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 청룡사지(靑龍寺址) 문화재를 찾아서...

왕마구리 2014. 10. 14. 21:24

◀ 한반도의 중심 고을! 충북 충주(忠州)를 찾아서

 

충주지역 탐방은 2012년 8월 1일 탄금대, 2013년 6월 15일 미륵대원지와 하늘재 트레킹으로 이미 두 차례 방문하여, 이번 탐방은 세번째이다.

지난 두 차례의 탐방은 충주 지역을 목적지하여 방문한 것이 아니라, 괴산과 단양 지역 탐방을 하면서 가는 길에 한 장소씩을 정해 탐방을 실시한 것인데 반해, 이번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충주지역만을 탐방할 목적으로 실시가 된 것이다.

이번 충주 방문에서 탐방한 관광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기로 하며,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제317호) 탐방과 계립령로 하늘재(명승 제49호) 트레킹은 2013년도 탐방 때 소개를 하였으므로 다시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 충주(忠州) 소개 】

중원문화권의 중심지인 충주는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며 984.02㎢의 면적에 약 21만명의 인구를 가진 자연경관이 수려한 고장이다.

전국 제일의 수질을 자랑하는 수안부 온천과 앙성온천, 문강온천이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충주호와 월악산국립공원, 선조들의 얼이 깃든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중원 고구려비),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일명 중앙탑), 탐금대, 충주 미륵대원지(중원미륵리사지, 사적 제317호) 등 역사유적과 골프장, 스키장 등 관광자원이 풍부한 고장이다.

특히 충주에서 단양까지 충주호의 130리 뱃길은 주변의 풍치관광과 더불어 역사 탐방관광 코스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 청룡사지 문화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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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째날(10월09일) :

청룡사지(청룡사자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보각국사탑 앞 석등<보물 656호>,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비내섬-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장미산성(사적 400호)-충주 고구려비(국보 205호)-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 중앙탑)

    ◈ 둘째날(10월10일) :

임충민공 충렬사(사적 189호)-단호사(철조여래좌상 보물 512호)-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계립령로 하늘재(명승 49호)

 

◀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 청룡사지 문화재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보각국사탑비

 

                  ▲ 청룡사지의 보각국사 관련 문화재들

 

『  청룡사(靑龍寺) 』

청룡사지는 청계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청룡사와 관련된 대표적 인물로는 보각국사 혼수(1320~1392)를 들 수 있는데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에 활동했던 고승으로 보우 스님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이같은 고승이 활동했던 청룡사는 조선 전기까지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과 관련된 문헌기록으로는 인조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승람'에 그 이름이 전하고, '여지도서', '충원현조'에 '현 북쪽 5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간행된 각종 지리지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으나, 자세한 연혁과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 절의 옛모습을 짐작해 볼 방법이 없고,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국보 제197호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보물 제656호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

보물 제658호 청룡사지 보각국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청룡사 위전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청룡사 석종형 승탑을 비롯한 석종형 부도 등이 남아 있어 사찰의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 청룡사 창건 설화 」

어느 화창한 봄날 한 도승이 청룡사지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도승이 나무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갖고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다.

용 한마리가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고 여의주는 큰 빛을 내다가 사라지고 용도 사라지니 비가 멎었다. 산세를 자세히 살펴 본 도승은 이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임을 깨달았고, 용의 힘이 꼬리에 있음을 상기한 도승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했다고 한다.

 

                  ▲ 청룡사지 문화재 배치도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국보 제197호(1979년05월22일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세워진 보각국사의 사리가 봉안된 조선 초기의 승탑이다.

높이 2.63m의 탑은 팔각원당형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양식이 도입된 보도탑으로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을 완성하였다.

 

                  ▲ 보각국사탑 기단부 장식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하대석)에는 엎어놓은 16단엽의 복련(연꽃무늬)을 새겼다. 가운데돌은 8각으로 부른모습이며,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윗받침돌(상대석)에는 아래받침돌과 같은 양식의 양련을 조각하여 마치 하대석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 몸돌의 신장상(사진 左)과 사자상(사진 右)

 

탑신의 몸돌은 평면 원형에 가까운 8각이며 모서리마다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반룡이 양각된 원주 기둥을 강한 기둥으로 모각하였으며,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불법 수호신)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마루마다 용문이 있고 여덟 기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 지붕돌과 꼭대기 장식들

 

상륜부에는 양화, 복발, 화염보주(불꽃장식의 연꽃봉우리 모양장식)가 차례로 얹혀 있다.

태조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탑은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탑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하여 감상할 만하다.

 

「 왕들이 존경한 보각국사 」

보각국사(1320~1392) 혼수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였으며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계율과 도를 우선으로 지키며 실천하였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 73세의 나이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정혜원릉'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 부도탑은 도괴되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고 상륜부는 지하에 매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또 지대석 밑 지하와 탑신 상면에는 각각 사리공이 있으나 장엄구들은 일제강점기에 도취되었다.

이 탑은 뒤에 있는 보각국사탑비(보물 제658호)에 의해 태조3년(139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각국사탑과 탑 앞 사자석등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앞 獅子 石燈)

*보물 제656호(1979년05월22일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높이 2.2m의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보각국사의 승탑 및 탑비와 나란히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의 후면과 측면

 

지붕돌은 네 기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며, 탑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8호(1979년05월22일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1394년 문인선사 희달이 태조의 명을 받들어 보각국사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에 세운 탑비이다.

권근(1352~1409)이 비문을 짓고 천택대사가 글씨를 쓴 것을 높이 2.4m, 폭 1.2m의 한 장의 장방형 비신에 음각하였다.

머릿돌(이수)이 없는 비신의 상부 모서리를 깎아내고 바닥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은 상태이다.

 

                  ▲ 보각국사탑비의 비문(상단 일부)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라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두었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 보각국사탑비 후면(사진 左)과 측면(사진 右)

 

청룡사 위전비와 석종형부도가 있는 지역은 현재 보호막 설치 등 주변 정리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어수선한 상태였다.

10월8일부터 시작된 주변 정리공사 완료예정일이 10월15일이라 늦어도 10월20일경이면 쾌적한 환경속에서 탐방을 할 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충주 청룡사지 위전비(忠州 靑龍寺址 位田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1979년05월22일 지정)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비신높이 140cm, 너비 69cm, 두께 23cm의 크기인 위전비는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가첨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 청룡사 위전비의 거북모양 받침돌(사진 左)과 용문양이 있는 옥개석(사진 右)

 

비의 받침돌은 거북모양이고, 머리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비문에는 사찰의 경영을 위하여 신도들이 출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음기에 시주한 불자들의 이름과 출원품의 양이 명시되어 있다.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이 있어 절은 몇차례 보수,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이 비를 세운 대표자는 동정대부 崇徽(숭휘)로 되어 있다.

사원경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청룡사지 석종형부도가 있는 곳의 주변 전경

♧♧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부도(忠州 靑龍寺址 石鐘形浮屠)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소재지: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 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되지 않으나 '적운당사리탑(赤雲堂舍利塔)'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대석을 방형으로 돌려 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 석종형부도 앞 또 다른 작은 승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