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 재실 전체 전경(사진 上_
재실과 전사청(사진 中)
재실의 행랑채(사진 下)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구리 동구릉 재실앞 느티나무(사진 左)와 재실에서 건원릉 가는 길(사진 右) 「 건원릉(健元陵) 」 조선 제1대 태조의 능 동북면의 호랑이, 조선의 용이 된 태조 이성계 조선 왕릉의 표본!!!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입구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번지 *조성시기:태종8년(1408년) 9월 9일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 구리 동구릉 건원릉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아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진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에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태조 이성계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꼐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 구리 동구릉 건원릉 비각과 능침영역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와 비가 보관된 비각(사진 左)과 비(사진 右) ▲ 구리 동구릉 건원릉의 수복방(사진 左)과 수라청(사진 右)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보물 제1741호(2011년12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6-10 건원릉은 고려의 왕릉인 현릉(공민왕능)의 제도를 표본으로 태종8년(1408)에 조성되었다. 정자각은 고려시대에도 건립하였으며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왕릉에 정자각을 조성하였으므로 건원릉의 정자각도 능침의 조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정자각은 능제에 따라 능침 남쪽에 낮게 자리하고 있다.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측면(사진 左)과 후면(사진 右)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8년(1408) 건원릉을 조성하면서 함께 지어졌다. 이후 선조19년(1586)에 중수했다고 전하며,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방화하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숙종은 건원릉을 수리하려 했지만 왜란의 신기한 사연을 듣고 손대지 않았다고 숙종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영조40년(1764) 건물이 크게 퇴락하여 중수도감을 설치하고 건물을 수리하였다. 정조8년(1784)에도 소규모 수리가 있었으며 고종16년(1879)에는 건원릉 외에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수릉, 정릉의 정자각을 고치면서 수리했다. 기록에 남은 건원릉에 대한 마지막 수리는 광무3년(1899) 능의 석물을 고친 기사가 있지만, 이 떄는 정자각은 정자각은 손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 길례 단묘도설에는 '산릉의 침전(정자각)은 능실 남쪽에 있는데,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모두 3칸으로써,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있고, 신좌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정자각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은 이와 같은 모습이다. 정자각은 홍살문 북쪽 능상 남쪽에 있다. 장방형의 기단 위에 정전 정면 3칸, 측면 2칸에 배위청 정면 1칸, 측면 2칸이 전체적으로 丁자형을 이루며 서 있다. 기단은 장대석을 4단 이상 쌓은 단정한 모습이다, 배위청 동쪽의 향로계단석 우석은 테두리만 조금 남고 마모가 심하며 문양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본래는 다른 정자각과 마찬가지로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내부 전경(사진 上) 마모가 심하여 문양 확인이 어려운 정자각 우측의 신계(사진 下) 정전은 1출목 2익공이고 살미 끝은 18세기의 조각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전은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정자각의 규모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공포부분 등 세부는 18세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서 영조40년(1764) 도감을 설치하고 실시한 중수 때의 시대 특징을 충실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 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초창기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 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 뿐만 아니라 조선의 능침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九里 東九陵 健元陵 神道碑) *보물 제1803호(2013년07월16일 지정) 태종9년(1409)에 세운 것이다.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건국 과정을 비롯하여 생애와 업적 등을 영원히 기리고자 일대기를 짓고 돌에 새겨 새운 비이다, 이 신도비는 이수, 비신과 귀부가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왕의 신도비는 물론 여타 신도비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당대의 신망있는 문신이자 대학자였던 권근(1352~1409)이 비문을 짓고, 명문장가였던 변계량(1369~1430)이 비음기를 지었으며, 명신 서예가인 정구(1350~1418)가 전액을 쓰고, 조선 초기 명필인 성석린(1338~1423)이 비문글씨를 썼다. 비록 비좌 부분이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고려시대 석비 조형을 탈피하여 조선시대 들어와 새롭게 명나라의 석비전통을 받아 들여 세운 비로, 조선시대 석비의 기준작이 되는 한편 서예사를 비롯한 역사,문화사 연구자료가 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 조선 1대 태조(太祖) 생몰년도 : 1335~1408년 재위기간 : 1392~1398년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목조로 추존) 때부터 동북면 지방에 정착하여 원나라의 지방관직을 수행하면서 지방토호로 성장했다.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점차 원의 세력이 약화되고, 고려에서도 공민왕의 반원개혁이 시작된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고려가 원나라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데 내응하여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아버지 이자춘의 뒤를 이어 이성계는 그 직위를 이어받으며 동북면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공민왕10년(1361) 홍건적의 침입 때이다. 그는 개성이 함락되자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후로도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격파하는 등 다양한 공을 세워 나라의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고려 우왕14년(1388)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출병을 반대하였다. ◎ 4대 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둘째, 여름철에는 군사소집이 불가하다 셋째, 수도를 비운 사이 왜구가 침입할 수 있다 넷째, 여름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쏠 수 없고, 병사들은 병든다 그러나 끝내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다음 해에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웠으며,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 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불교에 정진하다가 태종8년(1408) 5월 24일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함흥차사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한다.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르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의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것이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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