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경북 북부 나드리 : 역사와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 (예천)문화유산의 보고! 천년고찰 용문사

왕마구리 2014. 3. 15. 00:35

빼어난 산수와 아름다운 옛 전통문화가 조화롭게 살아 숨 쉬는 경북 북부유교권은 우리 유교문화의 보고이자 친환경 웰빙여행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수려한 산과 계곡, 질 좋은 온천과 드넓은 동해 바다가 있어 어느 계절에도 다양한 레포츠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이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안동시, 영주시, 상주시. 문경시, 의성군, 청송군, 영양군, 예천군, 봉화군, 울진군 등이며, 이번 경북 북부 나드리는 1박2일 일정으로

상주시의 화달리 삼층석탑 및 전사벌왕릉, 경천대

예천군의 회룡포, 용문사, 초간정과 초간정원림, 금당실송림, 예천권씨초간종택, 그리고 개심사지 오층석탑

안동시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등의 명소들을 방문하였다.

이번 탐방지는 각 지역별로 구분하여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일 정 표 】2014년 2월 20일(목)-21일(금) 1박2일

    ◈ 첫째날(2/20) : (상주)화달리 삼층석탑 및 전사벌왕릉-경천대-(예천)회룡포

    ◈ 둘째날(2/21) : (예천)용문사-초간정 및 초간정원림-예천금당실송림-예천권씨초간종택-개심사지오층석탑-(안동)하회마을-병산서원

 

인정 많은 충효의 고장! 예천(醴泉)

소백준령의 높은 산줄기가 감싸고 낙동강, 내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인심이 순박하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1300여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조상들의 숨결이 깃든 많은 문화유적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청정자원이 산재해 있다.

예천은 삼국시대에는 수주,

고려시대에는 보주, 양양으로 불리다 조선 고종33년(1896) 경상북도 예천군이 되었다.

 

이번에 탐방한 예천의 명소들은 각 관광명소별로 아래와 같이 6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육지속의 섬마을! 회룡포(回龍浦) 

- 문화유산의 보고! 천년고찰 용문사(龍門寺)

-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룬 초간정 원림(草澗亭 園林)과 초간정(草澗亭)

- 십승지의 송림! 금당실 송림(金塘室 松林)

- 영남 사대부가의 별당식 기와집! 예천권씨초간종택(醴泉權氏草澗宗宅) 

- 갑석이 전하는 석탑의 비밀! 개심사지 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 문화유산의 보고! 천년고찰 용문사(龍門寺) 

 

 

【 용문사(龍門寺)

신라 경문왕10년(970)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별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 용문사 입구의 장승들(사진 上)

                     일주문 지나 용문사가는 길(사진 下)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를 비롯 성보문화재 10여점이 현존하며, 조선 숙종 때 조성된 보물 제89호인 목각탱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 보광명전과 대장전 사이의 달마상과 약수

 

『 용문사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예천 용문사 대장전(醴泉 龍門寺 大藏殿)

*보물 제145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주불전인 보광명전과 나란히 서 있는 대장전은 경전을 봉인하는 전각으로, 안에 안치된 2좌의 윤장대로 더욱 유명하다.

초창부터 중창까지 기록이 잘 남아 있으며, 이 건물의 이력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중수용문사기'(1185)와 '속용문사적기'(1688), '예천용문사창기사대장전중수상량문'(이하 중수상량문, 1767) 등이 있다.

이중 '중수상량문'은 기록이 현존하지 않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의 고건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수용문사기'를 보면, 1173년에 2좌의 윤장대를 안치할 3칸의 건물을 지었다고 하나, 현 건물의 모습은 초창 당시의 건물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중수가 거듭되어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67년 대장전 중수 때 적은 상량문에는 1173년의 초창뿐만 아니라 1467년, 1534년, 1597년, 1665년의 중수 연대가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1665년 중수 기록을 '속용문사적기'에서는 1670년으로 적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라기 보다는 1665년과 1670년에 거듭된 보수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속용문사적기'애서 당시 대장전의 수리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장전은 '속용문사적기'의 수리 기록에 근거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치목과 장엄, 그리고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의 조성시기인 1684년과 연결해 17세기 건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세부 부제를 살펴보면 공포의 쇠서가 유연하게 올라가기 시작하고, 공포를 비롯해 건물의 내,외부에 연꽃의 장식요소가 강조되었으며, 측면의 칸수와 고주의 처리가 후대에 주로 쓰이는 수법이라는 점이 18세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 대장전 불단의 아마타삼존불과 목각탱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이 1683년에 세워진 금당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져, 불상과 연계한 조성시기 추정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2001~2004년도 해체수리과정에서 시도된 연륜연대조사방법에 의하면, 19세기에도 보수가 있었다.

또한 기단 공사를 위한 간이시굴조사 중 현 기단 속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이 노출되었는데, 창선 당시의 대장전 유구일 가능성이 높다.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는 대장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 대장전 모서리의 장식과 조각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우리, 물고기조각, 도깨비 조각 등이 화려한 단청과 함께 장식되어 있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를 만들어 두었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 대장전 외부공포

 

                  ▲ 대장전 내부 천장과 내부 가구

 

"돌리면 경을 억만번 염송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는 윤장"

대장전 안의 윤장대는 아래부분을 팽이 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중간에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후 팔각의 집모양을 얹은 형태로 되어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팔각의 각 면마다 여덟 개의 문을 달았는데 안에서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돌리는 불경보관집이다.

윤장은 중국 양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작은 책들을 한 곳에 꽂아두고 책장을 돌려가며 경전을 찾기 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후에 이것을 돌리기만 하여도 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고 또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전경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티베트나 소승불교를믿는 마라들에서 금속으로 만든 종형의 마니차를 돌리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경신앙(轉經信仰)은 윤장이나 경통을 돌리며 경을 억만번 염송하는 것과 같고, 그 공덕이 불가사의하여 전생에 쌓은 죄와 업장을 소멸시킬수 있어 현세에 모든 일이 원만해진다는 믿음을 말한다.

 

◈ 예천 용문사 윤장대(醴泉 龍門寺 輪藏臺)

*보물 제684호(1980년09월16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대장전

 

 

                  ▲ 대장전 내부에 설치된 윤장대

 

내부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마루 밑에 회전축위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 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8각의 집모양을 얹었다.

 

                  ▲ 대장전 내부 윤장대의 상부 문양

 

                  ▲ 대장전 내부 윤장대 문양들

 

8각의 집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 있고 8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

대장전을 창건할 당시에 함께 제작된 것인지, 현종11년(1670) 재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說法像)

*보물 제989-2호(1989년04월10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숙종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작품의 조성기가 하단에 '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되어 있음)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여 사바세계를 굼어 살피듯 묘사되었다.

두 손은 모두 무릎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본존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였다.

 

                  ▲ 대장전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989-1호(1989년04월10일 지정)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운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 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에 의해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 예천 용문사 감역교지(醴泉 龍門寺 減役敎旨)

*보물 제728호(1981년07월15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용문사 감역교지는 세조3년(1457)에 내린 교지로,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할 것을 인정하는 사패교지(공로가 있는 자에게 나라에서 부역을 면제해주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이다.

이 교지의 내용은 '일찍이 감사와 수령에게 지시한 대로 경상도 용문사는 다시 심사하여 더욱 보호하고 잡역을 덜어 주라'는 것이다.

가로 44.8cm, 세로 66.5cm로 국왕의 수결이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용문사의 지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예천 용문사 팔상탱(醴泉 龍門寺 八相幀)

*보물 제1330호(2001년10월25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 직지사 성보박물관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예천 용문사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제3폭에는 설산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아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 예천 용문사 영산회괘불탱(醴泉 龍門寺 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445호(2005년09월06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삼본불상 가운데 통견의 적색 대의에 밝은 회청색 내의를 착용한 본존 불상은 머리 높이가 180cm이고 머리 광배의 폭만도 무려 273cm에 이르러 10m가 넘는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적색 대의에는 봉황문과 화문, 격자문, 연화문 등의 둥근 무늬가 전체에 걸쳐 정연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내의에는 흰색의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본존불 하단 좌,우로는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였는데 두 상 모두 손 모습과 천의의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본존불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신체의 자세 및 서 있는 발의 모습, 인물의 크기와 형태, 보관, 지물 등이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상단 본존불상의 머리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자리하였으며, 배경으로는 황,적,청,녹색의 색구름대를 깔고 감청색의 하늘을 두어 공간감을 부여해 주고 있다. 또한 그림 내부 하단 가운데 쪽에 왕실의 안위를 발원하는 내용의 글이 있으며, 테두리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괘불탱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1705년 조성된 작품으로, 둥글넓적해진 얼굴에 근엄한이 엿보이며,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등 17세기로부터 18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이 아닌 부처상으로써 지물(연꽃가지)을 드는 새로운 도상의 예를 보여주어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가 크다.

 

♧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보물 제1637호(2010년02월24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여래상의 몸안에서 원문과 시주자 목록이 두 장 발견되었는데, 1515년 4월 9일에 고쳐 만들었다는 개조이라는 개조기록을 비롯하여 이를 만든 화원과 목수, 철장의 이름, 그리고 수백 명에 이르는 시주자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산화원 이영문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음을 밝혀 승려가 아닌 일반 장인에 의해 주도된 16세기 전반의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이중의 대의를 걸친 불상으로 가슴과 옷주름, 무릎과 발 등의 표현이 자연그러우면서도 신체의 볼록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 특징이다. 특히 눈 꼬리가 길고 앞으로 튀어 나온 양감있는 얼굴 모습과 자연스러운 옷 주름 등은 조선전기인 15세기의 전통이 남아있어 16세기에 이르러 푱면적인 경향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16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명문불상이 극히 적게 남아 있는 조선전기의 조각 상황, 우수한 조형성 등에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 예천 용문사 천불도(醴泉 龍門寺 千佛圖)

*보물 제1644호(2010년02월24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천불도는 유존 사례가 극히 드물어, 1709년에 화승 도문, 설잠, 계순, 해영이 제작한 용문사 천불도는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천불도는 석가팔상도와 같은 시기인 1709년 제작된 그림으로 당시 불사와 후원자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질서 정연한 배치, 이지러짐이 없는 형상과 필선 등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현존하는 천불도는 선운사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는 1754년 작품이 있을 뿐 매우 희귀하다. 또한 1754년 선운사 천불도가 모두 5폭으로 그려진데 반해 한 폭에 천불을 모두 그린 것으로, 현존 천불도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설 뿐 만 아니라 많지 않은 18세기 초반 불화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 후기 천불신앙을 전해주는 예로서도 중요하다.

 

『 용문사의 기타 문화재들

♧ 예천 용문사 자운루(醴泉 龍門寺 慈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6호(2013년04월08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대장전 앞에 위치한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13년(1621)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 1979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보이고 있어 처음 건립 당시의 모습은 상실했으나, 장식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휘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불교 행사가 있을 때 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예천 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醴泉 龍門寺 重修龍門寺記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0호(201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이 비는 고려 명종14년(1184)에 이지명(1127~1191)이 왕명으로 기문을 짓고, 이듬해 성인선사 연의가 비문을 쓰고 입선 해석이 각자한 높이 195cm, 너비 93cm, 두께 10cm 크기의 중수용문사기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용문사의 위치 소개 및 사원의 형성 계기가 된 두운선사의 복정 사실과 태조 왕건의 지원 내용, 주지 조응의 용문사 중수 및 낙성 관련 내용, 대선사 조은에 관한 내용 등이다. 그리고 명종18년(1188)에 추기된 음기는 조응의 제자를 사법제자와 집사제자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 비는 12세기 후반에 건립되었으며, 내용분석을 통해 고려 중기 선종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료이므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용문사의 불전들

♧ 예천 용문사 보광명전(醴泉 龍門寺 寶光明殿)

 

 

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을 함께 모셨다.

보광명전에 봉안된 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 예천 용문사 명부전(醴泉 龍門寺 冥府殿)

대장전의 동쪽에 있으며, 남서향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배치축과 일정한 배치관계는 없이 지형의 영향으로 대장전에서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속용문사적기'에의하면 1649년에 보광전의 동쪽에 지장전을 짓고, 1682년에 다시 시왕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실적과 신경대사가 판불과 함꼐 시왕상을 조성하는데 힘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현존하는 명부전이 1682년에 지은 시왕전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은 조성 이후 이렇다 할 중수기록이 없다. 현재 명부전 내부에 걸려있는 '용문사명부전개채여단확기(1884)'를 통해서 조선말의 현황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채와 단확은 단순히 지장 및 시왕상의 색을 다시 칠하고 건물에 단청공사를 다시 한 것 뿐만이 아니라 건물의 흙벽을 다시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벽을 헐고 미장공사를 다시 하는 수준의 보수공사였다. 한식 건축의 특성상 미장공사를 한다는 것은 흙벽의 뼈대 역할을 하는 것과 외를 손보는 공사이므로 벽선 등의 수장재까지 손보는 공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보수공사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명부전은 존상의 개수가 많기 때문에 측면과 후면에 문을 설치하는 예가 드문데 만약 문을 설치하게 되면 기둥에 장부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이 건물의 경우 측면과 후면의 기둥에서 장부구멍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획 당시부터 지장삼존과 명부 시왕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볼 수 있으며, 조성시기와 건물의 결구 수법 등을 비교해 볼 때에도 상을 조성했을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생각된다.

현재 명부전은 전면과 후면의 공포양식에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면의 공포는 조선 말기의 공포인 반면에 후면은 쇠서의 곡서의 곡선이 완만한 주삼포식의 공포로 전면에 비해 세련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조성시기를 17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고주가 직접 종보를 받치는 수법은 측면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장전의 가구수법보다 선행하는 수법으로 17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가구법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 예천 용문사 진영당(醴泉 龍門寺 眞影堂)

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 자리한 진영당은 과거 용문사에 주석했던 선사들의 진영을 봉안하는 곳이다.

현재 이 전각에 '진영당(眞影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사찰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편액 외에 건물 전면 고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진영당에 관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각은 조사전인 동시에 시왕전의 노전이었다.

1681년에 희인대사가 신암자를 이건한 뒤 1893년에 혜웅강백이 중수하고 1934년에 주지 이광하가 중수한 후 1935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이외에 진영당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속용문사적기'에 적힌 1649~1670년에 건립된 삽삼전이 있다.

삽삼은 33인의 조사, 즉 조사전을 가르키는 것 같지만, 삽삼전을 지은 행변과 신암자를 이건한 희인이 일치하지 않고 조성시기도 맞지 않는다. 용도가 비슷한 건물이 한 사찰안에 여러 채가 있었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로 향 우측 전면 2칸은 통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향 좌측의 전면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 홑처마 남도리집이다. 현재의 평면으로 추정해 보면, 후면의 퇴칸은 감이었을 것이며, 그 앞의 실과 툇마루는 예를 올렸던 사당형 공간이었을 것이다.

 

 

 

현재 건물에서 보이는 선자연 구성수법은 조선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쓰이던 수법으로, 1681년에 지어진 후 큰 변화없이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

 

♧ 예천 용문사 회전문(醴泉 龍門寺 回轉門)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천왕상이 있으며, 좌우 2구씩 목책안에 안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으로 들어가는 왼쪽 앞쪽에 서방 광목천왕, 뒤쪽에 북방 다문천왕이, 오른쪽 앞쪽에 남방 중장천왕이,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흙을 사용하여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천왕이 들고있는 지물은 다문천왕이 당(幢), 광목천왕은 용(龍)과 보주(寶珠)를, 지국천왕이 비파를, 중장천왕이 검을 들고있으며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서천왕 발 아래에는 악귀들이 천왕의 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1688년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다.

 

♧ 예천 용문사 일주문(醴泉 龍門寺 一柱門)

사찰의 첫 문인 일주문은 기둥 2개에 지붕을 올린 구조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한다.

일주문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종교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邪)됨을 막는 벽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주문에는 사명과 사찰이 소재한 산명이 적힌 편액 혹은 '자하문(紫霞門)', '조계문(曺溪門)'과 같은 편액이 걸리기도 하는데, 용문사의 일주문에는 현재 '小白山龍門寺'란 편액만이 걸려 있다.

 

 

'속용문사적기'에는 1608년에 시작된 용문사 창의 막바지 불사로 1689년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의 중창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장식은 17세기 보다는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형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대장전의 공포와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대장전 중창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 추녀마루에는 얼마 전까지도 '昭和十三年'명 암막새가 놓여있어 1938년에 보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포대는 두 개의 간포와 두 개의 귀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출목은 앞뒤 모두 2출목이다. 공포는 하나의 수서와 두개의 양서, 그리고 권비형 운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 형태는 우진각 지붕으로 중국의 패루와 닮았다.

 

상기에 기술한 용문사의 전각외에도 응진전, 원통전, 극락보전, 산신각, 관음전, 범종각 그리고 성보박물관이 있다.

 

 

 

                  ▲ 용문사 대광보전 뒷편에 자리한 관음전, 산신각과 극락보전

 

                  ▲ 용문사 회전문과 대광보전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담장(사진 上)

                     범종각과 성보박물관(사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