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철원(鐵原)의 겨울 제Ⅳ편 도피안사(到彼岸寺)

왕마구리 2013. 1. 22. 11:33

◀ 아름다운 한탄강이 감아도는 통일의 땅!!! 철원의 겨울을 찾아서...

【 철원군(鐵原郡) 소개 】

강원도 철원군은 총 면적이 898.4㎢이고, 둘레는 212km, 동서의 폭은 96.4km, 남북의 길이는 25.7km로 평강군 북방산을 수원으로 한 한탄강과 서면, 근남면으로부터 화강(남대천)이 갈말읍 북쪽에서 합류하여 깊은 계곡을 이룬 한탄강이 동송읍과 갈말읍의 경계를 따라 임진강에 합류하고 있다.

대체로 동북방은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으며, 중부와 서남방은 비교적 언덕과 평야를 이루어 대철원 곡창지대를 만들고 있다.

고구려시대에는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 불리었고, 신라의 경덕왕 때 철성, 그 후 궁예가 901년 도읍을 풍천원(현 철원군 북면 흥원리)에 정하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였으며,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개칭하여 18년간 통치하였다.

919년 고려 태조 때 철원으로 개칭한 후 동주로 개명하였으며, 충성왕2년(1310) 다시 철원부가 되었다.

세종16년(1434)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으며, 영조22년(1747) 춘천으로부터 전관도호부를 이설하여 3부 6현을 관할하였다. 고종32년(1895) 5월26일 춘천부 철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다.

1945년 8.15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철원군 전역이 공산치하에 들어 갔다가 한국전쟁이후 국군의 북진에 따라 일부 지역이 수복되었으며, 1963년 1월1일부로 김화군 중 8개 읍면이 철원군에 편입되고, 신서면이 경기도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4개읍(철원, 김화, 갈말, 동송읍)과 7개면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철원군의 심벌마크(사진 左), 마스코트(사진 中), 그리고 캐릭터인 철루미(사진 右)

 

이번 철원군 탐방은 철원팔경(고석정, 삼부연폭포, 직탕폭포, 도피안사, 매월대폭포. 토교저수지, 순담계곡, 제2땅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철원팔경의 인근에 자리한 노동당사, 승일교 등을 이동 중 추가로 탐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철원팔경 중 제2땅굴은 7년 전 한 차례 방문을 한 적이 있었고, 제2땅굴과 월정리역은 민통선 이북의 군사지역이라 탐방을 위해서는 고석정국민관광지 매표소에서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어 이번 탐방에서는 제외를 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인 토교저수지와 천통리 샘통 2곳의 탐방을 계획하였다가 토교저수지의 겨울철새인 독수리들만 탐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샘통 철새도래지는 방문을 포기하였다.

이번 철원군 겨울탐방 내용은 총 5편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Ⅰ편 : 빙벽을 이룬 철원의 겨울 폭포들 직탕폭포(直湯瀑布), 매월당폭포, 그리고 삼부연폭포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Ⅱ편 : 임꺽정의 활동무대였던 한탄강의 국민관광지 고석정(孤石亭)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Ⅲ편 :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순담계곡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Ⅳ편 :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국보 및 보물)를 보유한 철원의 사찰! 도피안사(到彼岸寺)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 Ⅴ편 : 안보관광명소인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노동당사(勞動黨舍)와 승일교(承日橋)

 

【 일 정 표 】2013년 1월 14일(월)-15일(화) 1박2일

                     ◈ 첫째날(1/14) 오후 : 토교저수지-노동당사-도피안사-직탕폭포-고석정

                     ◈ 둘째날(1/15) : 매월당폭포-순담계곡-승일교-삼부연폭포

 

◀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철원의 겨울(Ⅳ편) : 도피안사(到彼岸寺) 

통일신라시대의 찬란한 문화 역사!!!

철원군내 유일한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와 보물을 보유한 도피안사!

 

 

【 도피안사(到彼岸寺) 】 

*소재지: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0번지

 

 

통일신라 제48대 경문왕5년(865) 도선국사가 향도 천여명을 거느리고 천하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하여 화개산 현 위치에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국보 재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보물 제233호인 삼층석탑을 조성한 후 사찰 이름을 도피안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도선국사가 높이 91cm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제조, 철원읍 율리리에 소재한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여러 승려들과 같이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이 불상이 갑자기 없어져 그 부근 일대를 찾다가 현위치에 그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조그만한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 하여 절 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며 절내에는 도선국사가 제조한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 도피안사의 보호수인 느티나무(수령 600년/지정일:1982년11월13일, 수고 22m, 나무둘레 3m)

 

조선 광무2년(1898) 재화를 입어 당시 주지 법운 스님이 재건했고, 1941년 1월 주지 김희권 스님이 사찰을 개수하여 전통사찰로 이어져 오던 중 해방 후에는 공산치하에 있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 소실된 것을 1957년 11월 육군 제15사단에서 복원한 후 군부대에서 관리해오다 1986년 사찰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1988년부터 정부지원으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을 개축하고 범종각, 사천왕문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에는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 되었다가 현재는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철원팔경 중의 하나이다.

 

 

 

                  ▲ 도피안사의 안내도(사진 上)

                      도피안사의 사천왕문(사진 下左)과 해탈문사진 下右)

 

◈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座像)

*국보 제63호(1962년12월20일 지정)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에 모셔진 철제 불상이다.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에 크게 유행하던 철로 만든 불상의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이 불조상은 신체와 대좌가 모두 철로 된 신라말의 보기 드문 불상이다.

뒷면에 새겨진 100여 자의 명문 가운데 "함통(咸通)6년 기유(己酉) 정월(正月)"의 문구가 있어서 이 불상의 제작 시기는 신라 경문왕5년(865)임을 알 수 있다.

살상투의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점, 계란 모양의 단정한 얼굴, 이상적이며 생동하는 느씸이 사라진 극히 현실적인 체구 등에서 우리는 당시의 참선하고 있는 스님을 대하는 듯한 친근힌 느낌을 받는다.

법의에는 얇게 빚은 듯한 평행 옷주름이 전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철원군의 거사, 신도 1,500여명의 열렬한 신앙심에서 만든 것으로서, 당시의 활발했던 불교신앙 결사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이와 함께 이 불상은 당시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23호(1963년01월21일 지정)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윗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둘러 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