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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탐방 시리즈(4) 종묘(宗廟)

왕마구리 2010. 11. 24. 16:51

◀ 신성한 왕실의 사당! 종묘(宗廟)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 궁궐을 세움과 동시에 조상신에게 나라의 안녕을 비는 사당인 종묘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마련했다. 조상신과 자연신에게 정중히 제사 지내는 것은 왕실이 통치의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받은 신성한 존재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조선 왕조는 종묘와 사직을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하였으며, 이를 보호하고 유지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종묘에서 모시는 제사를 '종묘제례',

종묘제례 때 연주하는 음악과 춤을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종묘제례는 국가 최고의 제례로 왕이 친히 받드는 제사였으며 유교적 절차에 따라 매우 엄격하게 치러졌다. 또한 제례 절차에 따라 음악과 춤이 어우러져 장엄함을 더하였다. 오늘날 종묘제례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되고 있다.

조선 왕조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왕실의 조상들을 위한 공간과 제사,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음악과 춤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옛 왕조의 왕과 왕비를 위해 제례를 올리고, 그것도 600년이 넘게 전통을 이어온 사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인류가 소중히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선정되었다.

종묘에 모셔진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는 모두 83위로, 정전과 영녕전에 나누어 모셨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셔야 할 신주가 늘어나면서 새로이 지은 전각이다. 두 전각이 매우 긴 一자형의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 지을 때 그 규모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모셔야 하는 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신설을 증축해 나갔기 때문이다.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을 포함하여 제례를 지낼 때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만으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전각 수가 많지 않고 구성과 배치가 단순하다. 신실을 꾸민 것 이외에는 전각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다. 이는 조상신의 영혼이 깃든 공간인 종묘의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종묘 공간에 담긴 의미와 이를 수백 년간 엄격하게 지켜온 선조들의 뜻을 생각하면, 궁궐을 돌아볼 때와는 다른 숙연함이 전해진다.

 

【 방문일자 】2010년 11월 21일(일)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시간제 관람(매주 화요일 휴관)

                   해설사의 인솔하에 관람만 가능(09:20~16:20, 매시 20분 정문 출발)

                   일반관람 : 매주 토요일(3월~9월:9시~18시/10월~2월:9시~17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청소년(7세~18세) \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종로3가역(1호선) 11번출구, (3호선) 8번출구, (5호선) 8번출구 도보 5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훈정동 1-2)

【 종묘 탐방코스 】외대문-향대청 일원-재궁 일원-전사청 일원-정전-영녕전-정전 악궁청-영녕전 악궁청-향어로-외대문

 

 

【 종묘 소개 】

*사적 제125호(1963년1월18알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1995년 지정)

*면적:194,331㎡

정전. 중앙에 나 있는 검은 길은 신로(神路)이다. 종묘(宗廟)는 조선 왕조의 역대 제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며,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종묘의 건물은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자 바로 짓기 시작하였는데 1394년 10월 태조가 서울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1395년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건물들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그리고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두었다.

종묘의 제사일은 4계절의 첫 달 상순, 정초·단오·한식·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일로 정하였으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제하여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분향(焚香)·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한다. 그러나 국상일의 경우에는 이를 피한다.

종묘향사는 국가적 행사인 만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의복·제기(祭器)의 규격, 제물(祭物)의 종류·수 등은 엄격하게 규정하고 준수한다. 그리고 문묘와 달리 고려의 예를 따라 역대 공신을 위한 공신배향(功臣配享)이 있다.

종묘의 건축물들과 600여 년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제 제1호)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 종묘의 역사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인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나는 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 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라는 고대 중국의 도성 계획 원칙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그 밖에 따로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齎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 10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여 종묘가 주변 언덕에 파묻혀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한 다음 종묘의 건물 형식을 고쳤다. 본래 종묘 건물은 'ㅡ'자로 길게 생겼는데, 지금은 감실에 신위를 모신 몸채 건물과 그 양큰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ㆍ서 월랑으로 구성되어, 가운데가 긴 ㄷ자형 건물이다. 태종 이래로 이 건축 형식이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되었다.

 

  

▲ 종묘의 정전

 

현재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별묘인데, 세종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러나 세종 원년(1419년)에 정종이 승하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종묘 정전 5칸에는 태조와 태조의 4대 조상을 합쳐 다섯 신위로 모두 차 있어서, 이제 이 다섯 신위에 더해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종묘에는 다섯 신위만 모시도록 예법에 규정되어 있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중국 송나라의 예를 따라 1421년 10월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別廟)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실 것을 결정한다. 이 별묘가 지금의 영녕전이다.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의 영녕전은 종묘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셨다고 하여 '조묘'라고도 한다.

 

▲ 종묘의 영녕전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칸, 양 옆 익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원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앞서 말한 대로 본래 종묘 정전에 다섯 신위를 모시기로 하였던 것인데, 그 뒤 다섯 신위 외에 다른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라는 제도가 생겨, 종묘 정전에 모시는 신위의 수는 다섯 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모셔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나자 칸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그 결과 종묘 정전 건물은 증축된다. 조선 초기의 왕 가운데 불천위로 결정된 왕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이다.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지다가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의 규모로 재건한다.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 뒤 현종 8년(1667년)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년)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묘를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는 종묘에 모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 경우 이전 장소로는 당시 쓰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주로 이용하였다.

【 종묘의 문화재들 】

◎ 절제와 반복이 이루어낸 신성함 - 종묘(宗廟)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다!!!

종묘는 조선왕실의 사당으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공간과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역대 왕과 왕비 49분은 정전의 19실에, 조천되신 왕과 왕비 34분은 영녕전의 16실에 나누어 모시고 있다.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임금님과 세자가 제사를 준비하는 재궁, 제수를 마련하는 전사청, 제례악과 무를 준비하는 악공청 등이 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정전이다.

좌우 길이가 총 101m로 우리나라의 단일 목조건물로서 가장 긴 건물이며 그 내부는 하나의 건물 안에 신실을 나누어 신주를 모시는 동당이실(同堂異室)로 되어 있다.

신실의 실괴 실은 발을 드리워 분리하고 각 감실의 북쪽에는 신주를 모신 신주장을 두고 좌우로 보장과 시책장을 두었으며 그 앞에는 신탑을 설치했다. 감실 사방에는 황색 내면장을 내려 생전의 침전과 같이 꾸몄고 감실의 전면에는 황색 외면장을 길게 쳤다.

신실에 모셔진 신주는 깊은 산에서 곧게 자란 밤나누를 구하여 윗면은 둥글고 아랫면이 네모난 직육면체로 만들고 혼이 깃들어 의지하시라는 의미로 가운데 상하좌우로 '규(竅)'라는 구멍을 내었다. 신주의 가운데는 묘호와 시호, 존호, 휘호를 썼고, 왕의 신주에는 백저건을 왕비의 신주에는 청지건을 덮어두었다.

 

 

▲ 외대문을 들어서서 우측의 향대청 일원 가는 길

 

종묘 정문과 향대청(香大廳) 일원

▲ 향대청 일원 배치도

 

♧ 외대문(外大門)

 

 

종묘 일곽의 주된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이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

 

▲ 외대문에서 재궁으로 이어지는 삼도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어숙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

 

▲ 향대청 앞 전경

 

♧ 망묘루(望廟樓)

 

망묘루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그 이름은 제향시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건물 가운데 1칸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1443년(세종 25년)에 망모루 옆에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으며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의한 것이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향대청(香大廳)

 

향대청은 종묘에 쓰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불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었다.

남북의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정면 9.5칸의 긴 건물과 서쪽에 행각이 자리를 하고 있는데, 현재는 종묘교육홍보관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 참고 )) 향로(香路)

 

향대청 안에 전석이 깔려 있는 이 길은 종묘제례 때 향과 축문을 모시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한다.

이 길은 신로(神路), 신향로(神香路), 향어로(香御路), 어로(御路), 세자로(世子路)와 같이 존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른 길과 다르게 전석을 깔아 차별을 두고 밟고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종묘의궤록'에는 이 길이 향대청 밖으로 계속 이어저 남북으로 각각 외대문 앞과 어숙실 옆의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망묘루 뒤쪽에 위치한 공민왕 신당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는데 조선 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다.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 재궁 일원 배치도

 

종묘 재궁(宗廟 齋宮) 일원

▲ 향대청쪽에서 바라본 재궁

▲ 종묘 정전쪽에서 바라본 재궁

 

어숙실(御肅室)

  

             ▲ 재궁내의 서쪽의 어목욕청(사진 좌측)

                중앙의 임금이 머무러는 어숙실(사진 중앙)

                그리고 동쪽에 위치한 세자가 제례 준비를 위해 머무르는 세자재실(사진 우측)

 

어숙실(재궁)은 재궁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제향에는 임금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나 대신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다.

 

  

             ▲ 재궁 남쪽에 위치한 임금과 세자가 재궁으로 들어올 때 이용하는 정문(사진 좌측)

                재궁 서쪽에 위치한 어목욕청 우측으로 임금이 이용하는 서협문(사진 중앙)

                어목욕청 좌측으로 신하들이 이용하는 서협문(사진 우측)

 

어숙실 일곽은 둘레담과 정문, 동협문, 서협문으로 싸여 뜰을 중심으로 북ㆍ동ㆍ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은 제례 준비를 위해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은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은 임금이 목욕재계하던 곳인 어목욕청이다. 어숙실 서북쪽으로 종묘 정전이 위치하는데, 제향 때 제관은 재궁인 어숙실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어숙실 서협문을 지나 정전 동문을 통하여 정전에 이르게 된다.

 

▲ 전사청 일원 배치도

▲ 전사청이 있는 정전 동문 앞에서 뒤돌아본 재궁에서 정전 동문으로 이어지는 삼도

 

종묘 전사청(宗廟 典祀廳) 일원

               ▲ 정면(북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전사청 건물이고,

                  우측(서쪽)으로 보이는 작은 누각 형태의 문이 제정 출입문이다.

                  전사청 정문 앞 넓은 마당에 사각의 단이 보이는데 좌측의 2단 기단으로 쌓은 단이 찬막단, 우측의 작은 1단의 기단으로 쌓은 단이 성생위이다.

 

♧ 전사청(典祀廳)

▲ 전사청 정문에서 바라본 내부 모습

 

전사청은 종묘 제례에 쓰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평소에는 이곳에 제사용 집기를 보관하였다.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돌절구가 남아 있다.

 

♧ 수복방(守僕房)

 

              ▲ 종묘 정전 안에서 바라본 정전 기준 동쪽 담장에 위치한 수복방 전경(사진 위)

                  전사청 앞 정전 동문 입구에서 바라본 수복방 전경(사진 아래)

 

수복방은 제사를 담당하는 노비와 관원들이 거처하던 방이다. 수복방 전면에는 제사에 쓰일 제물을 심사하는 찬막단이 있고, 찬막단 동편에는 희생대가 있다.

 

♧ 제정(祭井) 제사용 우물

 

 

♧ 찬막단(饌幕壇)

 

전사청에서 만든 제사 음식들을 제상 위에 차리기 전에 검사하던 곳으로 돌로 만든 제단이다. 전사청 건물 앞 마당에 있다.

 

♧ 성생위(省牲位)

제물인 소, 양, 돼지를 검사하던 곳으로 돌로 만든 제단이다. 전사청 건물 앞 마당에 있다.

 

▲ 종묘 정전 일원의 배치도

 

종묘 정전(宗廟正殿) 일원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으로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진다.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으로, 지면에서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며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하월대는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자리 잡고 일무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가 자리 잡는 공간이다. 그리고 묘정 월대의 한가운데로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현재의 정전은 매 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 나온 동ㆍ서 월랑 5칸이 자리하고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예감(망료위라고도 함)이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 수복방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과 제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 정전 동쪽에 위치한 재궁에서 바라본 정전 남쪽 정문으로 이어지는 삼도(사진 위)

                   영녕전 입구인 서쪽에서 바라본 정전 남쪽 정문으로 이어지는 삼도(사진 아래)

 

종묘 정전(宗廟 正殿)

*국보 제227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5-1번지

*제작시기:조선 태조4년(1395) 창건

 

 

 

 

종묘 정전(宗廟正殿)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물이며, 총 101m의 긴 건물로, 종묘의 중심이 된다.

종묘는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 후보로 계룡산ㆍ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년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을 벗어나 천도를 한 해에 터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태조 4년 9월 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준공된다.

 

 

▲ 정전 내부 신단과 신위

▲ 정전 중앙의 내부 출입문

 

▲ 정전의 퇴칸과 정면 공포 모습

 

준공된 종묘는 대실이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와 효비, 익조와 정비, 도조와 경비, 환조와 의비의 4대 신주를 개성에 옮겨와 봉안하였다.

 

  

              ▲ 정전 동쪽 익랑으로 오르는 돌계단(사진 左)

                 정전 중앙에 위치한 출입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사진 中)

                 그리고 하월대에 설치된 배수시설(사진 下)

 

정전 건물의 전면은 퇴칸을 구성하는 기둥만 서 있고 벽체 없이 모두 묘정으로 트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모두 전벽돌로 두껍게 벽체를 쌓아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함으로써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약간 뒤틀려 아래위가 벌어져 있다. 이는 혼 드나드는 통로임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로 통기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하방(門下枋) 좌우에는 신방목(信枋木)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 판문을 열어 발을 늘어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칸막이 벽체없이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으며, 뒷면 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각 감실에는 서쪽에 왕, 동쪽에는 왕비의 신주가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신실 구성 형식을 당(건물)은 같으나 실(칸막이)은 달리하는 동당이실(同堂異室)제도라도 한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동쪽으로 가면서 각 왕과 비를 합쳐 모두 49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있다.

남쪽 담장 안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을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세웠으며, 서문 밖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을 두었다.

 

▲ 정전 남쪽에 위치한 정문 

  

▲ 정전 3대문(좌로부터 서문, 정문, 동문)

▲ 영녕전으로 이어지는 서문

 

(( 위패 배치도 ))

제 1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제 2실 태종대왕(太宗大王) 원경왕후(元敬王后)

제 3실 세종대왕(世宗大王) 소헌왕후(昭憲王后)

제 4실 세조대왕(世祖大王) 정희왕후(貞熹王后)

제 5실 성종대왕(成宗大王) 공혜왕후(恭惠王后) 정현왕후(貞顯王后)

제 6실 중종대왕(中宗大王) 단경왕후(端敬王后) 장경왕후(章敬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제 7실 선조대왕(宣祖大王)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제 8실 인조대왕(仁祖大王) 인렬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제 9실 효종대왕(孝宗大王) 인선왕후(仁宣王后)

제10실 현종대왕(顯宗大王) 명성왕후(明聖王后)

제11실 숙종대왕(肅宗大王)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제12실 영조대왕(英祖大王)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제13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제14실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제15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제16실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제17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제18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제19실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 칠사당(七祀堂)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이다.

칠사는 '봄의 사명(司命)과 사호(司戶), 여름의 사조(司竈)와 중류(中霤), 가을의 국문(國門), 겨울의 국행(國行)'을 이르는 말이다. 칠사에 지내는 제사는 토속신안과 유교사상이 결합된 국가의례였다.

 

 

▲ 정전 남쪽 남장에 붙여 설치된 칠사당(左)과 공신당(右)

 

▷ 공신당(功臣堂)

공신당은 역대 왕의 배향 공신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이와 함께 동쪽으로 증축되어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공신당 전면 중앙부 3칸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칸에는 하부에 벽체를, 그 상부에는 광창을 설치하였다. 그 외 세 면은 전벽돌로 감싸여있다.

(( 공신당의 배향 공신 ))

-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 조준, 의안대군,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 태종대왕(太宗大王) :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 세종대왕(世宗大王)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 세조대왕(世祖大王) : 권람, 한확, 한명회

- 성종대왕(成宗大王) : 신숙주, 정창손, 홍응

- 중종대왕(中宗大王)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정광필

- 선조대왕(宣祖大王) : 이준경, 이황, 이이

- 인조대왕(仁祖大王) :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 효종대왕(孝宗大王) :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 현종대왕(顯宗大王) :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 숙종대왕(肅宗大王) :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 영조대왕(英祖大王) :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 남공철, 김로, 조병구

-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 이상황, 조인영 

-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 김수근, 이헌구, 이희

-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 민영환,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 서정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 서문 앞에서 바라본 정전의 측면과 정전 담장 밖에 설치된 악공청

 

▷ 악공청(樂工廳)

종묘제례 때 연주하던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곳이다.

 

▲ 영녕전 배치도 

▲ 정전 서문에서 영녕전 동문가는 길

▲ 영녕전 남쪽의 정문

▲ 영녕전 정문 앞 전경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

*보물 제821호(1985년1월8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1번지

*제작시기:조선 세종3년(1421) 창건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서울에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세종 원년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나라에서 따로 별묘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 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문을 두어 제례 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처럼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있는 구성이다.

 

 

▲ 영녕전 동월랑(左)과 서월랑과 서문(右)

 

현재 영녕정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 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기본적으로 종묘 정전과 같으며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으며, 건축 규모 면에서는 영녕전은 정전보다 건축 영역이 좁다. 또 형식면에서도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과 같은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크기가 작다. 영녕전에는 정전과 달리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는데, 이곳에 모신 목조, 도조, 환조, 익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어서, 함께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왕도 도리 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 영녕전 내부의 감실과 신위

 

영녕전에는 모두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동문 앞에는 찬막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동쪽에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천을 두었다.

 

 

▲ 영녕전 동문 밖의 찬막단과 서문 밖의 악공청

 

(( 위패 배치도 및 배향공신 ))

정중 (正中)

제 1실 목조대왕(穆祖大王) 효공왕후(孝恭王后)

제 2실 익조대왕(翼祖大王) 정숙왕후(貞淑王后)

제 3실 도조대왕(度祖大王) 경순왕후(敬順王后)

제 4실 환조대왕(桓祖大王) 의혜왕후(懿惠王后)

서협 (西夾)

제 5실 정종대왕(定宗大王) 정안왕후(定安王后 익안대군

제 6실 문종대왕(文宗大王) 현덕왕후(顯德王后) 하연

제 7실 단종대왕(端宗大王) 정순왕후(定順王后) 

제 8실 덕종대왕(德宗大王) 소혜왕후(昭惠王后) 

제 9실 예종대왕(睿宗大王) 장순왕후(章順王后) 안순왕후(安順王后) 박원형

제10실 인종대왕(仁宗大王) 인성왕후(仁聖王后) 홍언필, 김안국

동협 (東夾)

제11실 명종대왕(明宗大王)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연원, 이언적

제12실 원종대왕(元宗大王) 인헌왕후(仁獻王后) 

제13실 경종대왕(景宗大王) 단의왕후(端懿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이유, 민진후

제14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순소황후(孝順昭皇后) 

제15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민백상, 이종성

제16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의민태자비(懿愍太子妃) 

 

◎ 왕이 친히 모시는 큰 제사 - 종묘제례

최고의 품격을 갖추다!!!

 

   

 

조선 왕조에서 예의 으뜸은 제례이며, 제례의 으뜸은 종묘에서 지내는 제례였다.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받드는 국가 제례로서, 모든 제사의 모범이 되었기에 엄격한 격식과 절차에 따라 모셨다. 종묘제례는 크게 신을 맞이하는 절차로 시작하여, 신이 즐기도록 음식과 술을 올려 대접한 뒤,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진행된다.

제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제례 준비에 온 정성을 다하였고, 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지위와 맡은 역할에 따라 각각 다른 제례복을 입었다.

종묘대제는 해마다 5차례씩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으나, 1971년부터는 해마다 5월 첫째 일요일에 한 차례 거행되고 있다.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역시 그 절차와 음식, 제기, 음악, 춤 등이 잘 보존, 계승되어 오고 있다.

유네스코는 이의 인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정하여 종묘를 세계유산에 등재하였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무형유산 대표 목록에 선정하였다.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 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종묘 제례는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

조선 시대 종묘 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차례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 종묘 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

종묘제례악은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 '악'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 음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歌)로 구성된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 가, 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 장엄한 음악과 춤 - 종묘제례악

인간과 신이 교감하다!!!

종묘제례는 온갖 예와 정성을 다해 치러졌으며, 절차에 따라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악기 연주,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욱 장엄했다.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한 것은 하늘과 땅의 조화를 담은 음악이 인간 사회의 질서인 예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정전 앞 마당의 너른 월대는 제례 때 제관들이 도열하고 악공과 무원들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종묘제례 때 연주되는 음악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다. 두 음악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이 직접 조선의 정서에 맞게 만들었다. 세종 당시에는 궁중 제향(왕실 제사)에 연주되었고, 세조 때부터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되었다. 보태평과 정대업이 악대에 의해 연주되면, 악장과 일무(춤)가 어우러진다. 악장은 각각 조상의 문무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64명이 8줄로 정렬하여 추는 팔일무는 모든 세상을 조화롭고 평화롭게 하는 의미가 있다.

춤은 주로 한 자리에 서서 음악의 흐름에 따라 팔을 올리고 벌리는 경건한 동작으로 이루어지며, 강함과 부드러움이 잘 조화되어 있다.

 

▲ 정전에서 외대문으로 나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