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강변의 아름다운 천년고찰!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 ▶
나옹선사의 입적으로 대사찰이 된 신륵사!
여주 영릉(세종대왕릉)의 원찰!
경기도 여주는 성지지맥과 마감산~보금산 산행, 명선황후생가,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와 보물 제 6호,7호,8호로 지정된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원종대사 혜진탑, 고달사지 석불대좌 등이 남아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251호로 지정된 파사성, 이번에 소개하게 되는 신륵사 탐방 등으로 이미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왕릉 영릉과 목아박물관 등은 탐방을 하지 않은 곳이 남아 있어 이번에 시간을 내어 여주 신륵사를 재탐방하고, 목아박물관, 조선왕릉 영릉(세종대왕&효종대왕릉)을 새롭게 탐방하게 되었다.
여기에 소개하게 되는 신륵사에는 8점의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신륵사의 금당인 극락보전,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원구형석조부도와 나옹대사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등 경기도 문화재자료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고, 사찰 내에는 신륵사의 역사를 대변하듯 약 600년 수령의 보호수인 향나무, 은행나무, 참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여주 신륵사는 고려 우왕2년(1376)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으므로, 나옹선사와 관련된 신륵사의 문화재와 그 외의 문화재들로 나누어 두 편으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신륵사 입구의 여강길 안내도
【 탐방일자 】2015년 1월 26일(월)
【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 소개 】
*소재지: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 또는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경내의 동대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초상 지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우왕2년(1376) 8월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조당,승당,선당,종루,동익당,서익당,남행랑,향적당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을 모시는 선각진당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를 발원한 것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승계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과 수봉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신조,자초 등의 고승들과 최영,조민수,조무선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가 금자로 제목을 쓰고 각봉은 황복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경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과 홍의룡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 그리고 강부인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영릉(세종대왕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예종1년(1469)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성종3년(1472)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신륵사는 사대부들의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럭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가, 현종12년(1671) 계헌이 중건하였고, 숙종26년(1700) 위학과 그의 제자 우안,천심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영조2년(1726)에는 영순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20년(1796) 영돈녕 김이소와 예조판서 민종현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종각,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철종9년(1858)에는 순원왕후가 내탕전을 희사하여 불전,선료,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 주지 성인이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 명부전, 심검당, 적묵당, 봉향각, 칠성각, 종각, 구룡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정조21년(1797)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보물 제1791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된 지장탱화가 있으며, 영조49년(1773)에 주조한 범종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느 '千秋萬歲'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 구실을 하는 정면 9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보물 제225호인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 비천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인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석종비,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가 있다.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 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 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숙종15년(1689)과 영조25년(1749), 철종11년(1860)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있다.
▲ 신륵사 구룡루 옆에서 바라본 김병기공덕비, 다층전탑 그리고 보호수인 은행나무와 참나무(수령:약600년, 수고:32m, 나무둘레:4.1m)
◀ 제Ⅱ편 : 신륵사의 문화재들 ▶
나옹선사와 관련된 문화제들을 제외하고도 신륵사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를 포함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극락보전 앞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극락보전에 봉안된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의 조성에 관한 기록을 적고 있는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 보물 4점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신륵사 극락보전, 려말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인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건륭삼십팔년명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극락보전 삼장보살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등 경기도 지정 문화재들이 있다.
또한 보호수인 수령 약 600년의 향나무와 참나무 등이 경내에서 신륵사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 신륵사의 문화재들 】
◈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佛 보물 제1791호)
◈ 보호수
*여주 신륵사 향나무(여주-65호)
*여주 신륵사 참나무
◈ 경기도 도지정문화재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경내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극락보전 좌측에 조사당이 위치해 있으며, 현재 조사당은 서까래 이상 해체 후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보수공사기간(2013년12월27일~2014년8월26일)이 끝났지만 아직까지 완료되지 않아 공사용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 전혀 볼 수가 없는 사태이다.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등은 조사당 뒷편 신륵사 북쪽 산기슭에 함께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삼층석탑은 신륵사 동쪽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아래 남한강변 암반 위에 세워져 있고, 1972년 홍수로 떠내려가 버린 강월헌 육각정자는 그 뒤 삼층석탑 조금 아래쪽에 다시 세워져 있다.
♧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 多層石塔)
*보물 제225호(1963년01월21일 지정)
극락보전 앞에 있는 높이 3m의 탑으로,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석탑은 현재의 보존 상태와 절 안의 건물 배치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로 추정된다.
석탑은 흰색의 대리석을 네모난 단면으로 다듬고 쌓은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구하기 어려운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규모 역시 크지 않다.
2층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여러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은 신라 석탑이나 고려 석탑의 기본적인 수법을 따른 것이지만, 각 세부의 조형은 양식을 달리하였다.
▲ 신륵사 극락보전 앞 다층석탑의 기단부(사진 左)와 탑신부(사진 右)
바닥돌 위에는 아래층 받침돌이 놓였는데, 하대석의 윗부분에는 꽃잎을 아래로 향하게 둔 홑잎의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연꽃의 배치는 가운데에서 모퉁이로 향하면서 점차 경사를 짓는 모습인데,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연꽃 무늬의 배열 수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면석은 매우 낮은 편으로, 각 면마다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형식적으로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면에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덮개돌은 마치 윗층 받침돌의 하대석까지 포함한 듯 면석에 비해 유난히 두꺼워 중후한 느낌을 주지만, 각 면마다 여러 장식적인 의장을 두어 둔중함을 다소 감소시킨다. 곧 옆면에는 한 줄의 띠로 된 굽을 둘렀고, 위아래면에는 홑잎의 연꽃 무늬를 각각 앙련과 복련의 모습으로 새겼다. 양련의 연꽃무늬 아래와 복련의 연꽃 무늬 위에는 각각 1단의 각진 받침이 있다.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상층 기단의 모서리기둥과 운룡문
윗층 받침돌의 면석에는 꽃 무늬와 구슬 무늬 등으로 꾸민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고, 4면의 각 면마다 용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용 주변의 우아한 구름 무늬가 용과 잘 어울려 조각 수법은 능숙한 편이다. 윗층 받침돌의 덮개들은 마치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곧 윗면은 아무런 굄도 없이 평평하지만, 옆면에는 윗부분에 굽의 띠를 돌렸고, 아래부분에는 맨 아래에 이르기까지 각 면마다 꽃잎이 위로 향한 홑잎의 연꽃 무늬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현재 8층 몸돌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다만 8층 몸도 위의 지붕돌과 몸돌은 8층 바로 위의 것은 아니다. 각 층의 체감은 적은 편이며, 특히 몸돌의 높이가 매우 낮아 지붕돌의 높이와 비슷하므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층수가 다층이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평박한데 밑면 받침은 매우 낮게 조각되었고, 윗면에는 1단의 각진 굄이 새겨져 있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다가 네 귀퉁이의 전각에서 반전을 이루었지만, 낙수면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둔중해 보이고, 내림마루인 우동도 거의 수평이어서 반전이 약해져 경쾌한 느낌은 줄어 보인다.
머리장식인 상륜부의 여러 부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의 창건시기는 신라시대로 일컬어지지만 현재의 유물은 대체로 고려 중기 이후의 것이고, 조선 성종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여 건립시기도 1472년 전후로 추정된다.
♧ ♧ 신륵사 극락보전(神勒寺 極樂寶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1985년06월28일 지정)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하여 정조24년(1800)에 완공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영조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건륭삼십팔년명동종,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보물 제1791호(2012년12월27일 지정)
- 아미타여래상(본존):높이 149.5cm, 무릎너비 96.9cm
- 관음보살상(좌):높이 177.5cm
- 대세지보살상(우): 높이 174.2cm
신륵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으로, 불상 내부에서 복장원문이 발견되어 1610년에 조각승 인일과 수천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정확한 조성시기와 새로운 17세기 초 조각승의 발견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서있다. 이들 산본상은 장방형 얼굴과 세장한 신체비례, 근엄하면서도 단정한 인상, 협시보살상의 각각 다른 착의 형식 등이 특징이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중품하생인을 하였으며 얼굴과 목이 길고 어깨와 무릎은 넓어 전체적으로 길쭉하면서도 비례가 안정적이고 자세는 당당하다. 머리에는 육계가 유난히 높게 올라가 독특하고 정수리에는 정상계주를 표현하였으며 큼직한 나발을 빼곡히 조각하였다. 긴 얼굴은 눈두덩이가 두터운 좌우가 긴 눈, 기다란 코, 작지만 도톰한 입술 등을 표현하여 근엄하고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특히 아랫눈꺼풀을 바깥 방향으로 굴곡지게 나타내거나 인중을 돌출되게 표현하고 입술 양 끝을 오목하게 패도록 조각하여 얼굴의 입체감을 더하였다. 곧고 긴 목에는 삼도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착의법은 오른쪽 팔에 편삼을 두르고 그 위로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으로 목깃이나 옷주름 등이 두껍고 간결하며 두 다리 사이의 옷은 그 끝을 각지게 주름잡아 딱딱한 인상을 준다.
보살상들은 긴 신체비례나 얼굴 표현 등에서는 본존불상과 유사하지만 착의법이나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의 표현에서 차이를 보인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양 손을 배 부분에 두어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형상이며, 어깨 위를 덮고 흘러 내린 천의는 팔복을 감아 길게 내려와 있다. 허리에서 무릎 아래에는 화려한 장식을 걸쳤으며, 무릎 부분에는 띠로 묶어 위아래를 불록하게 표현하는 등 이례적인 표현을 보인다.
우측의 대세지보살상은 본존과 손모습이나 옷 주름의 표현에서 닮은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변형 통견식 대의라든지 두터운 목깃 등이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옷 주름을 보이지만 주음에 변곡을 주어 입체적으로 처리하고자 하였다.
보살상의 머리카락 표현을 보면 관음은 어깨 위에 여러 가닥의 보발이 흘러내리지만 대세지보살은 생략하는 등 두 협시보살상의 표현에 차이를 둔 점도 특징이다. 장식은 두 보살상이 거의 같은데, 귀에는 큰 화형 귀걸이를, 가슴에는 둥근 화형문에 구슬이 달려있는 간결한 형태의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좌상의 여래, 입상의 보살로 이루어진 삼존의 구성과 두 협시보살상의 착의법을 달리 표현하는 사례는 1603년 조성된 안성 청룡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제1789호), 1620년 조성된 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 등이 있어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1610년 백 여명이 넘는 승속인들이 발원한 불상으로 원 봉안처, 제작시기, 제작자가 명확하여 17세기 초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유난히 높은 육계, 이국적인 얼굴, 옷 주름 표현의 독창성 등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조형적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불상을 만든 조각승 인일은 이 불상을 통해 처음 소개된 조각승으로 주목된다.
♧ ♧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 多層塼塔)
*보물 제226호(1963년01월21일 지정)
아래로 남한강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경치좋은 암반 위에 세워진 높이 약 9.4m의 현재 전해오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으로, 이러한 위치 선정은 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유향하던 특별한 점지의 영향이 남은 탓이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바닥돌 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길고 큰 돌을 7층으로 쌓아 받침돌을 삼았는데, 밑에서부터 3,5,6,7단 등 4단은 각각 체감되어 층단을 이루고 있다. 다만 맨 밑단의 중간 돌과 2단의 아래 돌이 다른 돌보다 유독 높아 주목된다.
받침돌을 화강암으로 구성한 것은 층단을 이룬 받침돌 전체 모습과 함께 이례적이다. 받침돌 위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놓은 1단의 화강암 받침이 있는데, 신라 전탑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받침 위로는 벽돌로 쌓은 3단의 받침이 있는데,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되었다.
탑신부는 6층으로 모두 벽돌로 쌓아 올렸다. 몸돌의 높이는 체감률이 거의 없고 너비의 체감률 역시 일정하지 않으면서 6층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 기형적인 모습으로 높아 보인다.
▲ 다층전탑 기단부 돌출석재(사진 左)와 탑신부 및 상륜부(사진 右)
지붕돌 너비 역시 매우 좁아서 일반적인 전탑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1~3층까지가 2단이고 4층 이상은 1단이다. 지붕돌의 윗면인 낙수면의 층단은 1층이 4단이고 2층 이상은 2단이다. 이러한 받침 수와 층단 수가 이 전탑을 기형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인이다. 또한 신라 전탑은 벽돌 사이의 간격을 거의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데 반해 이 전탑은 간격을 넓게 떼고서 그 사이에 면토를 발랐다.
▲ 다층전탑 탑신부 벽돌의 당초문양
벽돌에는 테두리에 구슬 무늬를 두르고 그 안에 당초 무늬를 돋을새김한 반원 무늬를 새겼지만, 배열 방법은 무질서한 편이다. 머리장식인 상륜부는 6층 지붕돌 위에 벽돌로 만든 노반을 두었고, 그 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양화,보륜,보개 등이 얹혀 있다.
이 전탑의 북쪽에는 수리비가 있는데 '崇情記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건립 연도가 적혀 있어, 영조2년(1726)에 지금의 모습으로 수리되었음을 알 수 있지만,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전탑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신라시대로 추정되고 있지만, 벽돌의 무늬를 근거로 고려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자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 ♧ 신륵사 대장각기비(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1963년01월21일 지정)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대장각의 조성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각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 ♧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神勒寺 八角圓堂形石造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2004년11월27일 지정)
려말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팔각원당형을 이어 받고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고 전체 높이는 225cm이다.
원래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서 1966년 현재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때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 발견되었지만 어떤 스님의 탑인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 부도는 팔각의 집 모양을 받치는 3단형의 기단부와 팔각 집 모양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과 일조로 구성된 팔각의 하대석에는 8개의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고 매우 낮은 원통형의 중대석은 문양이 없으며, 팔각의 상대석은 위로 향한 연꽃잎 무늬를 돋을새김해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팔각형태로 문을 새기고 범자를 돋을새김하였다. 지붕을 나타내는 옥개석은 기와골 끝에 꽃장식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육중하면서도 세련되며 간결한 기풍을 풍기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신륵사 조사당 뒤 보제존자승탑 영역가는 길목에 위치한 2기의 승탑(원구형석조부도 및 팔각원당형석조부도)
♧ ♧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神勒寺 圓球形石造浮屠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2004년11월27일 지정)
이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탑의 형태가 둥근 공 모양을 하고 있어 원구형 부도라고 불리운다.
현재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탑인지 알 수 없다. 크기는 전체 높이 220cm, 공 모양의 탑신은 60cm로 당시 조성되었던 부도들과 비슷하다.
이 부도는 크게 위로 부터 상륜부와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그리고 원형 모양의 탑신이 하나의 돌, 그리고 기단부는 세 개의 돌로 쌓았다.
아래쪽의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중대,상대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되어 있다. 연꽃 잎으로 장식된 상대석과 팔각의 돌 위에 각 모서리를 작은 원형의 연주문으로 장식된 중대석, 그리고 사각형의 지대석만 남아 있다.
상륜부는 연주문을 받침으로 한 세 층의 보주형으로 장식했으며, 탑신 위의 옥개석 부분은 기와골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새기는 등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시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신륵사의 기타 불전과 문화재들 】
▲ 신륵사 일주문(사진 左)과 불이문(사진 右)
▲ 신륵사 보제루
▲ 신륵사 범종루(사진 上)
구룡루(사진 下)
▲ 신륵사 명부전(사진 左)과 봉송각(사진 右)
▲ 신륵사 산신각(사진 左)과 심검당(사진 右)
▲ 산신각에서 바라본 봉향각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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