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강원 평창)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태종의 원찰! 상원사(上院寺)

왕마구리 2015. 12. 19. 19:02

◀ 강원 평창 상원사(上院寺) ▶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태종의 원찰!!

현존하는 한국의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

 

                      ▲ 상원사 전경

 

【 일 정 표 】2015년 09월 11일(금)-12일(토) 1박2일

                             ◈ 첫째날(09/11) : 월정사-상원사-오대산 선재길

                             ◈ 둘째날(09/12) : 탑동 삼층석탑-방아다리약수-봉평 메밀꽃축제

 

오래간만에 찾은 강원도 지역 탐방으로, 평창을 대표하는 오대산국립공원 내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상원사와 월정사를 이어주는 '오대산 선재길' 탐방이 주 목적이었다.

평창 방문시기가 '봉평 메밀꽃축제'가 열리고 있는 기간이라 둘째날 축제장 방문을 하기로 하고, 축제장 가는 길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9호인 '탑동 삼층석탑'과 방아다리약수터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방아다리약수는 수질검사결과 '음용불가' 판정이 내려진 상태라 음용할 수 없었고, 자연학습장 및 부대시설 조성공사로 어수선한 상태었다.

또한 봉평 메밀꽃축제장은 많은 방문 차량들로 주차에 어려움이 있어 주 행사장 접근이 어려워 평창무이예술관 주변의 메밀밭을 방문하는 것으로 대신해야만 했다.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사찰! 월정사와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태종의 원찰! 상원사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오대산 선재길'은 '(강원 평창)깨달음, 치유의 천 년 옛길! 오대산 선재길'이란 제목으로 도보여행 '강원&충청권'에, 탑동 삼층석탑'과 '봉평 메밀꽃 축제'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경기&강원권'에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상원사 입구

 

                      ▲ 상원사 가는 길

 

『 오대산 상원사(五臺山 上院寺) 소개 』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산내 암자이다. 그러나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월정사 산내 암자에 그치지 않는 명성을 누려 오고 있다. 특히 사람이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데도 깊은 산사의 숙연한 분위기가 매우 뛰어나, 참선수행으로써 본래의 참면목을 깨우치려는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쫓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 상원사 누각 천장에 그려진 불화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 에는 고려 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 상원사 경내의 약수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 상원사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누각

 

『 상원사의 문화재들 』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

국보 제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象)

국보 제292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보물 제793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

보물 제1812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전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菩薩坐像 腹藏典籍)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왕상(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帝釋天王像)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동자상(3구)(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童子像(3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ㆍ십육나한상 및 권속(平昌 上院寺 靈山殿 釋迦三尊ㆍ十六羅漢像 및 眷屬)

 

                      ▲ 상원사 동종이 보관된 범종각

 

♧ ♧ 평창 상원사 동종 (平昌 上院寺 銅鍾)

*국보 제36호(1962년12월20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50, 상원사 (동산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는 이종은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 상원사 동종의 용뉴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 상원사 동종의 문양들

                      ▲ 상원사 동종 종신의 유곽안 연꽃유두(사진 左), 비천상(사진 右)

                      ▲ 상원사 동종 종신의 구연대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 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전설))

이 종의 소재 사명(寺名)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경북 안동으로 옮겨져 본부(本府) 문류(門樓)에 걸려 있었다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이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국보 제292호(1997년01월01일 지정)

*수량/면적:2첩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번지 월정사 성보박물관

세조 10년(1464) 세조의 왕사인 혜각존자 신미 등이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글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권선문은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 두 책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책은 상원사 중창권선문이며, 한 책은 세조가 상원사 중창 취지를 적은 어첩御牒이다. 어첩에는 세조와 왕세자의 수결과 인기가 있고, 효령대군을 비롯하여 여러 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이 있다.

다른 한 책인 권선문은 한문으로 쓴 다음에 바로 옆에 한글로 번역했으며 자성왕비윤씨慈聖王妃尹氏라고 쓰고 인기를 찍고 왕세자, 세자빈, 한 씨 이하 궁인들의 인기를 찍고 뒤에 신미 등의 수결이 있다.

 

 

                      ▲ 상원사 중창권선문 표지(사진 上)

                         발원문(사진 下左)과 본문(사진 下右)

 

훈민정음 제정 이후 제작된 판각이나 활자본 책자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직접 붓으로 쓴 것으로는 이 한글 권선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의 한글 서체를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왕가에서 직접 사찰에 보낸 귀중한 문서일 뿐 아니라 세조와 신미 등 고승들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겉표지는 붉은색 바탕에 당초문이 들어 있는 비단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세로 45.5센티미터, 가로 29.5센티미터로 접혀 있는데 펼친 총 너비는 810.5평방 센티미터이다.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 서적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96년 11월 28일 보물 제140호에서 국보 제292호가 되었다.

 

♧ ♧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象)

*국보 제221호(1984년10월15일 지정)

*소재지: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50, 상원사 (동산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보천과 효명의 두 왕자가 창건한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절에서 시작된 사찰로,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와 같이 상원사는 문수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이며 신체는 균형이 잡혀 있다.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볼을 도톰하게 하여 어린아이같은 천진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넓은 어깨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가로질러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가슴에는 구슬장식이 늘어져 있다. 옷주름은 신체의 윤곽에 따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거의 맞닿을 듯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둔 반가부좌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대좌(臺座)는 마련되지 않았다.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이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유래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의 손 모양

 

((전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童僧)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등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렸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는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전시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하고 있다.

 

♧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

*보물 제793호(1984년10월15일 지정)

*수량/면적:일괄(23종)

*소재지: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번지 월정사성보박물관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에서 1984년 7월 불상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2개의 발원문(發願文)과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된 유물이다.

발원문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후대에 보수한 기록도 적어 놓고 있다. 첫번째 발원문은 세조 12년(1466)에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4㎝의 낱장으로 되었고,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를 썼다. 또다른 발원문은 1599년에 2구의 문수동자상과 16구의 나한상 등에 금칠을 새로 하고 고쳤다는 내용이다. 크기는 세로 34.6㎝, 가로29.1㎝의 낱장으로 되었고 역시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로 썼다.

전적류는 모두 13종으로 백지묵서제진언, 대방광불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5종, 원각경 2종, 육경합부 3종이 발견되었다.

 

 

                      ▲ 대방광불화엄경 권28(사진 上左)과 백지묵서제진언-권말(사진 上右)

                         묘법연화경(사진 下)

 

백지묵서제진언은 불교의 가르침 66가지를 범어로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크기는 세로 41.8㎝, 가로 679.3㎝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 60권 가운데 권28에 해당하며 간행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된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이다.

 

                      ▲ 오대진언

 

오대진언은 다섯가지의 다라니 진언(眞言: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 글)을 범어, 한글, 한자순으로 적고 있다. 성종비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원본을 구하여 한글로 음역하고, 성종 16년(1485)에 간행한 것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우고 닥종이에 찍어낸 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 가로 16㎝이다.

묘법연화경 권1-3, 4-7은 2권의 책으로 되었고, 크기는 세로 26.9㎝, 가로 16.8㎝이다. 작은 글자로 아주 정교하게 새겨 고려 정종 1년(1399)에 간행한 것으로 해린(海隣)이 1년에 걸쳐 새긴 것이며 인쇄 상태로 볼 때 판을 새기고 한참 후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묘법연화경 권1-7은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모두 10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8.5㎝이다. 태종 4년(1404)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표지는 검푸른 색이고 제목은 금색으로 쓰여있다. 묘법연화경 권6-7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5㎝, 가로 25㎝이다. 세조 때 간행된 을해자본으로 인쇄직후 불상에 넣은 듯 매우 깨끗이 보관되어 있다. 묘법연화경 권1-3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있고 크기는 세로 27.6㎝, 가로 16.6㎝이다. 불상에 넣기 전에 읽으면서 달아놓은 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중에 복장유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세조 11년(1465)에 간행된 목판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7㎝, 가로 18.5㎝이다.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세우고 난 뒤 효령대군에게 명하여 교정한 원각경을 정란종(鄭蘭宗)이 쓴 것으로 을유자(乙酉字)로 찍은 것이다. 을유자본은 을유년에 만든 활자로 찍은 책을 말하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고 부르며,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을유자본 가운데 가장 깨끗한 책이다. 또다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권상·중·하 3권이 세로 25.1㎝, 가로 16.5㎝의 하나의 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에 강희안이 옮겨 적고 간행했던 간경도감판본을 명종 19년(1564)에 신흥사(臣興寺)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그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세로 29.3㎝, 가로 17.3㎝ 크기의 육경합부는 1440년에 영제암에서 판각한 목판을 인수대비가 성종 3년(1472)에 대대적으로 찍어낸 것 가운데 하나이다. 화암사에서 성종 19년(1488)에 다시 새긴 다른 육경합부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세로 26.6㎝, 가로 15.7㎝이다. 진안(鎭安) 중대사(中臺寺)에서 세조∼명종년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육경합부는 크기가 세로 26.4㎝, 가로 16.3㎝인데 상원사 복장유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

 

                      ▲ 명주적삼

 

당시 상류계층에서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주 적삼 1점과 생명주 적삼 1점은 불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 다른 유물들과 같이 넣은 것으로 보인다. 황색 보자기는 불상에 들어갈 유물들을 싸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구슬 3개와 사리가 같이 발견되었다.

위의 유물 중 발원문은 상원사문수동자상 및 여러 불·보살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전적 중 제진언은 조선 전기 필사본으로는 유례가 드문 것이며, 그밖에 활자본과 목판본은 나름대로의 서지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복식류는 조선 전기의 의류로 현재까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상원사 문수전(사진 上)

                         문수전 내에 봉안된 목조문수동자좌상과 목조문수보살좌상(사진 下)

 

♧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전적(平昌 上院寺 木造文殊菩薩坐像 腹藏典籍)

*보물 제1812호(2014년01월20일 지정)

*수량/면적:2점

*소재지: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번지 월정사성보박물관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전적(平昌上院寺木造文殊菩薩坐像腹藏典籍)’은 ‘백지묵서금강반야바라밀경(白紙墨書金剛般若波羅蜜經)’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6’ 이다.

백지묵서금강반야라밀경은 백지에 먹으로 쓴 사경으로 전면에 ‘금강반야바라밀경’, 후면에 ‘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 수록되었다.

금강반야라밀경은 대승불교의 대표경전으로 줄여서 ‘금강경’ 또는 ‘금강반야경’이라고도 한다. 상원사의 금강경은 권두에 변상도는 없고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본을 저본으로 펴낸 것이다. 사성기(寫成記)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도침이 잘된 두터운 장지(莊紙)에 정성드려 쓴 서체의 품격에서 사경체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사성시기는 14세기로 추정되고 희소성이 있는 것으로 사경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묘법연화경 권6’은 송나라의 승려 계환(戒環, 1119~1125년)이 주해한 송본(宋本)을 저본으로 하여 고려의 최이(崔怡, 1356~1426년)가 주관하여 판각한 판본을 다시 인쇄한 것으로, 간행시기는 여말선초로 추정된다. 상하단변에 2엽마다 판수제, 권차 및 장차가 있어 고려시대 권자본(卷子本)이나 절첩본(折帖本)의 특징을 보여준다. 28행의 절첩본 판식에서 14행씩 찍어내어 선장식으로 제책된 포배장본이다. 이 판본은 판각 및 인쇄상태로 보아 1240년(고려 고종 24)에 판각된 판에서 여말선초에 펴낸 희소한 판본으로 불교사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상원사 문수전 목조문수보살좌상(전면과 후면)

 

♧ ♧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제석천왕상(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帝釋天王像)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0호(2011년08월12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상원사

 

 

이 제석천왕상은 복장유물이 완전하게 보관되어 있어 1645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현존하는 조선시대 제석천왕상으로 매우 귀중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 평창 상원사 문수전 목조동자상(3구)(平昌 上院寺 文殊殿 木造童子像(3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1호(2011년08월12일 지정)

*수량/면적:3구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상원사

이 동자상 3구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조각적으로도 뛰어난 조선후기의 목조상으로,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 ♧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ㆍ십육나한상 및 권속(平昌 上院寺 靈山殿 釋迦三尊ㆍ十六羅漢像 및 眷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2호(2011년08월12일 지정)

*수량/면적:21구

*소재지: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상원사

이 불상들은 조각수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제작연대(1711년) 및 작자를 명확히 알려주는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고, 개성 있고 다양한 모습의 특징 있는 형태들로 당대 16나한상 연구에 중요시 되어야 할 작품이다.

 

 

                      ▲ 상원사 영산전 권속(사진 上左)과 석가삼존(사진 上右)

                         십육나한상(사진 下)

 

「 관대걸이 」

 

 

 

「 문수전 앞 고양이 석상 」

조선 세조와 인연이 있는 석상으로, 세조가 상원사를 참배하여 법당에 들어가려 하니 고양이가 나타나 어의를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서 자객을 찾아서 목숨을 건진 세조는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猫田)을 하사하였다.

근래에는 고양이 석상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분들이 믿음으로 기도하고 오대광명을 받아가고 있다.

 

 

「 봉황보당(鳳凰寶幢) 」

보당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의례용으로 거는 깃발로 들어오는 불자들에게 장엄한 화엄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성보물이다.

당간을 보당에 달아 걸며 당간을 지탱하는 기둥을 지주라 한다.

 

 

상원사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주 1기가 남아 있는데, 세조가 이곳을 참배하였을 때 왕의 상징인 어룡기를 걸어두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많은 불교 문화유산 가운데 당간지주는 다수 남아 있으나, 완전한 보당은 단 1점(국보 제136호 금동 용두보당) 만이 있으며, 용두는 2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인광스님은 장엄불사의 전통미와 사상을 재해석하여 봉황으로 보당을 조성하는 인연을 모으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모든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화엄세계를 이루고, 지주에 용과 호랑이를 조각하여 화엄성중님의 항마력으로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기원하였으며, 지주 기단에 거북으로 당간을 세워 공덕을 지은 불사들의 가정에 오대광명이 충만하길 발원하였다.

 

((참고))

♧ 금동 용두보당(金銅 龍頭寶幢)

*국보 제136호(1971년12월21일 지정)

*소재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삼성미술관 리움 (한남동)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장대 모양의 이 당은 꼭대기에 용의 머리모양이 장식되어 있어 용두보당이라 한다.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73.8㎝의 작은 크기로, 2층의 기단(基壇) 위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당간을 세운 모습이다. 당간은 8개의 원통이 서로 맞물려 이어져 있는데, 여덟번째의 원통에는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용머리는 목에 비늘을 새겨 놓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뿔이 앞뒤로 생동감 있게 뻗쳐있어 더욱 힘차게 보인다. 표면 전체에 다갈색으로 얇게 옻칠을 하고 그 위에 금칠을 하였는데, 지금은 군데군데 그 흔적만 남아있다.

신라 이래 발달해온 당간 양식의 모습과 세련된 공예미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보통 당간의 머리장식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 당은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상원사 삼화상(한암,탄허,만화)부도탑 입구(사진 上)

                         삼화상부도탑 표지석(사진 中)

                         삼화상부도탑(사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