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Ⅰ편:불교문화의 정수! 승보사찰 송광사<2>

왕마구리 2014. 4. 15. 20:05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여행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대한민국 생태 수도 순천 탐방은

호남정맥 산줄기에 자리한 조계산(889m) 기슭에 아름다운 경관,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루어 명승 제65호로 지정된 16국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의 하나인 승보사찰 송광사와 많은 선승을 배출한 임제선풍의 대쪽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량이자 천년고찰인 한국불교 태고총림 선암사.

전국 유일하게 남아있는 납매(납월매) 6그루와 700년 이상된 고목인 야생차나무가 자라고 있는 선종가람 금둔사, 그리고 역사와 민속, 생태가 어우러진 조선시대 대표적인 계획도시로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 등재 및 CNN선정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된 대한민국 3대 읍성의 하나! 순천 낙안읍성 등에서 이루어졌다.

이번 순천 탐방에서 대한민국 대표 생태관광지인 순천만, 임진왜란 7년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로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순천왜성과 60~80년대 달동네 추억의 거리로 조성된 드라마촬영장 등은 짧은 일정으로 탐방을 하지 못하여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박람회장을 새롭게 꾸며 2014년 4월 20일 개장하게 될 순천만정원과 함께 다음 기회에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이번 탐방에 포함된 천자암 쌍향수는 2008년 6월 7일 호남정맥 제16구간(붓재~오도재) 산행을 마치고, 낙안읍성은 2008년 7월 5일 호남정맥 제18구간(접치~석거리재) 산행 때 이미 탐방한 곳이지만 6년만에 다시 찾게된 여행지가 되었다.

이번 순천 여행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송광사, 선암사 및 금둔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그리고 낙안읍성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호남권'에 소개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송광사와 선암사에는 다수의 중요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어 각각 두 편에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하며, '천자암 쌍향수'는 승보사찰 송광사<2>에 함께 게재를 한다.이번 순천 탐방은 송광사, 선암사 각 2편씩 포함 총 6편으로 게재를 하게 된다.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Ⅰ편 :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수!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1>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Ⅰ편 :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수!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2>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Ⅱ편 : 청정도량인 천년고찰! 한국불교태고총림 선암사(仙巖寺)<1>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Ⅱ편 : 청정도량인 천년고찰! 한국불교태고총림 선암사(仙巖寺)<2>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Ⅲ편 :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아름다운 동행! 낙안읍성(樂安邑城)

- 사랑과 감동이 함께 하는 정겨운 순천(順天) Ⅳ편 : 국내 유일의 납매와 700년 이상된 야생차나무의 선종가람! 금둔사(金芚寺)

 

【 일 정 표 】2014년 4월 3일(목)-4일(금) 1박2일

                             ◈ 첫째날(4/3) 오후 : 송광사-천자암 쌍향수

                             ◈ 둘째날(4/4) : 낙안읍성-금둔사-선암사

 

◀ 제Ⅰ편 :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수!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2> ▶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승보사찰!  

【 송광사 소개 】

*사적 제506호(2009년12월21일 지정)

*소재지: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우리나라 삼보(불보, 법보, 승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송광사 길상사라는 100여 칸 규모의 절로 3~40명의 스님들이 머물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절로 창건되었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간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가 거조사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수선사로 개명하고, 산 이름도 송광에서 조계산으로 바꾸었으며, 후에 절 이름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가 되었다.

지눌스님은 명종27년(1197)부터 희종원년까지 9년간 중창불사를 일으켜 절의 면보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 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지눌이 타계한 다음 그의 법을 잇는 진각 혜심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풍을 크게 진작시켜 수많은 신도들이 모이게 되자 다시 절이 비좁게 되었다. 강종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혜심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1395년 계획을 세우고,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선사께서 중창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으로 잿더미로 변한 송광사를 응선화상이 복구를 시작하고, 지리산에 머물던 부휴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송광사에서 부휴대사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헌종8년(1842)에 큰 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두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철종7년(1856)까지 무려 14년간 2,150칸이 다시 재건되었다.

5차 중창으로부터 7~80년 뒤인 1922년 주지 설월스님과 율암스님에 의해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고치고, 개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1948년의 여순반란과 한국전쟁 때 산중에 은신한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가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자,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스님과 화주 취봉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송광(松廣)'이란 이름에 관련된 전설

- 18명의 큰 스님들이 나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르키는 글자로 18명의 큰 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르켜서 18명의 큰 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는 뜻에서 치락대라 불렀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삼보(三寶)'사찰

불교에서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라 일컷는 세가지를 삼보라 하는데, 부처님(佛), 가르침(法), 승가(僧)을 말한다.

불교인의 신앙은 바로 이 세가지 보배를 값지고 귀한 것으로 알고 그에 귀의해 가는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일찌부터 세가지 보배를 가르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통도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경판이 모셔져 있는 해인사는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는 송광사는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송광사는 800여년 전 고려 때 보조국사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보하는데 그 근본도량이 되었으며, 지눌스님의 뒤를 이어 열다섯명의 국사가 배출되어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가 나와 한국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어 한국불교 전통의 산실이요, 그 전통을 잇는 중요한 사찰이다.

 

◈ 송광사의 암자들

12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승보사찰 송광사에는 16국사를 상징해서인지 16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보조국사가 창건한 보조암(普照庵, 일명 本庵)을 중심으로 은적암(隱寂庵, 東庵), 광원암(廣遠庵, 西庵), 묘적암(妙寂庵, 南庵), 북암(北庵)과 천자암(天子庵), 청진암(淸眞庵), 자정암(慈靜庵), 감로암(甘露庵), 부도암(浮屠庵), 조계암(曺溪庵), 판와암(板瓦庵), 실상암(實相庵), 상선암(上禪庵), 상염불암(上念佛庵), 하염불암(下念佛庵)을 말한다.

현존하는 암자는 광원암, 천자암, 감로암, 부도암, 자정암(현 불일암,佛日庵), 판와암(현 인월암,印月庵)뿐이며, 근래에 세운 오도암(悟道庵)과 탑전(塔殿, 寂光殿)이 있다.

보조암, 은적암, 묘적암, 청진암, 조계암, 실상암(1994년 확인), 상선암(1994년 발견)은 터가 남아 있으나, 북암, 상염불암, 하염불암은 이름만 전할 뿐이다.

이외에 수석정 부근에 1940년 효봉스님께서 세우고, 정진하시던 목우암(牧牛庵), 1975년에 구산스님께서 조계산과 연산봉 사이에 초암을 지어 정진하시던 인월정사(印月精舍), 절 입구 외송마을 뒷산에 있었다는 빈대절은 터만 남아 있으며, 이름 모를 암자터가 6개소 이상 알려져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좌측의 '부석' 바위

 

【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曺溪山 松廣寺·仙巖寺 一圓) 】

*명승 제65호(2009년12월09일 지정)

*면적:22,340,612㎡

*소재지: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산48번지, 송광면 산평리 1번지 등

 

 

조계산은 호남정맥 산줄기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889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산세는 험하지 않으며, 산 전체가 넓은잎나무로 덮여 있어 철따라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솟구친 절벽은 비룡폭포, 감초암폭포와 같은 명산의 경관을 지니고 있다.

선암사쪽은 나이가 수십년이 넘는 나무들로 차 있는데 도토리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게 있어 사계절 훌륭한 경관을 연출해 낸다. 그 중턱에는 대각국사 의천이후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와 선,교종의 중심사찰인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통도사, 법보:해인사, 승보:송광사) 중 하나인 송광사는 혜린대사가 770년경 처음 세운 뒤 건물이 80여 동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는데, 한국전쟁 후 지금은 50여 동만이 남아 있다. 송광사 일대는 연산봉을 비롯하여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어, 송광사 내8경과 외8경이 전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조계산의 경관과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 일원은 숲의 조화를 이루며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곳이다.

 

【 송광사의 문화재들 】

◈ 국보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국보 제42호)

*순천 송광사 혜심고신제서(惠諶告身制書 국보 제43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 국보 제314호)

 

◈ 보물

*대반열반경소 권9~10(大般涅槃經疏 券九~十 보물 제90호)

*순천 송광사 경질(經帙 보물 제134호)

*순천 송광사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

*순천 송광사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믈 제204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권13~14(보물 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 권1~2(보물 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 권4~5(보물 제207호)

*순천 송광사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263호)

*순천 송광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순천 송광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보물 제572호)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진영(보물 제1043호)

*순천 송광사 응진당 석가모니후불탱 및 십육나한탱(보물 제1367호)

*순천 송광사 영산전 후불탱 및 팔상탱(보물 제1368호)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보물 제1376호)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보물 제1467호)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복장유물(보물 제1468호)

*순천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16나한상 일괄(보물 제1549호)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660호)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보물 제1661호)

◈ 천연기념물

*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천연기념물 제88호)

◈ 전라남도 도지정문화재

*자정국사 사리함(유형문화재 제18호)

*능견난사(유형문화재 제19호)

*송광사 금강저(유형문화재 제22호)

*고봉국사주자원불(유형문화재 제28호)

*송광사 삼청교 및 우화각(유형문화재 제59호)

*송광사 보조국사비(유형문화재 제91호)

*송광사 진영당(유형문화재 제97호)

*송광사 응진당(유형문화재 제254호)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유형문화재 제256호)

 

 송광사 탐방은 매표소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청량각(淸凉閣)을 지나 편백나무숲 오솔길을 이어가게 된다.

절 입구에 전국적으로 왕실기도처 역할을 하는 사찰 입구에 세워지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송광사는 고종24년(1887) 조선 고종의 왕실기도처로 '관음전'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하마비를 지나면 송광사의 첫 관문인 일주문 '조계문(曺溪門)'이 있다.

조계문을 들어서면 송광사 경내 탐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탐방한 송광사의 소개는 경내에 있는 '<1>건축물과 이와 관련된 문화재', '<2>불구, 불화, 서책, 문서 등 기타 문화재들' 로 나누어 기술하기로 한다.

탐방이 가능한 문화재들은 직접 촬영한 사진들을 이용하였지만, 공개되지 않은 문화재나 내부 시설들은 문화재청의 자료를 이용하여 재구성하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현재 송광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일부 공간만 공개된 상태이고, 조계총림의 선원, 율원, 강원에서 15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중이라 대다수의 건축물들이 둘러쳐진 돌담으로 격리되어 있어 제대로 탐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 송광사의 불구, 불화, 서책, 문서 등 기타 문화재들 』

이곳에서 소개하게 되는 송광사의 문화재는 대다수가 야외 전시가 불가능한 것들로 송광사 박물관 등에 별도로 보관되고 있어 특별한 행사나 전시일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사진들이 소개되어 있어 실물은 보지 못하지만 사진으로나마 만나 볼 수가 있어, 이곳에서도 문화재청의 자료들을 빌려와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이곳에서도 송광사의 문화재 소개 순서를 국보, 보물, 유형문화재, 그리고 기타 문화재 순으로 하기로 한다.

 

♧ ♧ 송광사 목조삼존불감(松廣寺 木彫三尊佛龕)

*국보 제42호(1962년12월20일 지정)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물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에서 들어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불감은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cm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cm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의 작은 방에는 각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은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2줄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에는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쪽 방에는 실천을 통해 자비를 나타낸다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동자상이, 오른쪽에는 사자상이 서 있다.

왼쪽 방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문수보살은 사자가 새겨져 있는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보살의 좌,우에는 동자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세부 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 송광사 혜심고신제서(松廣寺 惠諶告身制書)

*국보 제43호(1962년12월20일 지정)

 

 

고려 고종3년(1216)에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 제서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의 무늬가 있는 홍,황,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cm, 세로 33cm이다.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는 귀중한 자료이다.

 

♧ ♧ 송광사 화엄경변상도(松廣寺 華嚴經變相圖)

*국보 제314호(2009년09월02일 지정)

 

 

 

◀ 화엄경변상도 내의 '노사나불'

 

「화엄경」의 7처9회의 설법내용을 그림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 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랫부분에는 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턴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를 배치시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촹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 39품 중의 화엄세계품 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 ♧ 대반열반경소 권9~10(大般涅槃經疎 券九~十)

*보물 제90호(1962년01월21일 지정)

*수량:2권1책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열반을 다루고 있는 경전으로, 중생들에게 열반을 종교적,철학적으로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담무참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당나라 법보가 주석을 붙인 것으로 권9와 10이 한 책으로 되어 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세로 35.5cm, 가로 32.7cm이다.

 

 

세조 때 간경도감(세조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교장을 보고 다시 새긴 것인데, 교장은 고려 숙종4년(1099) 대각국사 의천이 중구ㄱ, 요, 일본 등에서 구해 온 불경을 흥왕사에서 간행한 것을 가르킨다.

이 책이 교장이 아니고 교장을 보고 다시 새겼다는 사실을 체재가 두루마리 형식을 따르나 책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종이의 질이 조선 초기의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같은 절에 보관되어 온 보물 제207호 '금강반야경소개헌초' 끝에 교장을 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어 그 확증을 굳혀준다. 원본 맨 뒤에 있는 기록을 보면 장모가 목판의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고, 글씨는 당시 유명한 구양순의 서풍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만큼 원판 못지않게 정성들여 불경을 새겼으며, 불교 경전으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 순천 송광사 경질(順天 松廣寺 經帙)

*보물 제134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2매

두루마리로 나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불교 공예품이다.

 

 

가느다란 대나무 조각을 색실로 엮어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끝단에는 삼각형의 비단 베를 붙여 끈을 달아 경전을 말아 두게 하였다. 대쪽은 색실로 엮어 꽃무늬를 넣었고, 둘레는 비단을 두르고 그 안에 종이를 발랐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한 편이지만 여러가지 색실로 나타낸 문양은 아직도 정교하며 잘 남아 있다.

비록 낡아서 그 형체만 남아 있지만,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유물로 그 가치가 높다.

 

♧ ♧ 순천 송광사 경패(順天 松廣寺 經牌)

*보물 제175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43개

경패는 원래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내용을 표시하는데 달아서 사용하던 것인데,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경패는 총 43개이다.

표면에 액을 만들어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으며, 가장자리에는 여러가지 문양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문양은 덩굴무늬, 학무늬 등 각양각색이다. 또 밑으로는 보살, 나한, 신장상 등을 돋을새김하였고, '貞', '周', '晉', '何' 등의 기호가 새겨져 있다.

 

 

그 중에는 여러 상 밑에 연꽃대좌 혹은 난간을 표시한 것과, 위에 장막 또는 격자무늬창을 세밀하게 조각한 것, 밑으로 기호자로 연꽃무늬를 새긴 것, 집모양을 조각하여 그 안에 새긴 것 등이 있다.

약 1cm 두께의 측면에는 둥근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세 개는 뚫어 새긴 것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조각의 정교함이나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 ♧ 순천 송광사 금동요령(順天 松廣寺 金銅搖鈴)

*보물 제176호(1963년01월21일 지정)

요령은 절에서 강의할 때 사용한 도구로, 이 요령은 고려 전기에 높이 20.6cm, 지름 6.6cm의 청동으로 만들었다.

몸은 사각형이고 각 면이 팽창되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몸 위에는 마디가 하나있는 긴 손잡이가 있으며 몸과 접하는 곳은 후세에 보수한 흔적이 있고 손잡이 윗부분도 손상을 입었다. 손잡이 아랫부분은 둥글며, 큼지막한 꽃이 한 송이씩 아래로 향하고 있다.

 

 

몸 전체 각 면을 구성하는 모서리와 입구 주위에 굵은 돌출선을 돌리고 그 테두리 안에 몸을 꼬며 위로 치솟는 용 한 마리와 그 사이 공간에 구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각각의 면에 있는 무늬는 하나의 틀에서 찍어낸 듯 하다.

입구 부분은 중앙에 반원형을 만들어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었다.

이 요령은 예로부터 송광사에 전해 내려온 절 행사도구로 우아한 형태와 아름다운 조각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요령 중에서 걸작에 속하며 제작 연대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 ♧ 송광사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松廣寺 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보물 제204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1책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법화경 28품 중에서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송나라 사효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쓴 것으로 크기는 세로 26cm, 가로 35cm이다. 보문품이란 법화경의 한 부분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구제에 관하여 이야기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세조7년(1461)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에서 판을 새겨 찍어낸 것으로,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교장을 원본으로 삼았다. 다른 책과는 달리 내용을 도표식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각 행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고 문장간에 경계선이 없다.

책 끝에는 고려 숙종4년(1099)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조7년(1461)에 간행된 보물 제207호로 지정된 '송광사 금강반야경소개헌초'와 새긴 솜씨, 종이질 등이 같아 세조 때 다시 펴낸 것으로 보인다.

 

♧ ♧ 송광사 금강반야경소개현초 권4~5(松廣寺 金剛般若經疎開玄抄 卷四~五)

*보물 제207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1책

금강반야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해 공철이 쉽게 풀이한 것을 나중에 지온이 보충한 것으로 '개현초'에 관한 7권 중 권4~6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진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6cm, 가로 35cm이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온 불경을 토대로 만든 교장을 보고 조선 세조7년(1461)에 간경도감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다. 각 권의 끝 부분에 글씨를 쓴 사람들과 교정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펴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송광사에 보존된 여러 교장들이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고 간졍도감에서 교장을 보고 다시 새겨 펴낸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 송광사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권13~14(松廣寺 大乘阿毗達磨雜集論疏 卷十三~十四)

*보물 제205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1책

불경은 크게 經, 律, 論의 삼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론(論)'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아비달마잡집론은 부처님의 열반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여기에 안해가 해설을 붙이고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아비달마잡집론에 신라의 현범이 다시 해설을 붙인 것으로, 전체 16권 중 권13과 권14를 각기 1책으로 묶은 것이다.

책의 끝에 고려 선종10년(1093)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원래 교장의 하나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교장을 원본 하여 다시 목판에 새긴 후 찍어낸 것이다.

 

♧ ♧ 송광사 묘법연화경찬술 권1~2(松廣寺 妙法蓮華經纘述 卷一~二)

*보물 제206호(1963년01월21일 지정)

*수량:1책

우리나라 천태종의 기본 경전인 묘법연화경(일명 법화경)은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교장을 원본으로 다시 찍은 것 가운데 하나로, '법화경'에 대한 당나라 혜정의 주석서 10권 가운데 권 1,2위를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크기는 세로 36cm, 가로 35cm이다.

각 권의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헌종1년(1095)에 남궁예가 글을 써서 처음 간행한  것을,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새겨 찍은 것 가운데 일부가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 송광사 고려고문서(松廣寺 高麗古文書)

*보물 제572호(1973년07월10일 지정)

*수량:2축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는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로 절에 관한 중요자료이다.

지정된 유물은 수선사의 창건 연혁과 관련된 형지기 1점과 수선사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를 기록한 노비문서 1점 등 총 2점이다.

고려시대에 묵으로 쓴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로, 오늘날까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문서의 양식과 필법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 송광사 고려고문서-수선사형지기(松廣寺 高麗古文書-修禪社形止記)

*보물 제572-1호(1973년07월10일 지정)

닥종이 작은 글씨로 기록한 두루마리이다. 크기는 가로 595cm, 세로 58.5cm이다.

내용은 수선사(修禪社)의 창건 연혁과 가람의 배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승려수, 재산목록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끝에는 문서를 작성한 관원의 관직과 성씨, 수결이 나와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 사원 경제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문서는 고려 고종8년(1221)에서 고종13년(1226)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송광사 고려고문서-노비첩(松廣寺 高麗古文書-奴婢帖)

*보물 제572-2호(1973년07월10일 지정)

고려 충렬왕7년(1281)에 수선사주 원오국사가 작성한 노비문서이다.

닥종이에 묵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크기는 가로 66cm, 세로 58.5cm이며, 고려시대 사원 경제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松廣寺 티베트文 法旨)

*보물 제1376호(2003년06월26일 지정)

 

 

송광사 16국사 중 제6세인 원감국사가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받아온 것이라 전해진다.

이 티베트문 법지는 현재 크고 작은 6장의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데, 색깔은 고르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황토색계의 밝은 황갈색이며 종이의 두께,색깔,필체 등으로 보아 본래는 1매의 문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내용상으로 보아

-문서의 소지자에 대한 신분과 신분 보장

-신분을 보장해줄 자들에 대한 명시와 협조 요청

-문서 발급자의 증명 부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활발해던 불교교류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 송광사 보조국사비(松廣寺 普照國師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1982년10월15일 지정)

송광사 절내의 외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보조국사 지눌의 행적을 기리고 있는 보조국사 감로탑비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밑의 일부가 땅에 묻혀 있는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의 머리화 되었으나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머리 뒤에는 귀가 솟아 있어 독특하며, 등은 육각무늬들로 가득 차 있는데 조각이 형식적이고 힘이 없다. 등 중앙에는 비몸을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해 놓았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을 새기어 장식하였는데,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생동감이 느껴지기는 하나 조각은 서투르다.

원래 고려 희종6년(1210)에 처음 세웠던 것을, 조선 숙종4년(1678)에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

고려시대 승려로 속성은 정씨로 8세에 출가하여 34세에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멀리하며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였는데, 지눌은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선종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일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다 송광사에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다.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1세로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를 통해 선종을 크게 일으켰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 지도자였다.

희종3년(1210)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추증하였다. 호는 목우자, 법명은 지눌, 시호는 불일보조국사, 탑호는 감로이다.

 

 

 

♧ ♧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松廣寺 普照國師甘露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2001년09월27일 지정)

송광사 설법전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뒷뜰 언덕에 있는 불일 보조국사 지눌의 감로탑이다.

감로탑은 맨 아래에 2단의 정사각형 대좌를 놓고 그 위로 네 귀퉁이에 각을 이룬 또 다른 대좌를 끼워 넣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매우 특이한 형식이다. 맨 아래 2단의 정사각형 대좌는 그 위에 있는 돌들과 석질이 다른 점으로 보아 1926년 이 탑을 해체복원하면서 새로 끼워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위에는 희미하게 연꽃무늬를 새긴 복련석이 몸돌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8각의 지붕돌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감로탑은 보조국사가 고려 희종6년(1210)에 열반하자 왕으로부터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탑'이라는 탑호를 받았으나, 3년 뒤인 강종2년(1213)에 세워졌다. 그 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 있다.

맨 아래 바닥돌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지붕돌의 급격한 전각과 처마의 귀솟음,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의 모습은 고려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지눌의 역사적 위상이나 고려시대 사리탑으로서의 학술성 등으로 보아 가치가 높다.

 

 

 

 

 

♧ ♧ 송광사 자정국사 사리함(松廣寺 慈精國師 舍利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호(1972년01월29일 지정)

자정국사의 사리를 담았던 그릇으로 지름 15.2cm, 높이 7.7cm, 뚜껑 높이 3.1cm, 몸체 높이 5.3cm인 청자상감국화문 항아리이다.

자정국사는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한 분으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 충렬왕19년(1293)~27년(1301)까지 주지승으로 있었다.

 

뚜껑은 윗면에 백상감으로 큰 원을 돌리고, 주변에 4개의 작은 원을 새겼다. 원 안에는 흑백상감으로 국화무늬를 새겼고, 원 사이에는 구름과 학무늬를 조각하였다. 옆면은 백상감으로 번개무늬와 연속된 작은 점을 돌렸다.

몸체는 중앙에 위아래가 구분되는 면이 있으며, 아가리 부분에는 백상감으로 번개무늬와 연속된 작은 점을 돌렸다. 그릇 아랫부분은 흑백상감으로 연꽃잎을 돌렸다. 유약 색깔은 고려 후기의 시대상을 반영하 듯 불투명한 비색이다.

♧ ♧ 송광사 금강저(松廣寺 金剛杵)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호(1972년01월29일 지정)

금강저는 불교의식에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저는 인도의 고대 무기 가운데 하나로 채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 금강저를 무기로 삼아 아수라의 무기를 쳐부순다고 한 신화에서 유래되었다.

 

 

손에 쥘 수 있는 모양으로, 쥐고 있으면 묵중하고 엄숙한 기분이 감돌아 온갖 잡념과 방해물을 굴복시켜, 부처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광사 금강저는 양끝이 3개의 가지가 있는 화살촉 모양으로 손잡이에는 손바닥이 닿는 부분이 몰록하게 나왔다. 손잡이 양끝은 4잎의 연꽃무늬를 양각함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 ♧ 송광사 고봉국사주자원불(松廣寺 金剛杵)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호(1972년01월29일 지정)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공간을 불감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셔진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광사의 16국사 가운데 제16세 국사인 고봉화상이 소지했던 원불이라 전해지는데, 이 불감은 문을 열면 바로 양편 문 내벽에 문짝이 있고, 내부벽에 불,보살 등을 양각으로 조각하였다.

중앙에 있는 주존불은 대일여래불로 손모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전통적인 비로자나불이 보통 취하는 손모양이 아닌 금강권인을 하고 있다. 좌,우 부처는 모두 여래상으로서 왼쪽에 보신불인 노사나불과 오른쪽에 화신불인 석가여래가 각각 협시불로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삼존불의 배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찰의 대적광전에서 볼 수 있는 통례라 하겠다. 또 아랫부분에는 부처님의 두 제자가 서 있고 그 양편에는 보살상이 앉아 있는 상으로 배치되었다.

광배는 여래상이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나타냈는데 비해 보살상과 제자상은 머리광배만을 조각하였다. 이들 불상에는 중앙 벽면의 두 제자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꽃무늬 대좌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이 불감에서 주목되는 것은 문비상인데, 일반적으로 문비에는 인왕상이 배치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들 문비에는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과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배치되었다. 이 불감에서 보여주는 불상들의 인상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으며 찌들거나 뒤틀어져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물론 작은 공간에 섬세한 표정을 조각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이나 어딘가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얼굴 표정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 송광사 3대 명물 』

◈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松廣寺 天子庵 雙香樹)

*천연기념물 제88호(1962년12월03일 지정)

*면적:111㎡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하여 울릉도와 일본에 분포하고 있다.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료로 쓰이거나 정원수, 공원수로  많이 심는 나무이다.

송향사 천자암의 곱향나무 쌍향수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2m, 가슴둘레 4.1m, 3.3m이다. 두 그루가 쌍으로 나란히 서 있고 줄기가 몹시 꼬인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와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한 손으로 밀거나 여러 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직이며,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즐이 찾고 있다.

이 천연기념물은 앞에서 설명한 전설과 기이한 모습을 가진 오래된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가치가 높아 천년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송광사 능견난사(松廣寺 能見難思)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호(1972년01월29일 지정)

 

 

송광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던 29점의 그릇이다.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6세 원감국사가 중국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며, 만든 기법이 특이하여 위로 포개도 맞고, 아래로 맞춰도 그 크기가 딱 들어 맞는다고 한다.

조선 숙종이 똑 같이 만들어 보도록 명했지만 도저히 똑같이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뜻에서 '능견난사'라는 이름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 송광사 비사리구시

 

 

1724년 남원에서 태풍으로 쓰러진 싸리나무를 옮겨와 만들어졌다고 하나, 사실은 보성군 문덕면 내동리 후곡(너문골) 봉갑사 인근 마을의 느티나무(귀목)이다.

그 쓰임새는 국가 제사시 대중을 위해 밥을 담아 두는 것으로 쌀 7가마(4천명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송광사 이외에도 비슷한 용도를 지닌 구시가 있으나, 많은 사찰들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지통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송광사 경우에는 여러 근거로 지통이 아닌 밥통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송광사 천자암(天子菴) 】

 

송광사 천자암은 송광사의 16암자 중의 하나로 송광사에서 산길(등산로)로는 약 3.4km 떨어진 남쪽 산 중턱에 자리를 하고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약 4~5km 거리이며 약 10여분이면 갈 수가 있다.

산 중턱에 자리한 천자암으로 올라가는 도로(승용차나 25인승 이하 소형버스 통행 가능)가 있어 입구의 주차장까지는 가파르지만 발품을 팔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물론 천자암까지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올라갈 수가 있으나, 급경사의 비탈길이고 오르내리다 중간에 맞은 편에서 오는 차와 만나게 되면 피할 곳이 없어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가급적 주차장에서 걸어서 천자암까지 오르는 것이 안전하다.

도보로 천자암까지 약 1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급경사의 오르막길이라 쉽지만은 않다.

 

 

                  ▲ 천자암의 본당(요사)과 경내로 들어가는 누각

                   ▲ 천자암 쌍향수 옆의 나한전

                  ▲ 천자암의 종각

 

                  ▲ 천자암 입구의 표석과 이정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