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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③목릉(穆陵)

왕마구리 2015. 3. 11. 23:02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사진 上)

                             재실의 전사청과 재실(사진 下左)와 행랑채(사진 下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건원릉에서 목릉 들어가는 길

 

 

「 목릉(穆陵) 」 조선 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

세 기의 능이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신도가 특이한 왕릉

                          ▲ 홍살문 밖에서 바라본 구리 동구릉의 목릉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번지

*조성시기:선조33년(1600년) 12월 22일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 구리 동구릉 목릉의 선조릉과 의인왕후릉(사진 上)

                             오른쪽 언덕에 조성된 인목왕후릉(사진 下)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룬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좀 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 대석에 새로운 양식의 꽃무늬가 장식된 의인왕후릉의 장명등과 망주석

 

목릉의 능역은 원래 선조33년(1600)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광해군원년(1608)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의 상소에 따라 인조8년(1630)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인조10년(1632)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정자각도 세 능이 들어설 때마다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 정자각에서 선조릉, 의인왕후릉, 인목왕후릉으로 각각 뻗으며 꺾이고, 층이 생기기도 한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신도

 

원래는 동편의 의인왕후릉 앞에 있었던 것이 후에 왕릉이 천장되면서 왕릉 앞에 정자각이 서고 왕비릉의 정자각은 헐리게 되었다. 여기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들어서자 한때 왕릉 쪽으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전이 번거롭다 하여 왕비릉은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목릉의 정자각은 왕릉을 향하여 서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 목릉의 비(사진 上)

                             목릉의 비각(사진 下左)과 수라청(사진 下右)

 

♧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보물 제1743호(2011년12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6-6

광해군 즉위년(1608)에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다가 지세가 좋지 않다는 풍수가의 견해와 터에 물이 차는 등의 이유로 인조8년(1630) 건원릉 동쪽으로 천장되었다. 천장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건물 수리가 있었지만 건물 자체에 손을 댄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종16년(1879)에 계단석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정전이 배위층보다 한 단 높다.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짰다.

 

 

현존하는 정자각 중에 다포식 공포를 갖춘 건물은 이 건물이 유일하다.

공포는 내외 1출목이며 외부 살미는 약간의 곡선을 갖추면서 아래로 처져 있고 소첨차와 대첨차는 높이에 비해 길이가 길어 안정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문묘 대성전의 공포 짜임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어서 이 시기에 다포식 공포의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배위청은 정면 1칸, 측면 2칸이고 기둥위에 바로 보머리가 얹혀지며 기둥 사이에 행공첨차를 끼워 화반 역할을 하도록 꾸몄다. 정전 측면은 고주 둘을 세워 벽체를 구성했는데 이런 방식은 정자각에서는 보기 드물다. 나머지 창호나 화방벽을 한 벽체 등은 대체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정자각의 제도를 잘 따르고 있다.

 

                          ▲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의 기단부와 동계(신계)

 

목릉 정자각은 초창과 이건한 모습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현재의 모습은 인조8년(1630)에 이건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살미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 되기 이전의 전기적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

 

◈ 조선 14대 선조(宣祖)

생몰년도 : 1552~1608년

재위기간 : 1567~1608년

 

                     ▲ 구리 동구릉의 목릉(선조릉)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명종7년(1552)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선왕 명종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22년(1567)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 해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매일 경연에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를 잃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이, 이황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 등을 편찬케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증직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세자책봉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국을 주도하던 사람들 사이에 당쟁이 극심해졌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간의 전쟁을 치루면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 선조릉 능침

 

                     ▲ 의인왕후릉에서 바라본 정자각 뒷편의 선조릉(사진 上)

                        인목왕후릉에서 바라본 선조릉(사진 下)

 

((일화))

선조는 선왕 명종의 조카이다. 명종은 어린 나이의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라고 명종은 말하며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해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 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정자각에서 의인왕후릉으로 이어지는 신로

 

◈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생몰년도 : 1555년~1600년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선조2년(1569)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마치 자신이 낳은 친아들처럼 대하였고, 훗날 세자의 자리로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 의인왕후릉

 

임진왜란 당시에는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정세는 안정을 찾아갔으나, 의인왕후는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46세의 일기로 황화방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선조33년 6월 24일조의 실록에는 "별로 아픈 곳은 없으나 음식이 먹고 싶지 않고 밤엔 잠을 잘 수 없으며 온 몸이 나른하여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하다. 음식을 대하면 구토부터 먼저 나고 숨이 가쁘며 목에서 가르릉 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고 맥은 부하여 한 번 숨 쉬는 동안 7번이나 뛴다. 아마도 원기가 부족한 탓으로 비, 폐, 심, 세 기관이 병난 듯하다."는 의인왕후의 병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자식이 없던 그녀를 무시하던 선조는 "중전의 목숨을 이미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실로 망극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밖에서 속히 일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빈청의 대신들에게 전교하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 의인왕후릉 능침영역

 

 

((일화))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기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에는 그녀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히 바랬던 그녀는 불교에 의지하여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으며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

생몰년도 : 1584~1632년

선조의 계비로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다. 선조35년(1602)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였던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재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폐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 인목왕후릉 능침영역

 

 

((일화))

광해군5년(1613)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인목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글을 '개축일기'라고 한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 싼 당쟁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기사문은 인조반정 뒤 대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윗전(인목왕후)이 애통해하며 대군(영창대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자 금부 하인들이 밀고 들어와 대군을 업고 나갔다. 그 후 한 달 만에 대군 아기는 강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늦도록 안부 전하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므로 윗전께서는 수상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는 것이었다. "어째서 오늘은 여지껏 안부도 전해오지 않는고? 필시 무슨 까닭이 있도다. 아무든지 높은 데 올라가 궁밖 길의 동정이나 살피고 오너라."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이 전에 침실로 썼던 다락 근처에 올라가 바라보니 사람들이 돈의문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화살을차고 창과 칼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고 말을 탄 사람도 많았다.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내려와 바깥 사람들이 길 닦는 곳이 있기에 거기 가서 물어 보고서야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관적 관점에서 쓰였으나,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치열한 당쟁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보조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