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왕마구리 2015. 1. 3. 18:01

◀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선.정릉(宣.靖陵) ▶

우리나라 최초의 동원이강 형식의 왕릉! 선릉

왕만 단독으로 있는 왕릉! 정릉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선.정릉의 재실 외부 모습(사진 上)

                       담밖에서 바라본 재실 내부 전경(사진 下)

 

                    ▲ 재실 앞마당에서 뒤돌아본 행랑채와 안향채 그리고 제기고

 

「선.정릉 재실(齋室)」

조선왕릉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영(令, 종5품)과 참봉(參奉, 종9품)의 거처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며 제계하고 제수를 미리 마련하여 갖추어 두는 곳으로 왕릉의례를 위한 준비공간이며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다.

선.정릉의 재실은 양릉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여름철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정릉 뿐이다.

재실 옆에는 보호수인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 재실 옆의 능의 보호수인 500년된 은행나무

                       *노거수 160호(수고 24m x 둘레 5.5m x 수관 20m / 수고 24m x 둘레 2.27m x 수관 10m)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첫째 :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

-세째 : 능산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네째 :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정(丁)'자의 평면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 이름 또한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진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건설되었다. 월대의 형태는 건물의 영향을 받아 '凸'자형에서 '口'자형으로 바뀌었고,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 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개,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또한 전면의 계단이 생김으로 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설치되었다.

황제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능하 구역으로 내려온 점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 방문일자 】2014년 12월 31일(수)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중부지구관리소 선.정릉관리소) : T.02)568-1291

 

                    ▲ 서울 선.정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지하철 : 선릉역(2호선 & 분당선) 8번출구에서 도보 5분

【 소재지 】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 1

【 서울 선.정릉 탐방코스 】매표소→(정릉)-재실-중종대왕릉→(선릉)-재실-성종대왕릉-정현왕후릉→매표소

 

 

                    ▲ 정릉에서 선릉가는 산책로

 

【 서울 선.정릉 소개 】

*사적 제199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8,813.19㎡

조선시대 왕릉으로 조선 9대 성종(成宗 1457~1494, 재위:1469~1495)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를 모신 동원이강릉인 선릉(宣陵)과

조선 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1506~1544)을 모신 단릉인 정릉(靖陵)으로 구성된 왕릉이다.

 

                    ▲ 선릉 입구

 

『 선릉(宣陵)

조선 9대 성종(成宗 1457~1494, 재위:1469~14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를 모신 왕과 왕비의 능이 정자각 뒤편 좌,우의 서로 다른 언덕 위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이다.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선릉(사진 上)

                        서쪽 성종대왕릉에서 내려다 본 남쪽 두 릉 가운데 정자각 등이 자리한 제향공간(사진 下)

 

서쪽 언덕에 성종대왕이, 동쪽 언덕에는 계비 정현왕후가 모서져있고, 홍살문과 정자각이 두 릉의 남쪽 가운데 위치해 있다.

왕릉에는 세조의 광릉이후 세우지 않았던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면석에는 구름 문양속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지대석과 만석에는 연꽃문양, 인석에는 해바라기와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상석 및 난간석이 있다.

 

                    ▲ 선릉의 성종대왕릉

 

                    ▲ 능침의 병풍석과 난간석(사진 左)과 혼유석(사진 右)

 

                    ▲ 능침의 망주석(사진 左)과 장명등(사진 右)

 

난간석은 1칸이며 그 밖에 양석, 호석, 망주석, 문.무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 정현왕후릉의 능침(사진 上)

                       정형왕후 능침 앞 석물들(사진 下)

 

정현왕후릉은 병풍석과 상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장대하면서도 조화가 잘 이루어져 균형미가 있다.

임진왜란 때 능이 훼손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

 

◈ 조선 9대 성종(成宗)

생몰년도 : 1457~1494년

재위기간 : 1469~1494년

성종은 1457년 7월 30일 경복궁에서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1469년 11월 28일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대비(세조의 비)의 명에 따라 13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재위 중 경국대저을 반포하여 조선의 법전체제를 완성하고 조세제도로는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유교예법을 확립하고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밖으로 윤필상 등을 보내 압록강, 두만강 건너의 야인을 물리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성종은 3비 9후궁에게서 16남 12녀를 두고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춘추에 승하하니 재위기간은 25년 1개월이었다.

 

 

 

                    ▲ 선릉의 정자각

                    ▲ 선릉의 정자각 뒤편에 위치한 서쪽의 성종대왕릉과 동쪽의 정형왕후릉으로 갈라지는 신로

  

                     ▲ 선릉의 수라간(사진 左), 비각(사진 中), 그리고 수복방(사진 右)

 

◈ 성종의 3비들

- 원비 공혜왕후(1456~1474) : 세조 때의 공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공릉에 안치된 장순왕후와 친자매 사이이다.

                                              세조13년(1467) 12세의 나이로 자을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 부인이 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5년 뒤 성종5년(1474) 19세의 나이로 자녀없이 승하했다. 파주 삼릉의 순릉에 모셔졌다.

 

- 연산군의 모후 윤씨(1455~1482) :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에 지위에 있다가 원비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다.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신씨의 딸로 윤관의 11대손이다.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고부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낸 일로 인해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신숙주는 그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그의 오빠 윤구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서삼릉의 희묘에 모셔져 있다.

 

 

                    ▲ 선릉 정현왕후릉의 석물들(장명등과 망주석)

 

                    ▲ 선릉 정현왕후릉의 석물들(문인석과 무인석)

                    ▲ 선릉 정현왕후릉의 난간석

 

- 계비 정현왕후(1462~1530) : 윤호의 딸로 1462년 6월 25일 태어나, 1473년 6월 숙의가 되었고, 1480년 11월 8일 왕비가 되어 중종과 신숙공주를 낳았다.

                                               1530년 8월 22일 경복궁에서 보령 69세로 승하하여 10월 29일 선릉에 장사되었다.

 

 

 

 

 

 

 

 

 

 

 

 

 

 

 

 

 

 

 

 

 

 

 

 

 

 

 

 

 

 

 

 

 

 

 

 

 

 

 

 

 

 

 

 

 

 

정현왕후릉 주변에서 노출된 난간석주

노출된 석물인 난간석주는 조선시대 정현왕후릉 조성 당시 또는 그 후 보수과정에서 파손되어 능 주변에 묻혀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관람로가 신설된 후 토양이 빗물에 일부 유실되면서 노출된 것임.

현재 능은 능제 형식에 맞게 12개의 난간석주가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다.

 

 

                    ▲ 재실에서 정릉가는 길

 

『 정릉(靖陵) 』

조선 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1506~1544)을 모신 단릉.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정릉은 원래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동원이강릉(왕과 왕비의 능이 정자각 뒤편 좌우의 언덕 위에 조성된 형태)으로 있었으나, 제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홍살문, 정자각 및 능침이 일직선의 배치를 이루는 정릉

 

홍살문과 정자각 및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고,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 제도를 본떴다.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향로와 어로)

 

병풍석의 면석에는 구름 문양 속에 십이지신상이, 지대석과 만석에는 연꽃문양이, 인석에는 국화문양과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상석 및 난간석이 있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은 장대하고 선각이 뚜렷하며 머리가 몸에 비하여 큰 편이다.

제2계비 문정왕후 사후 문정왕후도 이곳으로 장사하여 하였으나, 한강의 범람으로 홍살문까지 물이 들어와 이장론이 대두하여 문정왕후는 태릉에 장사지냈다.

임진왜란 때 능이 훼손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

 

 

 

                    ▲ 정릉의 정자각

 

                    ▲ 정릉의 정자각의 신계 무늬(사진 左)와 비각(사진 右)

 

◈ 조선 11대 중종(中宗)

생몰년도 : 1488~1544년

재위기간 : 1506~1544년

1488년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1506년 9월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제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중 조광조 등 새로운 학자를 등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현량과를 설치하고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자치를 시도하였다. 그의 재위기간 중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량하고 많은 책을 펴냈다. 북방 야인의 침입에 대비하고, 삼포에서 왜인들이 난동을 부리자 이를 진압한 뒤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방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3비 9후궁에게서 9남11녀를 두었다. 1544년 11월 14일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 창경궁에서 승하하니 재위 39년이며, 춘추 57세였다.

1545년 2월 현재의 고양시 희릉에 장사하였으나, 문정왕후에 의하여 1562년 9월 4일 선릉 동쪽 동남쪽 언덕으로 옮겨졌다.

 

◈ 중종의 3비들

- 원비 단경왕후(1487~1557) : 신수근의 딸로 양주시 온릉(溫陵)에 모셔져 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 부인의 오빠인데다 중종반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7일 만에 폐비되어 사가에 머물다 명종12년(1557)71세로 소생없이 승하하여 친정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숙종24년(1698)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영조15년(1739) 복위되어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추존되었다.

 

- 제1계비 장경왕후(1491~1515) : 윤여필의 딸로 고양시 서삼릉의 희릉(禧陵)에 모셔져 있다.

                                              파원부원군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인 숙의로 책봉되었으나 ,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150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에 세자인 세자인 인종(仁宗)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인하여 7일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32년(1537)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옮겼으며, 원래는 중종의 정릉(靖陵)을 희릉 곁에 썼으나, 명종17년(1562)에 정릉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성종의 선릉(宣陵) 곁으로 옮기면서 희릉만 남게 되었다. 소생으로는 인종 외에 효혜공주가 있다.

 

-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 윤지임의 딸로 서울시 노원구 태릉(泰陵)에 모서져 있다.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다.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중종10년(1515)에 세자(인종)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승하하자 151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생은 명종,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4녀이다.

왕후는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고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인종과 명종의 외척들과의 세력 다툼인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불교의 부흥을 위해 선교양종과 승과, 도첩제를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명종20년(1565)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