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남양주 홍릉(洪陵)과 유릉(裕陵)

왕마구리 2015. 1. 3. 23:37

◀ 세계유산 조선왕릉 남양주 홍.유릉(南陽州 洪.裕陵) ▶

우리나라 최초의 황제릉! 홍릉

조선의 마지막 왕릉으로 유일한 동봉삼실형! 유릉

 

                    ▲ 홍릉 전경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 분포도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홍.유릉 침전(寢殿)」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와 제27대 순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로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의 문무석이 서 있다. 그곳으로 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 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사슴, 소, 말이 섞인 상상의 동물), 코끼리, 사자, 해태(선악을 판단하는 뿔 달린 상상의 동물), 낙타, 말 모양을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홍.유릉 재실(御齋室)」

고급 살림집형의 조선왕릉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영(令, 종5품)과 참봉(參奉, 종9품)의 거처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며 제계하고 제수를 미리 마련하여 갖추어 두는 곳으로 왕릉의례를 위한 준비공간이며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모든 제도를 혁신함에 따라 능의 구조와 돌로 만든 석물의 배치 등도 바뀌었고 재실 건축도 바뀌었다.

따라서 홍.유릉의 어재실도 역대의 능과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 홍릉의 어재실(재궁) 】

 

                    ▲ 외부에서 바라본 남양주 홍릉의 어재실 전체 전경

 

                    ▲ 남양주 홍릉 어재실 2동의 건물 중 앞 건물 전경과 내부

                    ▲ 남양주 홍릉 어재실 앞마당에서 뒤돌아본 솟을대문과 행랑채

 

                    ▲ 남양주 홍릉 어재실 2동의 건물 중 뒷 건물 전경

 

【 유릉의 어재실(재궁) 】

                    ▲ 외부에서 바라본 남양주 유릉 어재실 전체 전경

 

                     ▲ 남양주 유릉 어재실의 재궁 건물

 

                     ▲ 남양주 유릉 어재실의 솟을대문과 행랑채 안밖 전경

 

                     ▲ 남양주 유릉 어재실의 재궁 건물 후면 전경

                     ▲ 남양주 유릉 어재실의 재궁 건물 중간의 연결통로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첫째 :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

-세째 : 능산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네째 :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정(丁)'자의 평면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 이름 또한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진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건설되었다. 월대의 형태는 건물의 영향을 받아 '凸'자형에서 '口'자형으로 바뀌었고,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 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개,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또한 전면의 계단이 생김으로 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설치되었다.

황제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능하 구역으로 내려온 점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 방문일자 】2015년 1월 1일(목)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동부지구관리소 홍.유릉관리소) : T.031)591-7043

 

                    ▲ 남양주 홍.유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전철 : 금곡역(경춘선) 도보15분

  - 버스 : (청량리) #30번, 65번, 165번 일반버스, #1330번, 1330-2번, 1330-3번, 1330-5번, 1330-44번, 765번, 330-1번 광역버스

              (잠실역) #1115번, 1000번, 1100번, 1200번 광역버스

【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 남양주 홍.유릉 탐방코스 】매표소→(유릉)어정-재실-유릉→(홍릉)→연지-재실-홍릉→매표소→역사문화관

 

 

 

                    ▲ 남양주 홍.유릉 입구인 삼문(사진 上)

                       홍릉가는 길(사진 中)

                       홍릉가는 길목에 위치한 연지(사진 下)

 

【 남양주 홍,유릉 소개 】

*사적 제207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278,526㎡

조선시대 왕릉으로 조선 26대 고종(高宗 1852~1919, 재위:1863~1919)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능인 홍릉(洪陵)과

조선 27대 순종(純宗 1874~1926, 재위:1907~1910)과 원후 순명황후(純明皇后 1872~1904), 계후 순정황후(純貞皇后 1894~1966)의 능인 유릉(裕陵)으로 황제릉 형식으로 조성된 왕릉이다.

 

홍릉(洪陵) 』

조선 26대 고종(高宗 1852~1919, 재위:1863~1919)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능.

 

                    ▲ 어재실에서 담장 밖으로 조망된 홍릉의 침전과 능침 영역

 

조선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인 배전(침전)을 세웠다. 능침 주변에 배치하였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 홍릉의 능침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 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 홍릉의 침전 앞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뒤돌아본 전경

                       양쪽으로 석물들이 대칭되게 설치되어 있다.

   

                    ▲ 홍릉의 침전 앞에 배치된 석물들(左로부터... 문석인,무석인,기린석,코끼리석)

   

                    ▲ 홍릉의 침전 앞에 배치된 석물들(左로부터... 사자석,해태석,낙타석,마석)

 

석물의 배치는 홍살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되어 있다.

 

                    ▲ 일반 왕릉과 달리 삼단으로 이루어진 참도가 침전 정면에 설치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일반 왕릉은 월대 좌,우측에 설치된 계단으로 참도가 이어진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다.

 

고종32년(1895)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광무1년(1897)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 아래 새 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라는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 조선 26대 고종(高宗)

생몰년도 : 1852~1919년

재위기간 : 1863~1907년

철종3년(1852) 7월 25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정선방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인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으며,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치세 아래 있던 고종이 장상하면서 친정의 의욕을 내비쳐 아버지와 대립하다가 고종10년(1873)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척인 민씨 일가의 권력이 강해졌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을미사변 등 큰 사건들을 뒤로 하고 고종은 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그 뒤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그들의 강요에 의해 그해 7월 양위조서를 내리고 순종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승하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 남양주 홍릉의 침전과 침전 내부

 

                    ▲ 남양주 홍릉의 수라간(사진 左)과 수복방(사진 右)

 

-대한제국 선포-

1896년(건양1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훗날의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황토재(지금의 광화문사거리)를 지나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와 협의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을 처형하도록 명하고, 이로 인해 을미사변과 맞물려 급진적 개혁으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러시아공관이 안전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고종은 러시아 고아관에서 1년의 긴 시간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 남양주 홍릉의 비각(사진 上)과 비각 내 비(사진 下)

 

◈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

생몰년도 : 1851~1895년

철종2년(1851) 9월 25이 경기도 여주에서 증 영의정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9세 때 부모를 여의고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16세 되던 해인 고종3년(1866)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외척의 세도정치를 경계한 흥선대원군의 의지 때문에 권세가 없는 민씨 집안의 딸을 낙점한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맞서 외척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졌으며,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하여 정권을 잡았다. 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엗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일본정권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갑오개혁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난자, 시해하고 시신을 궁궐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우는 사건이 일으났으니, 이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일본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은 승하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켰다가 그 해 10월 복호시키고, 명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을미사변-

쇄국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정책을 펴쳤지만, 일관성 없는 이른바 널뛰기 외교로, 일번, 청, 러시아 세력과 차례로 순잡으며 나라에 혼란을 초래하면서 결국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그녀는 러시아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 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이다치를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보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승하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그 해 10월 복호되었고,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고, 고종과 함께 지금의 홍릉에 묻히게 되었다.

 

『 유릉(裕陵)

조선 27대 순종(純宗 1874~1926, 재위:1907~1910)과 원후 순명황후(純明皇后 1872~1904), 계후 순정황후(純貞皇后 1894~1966)의 능.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곁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 남양주 유릉의 능침(사진 上)

                       침전(사진 下)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 홍살문 입구에서 바라본 남양주 유릉의 침전 영역 전체 전경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인석을 비롯한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문석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다.

 

                    ▲ 유릉의 침전 앞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뒤돌아본 전경

                       홍릉과 동일하게 양쪽으로 석물들이 대칭되게 설치되어 있다.

   

                    ▲ 유릉의 침전 앞에 배치된 석물들(左로부터... 문석인,무석인,기린석,코끼리석)

   

                     ▲ 유릉의 침전 앞에 배치된 석물들(左로부터... 사자석,해태석,낙타석,마석)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 유릉의 홍살문과 침전 바깥 공간에 자리한 어정

                     ▲ 홍살문은 사라지고 기단석만 남아 있는 유릉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8년) 11월 5일 경운경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현재 성동구 느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영 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기슭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호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월 13일 춘추 71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 조선 27대 순종(純宗)

생몰년도 : 1874~1926년

재위기간 : 1907~1910년

순종은 고종11년(1874)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975년 2월 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고종19년(1882)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광무1년(1897)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마이했다. 그러나 1907년 7월 1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융희1년(1907) 7월 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융희4년(1910)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망국의 한을 품고 구차하게 산 지 17년, 2천만 생민(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제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월 10일 발인하였는데,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 많은 군중속에서 수 천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리에 대한 옥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 유릉의 비각과 비

 

◈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

생몰년도 : 1872~1904년

여원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고종19년(1882)에 세자빈이 되었고, 광무 원년(1897)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광무8년(1904) 11월 33세로 승하하였다. 지금의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모셨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천장하여 함께 모셨다.

 

◈ 순정황후(純貞皇后) 윤씨

생몰년도 : 1894~1966년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광무10년(1906) 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고, 그 다음해 순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으려 조약 체결을 서두르자 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감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황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겪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을 달래다가 1966년 1월 13일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였다. 순종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 유릉의 수복방 앞에서 바라본 침전, 비각 및 석물들

 

『 현대사를 함께 한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강제 체결 후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홀로 남겨진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제강점기와 1945년의 광복, 가시 5년 후 6.25동란 등 한국 현대사의 슬픈 나날을 지켜보다가 1966년 1월 13일 72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 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홍.유릉 같은 구역내에 영친왕과 왕비(이방자)를 모신 영원, 황세손 이구를 모신 회인원, 의친왕묘, 덕혜옹주묘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묘가 함께 있다. 그러나 황실 가족의 묘들은 비공개 지역으로 관람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