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세계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 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릉)

왕마구리 2015. 2. 3. 01:27

◀ 세계유산 조선왕릉! 여주 영릉(英陵) ▶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된 왕릉!

조선왕릉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춘 동봉이실합장릉!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재실의 삼문

 

 

                     ▲ 여주 영릉 재실

                         ***재실 :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제관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던 집이다.

                                      국상 후 탈상 때까지 대군 등 자손과 문무백관이 제례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제례를 준비하던 집이다.

                                      이 재실은 영릉 안산(능 앞에 있는 산)인 북성산 동남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후에 없어진 것을 1970년에 이곳에 복원한 것이다.

                     ▲ 여주 영릉 재실의 행랑채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여주 영릉 산책로

 

【 방문일자 】2015년 1월 27일(화)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500

*문의(세종대왕유적관리소) : T.031)884-3123~4

 

                     ▲ 여주 영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여주터미널 앞 'BUY THE WAY' 편의점 앞 버스정류장에서 여주시내버스 이용 :

     *여주터미널→세종대왕릉 : #961번(09:30), #965-1번(13:10), #952-2(14:50)

     *세종대왕릉→여주터마널 : #961번(10:00), #965-1번(14:20), #952-2(15:30)

【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 여주 영릉 입구(사진 左)와 영릉으로 들어가는 '훈민문'(사진 右)

                     ▲ 여주 영릉 훈민문을 지나 영릉 홍살문으로 가는 길

 

【 여주 영릉(驪州 英陵) 소개 】

*사적 제195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2,009,545㎡(英陵과 寧陵 전체 면적)

조선시대 왕릉으로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를 모신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28년(1446)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능침영역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왕과 왕비 두 분의 서로 다른 방(현궁, 광)을 갖추고 있는 동봉이실합장릉으로 이는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 동봉이실합장릉인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능침

 

 

                     ▲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능침의 혼유석(사진 上左)과 난간석(사진 上右)

                         망주석(사진 下左)과 장명등(사진 下右)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 세종대왕동상, 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 조선 4대 세종(世宗)

생몰년도 : 1397~1450년

재위기간 : 1418~1450년

세종은 태조6년(1397)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18년(14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 여주 영릉의 세종대왕상

 

세종2년(1420)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 영릉의 정자각

 

                     ▲ 영릉의 정자각 동편으로 신계 옆의 동계가 좌,우 2개가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태조4년(1395)에 태어났다.

태종8년(1408)에 충녕대군(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태종17년(14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태종18년(14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 하여 세종14년(1432)에 왕비로 승봉되었다.

 

                     ▲ 영릉의 수복방 :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 원형대로 복원한 것임.

 

                     ▲ 영릉의 수라간(사진 左) : 주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

                         영릉의 비각(사진 右)

 ◀ 여주 세종대왕릉 영릉비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군국의 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이 모두 사사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는 8남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 영릉의 능침영역으로 오르는 계단길

 

세종과 소헌왕후는 매우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료에 따르면 세종18년(1436) 10월, 세종은 사정전으로 나아가 소헌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우리 조정 이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 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세종28년(1446)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 '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이를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문헌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 여주 영릉의 금천문과 홍살문

                         ***금천교(禁川橋) :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 또는 금천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193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발굴하여

                                                     2008년 5월 복원하였다.

                         ***홍살문(紅箭門) :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 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있고 제관들이 찾을 때 절을 하는 판위가 조성되어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 절을 하고 정자각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참례하러 가는 길)라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라 불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신도로 출입할 수 있을 뿐이다. 

 

                     ▲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여주 영릉 참도(사진 上)

                        일직선을 이루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중간에 꺾이어지는 참도(사진 下)

                     ▲ 영릉 재실에서 뒤돌아본 참도

 

                     ▲ 세종전 주변에 야외 전시된 세종대왕 시대의 발명품들

                     ▲ 세종전

                     ▲ 입산이 금지(산불조심강조기간)된 700m 떨어진 효종대왕릉 가는 산책로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