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에게 사랑받은 창덕궁(昌德宮)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산을 뒤로 하고 앞에 물을 두는 '배산임수', 앞에는 집무 공간, 뒤에는 생활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 여러 전각과 여러 겹의 담장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구중궁궐', 세자와 대비의 거처는 동쪽에 둔다는 '동궁동조'의 원칙을 따랐으며, 기본적으로 공식 업무 공간인 정전, 일상 업무 공간인 편전, 생활 공간인 침전을 갖추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창덕궁은 지연환경과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궁궐 건축과 전통 정원의 원형을 잘 간직한 궁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창덕궁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다.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제일의 궁궐이 되었다.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궁궐다운 규모와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 왕조의 오백 년 역사를 놓고 보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다.
너른 평지 위에 직선의 축을 따라 전각들이 들어선 경복궁에서 위엄과 권위, 질서와 절제가 돋보였던 것과 달리, 창덕궁은 전각들이 산과 언덕 등 지형을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고, 규모도 배치된 공간과 쓰임에 걸맞게 지어졌다. 조선시대 왕들이 창덕궁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친환경적인 매력,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공간의 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에서도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자연의 지형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최소한의 손길만을 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솜씨가 절묘하다. 자연미를 중요시한 조선시대의 미감이 잘 드러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의 전용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혁신 정치를 펴서 조선시대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다. 정조에게 규장각은 세종의 집현전에 버금가는 큰 힘이 되었다. 후원의 부용지에 자리한 주합루 1층이 규장각이다.
부용지에 서면 왕과 신하들이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면서 함께 시를 짓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활기차고 이상적인 모습이 절로 눈앞에 펼쳐진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1820년대 후반에 그려진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에도 잘 드러나 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둘러싼 주변 지세와 전각, 담장, 각종 기물들을 상세하게 또한 사실적으로 그려낸 궁궐 기록화이다. 궁궐의 현재와 옛 모습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역사의 흐름 속에 변화해온 궁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궁궐로 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지켜본 궁궐이기도 하다. 한일병합을 결정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과 중전인 순정효황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창덕궁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쳤다.
【 방문일자 】2011년 02월 2일(수)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자유 관람 4월~10월 09:00~18:30/11월, 3월 09:00~17:30/12월~2월 09:00~17:00(매주 월요일 휴궁)
-후원 시간제 관람(2시간 소요) 10:00~15:00 매시 정각, 15:30, 16:00, 16:30/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람
*관람요금 :
-자유 관람 어른(19~64세) \3,000/청소년(7세~18세) \1,500
-후원 시간제 관람 어른(19~64세) \5,000/청소년(7세~18세) \2,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종로3가역(1,3,5호선) 6번출구 도보 10분/안국역(3호선) 3번출구 도보 5분
- 버스 : 109번, 151번, 162번, 171번,172번, 272번, 7025번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창덕궁 탐방코스 】
돈화문-회화나무-금천교-궐내각사-구 선원전 일원-인정문-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 일원-성정각 일원-낙선재 일원-후원(부용지와 주합루 일원-애련지와 의두합-존덕정과 폄우사-옥류천 일원-연경당)
【 창덕궁 소개 】
*사적 제122호(1963년01월18일 지정)
*면적:583,516.3㎡
조선 태종5년(1405)에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세워졌으며,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으며,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어졌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어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며,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역사
창덕궁은 태종5년(1405)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 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 1408년 조선 태조는 이 창덕궁에서 죽었다.
태종11년(1411)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38년(1605)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원년(1609)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25년(1647)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 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가녕전과 그 앞의 동ㆍ서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으로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하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건축과 구조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 사대부 집을 닮은 - 낙선재(樂善齋)
사랑도, 한도 포근하게 품어 안다!!!
낙선재와 석복헌은 한 여인에 대한 헌종의 깊은 사랑이 담긴 전각이다. 세자를 얻기 위해 간택하여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한 헌종은 경빈 김씨를 무척 아껴 함께 지낼 새 보금자리로 이들 전각을 마련했다.
낙선재는 예술에 관심이 각별했던 헌종이 편안하게 책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개인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석복헌은 '복을 내리는 집'이란 뜻으로, 왕실의 '복'이란 다름 아닌 세자를 얻는 일이다. 석복헌과 수강재 사이의 뒷문에 장식된 포도 문양도 자손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만큼 왕의 후궁이 된 경빈 김씨에게 세자를 얻는 일은 매우 절실했다. 그러나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맞이한 뒤 약 2년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는 1989년까지 조선 왕실의 후손들이 생활하였고, 낙선재에서는 고종의 아들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수강재에서는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생활하였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뒤뜰은 작은 동산이지만, 계단식으로 꽃밭을 만들고 신비스러운 모양의 괴석과 돌 연지도 놓아 볼거리가 가득하다. 뒤뜰은 각각 정자가 딸린
후원에 연결되어 있다.
♧ ♧ 창덕궁 낙선재(昌德宮 樂善齋)
낙선재(樂善齋)는 헌종13년(1847)에 중건된 창덕궁의 건물로, 이 일대에는 숙종, 정조, 헌종 때에 지어진 소박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헌종13년(1847)에 낙선당 옛터에 건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것으로 헌종은 낙선재에서 경빈 김씨는 석복헌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낙선재의 의미는 선한 일을 즐겨한다는 의미이고 석복헌은 복을 준다는 뜻으로 후사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순정효황후(윤황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도 이곳에서 살다가 1989년에 죽었다.
▲ 낙선재 출입문인 장락문(長樂門)과 협문
낙선재는 세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 낙선재
▲ 낙선재 내 모습
▲ 낙선재 실내 전경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 석복헌(사진 上)
석복헌 입구 전경(사진 下)
그 동쪽에는 낙선재와 건립 시기가 비슷한 석복헌(錫福軒, 1848년 8월 11일 중수)이 있으며,
▲ 석복헌과 수강재 사이의 공간
▲ 수강재
▲ 취운정가는 수강재 옆 협문
현재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탐방을 하지 못하였음.
다시 그 동쪽으로 1820년대 이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수강재(壽康齋, 1848년 8월 11일 중수)가 있는데,
이 건물들이 있는 영역을 통틀어 흔히 낙선재라고 부른다. 낙선재는 임금이, 석복헌은 왕비가, 수강재는 대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낙선재는 조선 시대 궁궐의 침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의 평면 형식에서 벗어나 온돌과 마루를 생활 방식과 기능에 맞게 구성한 점이 돋보이며, 다양한 외관과 창호 형식, 그리고 후원의 계단식 화단이 빼어나다. 화계 위에는 취운정(翠雲亭), 한정당(閑靜堂)이 있으며, 그 위에 상량정(上凉亭), 칠분서(七分序), 만월문(滿月門), 삼삼와(三三窩), 승화루(承華樓)와 그 일곽이 있다. 이방자가 세상을 떠난 뒤 낙선자 일곽에 보수와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1996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승화루는 원래 소주합루라 불렀으나 훗날 승화루라고 이름이 바뀌었고 아래는 의신합이라는 방이었으나 현재는 열린 공간이 되어있다. 중희당과 삼삼와라고 불리는 육각정과 연결시켜 주는 칠분서라는 월랑이 있다. 상량정은 원래 평원루였으나 이름이 바뀌었다.
▲ 낙선재 담장에 설치된 굴뚝과 담장 밖의 우물
▲ 외부에서 바라본 낙선재 일원의 담장과 건물들
현재 낙선재 일원 뒤편 취운정, 한정당, 상량정이 위치한 구역은 탐방이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각략하게 각 건물의 설명만 기술하기로 한다.
♧ 취운정(翠雲亭)
수강재의 뒤뜰 화계 위에 자리 잡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평면에 굴도리를 사용한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서까래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각재인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숙조 12년(1686)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궐도'에도 표현되어 있는 건물이다. 4면의 바깥 기둥 사이에는 아(亞)자 난간을 두르고 안쪽 기둥(내진주)에만 문을 달아 4면의 툇간이 개방되어 있어 좁은 대지를 여유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쪽의 담장에 일각문이 있어 석복헌 뒤쪽의 한정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 한정당(閒靜堂)
정면 3칸에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에 각기둥과 굴도리를 사용한 소로수장 건물이며 '동궐도형'과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에서는 이 자리가 빈 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1917년 이후에 옮겨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가운데에 2칸만 앞퇴를 두고 동쪽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였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그 위로 아자 난간을 둘렀다.
기단은 정면의 2칸 부분만 두벌대의 장대석으로 두르고 앞마당에는 석분과 괴석으로 운치를 더하였다. 툇마루의 서쪽벽에도 창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여닫도록 된 것과 변형된 아자 분합문이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상량정(上凉亭)
1908년경 융희 년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형>에 보면 평원루(平遠樓)라는 이름의 육각정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1908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형>에서는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상량정, 즉 평원루는 그 사이 어느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물론 상량정이란 이름 역시 1908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일제시기에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을 돌려 쌓고 그 위에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밑층을 세운 뒤 그 위에 계자 난간의 튓마루를 구성하였고 난간의 궁판에는 투각하여 치장하고 난간 하부로도 낙양을 두어 장식하였다. 위층의 벽에는 육각형의 기둥 사이로 사분합문의 창살 구성이 독특하고 공포는 일출목의 다포 형식이며 겹처마의 육각 지붕 정상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천장에는 서까래가 노출되어 있고 중도리 안쪽 육각형의 부분은 마름모꼴의 소란 반자로 구성하고 봉황과 용과 박쥐 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베풀었다. 궁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다.
♧ 만월문(上凉亭)
상량정의 서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서 전돌로 만월형의 출입구를 내고 좌우로 밀어 열게 된 넌출문이 달렸다. 바깥쪽 문 좌우 담 벽에는 수복 등의 길상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게 채웠다. 궁궐의 협문으로는 유일하게 원형으로 만든 아름다운 문이다.
((낙선재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마지막 왕족들))
★순정효황후 윤비(1894년 음8월20일~1966년 양2월3일)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는 대한제국 순종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다.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04년에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이듬해인 1907년에 남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玉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인민군을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휴전을 맞아 환궁하려 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이 사람들의 순정효황후에 대한 존경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정신 장애인이 되어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남편을 여읜 평생의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末)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승하할 때까지 영어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고(타임지를 읽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국문학과 불경 연구에 혼신을 쏟는 등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영왕(영친왕;1897년10월20일~1970년5월1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은(垠).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嚴氏)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8월 영왕(英王)에,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1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11세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隆熙皇帝:뒤의 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王世弟)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흡수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고 불렸다.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뒤 1963년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했으나 귀국 당시 이미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그 후 7년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 있다.
◀ 영왕과 영왕비
★영왕비(이방자;1901년11월4일~1989년4월30일)
이방자(李方子, 일본어로는 리 마사코)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후 존호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이다.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守正)와 그의 부인 이쓰코(伊都子)의 장녀 마사코(方子)로서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에 고준 황후가 됨) 및 황족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을 이유로 1916년,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롯폰기의 이왕저에서 이은과 결혼식을 올렸다. 비록 일본의 의도로 이루어진 정략결혼이었으나, 둘의 사이는 화목했고 불임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또한 1923년 일본인들이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혼란의 희생양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 관동 대학살로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충격과 자책의 나날을 보냈다.
1931년, 둘째 구(玖)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이방자는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해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년, 심신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를, 1967년, 농아 및 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을 잃고 1971년, 정신지체장애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년,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玖)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이구(李玖; 1931~2005)
대한제국의 황태손.
본관은 전주, 시호는 회은(懷隱)이다. 고종의 손자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일본 왕족의 딸인 이방자(李方子, 본명은 마사코)이다.
이구는 1931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영친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 이진(李晋)이 생후 8개월 만인 1922년 5월 11일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황태손이 되었다. 이구는 일본 왕실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에서 교육을 받고, 1950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로 일했다.
1952년 4월 발효된 대일강화조약에 따라 국적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뀌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로 한국에는 입국할 수 없었다. 1959년 여덟 살 연상인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으로 바뀐 이후 1963년 11월 부모와 함께 잠시 입국하였다. 1965년부터 서울대학교 등에서 건축학을 강의했으며, 1966년에는 트랜스아시아 부사장에 취임했다. 1970년 아버지 영친왕이 사망하자 황실을 이어갔으며, 1971년에는 영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1973년 3월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하였다.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그곳에서 사업을 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고, 1982년에는 아내 멀록과도 이혼했다. 1996년 영구 귀국하셔서 부암동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으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로 일했다.
2005년 7월 16일 자신이 태어난 장소이기도 한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영친왕 묘역에 묻혔다.
★덕혜옹주(1912년5월25일-1989년4월21일)
덕혜옹주(德惠翁主)는 구 왕가의 일족으로 고종이 60세가 되던 해에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이다.
경술국치(1910) 뒤인 1912년 덕수궁에서 출생하였다. 고종의 고명딸로서 5살 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총독부는 처음에는 그를 왕공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1917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왕족으로 정식 인정되었다. 이름 없이 "복녕당아기(福寧堂阿只)"라고 불리다가 고종 사후인 1921년 5월 4일(양력)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유학을 간 그녀는 1925년 도쿄 가쿠슈인 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0년 모친 복녕당 양씨(귀인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조발성 치매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데이메이 황후 의 명령으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쓰시마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와 강제 혼인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 정혜)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1955년에는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 기자에 의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양덕혜라는 이름의 호적을 받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30년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 덕혜옹주의 행적을 존경심을 담아서 보도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현재 덕혜옹주의 묘소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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