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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 맑은 물! 아름다운 함양(咸陽)을 찾아서... 제Ⅵ편 개평(介坪)마을

왕마구리 2012. 12. 17. 22:15

◀ 산삼고장!!! 물레방아고을!!! 함양을 찾아서

경상남도 서북단에 위치한 함양군은 동쪽으로 산청군, 서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와 장수군, 남쪽으로 하동군, 북쪽으로는 거창군과 인접해 있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북쪽과 서쪽으로 이어지며 2개의 국립공원(지리산, 덕유산)이 자리한 함양군은 1읍(함양읍) 10개 면, 103개 리, 256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2년 11월 현재 인구는 40,727명이다.

선비의 고장을 일컬을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듯이,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던 일두 정여창 선생을 비롯하여 뛰어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선비의 고장으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다.

벗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학문을 논하던 정자와 누각이 마을마다 100여개 세워져 있으며, 선비의 기개, 가문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 뿌리 깊은 양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고장이다.

유서 깊은 고색창연한 고택이 즐비한 개평마을, 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 태수 최치원이 조성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인 함양상림, 과거보러 한양으로 향하던 영남 유생들이 육십령 고개를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이 위치한 화림동계곡의 '팔담팔경'을 감상하며 풍류를 즐기던 선비문화탐방로,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 등 자연 속에 녹아있는 500여년이 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곳이다.

이번 함양 여행은 총 4편으로 나누어 여행지를소개해볼까 한다.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 Ⅰ편 : 옛 성현들의 발자취를 찾아 선비문화탐방로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 Ⅱ편 : 함양 안의면내의 볼거리들(안의향교. 허삼둘가옥, 광풍루)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 Ⅲ편 : 천년의 숲! 함양상림(咸陽上林)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 Ⅳ편 : 함양읍내의 볼거리들(학사루느티나무, 학사루, 함양향교, 교산리석조여래좌상)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 Ⅴ편 : 한국 두번째 사액서원! 남계서원(灆溪書院)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 Ⅵ편 : 선비정신을 만나다! 개평마을

 

【 일 정 표 】2012년 12월 10일(월)-11일(화) 1박2일

                     ◈ 첫째날(12/10) 오후 : 선비문화탐방로-안의면 명소(안의향교, 허삼둘가옥, 광풍루)

                     ◈ 둘째날(12/11) : 함양상림-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학사루-함양교산리석조여래좌상(보물)-함양향교-남계서원(사적)/청계서원-개평마을

 

◀ 푸른 산! 맑은 물! 함양을 찾아서(Ⅵ) : 개평마을

500여년이 훨씬 넘는 역사의 마을! 

유서 깊은 고색창연한 고택의 마을! 

 

함양 여행의 마지막 탐방지이다.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 온 유서 깊은 고택이 즐비한 개평마을은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두 개울이 하나로 합류하는 그 사이에 자리를 하고 있다.

마을 돌담길을 따라 유서 깊은 고가들을 찾아 탐방을 하였으며, 5개의 고가 중 사람이 실제 거주라고 있는 풍천노씨대종가는 대문이 잠겨 있는 상태라 방문을 하지 못하였다.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 마을을 둘러보는 것 외에 '일두산책로'를 둘러보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 탐방이었다.

 

 

 

【 함양 개평마을 소개 】 

*소재지: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양반의 고장을 이야기할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듯이, 함양 역시 안동에 못지않게 양반의 고장으로 손꼽힌다.

그만큼 선비의 기개, 가문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 뿌리깊은 양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고장이다. 함양 가운데도 지곡면에 자리한 개평마을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여창의 고향으로 500여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오담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풍천노씨대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하동정씨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 수백년 동안 대물림해온 유서 깊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이들 가운데 오담고택, 풍천노씨대종가, 노참판댁고가는 실제 사람이 거주하는 주거공간이다.

개평이란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자 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하였다.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울이 하나로 합류하고,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 서 있다.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마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일두산책로가 있는데, 지곡초등학교에서 개울 건너편 낮은 언덕을 따라 수십 그루의 늠름한 소나무군락을 지나 선암공원의 정자와 마을회관, 정일품농원을 거쳐 마을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일두산책로의 소나무군락은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300~400년 된 적송이다.

개평마을을 둘러보는 고살길은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담장의 곡선과 이끼가 낀 기와를 이고 있는 기와지붕에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길이 나 있는대로, 발걸음 닿는대로 그냥 순서에 관계없이 걸어 마을을 둘러보는 길이다.

마을길을 따라 걷다보면 숨어있는 보물인 유서깊은 고가들이 곳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 함양 일두고택(咸陽 一蠹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유배와 죽음, 부관참시까지 우환이 이어져 집안을 쉽게 일으키지 못하다가, 현재의 집은 선생이 타개한지 100년 후 후손에 의하여 중건된 것이다.

고택에는 3,000여평의 대지에 17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잘 구획된 12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이며, 사랑채와 안채는 조선 후기에 중수된 것이다.

 

 

 

                  ▲ 솟을대문과 안쪽의 홍살문(사진 上)

                     홍살문 상단에 붙어있는 5개 현판/정려(사진 中)

                     집안에서 뒤돌아본 솟을대문과 문간채(사진 下)

 

고택 입구 솟을대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함께 붉은 색 목판에 흰 글씨가 쓰여있는 5개의 편액이 눈길을 끄는데, 이 편액들은 나라에서 하사한 충,효 정려(충신, 효자, 열녀가 살던 고장에 붉은 색을 칠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집안의 자랑이자 자부심을 표시하는 하나의 정표이다.

 

                  ▲ 곳간(左)과 사랑채(右) 사이의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

 

일두 정여창의 조부를 비롯하여 후손이 하사받은 정려가 5개로, 한 집안에서 정려를 5개나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 사랑채(사진 上)

                     사랑채의 현판(사진 下)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 방향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높은 축대위에 다부지게 올라앉은 사랑채는 'ㄱ'자형의 평면에 내루가 앞 쪽으로 달린 건물이며,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고 가늘고 긴 석주를 초석으로 삼았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白世淸風) 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위에 세워져 있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 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 안채(사진 上)

                     안채 앞 마당의 굴뚝과 우물(사진 中)

                     안채 맞은 편 안곳간의 문(사진 下)

 

남향한 一子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하다.

 

 

                  ▲ 안채 옆에서 바라본 아래채(사진 上)

                     안사랑채와 객사(사진 下)

 

안채 좌측으로는 아래채가 있고, 뒤편에는 가묘와 별당, 그리고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옛 손길이 고스란히 베여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여창 고택은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며, 정여창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이라 한다.

 

                  ▲ 안사랑채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 

 

                  ▲ 사랑채 앞 마당의 정원인 석가산

 

일두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집 안에 석가산을 조성해 놓았다는 것인데, 사랑채 누마루 앞에 조성한 석가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이라는 뜻이다. 산에 흙과 돌, 물과 나무가 있듯이 마당 안으로 산을 끌어들여 자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원을 만든 셈이다.

 

                  ▲ 솟을대문을 통해 바라본 사랑채

 

1987년 KBS대하드라마 '토지(최수지, 윤승원 주연)'의 최참판댁 촬영지, 2003년 MBC드라마 '다모(하지원, 김민준, 이서진 주연)'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문화유적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함양 오담고택(咸陽 梧潭古宅)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7호

 

                  ▲ 오담고택 

                  ▲ 오담고택 안채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전,후 툇집으로 기단은 자연석을 3~4단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방주이며 약간 민흘림을 두었다.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며 우측 방 전면의 툇마루는 약간의 높이 차를 두었다.

 

 

 

                  ▲ 오담고택 사랑채

 

 

중도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해 사랑채가 1838년, 안채는 1840년 등 건립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부재의 단면 크기가 크지는 않으나 자연재를 그대로 사용한 가구기법이나 안채, 사랑채에 모두 전,후 툇칸을 적용한 점 등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로서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 계층의 주거 형태를 볼 수 있는 건물이다.

▷ 오담 정환필(1798~1859)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 후손으로 생전에 경로효친 정신을 제일 덕목으로 실천하였으며,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노사(기정진 1798~1876) 선생과 함께 남계서원의 "풍영루"에 대한 글을 찬술하여 일두 선생의 높은 학문적 경지를 재조명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장력이 특출한 학자였다.

 

♧♧ 하동정씨 고가(河東鄭氏 古家)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1호

 

 

1880년에 지은 집으로서 당초 건립시에는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훼절되어 현재의 모습만 남아 있다.

 

 

 

 

                  ▲ 하동정씨고가의 안채

 

특히 안채는 남도의 특징인 一자형 건물에 개방형이며,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퇴를 두었으며, 맞배지붕에다가 부섭지붕을 하였다. 건물 배치 형식에서 조선후기 남부지방 상류층 주거의 전형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크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며, 본 고택의 소유자인 정병조 선생은 성균관대학장과 문공부 차관을 역임했다.

 

♧♧ 함양 개평리 노참판댁고가(咸陽 介坪里 盧參判宅古家)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0호

 

 

                  ▲ 사랑채(사진 上)

                     안채(사진 下)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사초 노근영(1875~1944)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의 호가 사초여서 사람들은 노사초라고 불렀으며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검소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재산을 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 등지로 다니면서 가다리 8단과 혼다슈고 초단에게 백을 들고 만방으로 이기는 등 프로기사가 없던 시절에 조선 바둑계의 국수로 불려졌다.

특히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갔다가 바둑 친구를 만나 약을 손에 든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가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긴 바둑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선생의 증조부 감모재 노광두(1771~1859)공이 만년에 낙향하여 기거한 곳으로서 공은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렴하였다. 특히 이 지방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임금께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상소하여 탕감을 받게 된 인근의 주민들이 그 고마움으로 재물을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아 사랑채를 지어주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전국적으로 찾아 볼 수 없는 드문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