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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④휘릉(徽陵)

왕마구리 2015. 3. 14. 01:43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 금천교 앞에서 바라본 휘릉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사진 上)

                             재실의 전사청과 재실(사진 下左)와 행랑채(사진 下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동구릉 탐방로가 시작되는 재실 앞 느티나무

 

 

「 휘릉(徽陵) 」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

인조~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군림한 여인

양 옆에 익랑이 붙어 있는 정자각

 

                          ▲ 홍살문 밖에서 바라본 구리 동구릉의 휘릉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5-2번지

*조성시기:숙종14년(1688년) 12월 16일

숙종14년(1688) 조성된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3면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다. 18대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을 조영한지 5년 뒤에 다시 조영하 능이라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거의 비슷하다.

난간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 열 두 방위를 표시하였고, 능침 앞의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이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이 5개였다가, 세종 영릉 이후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된 것이다. 고석에는 귀신을 물리치길 바라는 뜻에서 도깨비를 새겨놓았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다.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한 단계 아래의 문석인과 무석인은 모두 2.4m에 이르는 큰 키를 자랑한다. 문석인은 이목구비가 마멸되어 윤곽만이 남아 있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으며, 무석인은 목이 없이 얼굴과 가슴이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커서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 구리 동구릉 휘릉(사진 上)

                             정자각 뒷편 언덕에 조성된 장렬왕후릉 능침영역(사진 下)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양주 조씨는 1688년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8월 27일에 소렴하고, 9월 1일에 대렴하였다. 12월 15일 발인하였다.

숙종실록 14년 12월 15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렬왕후의 발인에 총호사가 재궁을 받들고 빈양문으로부터 명정전을 경유하여 나가서 진발하였는데, 모시고 따라간 문무 백관은 모두 걸어서 따르고 임금은 소여를 타고 홍인문 밖까지 곡하며 따라가서, 노제소에서 절하고 하직하고 돌아왔다.'

발인 다음날인 12월 16일 봉릉하였다.

 

 

 

                          ▲ 휘릉 정자각 정면 전경(사진 上)

                             휘릉 정자각 측면 전경(사진 中左)과 양옆으로 붙어있는 정자각 익랑(사진 中右)

                             휘릉 정자각 대각 방향에서 바라본 전경(사진 下)

 

◈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

생몰년도 : 1624~1688년

인조의 계비로 인조2년(1624) 인천부사이던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났다.

15세의 나이로 인조16년(1638) 12월 2일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조27년(1649)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26세의 나이로 대비가 되었으며, 효종2년(1651) 자의의 존호를 받았다.

효종10년(1659)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문제로 서인, 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을 입었다. 현종15년(1674)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

자의대비는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치는 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가 숙종14년(1688) 8월 26일 65세로 소생없이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하였다.

 

                          ▲ 중간에 층이 진 계단이 있는 휘릉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로(사진 左)와 초석만 남아있는 수복방터(사진 右)

 

((일화))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궁에 들어와 남편을 일찍 여윋 장렬왕후는 효종, 현종, 숙종 3대의 왕이 인조의 뒤를 잇는 동안 자의대비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맏아들이 죽었을 때는 부모가 3년 상의 상복을 입고, 차남의 상에는 1년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효종10년(1659) 5월 4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의 맏아들이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를 하여 자의대비가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 구별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1년복을 주장하던 서인들이 이 논쟁에서 승리한 셈이 되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의대비의 며느리이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르 2차 예송논쟁이라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역시 인성왕후를 둘째 아들 며느리로 여겨 9개월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중전이므로 첫째 아들 며느리 대우를 하여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체택하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 장렬왕후비와 비가 보관된 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