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청도는 경상남도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새마을운동은 1969년 8월초순 경상남도 수해복구 시찰시 경부선 철로변에 위치한 신도마을의 지붕개량, 하천, 안길 등이 잘 가꾸어진 모습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착안,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제창하였다.
청도는 세계 최초 돔형식인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하여 농경문화가 시작되는 시대부터 즐기던 소싸움을 전승하고 있으며, 특산물로는 씨가 없고 육질이 유연하여 당도가 높고 수분이 많아 홍시로 전국의 제일인 청도반시와 독특한 향이 살아있고 씹는 맛이 달고 연하여 마디가 짧고 탄력이 있는 한재미나리가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거리상으로 서울에서 멀어 당일 탐방으로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관광지들을 두루 찾아가기에는 불가능하여, 오후 늦은 시간에 도착한 첫째날은 영남 7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운문산 지맥의 호거산 기슭에 위치한 운문산자연휴양림에서 숙박을 하고, 둘째날 청도의 명소를 찾아 본격적인 탐방을 실시하였다.
짧은 일정으로 이번 탐방에서 방문하지 못한 관광 명소는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인접지역(밀양시) 탐방과 묶어 탐방해 볼 계획이다.
이번에 탐방한 청도의 명소들은 각 관광명소별로 아래와 같이 총 6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화랑정신과 삼국유사가 시작된 곳! 운문사(雲門寺)
- 조선 상류계층의 고택과 6.25때 이승만 대통령이 묵었던 운강고택(雲岡故宅)과 만화정(萬和亭)
- 골짜기 절벽위의 천불탑! 불령사전탑(彿靈寺塼塔)
- 버드나무를 닮은 유송(柳松)! 청도 동산리 처진소나무
- 신라시대 창건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찰들! 대비사(大悲寺)와 대적사(大寂寺)
- 폐터널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와인터널
【 일 정 표 】2013년 11월 25일(월)-26일(화) 1박2일
◈ 첫째날(11/25) : 운문산자연휴양림
◈ 둘째날(11/26) : 운문사-운강고택&만화정-불령사전탑-동산리 처진소나무-청도 박곡동 석조석가여래좌상-대비사-대적사&와인터널
◀ 화랑정신과 삼국유사가 시작된 곳! 운문사(雲門寺) ▶
비구니 전문강원이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승과대학!
【 운문사(雲門寺)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진흥왕18년(557)에 한 신승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 10여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소작(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대작갑사인 운문사와 소작갑사인 대비사 뿐이다.
신라 진평왕22년(600) 원광국사가 중창하였는데,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 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태조20년(937)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죽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 숙종10년(1105)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인조7년(1129)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물며 '삼국유사'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최고에 이른다.
그 후 제5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고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내원암, 북대암 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약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있으며 운문승과대학은 국내 승과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처진소나무 외 30여동의 건물과 7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 운문사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운문사 대웅보전(雲門寺 大雄寶殿)
*보물 제853호(1985년01월08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신라 진흥왕(540~576) 대작갑사로 창건된 운문사는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쳤다. 현재 가람은 조선 숙종44년(1718)에 네 번째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14.7m), 측면 3칸(12.8m)의 팔작지붕으로 외3출, 내4출목 다포계의 공포를 구성하고 짜임새도 건실하다. 천장은 1고주 5량가로 4면에 빗천장을 돌리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두었다.
▲ 운문사 대웅전(비로전) 측면 전경과 내부 모습
▲ 운문사 대웅전(비로전) 불단(사진 左)과 내부가구와 천장(사진 右)
기둥은 민흘림을 사용하였으며 전면에서 보아 모서리 네 기둥을 2치의 귀 솟음을 하여 건물의 상승감을 더하였고 건물 안쪽의 고주2개를 합하여 14개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추녀 %끝 부분에 활주를 세워 귀마루의 하중을 받게 하였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관계로 주초면이 평탄하지 않아 기둥 및 부분을 깎아 맞춘 기법을 사용하였고 단청은 금단청이다. 창호는 전면 전칸에 꽃갈문 분합을 달고 어간은 넓어 5짝 분합문을 달았는데 꽃잎무늬가 있는 문은 한 짝만이 남아 있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 이 전각은 아홉칸 규모의 법당으로 1988년 실측 조사시 상량 도리 밑에 별도로 설치된 상량문에는 "세차순치십년계사구월일(歲次順治十年癸巳九月日)"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효종4년(1653)에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운문사 대웅보전은 만세루 뒤에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비로전을 중,개수하여 대웅보전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雲門寺 東.西 三層石塔)
*보물 제678호(1980년09월16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 운문사 대웅전(비로전)앞 동,서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운문사 대웅보전 앞에 동쪽과 서쪽에 1기씩 배치되어 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이다. 기단은 모두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팔부증상이 앉아 있는 자세로 조각되어 있다.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겨놓았다.
▲ 동탑(사진 左)과 서탑(사진 右)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 받침), 복발(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의 머리장식), 양화(활짝 핀연꽃 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는데 본래의 것들이다. 기단의 가운데 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보수하였는대 이때에 팔부중상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 운문사의 기도효험이 있는 암자들 』
운문사는 소속 암자로도 유명하다.
특히 문수선원, 내원암, 청신암, 북대암, 사리암은 운문사가 자랑하는 암자 중의 암자인데, 그중에서도 북대암과 사리암은 가장 효험이 있는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리암은 세 번 오르면 원하는데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퍼져 기도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사리암 근처에 있는 사리굴은 옛날에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이 머물면 한 사람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고, 두 사람이 머물면 두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ㅈ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서 구멍을 넓혔는데, 그 후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 운문사 석조여래좌상(雲門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17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높이 0.63m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잔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 작은 눈, 오뚝한 코, 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내의가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사천왕상이 있는 작압전
▲ 작압전 내의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사천왕상
♧ 운문사 석조사천왕상(雲門寺 石造四天王像)
*보물 제318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기둥이다.
운문사 작압전안의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각가 2기씩 모두 4기가 돌기둥처럼 서 있으며 각 석주마다 사천왕상이 1구씩 조각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손에는 삼고저(양쪽 끝이 세갈래로 된 금강저), 보탑(부처의 경전이 들어있는 탑), 꽃가지, 장검을 들고 있으며, 각 부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 서쪽이 광목천왕, 남쪽이 증장천왕, 북쪽이 다문천왕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 운문사의 막걸리 마시는 소나무 』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처진소나무가 있다.
400여년을 살아온 이 소나무는 가지가 땅에 닿을 듯이 축축 처져 있는 희귀한 형태의 소나무이다. 특히 이 소나무는 매년 삼월 삼짓날 운문사의 스님들로부터 '막걸리 공양'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막걸리 열두말에 물 열두말을 섞어 부어주는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 쇠약해진 소나무를 살리고자 선대 스님들이 고안해낸 지혜라고 한다. 스님들의 정성 덕분인지 소나무는 다시 살아나 푸르름을 되찾았고, 그 후로도 매년 막걸리를 마시며 운문사의 상징으로, 또 스님들에겐 겸허함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굳건히 서 있다.
♧ 운문사 처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1966년08월25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희귀하다.
간혹 야생상태에서는 보고된바 있으며 소나무가 눌렸을 때 가지가 위로 뻗지 못하여 밑으로 처져있다가 그대로 굳어진 것은 있으나 이 소나무는 전혀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이다. 또한 가지에 많은 지주가 떠받치고 있는데 지주가 없다면 굵은 가지가 땅에 닿았을 것이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9.4m, 둘레는 3.37m, 가지는 동 8.4m, 서 9.2m, 남 10.3m, 북 10m로 30여평을 뒤덮고 있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고하니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다 심었다는 이야기와 어느 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거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운문사 원응국사비(雲門寺 圓鷹國師碑)
*보물 제316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 원응국사비가 보관된 비각
고려시대의 비석이다.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업적과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석의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어졌지며, 세쪽으로 갈라진 비몸만 복원되었다. 비몸은 높이 2,28m, 너비 1.8m, 고려의 명문장가 금강거사 윤언이(1090~1149)가 비문을 짓고 대감국사 묵암 탄연(1069~1158)이 썼다.
원응국사는 고려 숙종 때의 승려로 11세에 입산하여 희함스님에게 학문을 배웠다. 송나라애서 천태교관을 배우고 귀국하여, 예종17년(1122)에 왕사로 책봉되었다. 인종22년(1144)에 "이 몸은 한 조각 구름, 남김없이 흩어지지만 둥구렷한 달 하나 있어 맑은 빛 허공에 넘치리"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93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비받침, 비몸, 머릿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짐작된다.
『 화랑정신과 삼국유사가 시작된 곳, 운문사 』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21년(560)에 신승(新僧)이 창건한 후 608년 원광국사가 고쳐 지었다. 운문사에 머물던 원광국사는 어느 날 일생의 좌우명을 묻고자 찾아온 화랑 추항과 귀산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내려준다.
세속오계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죽이는 일을 삼가하고,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정신이다. 세속오계는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 위대한 화랑정신이 되었다.
그 후 운문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일연선사가 주지로 추대되어 수행을 하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역사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이후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자리잡았으며, 1987년에는 승가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어, 260여명의 비구니들이 공부하며 수행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도량이 되었다.
♧ 운문사 금당 앞 석등(雲門寺 金堂 앞 石燈)
*보물 제193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운문사 금당옆 황금탑을 밝히기 위하여 세워진 8각 석등이다.
높이 2.58m. 바닥돌과 아래 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아래 받침돌에는 잎이 여덟 장인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윗 받침돌도 각 면마다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은 네 면 모두 창을 내었으며, 지붕돌(옥개석)의 추녀는 직선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또한 꼭대기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아한 모습과 우수한 조각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그러나 금당과 불이문을 경계로 석등이 있는 금당 앞마당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라 출입이 제한된 지역이라 자유로운 관람이 불가능하다.
▲ 담장 밖에서 바라본 금당 앞마당의 석등
▲ 석등과 석등으로 가는 금당옆 불이문
♧ 운문사 동호(雲門寺 銅壺)
*보물 제208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이 항아리는 전체가 흑색을 띠고 있으며 무엇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감로준(甘露樽)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 용기의 하나로 추측된다.
높이 55cm, 아가리 지름 19.5cm, 몸지름 31cm로 뚜껑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표현하였고 위로 6장의 연꽃잎과 ┼자형으로 된 불꽃 모양이 있는 높은 손잡이가 달려 있다.
어깨는 넓고 밑에 굽이 달린 항아리로 몸체의 좌우에는 손잡이 역할을 하는 굵은 고리가 달려 있다. 몸의 높이 33.5cm에 비해 뚜껑 높이가 24cm 로 매우 높은 비율을 보이며, 특이한 뚜껑 손잡이 형태가 주목된다.
특히 뚜껑 손잡이의 불꽃 모양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만든,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부도의 머리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과의 연관성이 짐작된다.
어꺠 부분에 제작시기와 관련된 글이 쓰여 있는데 고려 문종21년(1067)에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제작연대는 이보다 앞선 신라 말이나 고려 초가 아닌가 추정된다.
동호는 전시되어 있지 않아 볼 수가 없다.
♧♧ 운문사의 기타 불전들과 진입로인 솔바람길
『 운문사 진입로인 솔바람길 』
『 기타 불전들 』
▲ 경내로 들어서는 출입문인 범종루
▲ 경내 중심에 자리한 만세루
▲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새로 중건된 대웅보전과 그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과 조영당
▲ 대웅보전
▲ 관음전(사진 左)과 명부전(사진 右)
▲ 칠성각(사진 左)과 현재 일반인의 입이 금지된 금당(사진 右)
▲ 삼층석탑이 자리한 대웅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비로전과 금당 사이의 전경
▲ 청도 운문 에코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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