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전북 완주)국내 유일한 하앙식 구조의 깊은 역사를 간직한 사찰! 화암사

왕마구리 2015. 5. 21. 19:59

◀ 전북 완주 화암사(完州 花巖寺)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하앙식 구조 건축물이 남아 있는 사찰!!!

 

                      ▲ 화암사 입구에서 바라본 전체 전경

 

「 전북 완주(全北 完州) 소개 」

산이 있어 아름답고 유서깊은 사찰이 역사의 정취를 다하는 고장!

전라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 거리 36km, 남북 거리 71km로 동은 진안군, 서는 김제시, 남은 임실군과 정읍시, 북은 익산시와 충남 논산시, 금산군과 각각 인접하고 있다.

고덕산과 모악산이 둘러 있으며, 서북방은 전북평야에 연결되어 소양천, 고산천, 삼천천은 모두가 서북을 관류하는 만경강에 이르고 있다. 도로는 전주를 중심으로 4통 5달, 군산, 서울, 부산, 대구, 목포, 광주, 여수로 통하는 국도와 지방도가 이고, 철도는 전북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백제 위덕왕22년(555)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나 565년 폐지되었다. 의자왕20년(660) 신라에 병합되어 신문왕5년(685) 다시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며, 이때부터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덕왕16년(757) 전주로 바뀌었고, 완산정이 설치되어 군사상의 중심지로 중요시되었다. 진성여왕6년(892) 견훤이 완산에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태조19년(936) 멸망할 때까지 45년간 후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태조19년(936) 안남도호부로 바뀌었다가 태조23년(940) 다시 전주로 복구되었다. 993년 완산을 승화로 고치고 절도안무사를 두었으며, 995년 전국을 10도 12주로 개편할 때 강남도에 속한 순의군이라 칭하였다. 목종8년(1005) 전주 절도사가 파견되었고, 현종9년(1018) 전국 지방제도 개편 때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022년 다시 전주목으로 개칭되었다. 공민왕4년(1355) 전라도 안령사 정지상이 원의 사신인 야사불화를 감금시킨 사건 때문에 부고로 강등되었으나, 이듬해 완산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태조1년(1392) 이 지방은 태조의 고향으로 중시되어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으며, 태종3년(1403) 전주부로 개칭되어 조선 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그 영역은 고려시대보다 축소되었다.

1914년 고산군이 통합되어 전주군이 설치되었으며, 1935년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됨에 따라 전주군이 완주군으로 개칭되어 15개 면을 관할하였다.

1956년 삼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57년 초포,우전면과 조촌,용진,상관면의 일부가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초포면 일부를 삼례읍과 용진면에, 우전면 일부는 구이면에 편입, 1966년 운주면에 경천출장소 설치, 1973년 봉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익산군 온수리 화산마을이 삼례읍 삼례리에 편입되고 용진면 산정리 일부가 전주시 우아동에 편입되었다.

1983년 상관면 대성리,색장리와 용진면 산정리 일부가 전주시로 편입되고, 김제시 백구면 도덕리 일부를 조촌면에 편입되었다. 1985년 좇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87년 전주시에 편입되었고, 1989년 운주면 경천출장소가 경천면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이서면 중리,상림리가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1994년 김제군 용지면 금평리 일부가 이서면에 편입되었다.

 

【 일 정 표 】2015년 5월 10일(일)-11일(월) 1박2일

                             ◈ 첫째날(5/10) 완주 탐방 : 화암사-위봉사-위봉산성-송광사

                             ◈ 둘째날(5/11) 전주 탐방 :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객사(풍패지관)-전주향교-만고사&남고산성

 

이번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완주군에서의 일정은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어머니의 품 같은 명산! 모악산 등은 이미 일반산행과 금남정맥 종주 산행 등으로 몇 차례 산행을 실시하였으므로, 완주의 3대 명찰인 화암사, 위봉사, 송광사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산성과는 달리 유사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위봉산 고개에 자리한 위봉산성을 탐방하였다.

전주에서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 문화재들인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호남지방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전주 전동성당,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주향교, 그리고 남고산성과 남고사를 탐방하는 여행이었다.

 

완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화암사, 위봉사와 송광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상당산성은 '성곽돌기'에 아래와 같이 4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국내 유일한 하앙식 구조의 깊은 역사를 간직한 사찰! 화암사(花巖寺)

산사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사찰! 위봉사(威鳳寺)

천 년의 역사를 담은 사찰! 송광사(松廣寺)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축성한 성! 위봉산성(威鳳山城)

 

                      ▲ 적묵당 뒷담 너머로 바라본 화암사

 

『 완주 화암사(完州 花巖寺) 소개 』

*소재지: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번지

15세기에 쓰여진 『화암사중창비』에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라고 화암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듯 쉬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천년 사찰이다.

 

                      ▲ 화암사로 오르는 산길 입구의 화암사 안내도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위치한 작은 사찰인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창건되었다고 추측되지만 창건시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화암사중창기』에 따르면 신라 원효와 의상이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치상 백제의 주요 교통로에 존재했던 절로 추측된다.

중창비는 세종7년(1425)에 성달생이 절을 중창하고 기념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때 3칸의 불전을 매우 장려하게 짓고 차례로 승당, 조성전 등 여러 건물을 완성하였다는데 당시 지은 3칸 불전이 극락전인 것으로 전해진다.

화암사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고 1605년에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하앙식 건물로 유명하다.

 

                      ▲ 화암사 철영재에서 바라본 경내 전경(左로 부터 우화루, 적묵당, 극락전)

 

◈ 화암사의 문화재들

- 화암사 극락전(국보 제316호)

- 화암사 우화루(보물 제662호)

- 화암사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

- 화암사 중창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4호)

- 화암사 괘불도(등록문화재 제625호)

 

                      ▲ 화암사가는 길목에 자리한 보호수인 시무나무와 장승

                      ▲ 마을 지나 화암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숲길

 

화암사는 17번국도에서 경천면으로 빠져나와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산속으로 올라가면 넓은 공터인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공터에는 화장실이 있고,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차를 세워 두고 화암사 표지판을 따라 우측의 산길로 가게 된다. 직진의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 입구에는 차량출입을 통제하는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포장길은 화암사로 이어지는 길로, 화암사에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가 있어 화재 등이 발생할 경우 산길을 따라 소방차량 등의 진입이 어려워 새로 개설한 소방도로라 한다. 출입이 허락된 차량들은 물론 이 도로를 이용하여 화암사로 진행할 수가 있다고 한다.

 

                      ▲ 화암사가는 산길

 

화암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13:38)하고 작은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비포장의 넓고 완만한 오르막의 숲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화암사 탐방을 위해 나아간다.

 

 

                      ▲ 화암사가는 길의 작은 계곡을 건너는 통나무다리

 

버드나무 한 그루와 입석이 있는 곳에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통나무다리.(13:44)

다리를 건너 완만한 돌길의 오르막을 오르면 다시 작은 통나무다리.(13:48) 다리 건너 돌길을 이어가니 바위 협곡 사이에 밧줄난간이 설치된 바윗길이 우측에 계류를 바짝 끼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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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화암사가는 길

 

쉬엄쉬엄 올라가면 우측으로 바위 절벽에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폭포가 눈에 들어오는 철계단 입구(13:53)에 이르게 된다.

 

 

                      ▲ 철계단 입구 우측의 폭포(사진 上)

                         화암사로 오르는 철계단 입구(사진 下)

 

                      ▲ 화암사로 오르는 철계단

 

바위 절벽을 오르는 147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철계단을 오르고(13:57) 화암사가 가까이서 바라다 보인다. 돌계단을 잠시 오르면 화암사 우화루가 눈 앞에 나타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는 화암사의 경내로 들어서는 화암사 입구(13:58)이다.

 

                      ▲ 철계단이 끝나고 화암사로 이어지는 돌계단길

 

주차장에 걸어온 지 20분 지나 화암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화려한 단청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수더분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누각인 보물 제622호로 지정된 화암사 우화루. 절 입구에서 바라보면 2층 누각이고, 절 마당에 들어 돌아보면 단층 건물처럼 보이는 우화루는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던 일종의 강당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 돌계단을 오르며 올려다본 화암사

 

우화루 왼쪽에 경내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는데, 일반 집 대문 형태이다.

대문에 들어서 절 앞마당 중앙에 서면 정면에 국보 제316호인 극락전, 좌측에 스님들이 생활하는 적묵당, 우측에 불명당, 그리고 뒷편 극락전과 마주 보며 우화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 ♧ 완주 화암사 극락전(完州 花巖寺 極樂殿)

*국보 제316호(2011년11월28일 지정)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 화암사 극락전 정면(사진 上)

                         극락전 측면(사진 下左)과 후면(사진 下右)

 

자연석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주좌 부분만 평탄하도록 치석하였고 기둥은 만흘림의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어칸의 주간을 협칸보다 크게 하여 어칸에는 4분합, 좌우 협칸에는 3분합 세살문을 시설하였으며 측면은 외짝문을 달았다.

공포는 전후면만 배치했는데, 주상에 각 1구씩을 두고 주간에도 1구씩 공포를 배치했으며, 전면 어칸에만 2개의 주간포를 짰다.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포의 형상과 구조이다.

 

 

                      ▲ 화암사 극락전 외부 전면 공포와 현판(사진 上)

                         극락전 외부 전면 공포(사진 下左)과 외부 귀공포(사진 下右)

 

외2출목, 내3출목의 구조지만 그 위에 하앙 부재가 빗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앙은 보통 내단은 보나 도리에 고정시켜 지붕의 하중을  받게 하고 외단은 처마를 받치게 하여 두공을 중심으로 서로 균형을 이루는 구조이다. 일찍이 중국에서 발견된 이 구조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건물이 알려지기 전까지 유물 등을 통해서만 그 존재의 가능성을 추정해왔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백제시대 청동제소탑편과 간송미술관의 금동불감에서 하안 구조를 볼 수 있고, 또한 백제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건물로 알려진 일본 법륭사의 금당과 5중탑에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보다는 백제에서 성행했던 하나의 양식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화암사 극락전은 하앙재와 일부 하엽주두 외에는 전체적인 형상이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공포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초제공과 이제공은 살미의 끝만 살짝 들린 앙서형으로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중기 이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전유재란때 전소되지 않고 건물 일부만 불탄 것을 옛 모습을 따라 중건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의주를 쥐고 있는 용의 발 모양을 투각한 전면 하앙과 주간포의 하엽주두, 연화 당초를 조각한 내부 살미 모습에서는 전 시대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장식화 경향을 보여 준다.

공포는 전면과 후면부가 차이가 있다.

뒷부분의 하앙은 그 끝이 위에서 사절된 날카로운 삼각형의 모습이고, 하앙재 위에 당초문이 돋을새김된 벼개목을 끼워 넣어 장여와 처마도리를 받치고 있다.

 

                      ▲ 화암사 극락전 내부 우물천장(사진 左)과 닫집(사진 右)

 

극락전의 내부는 고주없이 통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칸 뒤쪽에 큼직한 불단을 조성하고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위를 화려한 닫집으로 장엄하엿다. 닫집은 불단 위에 네 기둥을 세워 亞자형 지붕틀을 구성하였다.

안에는 커다란 비룡을 중심으로 비천상, 동자상, 연봉 물린 봉황 등을 목각하여 매달아 놓았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유형이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중도리 안쪽을 한단 높게 하여 층급을 두었는데 반자에는 운학과 연화문 등이 그려져 있다. 1981년에 지붕 부분 보수가 있었고, 2002년에 해체, 수리하였다.

 

 

 

                      ▲ 화암사 극락전 외부 단청

 

화암사 극락전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인 하앙식 구조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완주 화암사 우화루(完州 花巖寺 雨花樓)

*보물 제662호(1980년06월11일 지정)

조선시대 누각으로 화암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을 보이고 있다.

 

 

                      ▲ 화암사 입구에서 바라본 2층 누각처럼 보이는 우화루(사진 上)

                         극락전 앞에서 바라본 단층처럼 보이는 우화루(사진 下左)과 우화루 측면(사진 下右)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3년(1611) 새로 세웠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4개의 기둥 위에 올린 2층의 누각이지만 안쪽(절 마당)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 통칸인 화암사 우화루 내부 전경 

                      ▲ 화암사 우화루 내부(사진 左)와 천장 가구(사진 右) 전경

 

내부는 통칸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다.

우화루의 '우화(雨花)'는 비가 꽃처럼 내린다는 뜻이다.

 

                      ▲ 화암사 우화루 벽화

 

                      ▲ 화암사 우화루 전면(사진 上)

                         우화루 정면 공포와 화암사 현판(사진 下)

 

♧ ♧ 완주 화암사 동종(完州 花巖寺 銅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1974년09월27일 지정)

극락전 안에 있으며 전체 높이 140cm, 몸체 높이 85cm, 입 지름 70cm이다.

종의 맨 윗부분에는 꽃을 세워 도드라지게 장식한 문양이 있다. 어깨에는 간략화된 꽃무늬 띠를 둘렀다. 어깨 아래로는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사이에 보살상을 새겼다.

유곽의 길이 25cm, 폭 25cm이며, 덩굴무늬로 장식된 곡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유곽 밑에는 금철대시주, 동철대시주, 보시, 공양 등의 문자판이 새겨 있다.

 

                      ▲ 화암사 중창비가는 길

                         화장실 건물 아래 좌측의 돌계단 산길

♧ ♧ 완주 화암사 중창비(完州 花巖寺 重創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4호(1981년04월01일 지정)

화암사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원래의 절을 고쳐 새롭게 하는 중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화암사는 비문의 내용을 미루어 신라 문무왕 이전에 창건되었고, 이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쳤다 한다.

비는 넓다란 사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비문이 많이 닳아 있어 읽기가 힘들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조선 태종17년(1417)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성달생이 절을 하나 짓고자 터를 찾아 다니던 중, 화암사의 자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 결국 그의 뜻에 따라 세종7년(1425)에 주지 해총이 절을 중창하였다. 이외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수도하였다는 기록도 보이며, 이들의 뜻에 따라 절을 잘 지키라는 당부의 내용도 실려 있다.

세종23년(1441)에 비문을 지어 선조5년(1572)에 비를 세웠다.

 

♧ ♧ 완주 화암사 괘불도(完州 花巖寺 掛佛圖)

*등록문화재 제625호(2014년10월29일 지정)

 

 

보기 드물게 비로자불을 본존으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권속들을 구성한 비로자아괘불도로서 주목된다.

채색에 있어서도 근대기 불화에 수용된 서양화법을 적극 수용하여 입체감 있는 표현 뿐 아니라 수체화 기법에 가까운 설체법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수용된 근대적 불화기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전통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를 함께 적용한 작품으로 불교 회화적 가치가 크다.

 

                      ▲ 화암사 철영재(啜英齋)

 

철영재는 숭죽대부 판충추원사 성달생(1376~1445)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조부로 세종 때 전라도관찰사를 거쳐간 후 퇴락해가는 화암사를 중창불사하였다. 이에 후대에 화암사에서는 성달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극락전 옆 주인을 알 수 없는 화암사 부도 1기

 

「 화암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촬영한 산길과 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