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왕마구리 2015. 1. 3. 13:29

◀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단릉! 태릉

난간석으로 연결한 동원쌍봉릉! 강릉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첫째 :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

-세째 : 능산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네째 :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황제릉으로 조성된 남양주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정(丁)'자의 평면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 이름 또한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진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건설되었다. 월대의 형태는 건물의 영향을 받아 '凸'자형에서 '口'자형으로 바뀌었고,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 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개,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또한 전면의 계단이 생김으로 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설치되었다.

황제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능하 구역으로 내려온 점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 방문일자 】2010년 11월 6일(일)

                           불암산둘레길 '나절길' 도보탐방시 방문한 조선왕릉!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동부지구관리소 태,강릉관리소) : T.02)972-0370

 

                    ▲ 서울 태릉과 강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지하철 : 화랑대역(6호선) 1번출구에서 버스 #202번, 1155번, 1156번, 73번, 82번으로 환승, '태릉,강릉'버스정류장 하차(5분 소요)

【 소재지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공릉동)

【 서울 태릉과 강릉 탐방코스 】태릉매표소→태릉→강릉

【 서울 태릉과 강릉 소개 】

*사적 제201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조선시대 왕릉으로 조선 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1506~1544)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를 모신 단릉인 태릉(泰陵)과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재위:1545~1567)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원쌍봉릉인 강릉(康陵)으로 구성된 왕릉이다.

 

 

 

♧ 태릉(泰陵)

*사적 제201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태릉 전경(사진 上)

                      태릉 능침(사진 下)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다.

문정왕후(1501~1565)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다.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중종10년(1515)에 세자(인종)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승하하자 151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생은 명종,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4녀이다.

왕후는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고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인종과 명종의 외척들과의 세력 다툼인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불교의 부흥을 위해 선교양종과 승과, 도첩제를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명종20년(1565)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하였다.

능제는 봉분에 운채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다. 곡장이 둘려진 봉분 주위에는 석양, 석호 등이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 아래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수복방,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것을 확인하거나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망료위, 표석, 홍살문 등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두 사람이 걸을 폭만큼의 신도와 어도의 판석을 깔은 보도가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인 정릉에 묻히고자 하여 공사를 벌였으나, 지대가 낮고 장마철에 물이 들어오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모셔졌다.

 

                  ▲ 정자각 

 

정자각은 능에 모신 분을 위하여 제례를 드리는 곳이다.

지붕 모양이 정丁자를 이루고 있어 정자각이라 부른다. 태릉 정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자각 오른쪽에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소맷돌이 있는 왼쪽의 계단은 혼령이 오르는 곳이고, 오른쪽의 계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관이 오르는 곳이다.

정자각 왼쪽의 계단은 제관이 축문을 태우러 갈 때 사용한다.

 

                  ▲ 태릉의 비각(左)과 수복방(右)

 

비각의 표석은 영조30년(1754)에 조성되었다.

표석의 앞면의 '조선국 문정왕후 태릉(朝鮮國文定王后泰陵)'은 홍계희의 필체이며 뒷면의 비문은 낙풍군 이무가 썼다.

(표석 뒷면의 내용)

성렬인명 문정왕후 윤씨는 제11대 중종대왕의 계비이다. 홍치14년(1501) 신유 10월22일 탄생하셨으며 정덕12년(1517) 정축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가정44년(1565) 을축 4월7일에 승하하시고 7월15일에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때가 문정왕후의 연세 65세가 되는 해였다. 숭정 기원 후 126년(1754)에 이 비석을 설립하였다.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왕비의 무덤들이 거위 훼손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예가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여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며 동년 12월 24일 개관한 태릉 내 입구에 위치한 '조선왕릉전시관'에서 국장 절차와 조선왕릉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산릉제례를 포함한 왕릉의 관리 및 왕릉의 조성 과정 등을 살펴보고 태릉을 참배한 후 태릉 내의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 강릉으로 가기 위해 태릉 입구로 되돌아 나온다.

 

                  ▲ 태릉내 조선왕릉전시관 

 

                   ▲ 입구에서 태릉가는 길

 

 

                  ▲ 태릉의 산책로 

 

 

                  ▲ 태릉의 숲

 

평일에는 비공개되고 금요일과 토요일만 오전, 오후 각 2시간씩 태릉을 탐방한 관광객들에게 공개를 한다는 삼육대학교 정문 입구에 위치한 강릉을 탐방하려고 하니 태릉에서 강릉으로 내부에서 연결하는 길은 중간에 태릉선수촌이 자리를 잡고 있어 태릉 입구로 되돌아 나와 화랑로 인도를 따라 진행하여 강릉 입구를 이용하여 탐방을 할 수가 있다.

태릉 탐방을 마치고 태릉 입구로 나온 시간이 오후 1시 34분. 둘레길 인도를 따라 삼육대학교 정문 입구에 위치한 강릉까지 진행하면 오후 2시부터 관람이 가능한 강릉을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고 둘러 볼 수가 있을 것 같다.(2010년11월 당시 상황)  

 

                 ▲ 버스정류장 옆 불암산둘레길 표시목

 

태릉에서 강릉으로 가기 위해 인도를 따르면 '태릉.강릉' 버스정류장이 있는 태릉 담장 옆으로 둘레길 표시목이 보이고, 길 건너에는 '↑삼육대학교 800m'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버스정류장의 운행버스 노선을 보니 모두 화랑대역을 경유하는 버스들이고 노선버스는 #1156, 1155, 202, 73번 등이다.

100여m를 진행하니 태릉선수촌.

태릉국제스케이트장과 KISS(체육과학연구원) 앞에 이르면 길 건너 '삼육대학교 교육농장' 간판이 보인다.

삼육대학교 정문 앞에 이르면 정문 약 50여m 전 좌측에 강릉 출입문이 있다.

 

                  ▲ 삼육대학교 정문

 

강릉 탐방 시작 시간인 2시까지 정문 앞을 배회하며 대기를 하고 있다가, 태릉 관리사무소의 연락을 받은 직원이 문을 개방해 다른 탐방객이 없어 혼자서 강릉 탐방을 하였다.

 

 

♧ 강릉(康陵)

*사적 제201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 강릉의 능침

 

조선 제13대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중종29년(1534)에 문정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545년 이복형 인종의 서거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8년간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고, 1553년부터 친정하여 외척을 견제하고자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하였다. 1567년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인순왕후(1532~1575)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으며, 명종이 승하하여 중종의 7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이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하였다. 선조8년(1575)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제는 봉분을 병풍석으로 두르고, 난간석으로 연결한 동원쌍봉릉이다. 곡장으로 둘려진 봉분 주위에는 석양, 석호 등이 호위하고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 정자각 

                  ▲ 비각과 수복방터

 

아래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것을 확인하거나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망료위, 표석, 홍살문 등이 있다.

비각 옆으로는 수복방이 있었던 자리에 건물은 없고 터만 남아있다.

 

                 ▲ 강릉의 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