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선비의 고장 영주(榮州)를 찾아서... 제Ⅰ편 : 화엄종찰 부석사(浮石寺)

왕마구리 2012. 11. 10. 12:35

선비의 고장! 영주를 찾아서

선비의 고장! 영주 여행은 재경대구고 18산우회의 2012년 친구가 사는 집 근처나 고향의 산을 찾아 산행을 실시한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2월 안양의 수리산, 3월의 수원 광교산, 4월의 서울 대모산&구룡산, 5월의 서울 도봉산의 북한산둘레길에 이어 5번째로 1박2일간 영주여행을 겸한 소백산자락길 탐방을 목적으로 실시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부석사, 소수서원, 그리고 선비촌은 단풍철을 맞아 2007년 11월 방문하였으니 약 4년 6개월만에 계절을 달리하여 다시 찾게 된 셈이다.

이번 영주여행에서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부석사, 세조3년(1457) 10월 단종 복위 거사의 실패로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이 죽임을 당하고, 역모의 본거지였던 순흥도호부 사람들이 관군에 의해 함께 죽임을 당하였으며, 소수서원의 자리에 있던 숙주사가 관군의 방화로 폐허로 변한 사건인 '정축지변', 이 사건으로 순흥부는 폐지되고 땅 덩어리는 충북 단양, 강원 영월, 태백, 그리고 경북 풍기, 봉화, 예천, 안동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숙종9년(1683) '절의지향'으로 명예회복 될 때까지 227년간 긴 세월동안 역향으로 잃어버린 고난의 세월을 보낸 역사적인 장소에 자리한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 소수서원, 그리고 산자락마다 선조들의 오랜 문화가 살아 있는 걷고 쉬고 즐기는 행복한 自樂! 소백산자락길을 1박2일 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탐방을 하게 된다.

서울과 경주를 제외하고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국가지정문화재를 가징 많이 보유한 지역인 이번 영주 여행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를 6월30일과 7월1일 이미 '문화생태탐방로'란에 소백산자락길 제1자락을 두 편에 나누어 소개한 탐방기를 포함하여 총 4편으로 나누어 소개하기로 한다.

 

- 선비의 고장! 영주를 찾아서 Ⅰ편 : 우리나라 10대 사찰의 하나! 화엄종찰 부석사(浮石寺)

- 선비의 고장! 영주를 찾아서 Ⅱ편 : 한국 정신문화와 민족교육의 산길! 소수서원(紹修書院)

- 걷고 쉬고 즐기는 행복한 自樂! 소백산자락길 제1자락 Ⅱ죽계구곡길

- 걷고 쉬고 즐기는 행복한 自樂! 소백산자락길 제1자락 Ⅲ달밭골길

 

【 일 정 표 】2012년 6월 2일(토)-3일(일) 1박2일

                             ◈ 첫째날(6/2) 오후 : 부석사-소수서원

                             ◈ 둘째날(6/3) : 소수서원-소수박물관-선비촌-소백산자락길

 

선비의 고장! 영주를 찾아서(Ⅰ편) : 화엄종찰 부석사(浮石寺) ▶

우리나라 10대 사찰의 하나!  

【 부석사 소개 】

 

 

신라 문무왕16년(676년) 해동화엄종의 증조인 의상조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6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이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신라 화엄종의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을 세웠으나 '안양(安養)'은 곧 '극락(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땅 위에 극학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된다.

 

 

부석사란 사찰 이름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 묵서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소실된 것을 우왕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다음 해(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의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 불교사적 위치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 들어와 법흥왕 때 국교로 승인된 후 크게 발전하였는데 중국을 통하여 전파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대사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를 창건하고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게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 초기의 부석사

부석사의 창건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한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절이 생겨날 당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였다. 의상이 제자를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 부석사의 중창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부석사에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을 정도였으며,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로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는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며, 무엇보다도 국보 제17호인 석등이 경문왕(861~874)때 만들어진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 고려의 원융국사

부석사 주지로 있으며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 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고 하였다. 현존하는 부석사의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성은 김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했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종7년(1041)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석사에서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8년(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 조선시대의 부석사

조선 성종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고 성종24년(1493)에 조사당을 단청하였다.

명종10년(1555)에 화재로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6년(159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으며, 선조9년(1596)부터 선조11년까지 석림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광해군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을 개금하였다.

영조22년(1746) 화재로 승당, 만월당,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중수되었고, 영조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을 개금하였다.

 

 

◈ 근대이후의 부석사

일제강점기인 1919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호리 부분이 잘린 석룡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지붕의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하였다.

 

【 부석사의 석축 】

부석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부석사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하게 되는데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민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는 상징하는 바가 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 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을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들은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 부석(浮石) 】

 

 

 

의상대사가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

식은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탐 배는 벌써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한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위해 왕명으로 이곳에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浮石'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숙종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 윗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후 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좌측의 '부석' 바위

 

 

 

【 부석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 국보 제17호)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祖師堂壁畵 국보 제46호)

◈ 보물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

*부석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부석사 고려각판(高麗刻板 보물 제735호)

*부석사 오불회괘불탱(보물 제1562호)

◈ 경상북도 도지정문화재

*부석사 원융국사비(유형문화재 제127호)

*부석사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30호)

 

♧ ♧ 부석사 무량수전(大寂光殿)

*국보 제18호(1962년12월20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있던 도둑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원융국사비에 따르면 고려 현종7년(1016) 때 중창하였으나, 1916년 해체, 수리공사시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 공민왕7년(1358) 왜구에 의하여 불에 타 버려 원융국사가 고려 우왕2년(1376)에 지금 있는 건물을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3년(1611) 때 서까래를 깔고 새로 단청하였으며, 1916년에 해체, 수리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여덟 팔(八)자의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로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견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 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건물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공민왕의 글씨이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무량수전의 귀공포(사진 左), 닫집(사진 中), 정면의 처마(사진 右)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을 모셨다. 협시보살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짧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있게 짜맞쳐진 모습은 오래동안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러한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져야 하므로 많은 정성과 공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으며,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들에서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았다.

 

 

                ▲ 무량수전의 내부 가구(사진 左)와 외부 공포(사진 右)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하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시대적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인정되고 있으나,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이 불전 형식과 구조 연구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들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 ♧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塑造如來座像)

*국보 제45호(1962년12월20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무량수전내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쪽 귀는 긴 편이며, 잘록한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발하는 광배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파오르는 모양(화염문)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보상화문)를 장식하였으며, 그 안에는 두광에 3체, 신광에 4체의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대좌는 앞면 너비 2.37m, 측면 너비 2m, 높이 1.05m의 흙과 돌을 섞은 수미단 원형이 남아 있고, 비닥에는 주위에 신라시대의 녹유전이 깔려 있으나, 불상 무릎 아래에 후세의 첨가물인 목조불단이 가설되어 있어, 밖에서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신라시대 불상의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일면을 감출수 없어, 시대적인 양식의 차를 보여 주고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 

*국보 제17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 앞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꼮대기에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부석사 석등은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으며,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대석은 3매의 판석이 조립된 방형의 지대석으로 상면에는 하대하석을 받치기 위해 고형의 받침대가 2단 각출되었고, 네 귀는 들림현상이 거의 없이 평이하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별석이다. 하대상석 상면에는 각형과 고형의 2단 받침대가 마련되고, 측사면(側斜面)의 상하에는 각대가 돌출되었다. 각대 내부에는 음각연의 안상이 2조씩 모두 8개가 새겨져 있다.

연하대석은 팔각 중심에 복엽 연판문이 모아지고, 그 끝 꼭지에는 귀꽃을 돌려 장식하였다. 이들 팔엽의 연화판 사이의 간엽은 상하가 겹친 중변(重辨)이다. 연화대석 상,하면에는 받침대가 있는데, 하면은 1단의 높이 30mm의 각형받침이, 상면에는 4단의 높이 65mm의 받침이 각형과 고형으로 있다. 내부에는 간주공이 뚫렸다.

팔각형의 간주석은 한 변이 145mm로 상하의 두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안허리곡도 없는 편이고, 상하끝은 상,하대석에 꽂을 수 있는 촉이 마련된 구조이다.

상대석 역시 팔각꼭지에 팔엽 단판 연화문 중심이 모아지게 구성되었고 화판 내부는 보상화문이 들어 있다.

하면은 3단의 받침대가 마련된 후 외연(外緣)의 연화문과 연결되고 상면은 2단의 받침대가 마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형받침이다.

상대대(上臺帶)는 50mm로 굵기가 두꺼원 화사석과 상대석의 경계가 뚜렷하며, 그 상면은 중앙으로 갈수록 귀솟음이 되어 있다, 팔면체의 화문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사면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나머지 사면 외부에는 보살입상이 부조(浮彫)되었다. 

화창 높이 410mm, 너비 170mm로 외곽에는 1단의 윤곽대가 마련되고 윤곽대 내부에는 철정공(鐵釘孔)이 12개씩 돌려있고 이 구멍은 한쪽에만 14개가 있으며 그 배열도 특이해 개폐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에는 가로 180mm, 세로 150mm의 등화시설로 보이는 방형의 단이 한 단 파여 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늘어뜨린 천의를 잡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는데, 자세들이 모두 자연스러우며 신체가 날씬하다. 이 보살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 어깨에 늘어뜨린 상태고 하의는 군의를 입고 있다.

옥개석을 삿갓형태를 하고 팔각 옥개면은 앙곡(仰曲)과 안허리가 분명하며 처마선도 경쾌한 곡면을 나타내고 있다. 옥개 상면은 팔엽복 판연화문의 연화관이 덮혀 있고, 그 위로 호형과 각형의 층급 받침대가 2단 마련되었다.

상단 상륜받침대 동서측 중앙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홈이 파여 있기도 하다.

처마 안쪽에는 깊이 28mm, 너비 20mm 절수구(切水溝)가 돌려지고 중앙에는 옥개받침대가 2단 각출되어 있다.

내부 상면은 상륜부를 낄수 있는 간공이 지름 220mm로 뚫려있고 구멍은 처마쪽으로 갈수록 점차 옥개면의 형태로 넓게 벌어져 있다. 상륜부는 원래 보주형의 연봉이 있었는데 현재는 보륜의 중간부까지만 남아 있다.

상륜은 하단부에 촉이 잇어 옥개석에 끼워지게 되고 외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3단 받침이 있고 보륜 중앙허리에는 4엽의 만개한 연화문이 띠와 함께 돌려져있다. 이외에 석등과 동일한 시기와 양식으로 조성된 배례석이 석등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석등과의 거리는 800mm이고 안양루와의 거리는 2,250mm 떨어진 상태로 그 형태는 장방형이며 1,420mm x 850mm x 300mm 크기이다.

배례석 상면 중앙은 자방이 큰 팔엽단판에 간엽이 있는 연화문이 양각으로 시원스레 장식되어 있다.

특히 넓은 자방 외곽에는 원형의 선대가 돌려 있다.

사면에는 상,하에 걸쳐 각대가 한 단씩 각출되어 있고 사이에 인상이 나즈막하게 파여 있는데 앞뒤에는 4개의 안상이, 좌,우 측면에는 2개의 안상이 각각 장식되어 있다. 이들 안상 아랫면은 하단부에 마련된 받침대와 바로 연결되는데 받침대는 3단이 넓게 마련되어 안정감 있다.

이 석등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가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 하석위에 팔각의 복엽 복련대석이 놓여 이루어진 점과 연화대 첨단부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 점, 그리고 화사석 사면에 보살이 장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즉 종래의 방형의 기단 형태에서 팔각 형태로 바뀌어 가는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단부 하대석의 연화대 받침대가 원형에서 팔각으로, 그 상면은 간주받침대가 굽형으로 각축된 점 등 양식의 세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간주석을 받치게 되는 연화대석 상면의 각형과 고형의 4단의 받침은 형태가 장식적인 층단이 마련되므로, 연화대석의 높이는 그 폭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다.

상대 양련의 연판 내에는 화문이 있고 상대석의 두께도 하대석의 연화대석처럼 얇은 편이며, 이들 상,하대석의 간엽은 2단의 중변 구조를 하고 있다.

 

  

 

화사석의 4개의 화창이 개설된 벽면 4벽에 사천왕상 대신 보살입상이 장식된 것은 매우 특징적이며, 옥개석은 옥개마루 쪽이 갑자기 들려 안허리곡이 심해 날카로운 감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연화문의 간엽이 중판인 점, 기단부에 귀꽃과 간주석 받침대의 발생, 그리고 상대 연화문 내의 보상화문이 화사석의 보살상의 장식 등과 같은 세부 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 ♧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국보 19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1916년 해체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3년(1377)에 원융국사가 세웠고, 조선 성종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 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 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보다 간결하다.

 

 

               ▲ 조사당 편액(左)와 조사당 측면(右) 

  

               ▲ 조사당 내부가구(左), 연등천장(中) 그리고 정면공포(右)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 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 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이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원본을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선비화)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 였다는 전설이 있다.

 

◆ 조사당 선비화(禪扉花)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에 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한다. 이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라고 부른다.

 

♧ ♧ 부석사 조사당 벽화(祖師堂 璧畵) 

*국보 46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설파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 안쪽 벽면에 사천왕,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일제강점기에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유리상자에 담아 보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백색, 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cm, 폭 75cm 가량이다.

조사당벽화는 천왕상 각 1면과 보살상 2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그 내용을 조사당내진(內陳) 원위치의 순서대로 보면 1)보살상(불명미상), 2)다문천왕상, 3)광목천왕상, 4)증장천왕상, 5)지국천왕상, 6)보살상(불명미상) 이다.

양쪽의 두 보살상은 보살상이 지니는 정일감을 잘 살려서 정적이고도 유려한 선을 잘 구사하여 고려조 예술이 지니는 아름다운 선의 성격을 잘 보여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벽화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벽화(1308년 건립), 개성 수락암동고분벽화, 장단 법당방고분벽화, 개풍군 공민왕릉벽화 등이 있으나 회화적인 격조로 보나 그 보존상태로 보나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벽화를 대표하는 것은 이 조사당벽화이다.

그러나 도리 하단에 1201년에 개체한 것을 다시 1493년에 개체하였다고 한 묵서명의 기록으로 보아 1377년 제작설은 제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사천왕상의 표현 기법은 '인종일체'의 선각 천부상과 같은 12세기 작품과 비교되며, 14세기 불화의 양식보다는 유연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이들 벽화의 제작시기는 1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조사당 벽화(사천왕상)

 

원래의 건축이 황폐되었을 당시 우루로 오염된 부분이 남아있고 또 후세의 묵서 낙서 등도 화면을 더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 그 채색이 발견 당시보다 약간 퇴색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우려된다.

 

사천왕상

귀부인 같은 느낌을 주는 보살상과는 달리 수호의 임무를 맡은 사천왕상은 그들의 성격처럼 굴곡이 심한 활달한 곡선을 구사하여 매우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방의 수호신인 지국천왕은 새털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왼손에 칼을 든 채 악귀를 밟고 서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어깨를 들어올리고 몸은 오른쪽으로 틀고 있어 활달하고 율동적인 모습이다.

서방 광목천왕은 사천왕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외호신다운 위엄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두 발로 악귀를 단단히 누르고 서서 칼을 잡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있으며, 다른 상과는 달리 한 발을 들어올려 악귀를 밟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 ♧ 부석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1963년01월21일 지정)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었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종선문대(세로줄)가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간대석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지주이나.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4.8m이다.

 

♧ ♧ 부석사 고려목판(高麗木板)

*보물 제735호(1982년05월12일 지정)

*수량:3종 634판

 

 

부석사 고려목판은 부석사에 있는 '화엄경' 정원본(貞元本) 40권, 진본(晋本) 60권, 주본(周本) 80권 등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을 나무판에 새긴 것으로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화엄종의 기본 경전으로 크고 방정하고 넓은 뜻을 가진 법계를 증독하신 부처의 설법을 화려한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은 경전이며, 법화경과 함께 한국불교사상 확립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정원본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가리킨다. 이 판은 모두 합쳐 634판이며 한줄에 34자씩 글자를 배열한 특이한 형식이다. 이 화엄경판은 고려 희종의 아들인 충명국사 때(13세기)나 원응국사 때(14세기) 새긴 것으로 보인다.

13~14세기경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나무판에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거란본 계열의 각판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晋本)

*보물 제735-1호(1982년05월12일 지정)

*수량:122판(240장)

이 판본은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진본 60권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인데 모두 239판으로 이루어졌다.

진본 권32에 선조1년(1568)에 새겨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원판을 새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6판을 보충하여 새겼고, 7장이 중복되었으며, 13~14세기경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진본 권32에 '융경2년무진정월일 경상도 영주지 태백산 부석사개판'이라는 간기가 있어 보각판은 선조1년(1568)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주본(大方廣佛華嚴經周本)

*보물 제735-2호(1982년05월12일 지정)

*수량:239판(472장)

이 판본은 당나라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 80권으로 고려시대에 만든 것인데 모두 273판으로 이루어졌다. 진본 권32를 보면 선조1년(1568)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원판을 새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4장이 중복되어 있으며 7판을 보충한 판으로 13~14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大方廣佛華嚴經貞元本)

*보물 제735-3호(1982년05월12일 지정)

*수량:273판(538장)

이 판본은 당나라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정원본 40권으로 고려시대에 만든 것인데 모두 122판으로 이루어졌다.

화엄경 진본 권32에는 선조1년(1568)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원판을 새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글씨가 작고 촘촘히 쓰여 있으며, 풀이가 없는 판본으로 13~14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49호(1963년01월21일 지정)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 삼층석탑 2,3층 옥개석(사진 中)과 상,하단부의 우주와 탱주(사진 右)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등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으로 문무왕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8매석으로 짜였고, 중석 각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에서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탑신의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어 있으며,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잇다.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이는 동쪽을 향해 안치된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방향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1960년 해체수리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높이 5.26m, 기단 폭 3.56m이다.

 

                                                                                             ▶ 삼층석탑 상층 기단 갑석위 탑신 괴임

 

♧ ♧ 부석사 복지리 석조여래좌상(高麗木板)

*보물 제220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2구

원래 부석사 동쪽 산 너머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서 양식상 동일한 조각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단아하면서 인간적인 형태나 선의 특징, 몸의 자세 등에서 9세기 후반 불상양식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법의를 얇게 빚은듯한 평행밀집 옷주름과 상,중,하대로 구성된 대좌, 만곡이 심하고 끝이 날카로운 배모양의 광배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두 손은 없어졌지만 두 팔이 가슴 쪽으로 올라가 있어 지권인이 비로자나불상으로 추정된다.

 

 

                      ▲ 복지리 석조여래좌상 동불상(사진 左)과 서불상(사진 右)

 

동쪽의 여래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두 팔이 가슴쪽으로 올라가 있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모양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당시 유행하던 얇게 빚은 듯한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대좌의 가운데 부분은 8각인데 각 면에는 수호신인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서쪽의 여래상은 동쪽의 여래상보다 종 더 당당하며 불신의 선들도 부드러운 편이다.

이 불상들은 9세기 후반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예로 당대의 불교사상의 특징과 불상양식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숨을 몰아쉬고 오르면 범종루가 눈앞에 나타나고, 이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2구(동탑, 서탑)의 쌍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 탑들은 부석사 동쪽 일명사터에 있던 것을 1966년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탑들이지만 부석사의 경관을 흐트리지 않고 잘 조화되어 있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이 377cm로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은 거의 같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보물 제249호 부석사 삼층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 천왕문 지나 안양문 직전에 설치된 삼층석탑등 : 동탑(사진 左)과 서탑(사진 右)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재된 모습으로 신라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윗부분은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져있는 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한다.

 

♧ ♧ 부석사 안양루(安養樓)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있는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측 마당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떨어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스라이 보이는 백두대간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된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오는데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있다.

 

♧ ♧ 부석사 선묘각(善妙閣)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 그린 선묘의 영정이 있다. 

 

 

                      ▲ 부석사 일주문 

                       ▲ 부석사 천왕문

                      ▲ 천왕문에서 바라본 바깥 세계

                      ▲ 부석사 지장전

 

이외에도 부석사에는 안양루와 함께 부속사의 2개의 누각 중 하나인 범종루,

칠성, 독성, 산신 세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한 삼성각.

만세루 위쪽 석축단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골계 맞배집으로 1980년 보수 정화공사 이후 신축한 범종각,

부석사 고려목판(보물 제735호)과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를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석축단 위,아래 건물 2동으로 이루어진 보장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 건물로 나한을 모신 응진전,

선방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집인 자인당. 현재 실내에는 부석사 동쪽 산 너머 약1.5km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온 보물 제220호인 복지리 석조여래좌상이 석가여래의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최근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남도리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한 단하각,

요사채로 사용중인 선열당, 응향각 등 여래 채의 부속 건물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