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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東九陵) ⑤숭릉(崇陵)

왕마구리 2015. 3. 14. 12:00

◀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의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왕릉군!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컷는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전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왕릉 중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장릉(단종의 능)을 제외한 39기의 능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왕릉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기일에 올리는 제사인 능기신제(陵忌辰祭)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제례가 엄격하게 행해진다.

▷ 조선왕릉의 구성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분(능침, 능상)이 있는 성역 공간

   **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정자각, 침전)

   **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재실)

 

 

                          ▲ 구리 동구릉의 재실(사진 上)

                             재실의 전사청과 재실(사진 下左), 그리고 행랑채(사진 下右)

 

▷ 조선왕릉의 변천사

조선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 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구리 동구릉 입구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소개 』

*사적 제193호(1970년5월26일 지정)/유네스코 세계유산(2009년6월30일 지정)

*면적:1,969,675㎡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 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원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제실은 없고, 9개의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 동구릉의 국가지정문화재들

- 보물 제1741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2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74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2011년12월26일 지정)

- 보물 제1803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신도비(2013년07월16일 지정)

 

【 소 재  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 방문일자 】2015년 2월 28일(토)

【 관람정보 】

*관람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2월~5월,9월~10월:9시~18시(매표:9시~17시)/6월~10월:9시~18시30분(매표:9시~17시30분)/11월~1월:9시~17시30분(매표:9시~16시30분)

*관람요금 : 어른(19~64세) \1,000

*문의(조선왕릉 동부지구관리소) : T.031)563-2909, 564-2909

 

                          ▲ 구리 동구릉 안내도

 

*교통안내 :

  - 청량리역, 상봉역에서 #88번 또는 #220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강변역에서 #1번, #1-1번, #1-2번, #92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 버스 환승, 동구릉 하차

【  탐방코스 매표소→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승릉→매표소

 조선왕릉 동구릉 소개는 탐방코스와는 관계없이 조성 순서에 따라 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의 순으로 하기로 한다. 또한 탐방기는 각 릉별로 나누어 총 9편으로 소개를 한다.

 

                          ▲ 동구릉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홍살문

 

 

「 숭릉(崇陵) 」 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에서 태어난 왕! 현종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진 쌍릉!

 

 

                          ▲ 구리 동구릉의 숭릉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번지

*조성시기:숙종원년(1674년) 12월 13일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선된 능을 쌍릉이라고 한다. 높지 않은 언덕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체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 구리 동구릉 숭릉의 정자각과 능침 

 

현종은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숙종원년(1674) 34세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월 11일에 발인하여, 12월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숙종10년(1684)에는 현종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숙종9년(1683)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12월 7일에 소렴하고, 12월 9일 대렴하였으며, 1684년 4월 3일에 발인하여 4월 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숭릉의 비각

 

♧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보물 제1742호(2011년12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6-25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의 능으로 동구릉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이다.

숙종원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숙종10년(1684)에 현조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 옆에 나란히 조성하였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능역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멀고 정자각이 경사지 위에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한 모습이 돋보인다.

 

 

                          ▲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숭릉 정자각의 특징 : 1. 조선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

                                                            2.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으로 지어진 건물

                                                            3. 양옆으로 익랑이 배치된 정자각

 

숭릉 정자각은 숙종원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정자각은 몇 차례 수리를 거쳤으며, 순조28년(1828)에는 정자각 월대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순조실록에 보이고, 마지막 수리 기록은 고종16년(1879)에 계단석을 수리한 기록이다.

정자각의 지붕을 팔작으로 조성한 것은 인조 장릉의 정자각부터였다.

장릉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5칸의 팔작지붕 형태였다. 이를 전례로 동구릉에 조성된 효종의 정자각도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었고, 현종14년(1673)에 효종의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면서 정자각의 규모를 8칸으로 확대하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조성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이후 「현종산릉도간의궤」에는 숙종원년(1674)에 숭릉을 동구릉에 조성하면서 영릉의 정자각을 표본으로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효종영릉천릉도감」에는 영릉 천릉 시 정자각의 제도를 광릉 정자각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 양옆으로 익랑이 붙어있는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8칸 정자각은 광릉 이후에 기록상으로 선릉, 정릉, 효른, 강릉, 장릉 등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으며 영릉, 숭릉, 명릉, 익릉, 의릉의 정자각이 8칸으로 지어졌다. 이와 같이 정자각이 8칸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은 영악전이 폐지되며 그 기능을 정자각이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존 하는 8칸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그러나 숭릉을 제외한 나머지 정자각은 맞배지붕의 형태이며,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42기(남한 40기, 북한 2기)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8칸 정자각 이다.

공포는 정전은 일출목 이익공, 배위청은 이익공의 구조이며 규모가 8칸으로 확대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감있게 건축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영릉의 제도를 따라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유일하게 팔작지붕인 정자각이다. 또한 이러한 규모나 지붕 형식은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기ㅗ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

 

◈ 조선 18대 현종(顯宗)

생몰년도 : 1641~1674년

재위기간 : 1659~1674년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세자의 몸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인조19년(1641) 2월 4일 심양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인조27년(1649)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도 함께 세손으로 책봉되었고, 그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잇자 세자 자리에 올랐다.

효종2년(1651) 11세의 나이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왕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현종은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효종의 상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계속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종은 1674년 8월 18일 재위 15년, 34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일화))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 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을 받다가 표범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 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 동구릉 재실 앞 느티나무

 

◈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생몰년도 : 1642~1683년

인조12년(1632) 5월 17일 돈령부영사 김우명의 딸로 서울 중부의 장통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효종2년(1651)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현종언년(1659) 5월 9일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떄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한 때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현종 승하 9년 후인 숙종9년(1683) 12월 5일 창경궁의 저승전에서 42세로 승하하여 현종의 숭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소생으로는 숙종과 명선,명혜,명안공주가 있는데, 이 가운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충가 전에 일찍 죽었다.

((일화))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당쟁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당시 명성왕후는 어린 숙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서인 김우명을 아버지를 둥 명성왕후 역시 수렴청정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사건을 홍수(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바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며, 명성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과격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