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密陽) ▶
【 밀양(密陽) 소개 】
경상남도 북쪽에 위치한 밀양은 면적 799.01㎢이며, 2읍, 9면, 5동의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진 인구 108,289명(2013년10월 현재)의 시이다.
삼한시대 변한 지역으로 신라 경덕왕16년(757) 밀성군, 고려 성종14년(995) 밀주군, 조선 태조원년(1392) 다시 밀성군으로 불리어지다가 태조3년(1394) 밀성부가 되었다.
태종15년(1415) 밀성도호부, 고종32년(1895) 대구부 밀양군, 1896년 경상남도 밀양군, 1931년 4월1일 밀양군 밀양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89년1월1일 밀양시로 승격되었다.
밀양시는 발길 닿는 곳마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3대 명루인 영남루(보물 제147호)에서 재약산 사자평,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문화유산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 밀양 8경(사진 출처:밀양시 홈페이지)
- 영남루 야경 -
- 시례 호박소 -
- 표충사 사계 -
- 월연정 풍경 -
- 위양못 이팝나무 - - 만어사 운해 -
- 종남산 진달래 -
- 재약산 억새 -
▣ 밀양의 3대 신비(사진 출처:밀양시 홈페이지)
- 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
- 국난이 있을 때 땀흘리는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 두드리면 종소리 나는 만어사 경석(천연기념물 제528호)
여름 휴가철이 끝나가는 8월 중순 8월15일~17일 연휴기간을 이용하여 1박2일간 밀양 탐방을 실시하였다.
이동거리가 긴 관계로 1박2일간의 일정으로 밀양시 관광명소 전체를 탐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밀양 중부권과 동부권의 중요 관광지 몇 곳을 선택해 탐방을 실시하였다.
탐방한 관광명소는 아래와 같이 탐방 순서대로 총 7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Ⅰ편 : 억겁의 세월이 빚은 작품! 시례 호박소(詩禮 臼淵)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Ⅱ편 : 사명대사 호국성지! 사시사철이 수려한 표충사(表忠寺)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Ⅲ편 : 우리나라 고대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해주는 전통사찰! 만어사(萬漁寺)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Ⅳ편 : 90년 만에 옛 모습을 되찾은 밀양관아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Ⅴ편 : 풍류와 시정이 넘치는 우리나라 3대 명루! 영남루(嶺南樓) 일원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Ⅵ편 : 조선 전기 대표적 별서정원! 월연대(月淵臺) 일원
- 자연과 문화가 살아숨쉬는 밀양 Ⅶ편 : 이축선 전학후묘 병렬식의 특이한 건물배치! 밀양향교(密陽鄕校)
【 일 정 표 】2014년 8월 16일(토)~17(일)
◈ 첫째날(08월16일) : 시례 호박소-표충사-만어사
◈ 둘째날(08월17일) : 밀양관아-영남루일원(영남루, 아랑각, 무봉사)-밀양향교-월연정
◀ 제Ⅱ편 : 사시사철이 수려한 표충사(表忠寺) ▶
사명대사 호국성지!
▲ 표충사
『 천황산 표충사(天皇山 表忠寺) 』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1974년12월28일 지정)
*면적:20,026,399㎡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신라 문무왕원년(654) 원효대사가 터를 잡아 세운 죽림사이다.
흥덕왕4년(829) 세째 왕자가 몸쓸 병을 얻어 전국의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낫게 되자 탑을 세우고 약수 이름을 영정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라 부르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신라 때는 보우국사, 고려 때는 혜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사명대사의 8세 법손인 월파당 천유화상이 8도 도총섭에 올라 전국 사찰의 승규와 풍기를 감찰 단속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었으며, 근대에는 조계종 종정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선사가 주석하다가 입적한 곳이다.
예부터 명산유곡으로 이름이 높았던 표충사 일대에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남긴 각종 전설들이 전해 온다.
조선 헌종5년(1839)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 사면, 기허대사를 모신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표충사당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었다.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선조33년(1600) 혜징화상이 중건하였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신으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적진에 들어가 회담하였고, 그 성과로 포로로 잡혀간 3003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현재 이곳에는 중앙에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고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진왜란 때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주위의 뛰어난 경관뿐만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통합되어 있는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 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는 천황제일루
▲ 표충사 사천왕문을 통해 뒤돌아본 천황제일루
▲ 표충사 사천왕문(사진上)
사천왕문 앞에서 바라본 표충사 사천왕문 좌,우 전경(사진 中,下)
『 표충사의 사계(四季) 』
『 표충사의 문화재들 』
♧♧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국보 제75호(1962년12월20일 지정)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표충사에 있는 향완은 높이 27.5cm, 입 지름 26.1cm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 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 감각을 보여주고 잇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서하엿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수 있다. 이는 국내외에 7개 밖에 없는 동제향로 가운데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원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니라 경남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泗溟大師의 金襴袈裟와 長衫)
*중요민속문화재 제29호(1973년07월16일 지정)
사명대사(1544~1610)의 금란가사와 장삼이다.
사명대사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승려로 16세에 승려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과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가사란 승려들이 입던 법의를 말하는데, 장삼을 입고 그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결쳐 입던 옷이다. 사명대사 금란가사는 황금색의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가로 270cm, 세로 80cm이다.
현재는 색이 담황색으로 변색되고 훼손도 심하여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사진 左)와 장삼(사진 右)
장삼은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만든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옷으로 가사와 함께 승려가 입는 법복 중 하나이다. 사명대사 장삼은 흰색 무명으로 만들었다.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있으며, 군데 군데 훼손은 되었으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길이 144cm, 품 55cm이고, 등솔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43cm이며, 짧은 고름이 달려 있다.
사명대사 금란가사와 장삼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유뮬로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승려들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제75호)와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문화재 제29호)는 표충서원 맞은편에 위치한 유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 표충사 유물관
♧♧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 三層石塔)
*보물 제467호(1968년12월19일 지정)
표충사 대홍원전 앞에 세워진 3층석탑이다. 탑 앞에는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 있으나 이곳은 탑과 석등이 놓였던 원래의 자리가 아닌 듯하다.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인데 신라 흥덕왕4년(829)에 두번째로 크게 확장시켜 이름을 영정사로 고쳤다고 전한다. 조선 헌종5년(1839)에는 그때까지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는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 표충사 삼층석탑과 석등
♧♧ 표충사 석등(表忠寺 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1972년02월12일 지정)
표충사 경내에 삼층석탑과 함께 서 있는 석등으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닌 듯하다.
길쭉한 기둥 위에 받침돌,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 지붕돌을 차례대로 올린 일반적인 형태로, 각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고,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다.
지붕돌은 모서리 부분의 파손이 심하며 꼭대기에는 간략한 구조의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등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조각수법과 규모로 볼 때 시대가 조금 뒤떨어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표충사 대광전(表忠寺 大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1972년02월12일 지정)
▲ 보수공사(2014년07월01일~12월27일) 중인 표충사 대광전
표충사 경내에 있는 중심 불전으로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을, 서쪽에는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가각 봉안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다포계양식 이다. 기둥 간격은 공포 간격을 배려하여 같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 보수공사 전의 대광전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의 장식들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과 기둥 위 장식들의 간격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균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건물 네 귀퉁이에는 추녀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4개의 기둥(활주)을 따로 두어 추녀를 받치고 있다.
4개의 기둥 중 앞쪽의 기둥은 팔각형인데 반해 뒤쪽의 기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은 특이하다.
건물을 받쳐주는 받침돌은 잘 다듬어져 있으며, 주춧돌 역시 다듬은 돌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 표충사 표충서원(表忠寺 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1972년02월12일 지정)
▲ 표충서원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당 등 세분 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원래는 무안면 중산리 삼강동에 표충사라는 사당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조선 헌종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 서산, 사명, 기허당 등 세분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표충사
▲ 표충사에 봉안된 사명대사 영정(사진 上)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영정(사진 下左), 사명대사와 기허당 영정(사진 下右)
서원은 전통 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이자, 대유학자인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충서원 역시 건물의 구성과 배치뿐만 아니라 제례 절차도 일반 서원과 같았다 한다. 고종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6년 대화재가 발생하여 대광전과 세 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던 영당 등이 불탔다.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대광전과 함께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세 분 대사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 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 형태를 찾아 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 표충사 팔상전(表忠寺 八相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1호(1985년11월14일 지정)
표충사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가지 모습(하천,탁태,강탄,출가,항마,성도,전법륜,입열반)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를 모시고 있는 불전이다. 이곳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표충사에는 조선 철종대에 환월선사가 지장전 옛 터에 세운 팔상전이 있었으며, 지금의 것은 표충서원이 있었던 곳에 1971년 옮겨 온 것으로 그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
♧♧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1985년11월14일 지정)
조선 철종11년(1860) 월암선사가 세운 만일루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로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으로 되어 안쪽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무량수각 또는 서래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였던 곳이다. 나중에는 참선하는 방인 선방으로 사용하였으며, 대한불교조게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대종사가 만년을 보내고 열반한 곳이다.
192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9년에 중건하였고, 지금의 것은 1992년에 보수된 것이다. 중건을 계기로 현판도 영남제일선원으로 새로 걸었다.
▲ 표충사 대광전 우측에 나린히 위치해 있는 관음전(左)과 명부전(右)
▲ 표충사 관음전
♧♧ 표충사 명부전(表忠寺 冥府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1985년11월14일 지정)
저승의 유명계를 사찰 속에 옮겨 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불교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면서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죽은 자들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지옥왕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이 가운데 다섯번째 왕이다)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경내에 관음전과 나란히 있는데 이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학실치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에 이미 있엇던 것 같으며, 당시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강해군대에 복구되지만 숙종대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주지 도환 등에 의해 다시 곧 바로 복구가 이루어졌다.
헌종대에는 월파선사가 명부전 자리를 서산, 송운, 기허 삼 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은 1929년 복원한 것을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 표충사 범종루와 우화루(사진上)
우화루에서 바라본 전경(사진 中)
독성전과 산령각(사진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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