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강변의 아름다운 천년고찰!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 ▶
나옹선사의 입적으로 대사찰이 된 신륵사!
여주 영릉(세종대왕릉)의 원찰!
경기도 여주는 성지지맥과 마감산~보금산 산행, 명선황후생가,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와 보물 제 6호,7호,8호로 지정된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원종대사 혜진탑, 고달사지 석불대좌 등이 남아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251호로 지정된 파사성, 이번에 소개하게 되는 신륵사 탐방 등으로 이미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왕릉 영릉과 목아박물관 등은 탐방을 하지 않은 곳이 남아 있어 이번에 시간을 내어 여주 신륵사를 재탐방하고, 목아박물관, 조선왕릉 영릉(세종대왕&효종대왕릉)을 새롭게 탐방하게 되었다.
여기에 소개하게 되는 신륵사에는 8점의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신륵사의 금당인 극락보전,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원구형석조부도와 나옹대사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등 경기도 문화재자료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고, 사찰 내에는 신륵사의 역사를 대변하듯 약 600년 수령의 보호수인 향나무, 은행나무, 참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여주 신륵사는 고려 우왕2년(1376)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으므로, 나옹선사와 관련된 신륵사의 문화재와 그 외의 문화재들로 나누어 두 편으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탐방일자 】2015년 1월 26일(월)
【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 소개 】
*소재지: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 신륵사의 겨울(조사당 앞 전경)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 또는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경내의 동대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초상 지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우왕2년(1376) 8월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조당,승당,선당,종루,동익당,서익당,남행랑,향적당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을 모시는 선각진당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를 발원한 것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승계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과 수봉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신조,자초 등의 고승들과 최영,조민수,조무선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가 금자로 제목을 쓰고 각봉은 황복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경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과 홍의룡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 그리고 강부인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영릉(세종대왕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예종1년(1469)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성종3년(1472)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신륵사는 사대부들의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럭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가, 현종12년(1671) 계헌이 중건하였고, 숙종26년(1700) 위학과 그의 제자 우안,천심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영조2년(1726)에는 영순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20년(1796) 영돈녕 김이소와 예조판서 민종현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종각,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철종9년(1858)에는 순원왕후가 내탕전을 희사하여 불전,선료,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 주지 성인이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 명부전, 심검당, 적묵당, 봉향각, 칠성각, 종각, 구룡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정조21년(1797)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보물 제1791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된 지장탱화가 있으며, 영조49년(1773)에 주조한 범종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과 무학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 구실을 하는 정면 9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보물 제225호인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 비천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인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석종비,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가 있다.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 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 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숙종15년(1689)과 영조25년(1749), 철종11년(1860)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있다.
◀ 제Ⅰ편 : 나옹선사 관련 문화재들 ▶
나옹선사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어, 나옹선사와 관련된 문화유적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다.
나옹선사의 영정을 모신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 나옹선사의 사리탑인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 나옹선사의 탑비인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석종비, 보물 제231호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그리고 나옹선사를 화장한 장소인 신륵사 동쪽 남한강변 암반에 기념탑으로 세워진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와 나옹의 당호를 따 그를 추념하기 의해 건립한 육각정자인 강월헌이 있다.
경내에는 나옹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약660년 된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 신륵사 나옹선사 관련 문화재 】
◈ 보물
*여주 신륵사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서종비(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보물 제231호)
◈ 보호수
*여주 신륵사 은행나무(여주-66호)
◈ 경기도 도지정문화재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133호)
『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 』
서천 지공스님과 절강 평산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승풍을 크게 떨쳤던 고려 말의 고승이다.
중국으로부터 보우와 함께 새로운 임제의 선풍을 도입하여 한국불교의 초석을 세운 장본인으로 유학하는 20여년 동안 강남지방의 간화선을 깊이 공부하고 귀국하여 간화선을 널리 선양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성은 아(牙)씨, 이름으 원혜(元惠), 법호는 나옹이며, 당호는 강월헌(江月軒), 시호는 선각(禪覺)이라고 하며, 1320년 1월 15일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일면에서 선관서영 서구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요적암에 있는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한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충혜왕5년(1344)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충목왕3년(1347)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 법화사에서 인도승 지공화상을 친견하고 정진하여 그의 법을 전수받은 후 공민왕7년(1358)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하였고, 이후 신광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홍건족의 침입으로부터 법력으로 신광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에서 수도 증진한 후 회암사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의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금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낙성식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지고 유학자들이 탄핵함에 따라 밀양 영원사로 옮기던 중 1376년 5월 15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니 나이 57세, 법랍 38세였다.
제자로는 자초, 지천 등 2,000여명이 있으며, '나옹화상어록'과 '가송'으로 스님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다. 신륵사와 관련된 나옹의 행적을 살펴 볼 수 있는 기록은 '보제사리석종기'와 김수온의 '보은사기'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륵사는 나옹이 도를 펼쳤던 곳으로 목은 이색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교유하므로 인해 신륵사가 경기도의 유명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경내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극락보전 좌측에 조사당이 위치해 있으며, 현재 조사당은 서까래 이상 해체 후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보수공사기간(2013년12월27일~2014년8월26일)이 끝났지만 아직까지 완료되지 않아 공사용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 전혀 볼 수가 없는 사태이다.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등은 조사당 뒷편 신륵사 북쪽 산기슭에 함께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삼층석탑은 신륵사 동쪽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아래 남한강변 암반 위에 세워져 있고, 1972년 홍수로 떠내려가 버린 강월헌 육각정자는 그 뒤 삼층석탑 조금 아래쪽에 다시 세워져 있다.
♧ ♧ 신륵사 조사당(神勒寺 祖師堂)
*보물 제180호(1963년01월21일 지정)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신륵사 가장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크고 긴 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 신륵사 조사당 내부공포(사진 左)와 추녀부(사진 右)
건물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한 다포식 가구를 갖추었다. 곧 모서리를 다듬은 고격의 주춧돌 위에는 둥근 두리기둥을 세웠고,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고서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공포를 배치하였다.
공포의 짜임은 바깥쪽으로 외2출목이고, 안쪽으로는 내2출목이다. 건물 바깥쪽의 살미는 제일 아래의 초제공이나 그 위의 2제공 모두 끝부분이 치켜 올라간 앙서 모양이고, 건물 안쪽의 살미는 끝부분이 둥근 교두형이어서, 조선 전기에 건립된 건물의 다포식 가구를 잘 보여준다.
처마는 끝부분에 짤막한 서까래인 부연이 덧얹어져 있는 겹처마이다.
▲ 신륵사 조사당 내부(사진 左)와 처마와 편액(사진 右)
건물 안의 바닥은 우물 정(井)자형의 우물마루로 짰고, 천장 역시 '정'자형의 소란반자를 놓은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 앞면에는 세로로 댄 가는 살에 가로살을 3곳에 건너댄 띠살문 6짝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오른쪽 옆면의 1칸에만 '정'자형의 살로 꾸며진 1짝의 문을 달아 출입구를 삼았으며, 양쪽 옆면의 나머지와 뒷면은 모두 벽면으로 마감하였다.
조사당은 앞면과 옆면의 길이가 거의 같은 작은 규모의 건물이자 가운데 부분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를 볼 수 없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 신륵사 조사당 외부공포
- 조사당 관련 사진들은 현재 보수공사중이라 출입이 불가능하여 문화재청 자료들을 인용하였음 -
조사당 앞에는 수령 약 600년이 된 수고 5m, 나무둘레 1.3m의 보호수인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 신륵사 조사당 앞 보호수인 향나무
조사당은 현재 서까래 이상 해체 후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관람이 불가능하고, 조사당 뒷편 나옹선사의 사리탑이 보제존자석종, 나옹의 탑비인 보제존자석종비, 그리고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있는곳으로 가는 계단이 있지만 보수공사중이라 좌측으로 돌아 오르도록 되어 있다.
가는 길목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2기의 부도(팔각원당형부도와 원구형석조부도)가 있고, 안내판을 지나 계단길을 오르면 좌측에 보제존자 석종, 석종비, 석종 앞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승탑 전역
▲ 여주 신륵사 조사당 뒷편 보제존자승탑으로 오르는 계단길
♧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鍾)
*보물 제228호(1963년01월21일 지정)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높이 1.9m의 고려 말 활동하였던 나옹 혜근(1320~1376)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다.
나옹선사의 사리를 안치한 또 하나의 승탑은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보물 제358호)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은 우왕2년(1376) 양주의 회암사에서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문화재청)
1379년에 각신과 각주 등이 주선하여 신륵사를 크게 중창한 뒤, 조사당 뒤쪽의 명당을 골라 나옹의 묘역을 마련하고서 승탑을 건립하였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을 따르지 않고, 고려 말기에 영향을 미쳤던 라마탑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받침돌(기단)은 금강계단처럼 네모난 모습이다. 낮으면서도 넓은 받침돌 위에는 받침돌 주변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다. 받침돌 가운데 부분에는 2단의 받침이 마련되었으며, 그 위에는 종처럼 생긴 석종형 몸돌이 놓여 있다. 받침돌의 앞쪽은 물론 왼쪽과 오른쪽의 중간 쯤에는 2단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간략한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 받침대의 2단 계단(사진 左)과 탑신부 꼭대기 화염보주(사진 右)
석종형 몸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완만한 타원을 이루어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편이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어깨부분은 마치 잘라진 포탄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그 위에는 불꽃무늬를 새긴 4각의 보주(연꽃봉우리모양의 장식)가 장식되어 있다.
석종형 승탑은 양산 통도사, 김제 금산사, 달성 용연사 등에도 자리하고 있다. 이 승탑은 통도사와 금산사의 석종형 승탑과 함께 계단탑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주로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던 석종형 승탑의 선구적인 양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29호(1963년01월21일 지정)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 보제존자석종비 정면(사진 上)
보제존자석종비 측면(사진 下左)와 후면(사진 下右)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 보제존자석종비 지대석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 보제존자석종비 비문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과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보물 제231호(1963년01월21일 지정)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자리한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앞에 서 있는 높이 1.94m의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의 모습을 따른 8각 석등이다.
아래븓침돌과 윗받침돌이 명확한 구분없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점은 석등의 양식이 점차 형식화되어 간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
▲ 받침돌의 양식이 흡사한 장흥 보림사 서승탑
석등은 제법 높은 8각의 바닥돌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받침돌의 모습은 장흥 보림사 서승탑(보물 제156호)의 받침돌과 매우 닮아 주목된다. 8각의 아래받침돌에는 윗부분에 2장의 꽃잎이 겹쳐진 상태로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의 연꽃 무늬가 매우 두껍고 도식적으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 옥개석,노반 및 보주(사진 左)과 하대석(사진 右)
간주처럼 생긴 가운데받침돌은 높이가 낮아서 마치 승탑의 가운데받침돌과 비슷한데, 8각의 각 모서리마다 둥근 마디의 난간이 장식되었고, 각 면에는 가운데부분 꽃 무늬가 돋을새김된 안상이 얕게 오목새김되어 있다. 윗받침돌은 아래부분에 아래받침돌의 윗부분과 똑같이 2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양련의 연꽃무늬가 겹쳐진 채 조각되었고, 윗부분에는 1단의 낮은 받침과 함께 덮개돌처럼 생긴 1단의 높은 받침이 새겨져 있다.
▲ 화사석 기둥의 번룡조각과 화두형 화창, 벽면의 비천상 조각
윗받침돌 위에는 불을 켜 놓은 부분인 화사석이 특별한 받침이 없이 바로 올려져 있다. 8각의 각 면에는 꽃 무늬로 반원형의 윗부분을 장식한 화창이 뚫려 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툭 튀어나온 둥근 기둥과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용이 깊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가장 윗부분에는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창방과 평방이 새겨져 있고, 화창의 윗부분에는 각 면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비천상이 역시 깊이 돋을새김되어 장식되었다.
화사석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다른 부재와 달리 특이하게 납석으로 만들었기에, 여러 장식이 더욱 섬세하게 장식될 수 있었다.
지붕돌은 전각이 두꺼운 편으로, 8각의 윗면마다 기왓골의 표현은 없지만 각 모서리에는 내림마루인 우동이 둥글게 쑥 내밀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동의 윗부분을 깎아 만든 복발 모양의 장식이 있고, 2단의 받침 위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얹혀 있다.
이 석등은 규모가 작으면서도 세부 구성이 안정감을 주고, 특히 화사석의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석등이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등 가운데 가장 우아하면서 장식성이 뛰어난 석등이자 고려 말의 석등 양식을 대변하는 석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 우왕5년(1379)에 보제존자 나옹 혜근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을 세우면서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신륵사 동쪽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아래 남한강변 암반 위 나옹선사를 화장하였던 장소에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나옹의 당호를 따 그를 추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강월헌' 정자는 1972년 홍수로 떠내려가 버려 그 뒤 삼층석탑 조금 아래쪽에 다시 세워져 있다.
▲ 남한강변의 강월헌과 삼층석탑
♧ ♧ 신륵사 삼층석탑(神勒寺 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2004년11월27일 지정)
화강암을 깎아 만든 3층탑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여주 신륵사 경내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한 정의 넓직한 돌 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에 덮개에 해당하는 상대석을 덮었다.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 있는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로 옥개석을 덮었다.
옥개석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 내지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형태로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쌓여 있으나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고려 후기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신륵사 은행나무
*보호수:여주-66(1982년10월15일 지정)
660여년 전 고려말 공민왕사 나옹선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듯 세 줄기의 가지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수령 약 660년, 수고 22, 나무둘레 3.1m와 2.7m이다.
▲ 단풍이 든 신륵사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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