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서울,인천&경기권

고궁 탐방 시리즈(5) 창덕궁(昌德宮) 후원과 창덕궁의 특별한 나무들

왕마구리 2011. 2. 11. 22:09

◀ 왕에게 사랑받은 창덕궁(昌德宮) ▶

600여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하였는데,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팔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현재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하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하였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였으며,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진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산을 뒤로 하고 앞에 물을 두는 '배산임수', 앞에는 집무 공간, 뒤에는 생활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 여러 전각과 여러 겹의 담장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구중궁궐', 세자와 대비의 거처는 동쪽에 둔다는 '동궁동조'의 원칙을 따랐으며, 기본적으로 공식 업무 공간인 정전, 일상 업무 공간인 편전, 생활 공간인 침전을 갖추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창덕궁은 지연환경과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궁궐 건축과 전통 정원의 원형을 잘 간직한 궁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창덕궁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다.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제일의 궁궐이 되었다.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궁궐다운 규모와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 왕조의 오백 년 역사를 놓고 보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다.

너른 평지 위에 직선의 축을 따라 전각들이 들어선 경복궁에서 위엄과 권위, 질서와 절제가 돋보였던 것과 달리, 창덕궁은 전각들이 산과 언덕 등 지형을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고, 규모도 배치된 공간과 쓰임에 걸맞게 지어졌다. 조선시대 왕들이 창덕궁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친환경적인 매력,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 공간의 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에서도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자연의 지형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최소한의 손길만을 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솜씨가 절묘하다. 자연미를 중요시한 조선시대의 미감이 잘 드러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의 전용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혁신 정치를 펴서 조선시대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다. 정조에게 규장각은 세종의 집현전에 버금가는 큰 힘이 되었다. 후원의 부용지에 자리한 주합루 1층이 규장각이다.

부용지에 서면 왕과 신하들이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면서 함께 시를 짓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활기차고 이상적인 모습이 절로 눈앞에 펼쳐진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1820년대 후반에 그려진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에도 잘 드러나 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둘러싼 주변 지세와 전각, 담장, 각종 기물들을 상세하게 또한 사실적으로 그려낸 궁궐 기록화이다. 궁궐의 현재와 옛 모습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역사의 흐름 속에 변화해온 궁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궁궐로 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깝게 지켜본 궁궐이기도 하다. 한일병합을 결정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과 중전인 순정효황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창덕궁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쳤다.

 

【 방문일자 】2011년 02월 2일(수)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자유 관람 4월~10월 09:00~18:30/11월, 3월 09:00~17:30/12월~2월 09:00~17:00(매주 월요일 휴궁)

  -후원 시간제 관람(2시간 소요) 10:00~15:00 매시 정각, 15:30, 16:00, 16:30/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관람

*관람요금 :

  -자유 관람 어른(19~64세) \3,000/청소년(7세~18세) \1,500

   -후원 시간제 관람 어른(19~64세) \5,000/청소년(7세~18세) \2,500

   -통합관람권 \10,000 :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포함>,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관람 가능

*교통안내 :

  - 지하철 : 종로3가역(1,3,5호선) 6번출구 도보 10분/안국역(3호선) 3번출구 도보 5분

  - 버스 : 109번, 151번, 162번, 171번,172번, 272번, 7025번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창덕궁 탐방코스 】

돈화문-회화나무-금천교-궐내각사-구 선원전 일원-인정문-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 일원-성정각 일원-낙선재 일원-후원(부용지와 주합루 일원-애련지와 의두합-존덕정과 폄우사-옥류천 일원-연경당)

 

 

【 창덕궁 소개 】

*사적 제122호(1963년01월18일 지정)

*면적:583,516.3㎡ 

조선 태종5년(1405)에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세워졌으며,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으며, 당시 종묘, 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어졌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어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며,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역사

창덕궁은 태종5년(1405)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 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 1408년 조선 태조는 이 창덕궁에서 죽었다.

태종11년(1411)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38년(1605)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원년(1609)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25년(1647)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 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가녕전과 그 앞의 동ㆍ서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으로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하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건축과 구조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 조선 정원의 백미 - 후원(後園)

궁궐의 뒷동산, 왕의 걸음으로 걷다!!!

창덕궁은 궁궐의 면모도 훌륭하지만 특히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는데,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덕지 같은 연못을 만들고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을 세워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였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고, 가끔 호랑이나 표범 같은 맹수가 나타나기도 했을 정도로 깊다. 게다가 절경들은 골짜기마다 숨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직접 걸어서 골짜기의 연못과 정자들을 찾아다녀야만 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향하는 숲길은 가장 인기있는 산책로이다.

 

 

후원은 태종의 창덕궁 창건 당시에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 버리고, 1624년 인조 때부터 역대 왕들에 의해 개수,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어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석하는 군사 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으며, 대비를 모시는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베풀어졌다. 성종 때에는 불꽃놀이도 했다.

왕은 후원에 직접 곡식을 심고 길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하였고, 왕비는 진히 누에를 쳐서 양잠을 장려하였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 창덕궁 부용지와 주합루 일원

 

후원의 첫번째 중심지로서 창덕궁내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 부용지(芙蓉池)

조선시대 궁궐내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칙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부용지 또한 땅을 상징하는 네머난 연못과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이 있다.

MBC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부용지와 부용정)이기도 하다.

부용지 모퉁이 석축에 새겨진 '잉어' 조각

 

                  ▲ 부용지 석축에 나타난 잉어 조각(사진 左)과 연못 주변의 석조물(사진 右)

 

이는 옛 사람들은 면학에 힘쓰던 선비를 잉어에 비유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것에 비유를 했다.

잉어가 용문의 급류를 뛰어 올라 용으로 변한다는 중국의 고사 '어변성룡(漁變成龍)'에서 비록된 것이다.

 

 

◆ 부용정(芙蓉亭)

 

1792년 건립된 十자형을 기본으로 한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을 다녀온 후 매우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 영화당(暎花堂)

 

 

 

 

 

부용지와 주합루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숙종18년(1692)에 재건된 것으로 한쪽에는 춘장대 마당을, 또 다른 한쪽으로는 부용지를 마주하여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영화당 앞 마당에 해당되는 춘장대는 왕족을 위한 휴식공간이면서도 정조 때는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 어수문(漁水門)

 

높은 언덕위에 있는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이다.

정문의 이름이 '어수문'인 까닭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간에 친밀한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는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어수문은 중앙의 왕이 드나드는 큰 문과 좌,우 신하들이 드나드는데 사용하는 작은 문 2개가 있다.

 

◆ 주합루(宙合樓)

 

정조 즉위원년(1776)에 완성한 2층 누각으로 후원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아래 층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뒤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 기관으로 왕실직속도서관인 규장각의 서고, 위층에는 열람실 겸 연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누마루를 만들었다.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정조는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심신 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고, 주합루란 시간과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천지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등 여러 문신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으로, 정조는 이곳에서 열흘마다 시제를 내려 젊은 학자들이 학문에 증진케하였으며, 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였던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다.

주합루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다.

 

◆ 부용지 북측 발굴 어정(御井)과 주합루의 취병(翠屛)

- 어정(御井)과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 부용정 옆에서 바라본 사정기비각, 그리고 비각 우측으로 어정이 보인다.

 

'굴궐지기록'에 따르면

술성각(述盛閣)은 열무정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사정기의 비각(四井記碑閣)이다.

세조 때에 종신에게 명하여 터를 잡아 우물을 파게 했는데, 그 뒤에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두 우물만 남았다.

숙종 경오년(1690)에 그 고적을 애석히 여겨 우물들만이라도 보수하라 명하고, 이어 그 옆에 비를 세워 표하였다.

 

 

 

◀ 어정

 

 

 

- 취병(翠屛)

취병은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주합루의 취병은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국보 제249호)의 그림을 토대로 하여 '임원십육지관병법'에 기록되어 있는 제작 기법대로 대나무 틀을 짜고 신우대를 심어 재련한 것이다.

 

 

♧ 창덕궁 애련지와 의두합 일원

 

◆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숙종18년(1692)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애련정은 단칸의 작은 정자지만 애련지 연못에 반쯤 걸친 모습은 경쾌하며,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절경을 이룬다.

 

◆ 의두합(倚斗閤)과 기오헌(奇傲軒)

 

                  ▲ 의두합(사진 左)과 의두합 옆 우측에 나란히 위치한 기오헌(사진 右)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하다 3년만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후에 익종으로 추존)

이곳에는 숙종대에 건립된 애련정이 있었고,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하였다.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때 본보기가 된 사람이 할아버지 정조였으며, 주합루 뒤쪽에 뒤쪽인 이곳에 집을 짓고 나라 일을 생각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이 집들이 의두합과 기오헌이다.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출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궁궐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다.

기오헌 역시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 불로문(不老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 의두합 측면 모습과 출입문

 

♧ 창덕궁 존덕정과 폄우사, 그리고 관람지 일원

 

이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세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 관람지 전경(사진 上, 中)과 관람지의 연못 석축(사진 下)

 

연못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 관람지 주변의 정자들(사진 좌측에서 부터 관람정, 승재정, 폄우사)

                  ▲ 관람자의 존덕정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를 세웠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이 날아 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 존덕정과 정조의 교시

존덕정 안 북쪽 벽에 '萬川明月主人翁白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89년에 직접 지은 시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나,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 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관람지의 존덕정 옆 돌다리

  

                  ▲ 관람지의 존덕정 옆 돌다리 주변의 석조 장식물들

 

♧ 창덕궁 옥류천 일원

 

창덕궁 후원의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르킨다.

인조14년(1636)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 둘러 앉아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 옥류천 일원의 취한정(左)과 소요정(右)(사진 上)

                  농산정(사진 中)

                  옥류천(사진 下)

 

근처에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義亭) 등과 함께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 인조의 '옥류천' 어필과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는 소요암(사진 上)

                  소요암 윗쪽에 위치한 옥류천 수원지(사진 下)

 

소요암(逍遙巖)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 옥류천 일원의 태극정과 청의정(사진 上)

                  태극정(사진 下左)

                  초가지붕의 청의정(사진 下右)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 옥류천 영역에서 연경당으로 가는 길

 

♧ 연경당(演慶堂)

 

'궁궐지'에 의하면 순조28년(1828)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들을 올리는 행사)를 올리기 위해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민가 형식의 집이다. 살림집이 99칸을 넘지 않는 규범에 따라 99칸으로 지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연경당은 배치와 구성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일상 거처인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의 차양을 설치한 왕의 사랑채와 왕비 등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로 나뉘어져 있어 단순하고 명쾌하다.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달이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전면에 대문간과 함께 행랑채를 두고,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을 중문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을 중문으로 두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각기 독립된 각자의 영역을 만나는데 사랑채와 안채를 한 몸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담장을 가로질러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만들었다.

 

 

 

 

               ▲ 연경당(사진 上)

                  장락문을 들어서서 앞마당에서 바라본 좌측의 안채 전경과 안채로 들어가는 평대문인 중문(사진 中)

                  안채 마당에서 바라본 안채 전경(사진 下)

 

담장 사이에는 앞뒤로 협문을 내 마당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 전 영역을 일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안채에 부엌이 없어서 안채 뒤에는 반빗간이라는 별채를 두었고 사랑채에는 서재인 선향재와 연경당 전 영역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한 칸짜리 정자인 농수정을 앉혔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에 위치한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 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각기 대청을 통해 앞마당과 뒷마당이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고, 안채와 사랑채 역시 안방 대청 건넌방 대청 침방으로 서로 연경되어 공간과 시선이 통하는 등 공간 환원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서재인 선향재 역시 가운데 대청의 분합문을 들어 걸쇠에 겉면 공간이 서로 막힘없이 통하여 앞마당과 뒷마당이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 창덕궁 후원 내 신 선원전 일원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탐방치 못하였으며, 신 선원전가는 길목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51호 다래나무도 탐방하지 못하였다.

 

♧ 창덕궁 신 선원전 일원

신 선원전 일대는 신선원전과 몽답정 괘궁정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덕수궁의 선원전을 옮겨다가 만들었으며, 이미 그 이전 창덕궁에는 선원전이 있어서 원래 선원전을 구선원전이라 하고 창덕궁의 신원전을 신 선원전이라 한다.

현재 개방사업구간이 아니라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신선원전의 위치는 대보단의 위치라기보다 대보단보다 동쪽이라고 볼 수 있다.

((대보단)) 숙종30년(1704)에 준공되었다. 제를 지내기 위한 제단으로, 각 면의 길이가 약 12미터 남짓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보단의 부속 건물은 만세송은이 있으며 일제가 중국에게 제를 지내는 단을 허용할리 없었다. 그래서 대보단을 없애고 덕수궁의 선원전을 옮겨다가 신선원전을 만들었다.

◎ 창덕궁의 특별한 나무들

창덕궁은 자연의 흥취가 한껏 살아있는 궁궐이다. 자연 그대로인 듯 멋스러운 창덕궁으로 보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는 나무 한 그루라도 법도에 따라 심고 가꾼 배려가 숨어 있다.

돈화문 주변에는 300~400년 수령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 여덟 그루가 자라고 있다. 돈화문 주변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이곳에 조정의 관료가 근무하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를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회화나무는 종종 학자의 기개에 비유된다.

선원전 서쪽 가까이에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가 자라고 있는 것은 선원전이 제례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선원전은 역대 왕의 초상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며, 과거에는 향나무의 줄기를 깎아 향을 피우는 데 주로 사용했다. 수령 750년 정도로, 창덕궁이 세워 질 때 이미 어느 정도 자란 나무를 옮겨다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 애련지 부근에 자라는 뽕나무(천연기념물 제471호)는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왕비가 키웠던 뽕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시대 왕비는 궐내에서 친히 누에을 치고,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 지내는 친잠례를 거행했다. 수령 400년 정도이며,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이다.

후원 깊숙한 곳에 자라는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는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이리저리 엉키면서 자라는 모습이 매우 독특하다. 다래나무는 암수딴그루인데,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수나무여서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수령 600년 정도로, 우리나라 다래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 창덕궁 회화나무 군(昌德宮 회화나무 群)

*천연기념물  제472호(2006년04월06일 지정)

*수량/면적:8그루/5,582㎡(보호구역)

 

창덕궁 회화나무는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관람로 양 옆에 나란히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 8그루로 나무높이는 15.0~16.0m, 가슴높이 줄기직경은 90~178㎝에 이르는 노거수이다.

회화나무는 궁궐 입구에 특별한 사유를 가지고 심어 가꾸어 왔는데, 창덕궁 돈화문 주변은 궁궐의 삼조(三朝) 중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에 해당되는 곳으로 궁궐 입구 주변에는 예로부터 중국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라 회화나무를 심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孤卿大夫)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이 중 삼공(三公)의 자리에는 회화나무(槐)를 심어 삼공(三公) 좌석의 표지(標識)로 삼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회화나무는 삼공 위계(位階)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주례(周禮)」, 추관(秋官), 조사(朝士)>’)

 

 

 

창덕궁 회화나무는 위와 같은 사유로 궁궐 앞에 심겨진 회화나무 중 남겨진 것으로 추정하며, 1820년대 중반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에도 노거수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수령은 300~400여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들 회화나무 8그루는 조선시대 궁궐의 배식 기준과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노거수로 판단된다.

 

                  ▲ 창덕궁 밖에서 바라본 회화나무들

 

♧ 창덕궁 향나무(昌德宮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1968년03월04일)

*면적:314㎡(보호구역)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선원전 서쪽 가까이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나이가 약 700살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라졌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랐다. 나무의 모양은 마치 용(龍)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처럼 생겼다.

 

 

 

 

창덕궁은 조선 태종 4년(1404)에 왕실의 별궁으로 지었는데, 별궁을 지은 다음 어느 정도 자란 커다란 나무를 심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무나이를 700년이라 추정한 것이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창덕궁 다래나무(昌德宮 다래나무)

*천연기념물 제251호(1975년09월02일)

*면적:1,256㎡(보호구역)

 

다래나무는 덩굴나무로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깊은 산속 토질이 좋은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타원형이며 봄에 돋아 가을에 떨어지고 꽃은 흰색으로 5월에 3∼10송이가 피며, 열매는 10월에 황록색으로 익는데 맛이 좋아 옛 부터 우리민족이 즐겨 먹었다.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후원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9m, 가슴높이의 둘레 1.04㎝이며,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다. 이 나무는 창덕궁 안에 있는 대보단 옆에서 자라며, 특별히 타고 올라갈 지지대 없이 이리저리 엉키면서 자라는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또 줄기의 껍질이 얇게 벗겨져 일어나는 점도 특이하다.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창덕궁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우리나라의 다래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크다. 또한 궁궐 속에서 자라온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참고)) 다래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 영역은 탐방이 불가능하여 직접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하여 참고 사진만을 게재한다.

 

♧ 창덕궁 뽕나무(昌德宮 뽕나무)

*천연기념물 제471호(2006년04월06일 지정)

*면적:314㎡(보호구역)

 

창덕궁 뽕나무는 창덕궁의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주위에 위치하며 나무높이 12.0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239.5㎝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 뽕나무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수형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예로부터 조선은 농본사회로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전하듯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은 조선시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는데, 조선조 궁에 뽕나무를 심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태종 9년 3월 1일)으로 창덕궁 건립 후 태종 9년(1409)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공상제도(公桑制度)를 본따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실록」 외에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에 양잠의 중요성을 말하며 후원에 뽕나무를 식재토록 하고, 후원에서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양잠의 신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잠은 예로부터 나라의 귀중한 산업으로 왕실에서는 뽕나무를 매우 중요시 여겼왔다. 1911년, 창덕궁 후원 주합루 좌측 서향각에서 조선총독부가 양잠소로 만들고 친잠례를 거행하였으며, 주합루에서도 1925년 6월 17일, 1929년 6월 15일, 1939년 6월 26일 친잠례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처럼 창덕궁 뽕나무는 친잠례 거행 등 궁궐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목으로 우리가 보호 관리하여야 할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소중한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