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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②현릉(顯陵)

왕마구리 2015. 3. 11. 15:23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구리 동구릉의 현릉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 전체 전경(사진 上)

                             구리 동구릉의 전사청과 재실(사진 下左), 행랑채(下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의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현릉(顯陵) 」 조선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동원이강릉

복위되어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천장된 현덕왕후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번지

*조성시기:단종원년(1452년) 9월 1일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다.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세종대왕의 예전 능의 제도를 따랐다.

병풍석에서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지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진다. 고석도 4개로 줄었다. 제일 아랫단에는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석인이 있는데, 머리와 눈, 코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문석인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신도비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되지 않았다.

 

                          ▲ 구리 동구릉의 현릉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홍살문에서 꺾이어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도

 

제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세종23년(1441)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 복위 사건에 의해 세조3년(1457) 추폐되었다가 중종7년(1512)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 구리 동구릉 현릉의 정자각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진다.

 

                          ▲ 구리 동구릉 현릉의 비각(사진 左), 수라청(사진 中) 그리고 수복방(사진 右)

 

◈ 조선 5대 문종(文宗)

생몰년도 : 1414~1452년

재위기간 : 1450~1452년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이다. 세종3년(1421) 8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세종32년(1450)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적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었다.

 

                          ▲ 구리 동구릉 현릉의 능침(문종능)

 

문종의 나이 29세에 세종이 병들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으며, 섭정기간 동안 문무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게 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 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말이 적으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 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과 성리학, 글씨와 시문 등 각 방면에서 통달했다.문종이 왕위에 오른 1450년에는 '동국병감'이 출간되었고, 그 뒤로 매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병제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다. 그러나 종친세력의 압력 등으로 인해 왕권은 위축되었으며, 문종 자신 역시 몸이 약하여 재위 2년 4개월만인 39세로 병사하였고,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생몰년도 : 1418~1441년

현덕왕후는 태종18년(1418)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세종13년(1431) 14세의 나이로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세자의 후궁이 되고, 이어 내명부의 종3품 품계인 양원을 하사받았다. 세종19년(1437)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세종23년(1441) 7월 23일 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산후병으로 그 다음날 동궁의 자선당에서 승하하였다.

현덕왕후는 정숙한 덕과 온순한 용모로 동궁에 뽑혀 들어와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고, 단아한 성품과 효행으로 세종과 소현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일찍 숨을 거둔 비운의 왕비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는 생애보다 더욱 비극적이었다.

경기도 안산군에 안장된 후 문종이 즉위하자 능호를 소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457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사건에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폐위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소릉은 파헤쳐져 바닷가에 장사지내는 수난을 당했다.

그 뒤 영남 유생들을 중심으로 소릉 복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중종8년(1513) 소세양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재차 건의하자,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를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 아래 복위되어 같은 해 4월 21일 지근의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일화))

문종은 동궁으로 있던 세종9년(1427) 14세의 나이로 김오문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러나 희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은밀히 술법을 동원하다가 시아버지인 세종에 의해 쫓김을 당하였다. 두 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는 성품이 괄괄하고 기가 센 여인이었는데, 문종과의 갈등이 잦았고, 동성애 시비에까지 휘말려 다시 폐위 당하였다.

결국 문종은 순빈과 헤어진지 두 달 만에 현덕왕후 권씨를 세 번쨰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여기에는 세종이 권근의 후손이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녀를 지명한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권씨는 세종의 예상대로 아들을 낳았으나, 그 다음날 죽게 되었고, 후계 구도가 복잡해지는 것을 이유로, 문종은 다시는 세자빈을 간택할 수 없었다. 단명한 현덕왕후 권씨가 문종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