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Ⅳ편:안심사(安心寺)

왕마구리 2015. 4. 6. 01:16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청주는 삼한시대 마한의 땅으로 백제 시대에 이르러 상당현(낭비성 또는 낭자각)이라 칭하고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5소경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태조23년(940년)에 청주로 지명을 개칭하였으며, 고려 우왕3년(1377) 청주 흥덕사에서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를 간행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청주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되었되었으나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관찰사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1920년 충북선 개통은 지역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1946년에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고, 1949년에 청주시로 승격되었다.

그후 행정동 분동, 청워군 편입 등을 거쳐 1989년 7월에 2개의 출장소(동부,서부)가 설치되었고, 1995년 1월에 출장소가 구(동부-상당, 서부-흥덕)로 승격되었으며, 지금은 1946년 6월 1일 분리되었던 청주,청원이 2012년 6월 통합이 확정되어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로 출범하였다.

면적 940.3㎢의 청주는 서울 동남방 128km 지점에 위치한 중부권의 내륙도시로 반경 40km 이내에 대전, 천안, 괴산, 보은 등이 인접해 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기점 119.6km에서 청주IC로 접어들면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도열해 있는 5km의 시원한 플라타너스 가로스 터널을 지나 시내에 들어서면 시가지를 아늑하게 감싸듯 솟아있는 우암산과 도심을 관통하여 휘감아 흐르는 무심천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유서깊은 교육문화의 도시, 청주를 만나게 된다.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로서 행정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 대륙성기후로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남동풍이나 남서풍이 불며,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북서풍이 부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기후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른 지방에 비해 한서의 차가 비교적 심한 편이나. 우리나라의 평균기온인 11ºC에 비해 11.6ºC로 비교적 기상여건이 양호하며 강수량은 연평균 1,200mm이상으로 6~9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자연재해가 비교적 적은 살기좋은 지역으로 대청댐의 풍부한 용수, 저렴한 용지와 함께 첨단산업이 입지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청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보살사와 안심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상당산성은 '성곽돌기'에, 그리고 기타 관광명소들은 3편으로 나누어 내가 찾은 관광명소 '강원&충청권'에 소개를 하기로 한다.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Ⅰ편 : 포곡식 석축산성! 상당산성(上堂山城)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Ⅱ편 : 조성년도가 확실한 당간! 용두사지 철당간(龍頭寺址 鐵幢竿)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Ⅲ편 : 청주 근교의 가장 오래된 사찰! 보살사(菩薩寺)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Ⅳ편 : 조선시대 창건된 사찰! 안심사(安心寺)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Ⅴ편 : 대통령의 별장! 청남대(靑南臺)

- 희망과 사랑의 도시! 청주(淸州) Ⅵ편 : 고려시대 석탑! 계산리 오층석탑(桂山里 五層石塔)과 조선후기 전통가옥! 청원 이항희가옥(淸原 李恒熙家屋)

 

【 일 정 표 】2015년 3월 23일(월)-24일(화) 1박2일

                             ◈ 첫째날(3/23) : 용두사지 철당간-중앙공원-상당산성

                             ◈ 둘째날(3/24) : 보살사-청원이항희가옥-청원계산리 오층석탑-안심사-청남대

 

◀ Ⅳ편 : 청주 안심사(安心寺)

조선시대 창건된 사찰!

 

                      ▲ 안심사 입구 요사채 옆에서 바라본 경내 전경

 

『 청주 안심사(淸州 安心寺) 소개 』

*소재지: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리 271

구룡산 서쪽 기슭의 사동리 절골에 소재한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대웅전 안에 1982년까지 걸려있던 「안심사고적연대표」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11년(775)에 진표율사가 절을 짓고 그의 제자 수십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안심사라고 이름하였다 전한다.

그 후 고려 충숙왕12년(1325)에 원명국사가 중창하고 조선 인조4년(1626)에 송암대사가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찰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의 연대와 대략 일치하고 있다.

또 대웅전의 처마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 '姜熙十一年壬子五月日造瓦大施主...'라는 양각명문이 있어서 창건된지 60년 후인 조선 현종13년(1672)에도 飜瓦(번와)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는 1980년과 1989년에 번와와 단청공사가 있었고, 1984년에 요사를 신축하였다. 그리고 안심사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없고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서에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밖에 「여지도서」의 청주목지도와 순조22년(1882)경에 필사한 '여지도'의 거원지리에 안심사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료로써 보면 안심사는 비록 「동국여지승람」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계속하여 법통이 이어진 사찰임을 알 수 있다.

 

                      ▲ 안심사 영산전 옆에서 바라본 경내 전경(사진 上)

                         대성전 출입문인 내삼문(사진 下)

 

◈ 안심사의 문화재들

영산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은 1613년에 지었다가 풍상으로 퇴락해가는 것을 현종8년(1842)에 중수하였다.

본디 이 건물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비로전이었으나 나한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영산전이 되었다. 불전 내부에는 삼가삼존불, 16나한상, 영산후불탱화, 신중탱화, 나한도 4점, 법고, 괘불함 등이 있다.

영산전 불단 앞에 마련된 괘불함에는 효종3년(1652)에 제작한 국보 제297호인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이 괘불은 석가여래상을 주존으로 주위에 보살상과 제자,성중 및 사천왕의 호법신들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영산회상도이다. 크기는 가로 462cm, 세로 627cm이며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본존상의 높이는 372cm에 이른다.

충혼각은 한국전쟁 때 죽은 무명용사들을 위해 인근 부대에서 세웠으며 매년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낸다. 이밖에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과 세존사리비, 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 목판 다라니경, 석탑 부재 등이 있다.

세존사리탑은 진표가 창건 당시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조선 말에 탑의 행방이 묘연하던 차에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고종18년(1881)에 구천동으로 옮긴 뒤 광무4년(1900)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 ♧ 안심사 영산회괘불탱(安心寺 靈山會掛佛幀)

*국보 제297호(1997년09월22일 지정)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덩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안심사에 있는 이 괘불은 길이 7.26m, 폭 4.72m의 크기로,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무리들과 석가를 호위하는 사천왕상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경편단을 걸치고 손기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중앙에 앉아 있다.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적인 표현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각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해 근엄해 보이며,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다. 광배에 있는 화려한 꽃무늬 장식은 석가불을 강조하며 돋보이게 한다. 위로 갈수록 석가 주변의 무리들을 점점 작게 묘사해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는데 두텁게 칠해 밝은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덧칠을 한 흔적이 있다.

조선 효종2년(1652)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청주 보살사 괘불이 조성된지 3년 후의 작품으로, 구도상 비슷한 점이 있어 17세기 중엽 충청지역의 불화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안심사 대웅전 우측에 걸려있는 영산회괘불탱 모조품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불화를 모조품이지만 실물 크기로 전시해 둔 것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절을 찾는 이들에게 실물을 직접 공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모조품일지라도 탐방객을 위해 전시를 한 안심사의 배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 안심사 대웅전(安心寺 大雄殿)

*보물 제664호(1980년06월11일 지정)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1626)송암대사가 중건한 건물로 보인다.

 

 

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 기와에 "강희십일년임자(姜熙十一年壬子)" 명문이 있어서 현종13년(1672)에 번와한 사실을 알 수 있고 그후에도 수차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 안심사 대웅전 현판과 옆면 전경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놓은 이 건물은 3단의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주석으로 삼았으며,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도 공포가 있어서 매우 이례적이다. 원래는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 안심사 대웅전 앞면의 문에 그려진 문양들

 

건물 내부의 천장에는 대웅전을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화려한 닷집을 갖추었다.

1976년 12월 23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가, 1980년 6월 11일 보물로 승격되었다.

 

                      ▲ 안심사 대웅전과 비로전(영산전)

 

♧ ♧ 안심사 비로전(安心寺 毘盧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1982년12월17일 지정)

 

 

 

조선 광해군5년(1613)에 세워진 건물로 조선시대 말기인 헌종8년(1842)에 고쳤다.

안심사 비로전은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원래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지만 이곳에서는 최근에 나한을 모시고 있다 해서 영산전이라 부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가운데 칸은 공포를 2개씩, 양쪽 칸은 1개의 공포를 배치하였다.

 

                      ▲ 안심사 비로전에 달려있는 '영산전' 현판(사진 左)

                         안심사 비로전 지붕 중앙의 특이한 장식(사진 右)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 경내의 조선 중기 건축인 대웅전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 안심사 세존사리탑과 탑비

 

♧ ♧ 안심사 세존사리탑(安心寺 世尊舍利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1976년12월21일 지정)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는 석종형 부도로서 탑비와 함께 안심사 대웅전 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부도는 신라 혜공왕11년(773) 진표율사가 안심사를 창건할 때 석가세존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왕발이 지은 세존사리비의 비문에 의하면 탑의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을 내려오던 중 이곳 구룡산에서 발견하였다 한다.

고종18년(1881)에 구천동에 옮겼던 것을 다시 광무4년(1900)에 승려 광우와 등원이 안심사로 옮겨 세웠다 한다.

사리탑의 모습은 방형 1층의 지대석 위에 8각형의 하대석을 놓아 만든 높이 200cm 가량의 석종형이다. 하대석 각면에는 문양이 새겨지지 않았고, 탑신을 받치는 괴임대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하대석 윗면에는 '十'자형으로 홈이 파여져 있다.

 

                      ▲ 안심사 세존사리탑의 팔각형 하대석(사진 左)과 상륜부의 28과 연주문(사진 右)

 

탑신에도 문양과 명문이 새겨지지 않았고 상륜부는 28과의 연주문을 돌려 구획하였다. 상륜은 상단을 뾰족하게 표현한 보주형이다. 전반적인 조성양식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