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 석어당 1층 방 내부 모습과 아궁이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주며 소박한 산림집 같다.

 

♧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明堂)

 

 

 

 

 

 

 

 

준명당은 1904년의 화재로 같은 해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등 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쓰였으며, 1916년에는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도 사용되었다.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현재 보수공사(2010년 5월24일~12월19일) 중이다.

 

  

▲ 준명당과 즉조전을 연결하는 회랑(左), 우물천장(中)과 내부 전경(右) 

▲ 준명당에서 고종 황제와 원로 신료들

 

◎ 왕비의 침전이 없는 - 내전(內展)

그래도 지커낸 궁궐!!!

선조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기에 부득이 격식을 갖추지 못했지만, 고종 때에는 궁궐의 영역도 한껏 넓어지고 규모와 격식도 제대로 갖추었다. 한일병합 이후 덕수궁의 전각과 부지를 조금씩 허물어내던 일제는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을 본격적으로 해체해 나갔다.

1931년에는 궁궐을 아예 상가 부지로 매각하려다가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한발 물러나 외전과 내전의 주요 전각을 남긴 상태로 공원화하여 1933년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오늘날 덕수궁에 남긴 전각들은 그렇게 지켜졌다.

내전의 주요 전각인 함년전은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곳도 함녕전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왕비의 침전이 따로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 고종이 다시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비의 침전을 대신한 것은 명성황후의 신주와 위패를 모신 경효전이었다. 경호전은 1904년 대화재 때 소실되고, 그 자리에는 덕홍전이 세워졌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지은 전각으로,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덕홍전에서 정관헌으로 이어지는 꽃담과 꽃담에 낸 무지개 모양의 유헌문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던 두 전각의 분위기와 화사하게 어울린다.

 

 

 

▲ 덕홍전의 꽃담과 유현문

▲ 함녕전과 덕홍전의 배치도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

*보물 제820호(1985년01월08일 지정)

▲ 함녕전 전면 모습

▲ 함녕전 후면 모습

▲ 함녕전 정문을 통해 바라본 전면 모습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어진 목조 건물로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위쪽에 여러 가지 조각을 장식해 놓고 있다. 더욱이 지붕 모서리 부분에 조각들(잡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간결하게 장식한 익공 양식이며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몄다. 건물의 천장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고, 네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다.

 

▲ 함녕전 지붕 모서리 부분의 잡상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 툇칸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 건물이며,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과 장식적인 굴뚝을 설치했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함녕전 동쪽의 행각 형태의 연결 통로와 내부 모습

▲ 함녕전 뒤편의 굴뚝

 

▲ 함녕전 동쪽 담장

 

(( 참고 )) 광명문(光明門)

광명문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문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自擊漏)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을 중종 29년(1536년)에 보완한 것이다. 흥천사 범종과 신기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 덕홍전 외부에서 바라본 전경

 

♧ 덕수궁 덕홍전(德壽宮 德弘殿)

 

 

덕홍전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고위 관료나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지붕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 덕홍전 내부 전경과 내부 천정의 우물반자와 등기구

 

 

1911년에 건립된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의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현재 덕홍전 행각지(중배설청, 이안청) 발굴조사(2010년 10월20일~12월19일)로 관람이 불가능하다.

 

◎ 고종이 사랑한 - 석조전과 정관헌

덕수궁의 서양 건축!!!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 건물이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정관헌은 함녕전 뒤편에 궁궐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하여 지은 전각으로, 고종은 이곳을 외국 외교관들과 연회를 열고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 애용하였다.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정관헌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생각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이 짐작되는 곳이다.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광명문은 본래 함녕문의 정문이었으나 지금은 함녕전과 멀리 떨어진 석조전 맞은 편 숲에 따로 서 있다. 석조전 서편을 미술관으로 개관할 때 흉천사의 종과 자격루를 전시하려고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태조의 명으로 만든 흉천사 종은 조선시대 범종의 표준이 되었고, 자격루와 신기전기화차도 조선시대 앞선 과학 기술을 알려주는 문화유산이다.

 

▲ 석조전 일원 배치도

 

덕수궁 석조전(德壽宮 石造殿)

▲ 현재 보수공사중인 석조전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7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 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같은 기간에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경복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석조전 서관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는데 그 앞에 서양식 분수공원도 조성되었다. 서관은 의석조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이 건물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석조전과 서관을 연결하는 통로

 

▲ 정관헌 배치도

▲ 정관헌과 함녕전 사이의 통로

 

덕수궁 정관헌(德壽宮 靜觀軒)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은 1900년경에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이 설계하여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 공간을 감싸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로 동,남,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한 형태로 건립되었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의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을 새겨, 한식과 양식의 절충된 이국적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예전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던 문이 있었다고 한다.

 

◎ 기타 건물들

정광헌 너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옆에는 예전에 황실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양이재가 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사무실로 사용 하고 있다.

평성문 밖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중명전(重明殿)이 있는데,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 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 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 궐내각사터 배치도

 

♧ 궐내각사터(闕內各司址)와 환구단(園丘壇)

덕수궁 대한문 북쪽, 함녕전 동쪽 숲 일대와 서울광장 일부는 궁궐안 관청들이 있던 궐내각사 터이다. 국가의 군사권을 관장하던 원수부와 황실의 업무를 보던 궁내부가 있었다. 이밖에도 시강원, 태의원, 전화국 등 여러 관청이 있었으나 태평로 개설 때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어 절반 이상의 전각들이 사라졌다. 담장 안의 나머지 전각들은 1933년 공원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서울광장 너머에 세운 환구단은 1914년에 찰도호텔을 지을 때 파괴되었으나,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와 돌북이 남아 대한제국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 궐내각사터 주변의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