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전북 완주)천 년의 역사를 담은 사찰! 송광사

왕마구리 2015. 5. 25. 18:03

◀ 전북 완주 송광사(完州 松廣寺)

독특한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사찰!!! 

 

「 전북 완주(全北 完州) 소개 」

산이 있어 아름답고 유서깊은 사찰이 역사의 정취를 더하는 고장!

전라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 거리 36km, 남북 거리 71km로 동은 진안군, 서는 김제시, 남은 임실군과 정읍시, 북은 익산시와 충남 논산시, 금산군과 각각 인접하고 있다.

고덕산과 모악산이 둘러 있으며, 서북방은 전북평야에 연결되어 소양천, 고산천, 삼천천은 모두가 서북을 관류하는 만경강에 이르고 있다. 도로는 전주를 중심으로 4통 5달, 군산, 서울, 부산, 대구, 목포, 광주, 여수로 통하는 국도와 지방도가 이고, 철도는 전북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백제 위덕왕22년(555)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나 565년 폐지되었다. 의자왕20년(660) 신라에 병합되어 신문왕5년(685) 다시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며, 이때부터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덕왕16년(757) 전주로 바뀌었고, 완산정이 설치되어 군사상의 중심지로 중요시되었다. 진성여왕6년(892) 견훤이 완산에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태조19년(936) 멸망할 때까지 45년간 후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태조19년(936) 안남도호부로 바뀌었다가 태조23년(940) 다시 전주로 복구되었다. 993년 완산을 승화로 고치고 절도안무사를 두었으며, 995년 전국을 10도 12주로 개편할 때 강남도에 속한 순의군이라 칭하였다. 목종8년(1005) 전주 절도사가 파견되었고, 현종9년(1018) 전국 지방제도 개편 때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022년 다시 전주목으로 개칭되었다. 공민왕4년(1355) 전라도 안령사 정지상이 원의 사신인 야사불화를 감금시킨 사건 때문에 부고로 강등되었으나, 이듬해 완산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태조1년(1392) 이 지방은 태조의 고향으로 중시되어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으며, 태종3년(1403) 전주부로 개칭되어 조선 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그 영역은 고려시대보다 축소되었다.

1914년 고산군이 통합되어 전주군이 설치되었으며, 1935년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됨에 따라 전주군이 완주군으로 개칭되어 15개 면을 관할하였다.

1956년 삼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57년 초포,우전면과 조촌,용진,상관면의 일부가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초포면 일부를 삼례읍과 용진면에, 우전면 일부는 구이면에 편입, 1966년 운주면에 경천출장소 설치, 1973년 봉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익산군 온수리 화산마을이 삼례읍 삼례리에 편입되고 용진면 산정리 일부가 전주시 우아동에 편입되었다.

1983년 상관면 대성리,색장리와 용진면 산정리 일부가 전주시로 편입되고, 김제시 백구면 도덕리 일부를 조촌면에 편입되었다. 1985년 좇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87년 전주시에 편입되었고, 1989년 운주면 경천출장소가 경천면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이서면 중리,상림리가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1994년 김제군 용지면 금평리 일부가 이서면에 편입되었다.

 

 

                      ▲ 송광사 일주문 옆 전통찻집 '백련다원'

                      ▲ 송광사 탐방을 마치고 입구의 전통찻집 '백련다원'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

 

【 일 정 표 】2015년 5월 10일(일)-11일(월) 1박2일

                             ◈ 첫째날(5/10) 완주 탐방 : 화암사-위봉사-위봉산성-송광사

                             ◈ 둘째날(5/11) 전주 탐방 :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객사(풍패지관)-전주향교-만고사&남고산성

 

이번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 탐방은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완주군에서의 일정은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어머니의 품 같은 명산! 모악산 등은 이미 일반산행과 금남정맥 종주 산행 등으로 몇 차례 산행을 실시하였으므로, 완주의 3대 명찰인 화암사, 위봉사, 송광사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산성과는 달리 유사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위봉산 고개에 자리한 위봉산성을 탐방하였다.

전주에서는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 문화재들인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 호남지방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전주 전동성당,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전주객사인 풍패지관,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주향교, 그리고 남고산성과 남고사를 탐방하는 여행이었다.

 

완주에서 탐방하였던 관광명소들 중 화암사, 위봉사와 송광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상당산성은 '성곽돌기'에 아래와 같이 4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국내 유일한 하앙식 구조의 깊은 역사를 간직한 사찰! 화암사(花巖寺)

산사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사찰! 위봉사(威鳳寺)

천 년의 역사를 담은 사찰! 송광사(松廣寺)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축성한 성! 위봉산성(威鳳山城)

 

 

『 완주 송광사(完州 松廣寺) 소개 』

*소재지: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를 떨치다 마친 이곳 전라북도 완주군 종남산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를 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남산 남쪽에 영험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 했다고 한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 보조 체징(804~880)선사가 설악상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섭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에 유학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귀국해서도 가지산 보림사와 종남산 백련사에 번갈아 거주하면서 도의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했다. 이때 체징선사는 백련사를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하였다. 이래로 송광사는 사세를 면면히 이어왔다.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중국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자, 사명을 백련사로 다시 고치고 천태종에 귀속했다.

조선시대 임진,정유 양란 때 송광사는 전소되었는데, 광해군 때 벽암각성의 문도인 덕림화상이 중창주가 되어 응호, 승명, 운정, 득순, 흥신 스님 등과 더불어 노력 끝에 중건하였다.

송광사개창비(1636)에 따르면, 송광사는 인조의 척족인 이취반이 폐허가 된 절터를 시주하였고, 보조국사 체징이 점지해 두었던 터에 1622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이듬 해에 7칸 중층의 대웅전을 건립하므로써 초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대가람'으로 사액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명부전(1640년), 천왕전(1649년), 나한전(1656), 일주문 등이 연이어 신축됨으로써 세 번째 중건됐다.

그 후에도 1707년에 네 번째 중건이, 1857년 다섯 번째 중건이 있었다.

<송광사대웅전중수상량문(1857년)>에 따르면, 다섯 번째의 중건은 전라도 순찰사 김병교, 전라도 관찰사 심경택, 전주부윤 홍종화 등이 백만전을 지원하여 2층 구조로 지어진 대웅전을 49일 만에 허물고 53명의 장인이 7개월만에 단층 대웅전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송광사의 중건을 전하는 기록으로는 <전주송광사개창비(1636년)>, <경진년칠월일서방산송광사시왕조성흘공기(1640년)>, <불상조성시주목록(1641년)>, 대영산십육성중오백성문조성회원문(1656년)>, <전가경19년갑술법당중수동참기(1814년)>, 송광사대웅전중건상량문(1857)> 등이 있다.

 

 

                      ▲ 송광사 첨성각과 향로전 전경(사진 上)

                         송광사 외부 담장(사진 下)

 

◈ 송광사의 문화재들

- 대웅전(보물 제1243호)

- 종루(보물 제1244호)

- 소조사천왕상(보물 제1255호)

-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274호)

- 일주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 송광사사적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

-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

- 나한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 오백나한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 목조삼전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70호)

- 금강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 ♧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 松廣寺 大雄殿)

*보물 제1243호(1996년05월29일 지정)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14년(1636)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8년(1857)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2층 불전이었으나 건물이 기울어 1814년 또는 1857년 다시 중수되면서 지금과 같은 단층 건물이 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며,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다.

장대석 외벌대로 낮게 기단을 조성하고 덤벙주초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정면은 5칸 모두 두짝 분합문을 달았다. 기둥을 높게 하여 문인방 상부와 창방 사이에는 사방을 돌아가며 벽화를 그렸다. 이와 같은 상벽의 설치는 조선시대 후기에 세워진 비슷한 규모의 불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송광사 대웅전 추녀 및 귀공포(사진 左)와 외부 공포(사진 右)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주칸마다 한 조씩의 간포를 배치하였다. 외 3출목 내 4출목 구조로서 살미는 가늘고 곡선진 양서형이며 내부는 모두 연봉을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그러나 후면의 공포는 좌우 퇴칸을 제외한 어칸과 협칸의 쇠서 모양이 화암사 극락전 배면의 공포 하앙재와 같이 사절하여 간략히 처리하였다. 전면에 비해 후면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 송광사 대웅전 내부 전경

 

내부는 평주열보다 뒤로 후퇴시켜 4개의 고주를 세우고 후불벽을 친 후 그 앞에 가로 3칸, 세로 1칸 크기의 수미단을 구성하고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의 거대한 삼세불을 봉안하여 법당의 내부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천개를 가설하였다.

 

                      ▲ 송광사 대웅전 우물천장(사진 左), 부축천자의 동자상(사진 中), 그리고 천장 주막비천도(사진 右)

 

천장은 중앙 3칸이 우물천장이고, 주위는 빗천장이다. 중앙의 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조각, 판형으로 새겨 부착한 게, 물고기, 거북 등이 있고, 빗천장에는 주악비천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천장 전체가 하나의 천개처럼 법당 안을 장엄한다.

 

                      ▲ 송광사 대웅전 정면 계단의 석상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떄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을 중창(1622년) 각성대사를 초빙하여 50일간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 시주함으로써 인조14년(1636)까지 계속 큰 불사가 이루어져 송광사는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대공덕화주인 벽암은 당대의 최고 승려로서 병자호란 때 의승군을 소집하여 서울로 진군하였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고 팔도도총섭으로서 승군들을 이끌고 성을 완성하였던 승병대장이었다. 그가 송광사의 중창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새로이 골고히 하는데 유익하였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조성기를 보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귀환과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있어 호국도량으로서 송광사의 성격을 보여준다.

 

♧ ♧ 완주 송광사 종루(完州 松廣寺 鍾樓)

*보물 제1244호(1996년05월29일  지정)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르킨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의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관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웠다.

 

                      ▲ 보물 제1763호 창덕궁 부용정(사진 左)과 보물 제1709호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사진 右)

 

현존하는 건물 중에는 창덕궁 부용정(보물 제1763호)과 수원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이 십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나 다른 건물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구조이다. 십자형은 내부 공간구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붕을 구성할 때도 회첨이 많이 생겨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광사 종루는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워 완전한 십자형 누각을 구성하였다.

누하주는 굵은 나무를 민흘림을 주어 8각으로 치목하였고 그 위에 다시 원기둥을 세워 2층 누각을 지지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외벌대로 돌렸으며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이며, 서측의 기단은 흙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처리되었으며,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평방을 서로 반턱맞춤으로 결구하여 공포를 배치하였다.

 

                      ▲ 송광사 종루 내부

 

평면은 중앙에 범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4칸에는 법고, 목어, 운판을 매달아 기본 불구를 갖추었다. 나머지 한 칸은 승강계단이 설치된 출입구이다. 주간은 모두 8.15자(尺)로 일정하며 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 송광사 종루 난간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외 3출목의 공포를 주상과 주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공포가 처마 밑을 받치고 있다. 출목간의 순각판은 내·외부 모두 생략되고 오제공 상단에 도리와 직각방향으로 널을 깔아 처리하였다.

내부의 초가지에는 연봉, 연화, 봉두가 조각되었으며 회첨귀한대 내부 제공은 모두 교두형으로 처리되었다. 특히 내부에서는 짜 올라간 공포로 별도의 천장없이 천개식 구성을 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송광사 종루 용마루 중앙교차점에 설치된 절병통

 

지붕은 평면형에 맞추어 십자형 팔작지붕을 구성하고 직교하는 용마루의 중앙 교차점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와는 신재로 교체되어 있는 상태이며 용머리 기와 및 망와는 일부가 옛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모로단청, 내부는 모로단청과 긋기단청이 혼용되었다. 벽이 없는 건물로 벽화는 없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공포대가 크고, 중첩되는 살미선과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선 그리고 계자난간 등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다. 공포는 화려하지만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양서형 살미와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자 등으로 인해 섬약해 보인다.

 

                      ▲ 송광사 종루 귀공포(사진 左)과 추녀부(사진 右)

 

대웅전 공포와 비교해 볼 때 장식적 수법은 덜하지만 쇠서의 양각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여 대웅전이 중건되던 시기에 같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평면과 화려한 공포, 날아갈 듯한 추녀선들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은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일한 십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왼쪽에는 남방 중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위치하고 있다.

 

                      ▲ 송광사 천왕문

 

♧ ♧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完州 松廣寺 塑造四天王像)

*보물 제1255호(1997년06월12일 지정)

송광사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잇다. 왼쪽 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긁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를 입고 있다.

 

                      ▲ 송광사 천왕문의 동방 지국천왕상(사진 左)와 북방 다문천왕상(사진 右)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산에서 약간 들어올린 왼쪽 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 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 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입체감을 나타낸다.

남방 중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 송광사 천왕문의 남방 중장천왕상(사진 左)와 서방 광목천왕상(사진 右)

 

서방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졌다. 왼팔은 거의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 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돋보이는 작품이다.

 

♧ ♧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完州 松廣寺 塑造釋迦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제1274호(1997년08월08일 지정)

*수량:불상 3구 및 복장물 2종6점(금산사 성보박물관 소장)

 

                      ▲ 송광사 대웅전의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 송광사 대웅전의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좌협시불인 약사불(사진 左), 본존불인 석가불(사진 中), 우협시불인 아미타불(사진 右)

 

신라 경문왕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는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5.4m 높이의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완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송광사 대웅전의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본존불의 복장유물인 후령통과 삼불조성기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14년(인조5년,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꼐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꼐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렴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 완주 송광사 일주문(完州 松廣寺 一柱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1971년12월02일 지정)

송광사는 위봉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개울 옆 평지에 자리잡은 절로 백제계 평지형 배치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일주문→금강문→천왕문→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은 이를 잘 말해준다.

 

 

송광사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 중기에 지은 것이다. 본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3km 지점인 나드리라고 하는 곳에 세워졌는데, 절의 영역이 좁아지면서 순조14년(1814) 정준선사에 의해 조계교 부근으로 옮겨졌다가, 1944년 해광극인선사가 현 위치로 옮겼다 한다.

전체적인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어 말쑥하고 단정한 멋을 느끼게 하며,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의 앞뒤에는 연화로 조각된 보조기둥이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조기둥을 포함하여 기둥은 덤벙주초위에 세웠고,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 위에 공포를 두었는데, 창방머리 보조기둥과 주기둥을 연결하는 보의 머리, 그리고 1개의 주간포를 구성하고 있는 초제공의 끝을 모두 용두로 장식하였고, 전후면의 3출목과 앙설의 화려함은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느끼게 한다.

 

                      ▲ 송광사 일주문의 현판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새기와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처마끝 부재들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도록함으로써 건물의 구성은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한다.

앞면 중앙에는 '終南山松廣寺(종남산송광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 완주 송광사 사적비(完州 松廣寺 史蹟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1971년12월02일 지정)

송광사 뒷뜰에 놓여 있는 비로, 절의 개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는 내용과 보조국사에서 벽암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송광사를 짓는데 참여했던 스님 가운데 한 분이었던 승명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대사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개창 당시 기술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조선 인조14년(1636)에 세운 비로, 신익성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의창군 광이 글씨를 썼다.

 

♧ ♧ 완주 송광사 동종(完州 松廣寺 銅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1992년06월20일 지정)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m, 입 지름 73cm의 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 주는 음통이 있다. 종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가 있고,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동종에 씌여있는 글을 통해 숙종42년(1716) 광주 무등산 중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영조45년(1769)에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송광사 명부전(지장전)

 

♧ ♧ 완주 송광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完州 松廣寺 冥府殿 塑造地藏菩薩三尊像 및 眷屬像 一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1999년04월23일 지정)

*수량:26구

명부전에 지상보살상을 주존불로 모시고, 왼쪽에 보제존자, 그 좌우로 시왕상, 인왕상, 사자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흙으로 만든 지장보살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 위에 놓여 있다. 원만한 인상에 눈,코,입 등이 가지런하며, 양 귀는 긴 편이 아니나 큼직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롭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양 팔에 걸쳐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다.

지장보살상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1640년에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이 함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송광사 나한전

 

♧ ♧ 완주 송광사 나한전(完州 松廣寺 羅漢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1999년07월09일 지정)

 

 

 

효종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옆면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자붕 건물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인왕상,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 ♧ 완주 송광사 오백나한전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完州 松廣寺 五百羅漢殿木造釋迦如來三尊像 및 眷屬像 一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1999년04월23일 지정)

*수량:526구

나한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삼존상 3구, 16나한상, 500나한상, 재석상 1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등 모두 526구이다.

 

 

본존불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 위에 놓여 있는데,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양쪽 귀는 짧게 표현되어 있다. 정제된 얼굴 표현에서는 근엄함과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새겨져 잇고, 왼쪽 어깨에서 내려진 옷주름은 왼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놓았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이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 나한상, 인왕상, 동자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효종7년(165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500나한상 중 일부는 후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나한전 내의 불상들은 비교적 작푼성이 뛰어난 귀중한 자료이다.

 

♧ ♧ 완주 송광사 목조삼전패(完州 松廣寺 木造三殿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1999년04월23일 지정)

*수량:3기

대웅전 삼존불 사이 양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이다.

 

 

전체적인 만든 방법과 형태는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높이 2.2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 2.08m 같으며, 뒷면에 정조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다른 위패들과는 달리 왕, 왕비, 세자로 조성한 2m가 넘는 대작이다. 여러장의 목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 새긴 것이 특징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크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교 목공예의 시기를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 송광사 금강문과 천왕문

 

♧ ♧ 완주 송광사 금강문(完州 松廣寺 金剛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1999년07월09일 지정)

금강문은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으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처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사자,코끼리를 타고 있는 동자상 2구씩을 배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 모양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송광사 경내 약수터 및 달마상

                      ▲ 송광사 금강문 옆 당간지주

                      ▲ 송광사 대웅전 뒷편의 석불과 석탑

                      ▲ 송광사 삼성각(사진 左)과 적묵당(사진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