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여주 영릉(寧陵:효종대왕릉)

왕마구리 2015. 2. 2. 21:37

◀ 세계유산 조선왕릉! 여주 영릉(寧陵) ▶

상하로 봉분을 배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상하릉!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된 대표적인 조선시대 대표적 건축물로 평가되는 영릉 재실!

 

                     ▲ 수복방 앞에서 바라본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된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재실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방문일자 】2015년 1월 27일(화)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500

*문의(세종대왕유적관리소) : T.031)884-3123~4

 

                     ▲ 여주 영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여주터미널 앞 'BUY THE WAY' 편의점 앞 버스정류장에서 여주시내버스 이용 :

     *여주터미널→세종대왕릉 : #961번(09:30), #965-1번(13:10), #952-2(14:50)

     *세종대왕릉→여주터마널 : #961번(10:00), #965-1번(14:20), #952-2(15:30)

【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산책로(사진 上)

                        여주 영릉(세종대왕릉)가는 길 입구 갈림길(사진 下)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700m 조성되어 있지만, 겨울철(산불조심강조기간)에는 폐쇄되어 차량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 여주 영릉(驪州 寧陵) 소개 】

*사적 제195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2,009,545㎡(英陵과 寧陵 전체 면적)

 

 

조선시대 왕릉으로 조선 17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1649~1659)과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장씨를 모신 무덤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위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 동원상하릉 배치의 여주 영릉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릉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 다른 왕릉과는 달리 금천교가 참도 중간에 조영된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효종10년(1659) 5월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효종이 승하하자, 이 해 10월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현종14년(1673)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 여주 영릉(효종대왕릉)의 수복방(사진 左)과 수라간(사진 右)

                        ***수복방 :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인인 수릉관 또는 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노인 수복이 거처하던 곳으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에 원형대로 복원.

                        ***수라간 : 산릉제례 때 제사 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05년7월 발굴조사하여 006년에 복원.

 

                     ▲ 여주 영릉(효종대왕릉)의 비각과 영릉비

 

◈ 조선 17대 효종(孝宗)

생몰년도 : 1619~1659년

재위기간 : 1649~1659년

 

 

                     ▲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능침영역(사진 上)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능침(사진 下)

 

효종은 조선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이다.

인조4년(1626)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머물렀다. 귀국 후인 인조23년(1645) 소현세자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후 세자로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오히려 그들을 도와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내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효종10년(1659) 5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능침의 장명등(사진 左)과 난간석(사진 右)

 

-일화

 인조14년(1636) 청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여 불과 며칠만에 강화도까지 점령하였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봉림대군(효종)과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군대를 의지와 상관없이 큰 고생을 해 가며 따라 다녀야 했다. 게다가 조선과 우호적이던 명나라가 점령당하는 것을 목격하여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고,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하면서 국제 감각을 키웠다.

인조23년(1645) 소현세자는 귀국 후 급서하였으며,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자들을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 영릉의 정자각

                     ▲ 동계가 신계 좌,우 두 개 설치된 영릉의 정자각 신계

 

◈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1618~1674) :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있을 때 현종을 낳았으며, 귀국한 뒤 인조27년(1649)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여주 영릉 효종대왕 비 인선왕후릉(사진 上)

                        여주 영릉 인선왕후릉 후면(사진 下左)과 난간석(사진 下右)

 

♧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보물 제1532호(2007년11월29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 영릉의 재실 외부 모습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인 영릉에 제사하기 위해 1674년에 세운 건물로 능을 수호하고 관리를 담당하는 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며, 제관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영릉 재실은 안향청,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 침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안향청, 집사청(현 제기고), 참봉청(현 재실), 제기고(현 행랑채부속동), 행랑만이 남아 있다.

 

  

                     ▲ 영릉 재실의 재실, 제기고, 안향청(사진 左로 부터...)

 

효종의 능은 본래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서쪽 산기슭의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다. 1659년 5월9일 산릉도감이 꾸며지고 6개월의 공사를 거쳐 그 해 10월29일 산릉의례가 거행되었다.

재실은 7월2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26일에 상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릉을 조성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석물이 벌어지고 현궁까지 물이 침투할 것을 염려하여 16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고 재실도 그대로 이건하였다. 재실은 이듬해인 1674년에 인선왕후를 합장하면서 다시 한 번 자리를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 이전된 재실이 현존 재실로 추정된다.

영릉이 초장, 이장, 합장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재실도 1659년 초창된 후 두 번의 이건과정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였다.

영릉 재실은 초창 시 장릉의 예를 따랐다. 처음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73년에 천릉하며 기록한 '효종천봉산릉도감의궤'를 통해 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때 재실은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 여주 영릉(효종대왕릉) 재실 배치도(사진 上)

                        재실 사주문 앞에서 바라본 재실 내부 전체 전경(사진 中)

                        재실 사주문 앞에서 바라본 안향청, 제기고, 재실 전경(사진 下)

 

재실은 안향청,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 침가, 일간문으로 구성되었다. 장릉과 비교해보면 어재실이 안향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전체 규모와 형식이 일치하고 있어 장릉 재실을 모범 삼아 영릉 재실을 건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실은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현종릉과 합사하면서 내청룡 밖에 다시 이건하였다. 이 때도 구 재실을 철거하여 이건하였기 때문에 건축의 규모와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 행랑채 부속동 앞에서 바라본 출입문 양쪽으로 자리한 행랑채(사진 上)

                        안향청 옆에서 바라본 행랑채(사진 中)

                        옛 제기고로 추정되는 행랑채 부속동(사진 下)

 

현재 영릉 재실은 안향청, 제기고, 재실, 행랑채 부속동, 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 뒷편으로 낮은 구릉지를 면하고 있어 가로로 길게 안향청, 제기고, 재실이 차례로 배치되고, 그 전면에 길게 대문이 있는 행랑이 있다. 1900년경 영릉의 재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능제규례'의 '재실지도'와 비교해 보면 현재 재실은 능역을 관리하는 참봉의 거처였던 참봉청이었으며, 제기고라 부르는 건물은 집사청이었다.

현 행랑채 부속동이 제기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시 왕과 헌관이 머물었던 안향청은 재실 건물 중 가장 격식있는 건물이다. 따라서 주위에 담장을 둘러 영역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이 철거된 상태이다. 또한 안향청 향좌측에는 전사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재실내 노거수 느티나무와 협문1(사진 上)

                        안향청과 사주문(사진 中左), 우물과 사주문(사진 中右)

                        출입문을 들어서면 대하게 되는 협문1(사진 下)

 

영릉 재실은 초창시 장릉의 제도를 따랐다.

의궤의 기록과 '능제규례'와 비교해 볼 때 처음 조성되었던 재실의 모습을 대체로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고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영릉 재실은 기본 형태가 잘 남아있고, 간결하고 소박하면서 짜임새 있는 건물의 구성은 조선왕릉의 재실 건축의 표본으로 학술적,역사적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驪州 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천연기념물 제459호(2005년04월30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327(영릉 재실內)

 

 

현존하는 조선조 왕릉 재실 중에서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는 영릉 재실 공간 내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양목 외에 향나무와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생한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생물학적 가치가 큰 노거수 일 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