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 ▶
통일신라 구산선문의 하나!
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의 유물이 출토된 옛 절터!!
「 충남 보령(忠南 保寧) 소개 」
대한민국 최대 관광휴양지!!!
보령시(保寧市)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해안 중앙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청양군·부여군, 서쪽은 서해에 면하며, 남쪽은 서천군, 북쪽은 홍성군과 접하고 있으며, 서편에는 114.9㎞의 해안선이다. 시가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는 장항선 철도와 국도 제21호선이, 동·서로는 국도 제36호선과 국도 제40호선이 각각 통과하여 서해안 교통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리아시스식 해안을 따라 발달된 천혜의 관광 휴양지인 대천해수욕장 및 1.5㎞ 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무창포 해수욕장은 이미 널리 이름나 있다. 보령 해안에 산재되어 있는 진흙을 이용 머드화장품을 개발 판매하여 전국 최우수 경영수익 기관으로 수상한 바 있으며, 매년 보령머드축제를 개최한다. 대천을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며, 행정구역은 1읍 10면 5동이다.
보령시의 면적은 569.01 ㎢이며, 인구는 2012년 말을 기준으로 45,275 세대, 106,421 명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도심인 대천에 거주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만로국(삼한의 78개 부족국가형성기 · 삼국지한전 참고)이었으며, 삼국시대 때는 백제의 결기군 신촌현, 신라시대 웅진도독부(삼국사기 지리지명 참고)에 속한 13현중 산곤현이었다가 제30대 문무왕 6년 병인(666년)에 웅주도독부로 개칭하였다가 제35대 경덕왕 16년 정유(757년)에 웅주도독부로 개편하여 결성군 신읍현이 되였다.
고려시대에는 6대 성종14년 을미(995년)에 10도제 개편에 따라 하남도 웅주(현공주) 보령현, 8대 현종 9년 무오년(1018년)에 전국을 5도로 병합 통치할 때 양광도 운주(현홍성)보령현이었다.
조선시대 태종 13년 계사(1413년) 보령현이었으며, 17대 효종 3년 임진(1652년)에 도독부로 승격하여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임케 하다가, 17대 효종 6년 을미(1655년)에 보령현으로 강등되어 장척,금신,주포,목충,명암,청라동,오산외 청소의 8개면을 관할하였다.
26대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할 개편에 따라 보령군으로 개정 명암면을 우라면으로 오산외면을 오삼전면으로 고치고, 금신면을 오천군에 넘겨주었다.
1914년 갑인 일제강점기 초 부군 통폐합령에 의거 남포군의 군내,신안,북내, 웅천,고읍,불은,습의,북외,심전의 9개면, 오천군의 천동,하남,하서, 천북의 4개면과 결성군 가산면의 죽현,농현,감리,신리,마촌,점촌,6개리, 홍산군 상서면의 자명리를 병합하여 보령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주포면 신성리(현 보령리)에 위치하고 있던 군청을 대천면 대천리로 이전하여 대천,주포,오천,천북,청소,청라,남포,웅천,주산,미산면의 10개면 111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해방 후 1963년 계묘 1월 1일 법령 제1177호에 의하여 대천면을 대천읍으로 승격시켰으며,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보령군에서 분리 6개 행정동,10개 법정동에 67통 214개반을 관할하였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하였으며, 2013년 9월 23일 보령시 조례 제 906호에 의거 1읍 10개면 5개동 235리 114통 1,214개반으로 행정구역이 확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보령 성주사지 안내도
『 탐방한 보령시의 문화재들 』
●보령 충청수영성(保寧 忠淸水營城) 사적 제501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0호 충청수영 내삼문(忠淸水營 內三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 충청수영 장교청(忠淸水營 將校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2호 충청수영 진휼청(忠淸水營 賑恤廳)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 & 보령성곽(保寧城郭)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 보령성곽(保寧城郭)
●보령향교(保寧鄕校) 충청남도 기념물 제112호
●화암서원(化巖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 발굴조사 당시의 보령 성주사지 전경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 사적 제307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보물 제20호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聖住寺址石燈)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성주사지 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保寧 聖住寺址 石佛立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남포관아문(藍浦官衙門) & 남포읍성(藍浦邑城)
남포관아문<진서루.내삼문.외동헌>(藍浦官衙門<鎭西樓.內三門.外東軒>)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
남포읍성(藍浦邑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
【 일 정 표 】2015년 11월 19일(목)-20일(금) 1박2일
◈ 첫째날(11/19) : (보령)충청수영성-보령관아문&보령성곽-보령향교-화암서원-성주사지-남포관아문&남포읍성
◈ 둘째날(11/20) : 죽도관광지-무창포해수욕장-(태안)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 성주사지에서 발견된 받침돌들(사진 上)
발굴조사 때 발견된 기와 조각과 석재들(사진 下)
충청남도 보령시 여행은 첫째날은 역사·문화유적 탐방, 둘째날은 꿈과 낭만이 있는 서해안 바닷가를 찾는 코스로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둘째날 탐방을 한 무창포해수욕장 '신비의 바닷길'은 바닷길이 열리는 시간(매월 음력 그믐과 보름 사리때)을 사전에 조사해 보지를 않아 약 1.3km의 바닷길이 나타나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초겨울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하는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다.
둘째날 보령 여행이 아쉬움만 남겨, 일찍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을 다시 탐방을 하였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입상은 약 8년 5개월 전인 2007년06월23일 금북정맥 제18구간(백화산구간) 산행 때 한 차례 탐방을 하였지만, 당시는 정맥 종주산행 중이라 그냥 지나치 듯 짧은 시간을 할애하여 탐방을 하였으므로 다시 찾게 된 것이다.
보령시 여행에서 탐방한 관광 명소들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강원&충청권'에 보령 충청수영성, 보령관아문 & 보령성곽, 남포관아문 & 남포읍성, 그리고 보령향교 & 화암서원 등 4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고, 보령 성주사지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별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입상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강원&충청권'에 별도로 소개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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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 보령 충청수영성(保寧 忠淸水營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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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과 읍성! 남포관아문(藍浦官衙門) & 남포읍성(藍浦邑城)
-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 향교와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 보령향교(保寧鄕校) & 화암서원(化巖書院)
▲ 낭혜화상탑비 전각 앞에서 바라본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그리고 금당지
▲ 성주사 비 안내문
『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 소개 』
*사적 제307호(1984년08월13일 지정)
*수량/면적:29,757㎡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일대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聖住寺址)에 4기의 석탑 중 금당지 뒤로 3기의 동형 석탑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성주사지 석탑 중 5층석탑은 금당지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문, 석탑, 금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1탑1금당의 고식배치 체계이다. ‘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석가여래사리탑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당지 뒤쪽에 일렬로 배치된 3기의 석탑은 정광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상이 다층방탑형의 석탑으로 배치된 특이한 형태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성주사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들은 원위치가 아니고 14세기 이후에 옮겨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시굴조사 결과 석탑 3기가 있던 장소에서 적심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탑 하부에서 조선시대 자기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이후 탑을 이건한 것으로 생각된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가 보관된 전각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1962년12월20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번지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귀부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머릿돌(이수)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비문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석등
♧ ♧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9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높이 634cm로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 성주사지 오층석탑 기단부(사진 左)
상층기단 갑석 상면의 1층 탑신 받침(사진 右)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 성주사지 오층석탑 탑신부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 성주사지의 3탑 배열양식을 통해 본 한국 불교사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3탑 양식 가람! 문경 도천사지 』
-1970년 문경 도천사지서 통일신라 석탑 3기 발견, 도천사 탑지 조사 결과 창건 때부터 나란히 배치
-1탑 가람이 유행했던 삼국시대와 2탑식 가람이 성행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양식과 달리 3탑은 역사 기록에도 없어 새 가람양식 이해의 단초
▲ 김천 직지사로 옮겨진 3기의 도천사지 삼층석탑
1970년 1월13일자 한국일보에는 문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 3기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석탑들은 모두 무너져있으나 복원하면 8m가 넘는 국보급 석탑이라고 보도하였다. 바로 현재 김천 직지사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기의 석탑들이다.
▲ 3기의 도천사지 삼층석탑 발견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진
신문에 등장하고 4년 뒤 이 탑들은 직지사에 이전 복원되었으나 원래대로 3기가 같이 있지 못하고, 2기는 대웅전 앞에, 1기는 비로전 앞에 세워졌다. 3기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안내판에는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되어있다.
도천사지 삼층석탑은 동일 규모에 동일 양식으로 제작된 3기가 존재한 점은 우리나라 사찰 가람 내 석탑의 배치 및 구성 체계상 주목할 가치가 있다. 통상 1탑 가람이 유행했던 삼국시대와 2탑식 가람이 성행했던 통일신라시대와 달리 3탑 가람의 예는 없다. 다만 충청남도 보령군 소재의 성주사지(聖住寺址)에 4기의 석탑 중 금당지 뒤로 3기의 동형 석탑이 일렬로 배치된 예가 있다. 성주사지 석탑 중 5층석탑은 금당지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문, 석탑, 금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1탑1금당의 고식배치 체계이다. ‘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석가여래사리탑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당지 뒤쪽에 일렬로 배치된 3기의 석탑은 정광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상이 다층방탑형의 석탑으로 배치된 특이한 형태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성주사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들은 발굴 조사시 적심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탑 하부에서 조선시대 자기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이후 탑을 이건한 것으로 보여 원위치가 아니고 14세기 이후에 옮겨온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도천사지의 탑들은 모두 창건기에 조성된 것일까?
문경시에서는 도천사지가 자리잡고 있는 금천(錦川) 주변의 마을과 유적을 정비하여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우선 탑지에 대한 조사를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시굴조사 결과 석탑 3기가 있던 장소를 확정할 수 있었다. 지상의 탑은 모두 직지사로 옮겨져 아무런 흔적도 없었으나, 지하에서 탑을 세우기 위해 설치한 적심시설을 확인되어 도천사지는 명실공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3기의 거대한 석탑이 나란히 있었던 유일한 사지가 된 것이다.
▲ 발굴 당시 드러난 3기의 도천사지 삼층석탑 탑지와 적심시설
문경지역에 3탑 양식이 발견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현재는 김천 직지사에 옮겨져 있어 학술적으로 탑의 역사적 가치와 배경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지금까지 연구자가 없었던 이유도 도천사지삼층석탑이 3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3탑 가람의 존재를 좀 더 심도 있게 조사해 학술적, 불교사적 가치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 성주사지의 3탑 배열 」
성주사지(聖住寺址)에 4기의 석탑 중 금당지 뒤로 3기의 동형 석탑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석탑은 정광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상이 다층방탑형의 석탑으로 배치된 특이한 형태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성주사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들은 적심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탑 하부에서 조선시대 자기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이후 탑을 이건한 것으로 생각되며 원위치가 아니고 14세기 이후에 3기의 석탑이 모두 옮겨와 3탑 배열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 동 삼층석탑 옆에서 바라본 일렬로 배치된 3기의 삼층석탑(사진 上)
서 삼층석탑 옆에서 바라본 일렬로 배치된 3기의 삼층석탑(사진 下)
♧ ♧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보물 제20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 측면에서 바라본 탑(사진 下) 상단 기단의 새로 보수 교체한 석재가 눈에 들어 온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높이 4.1m의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기단부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1층 몸돌의 문비(사진 左)와 한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반대편 1층 몸돌(사진 右)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상층 기단 갑석 상면의 1층 탑신 받침(사진 左)
옥개석 층급 받침(사진 右)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다른 곳에서 옮겨온 석탑이다.
♧ ♧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보물 제47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높이 4.43m의 석탑으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어디에 처음 설치된 탑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의 기단부(사진 左)와 1층 몸돌의 문비(사진 右)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받침돌에 뚫어 둔 구멍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1973년12월24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4기의 석탑 중 하나이다.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것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위층 기단은 각각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과 탑신의 1층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을 끼웠으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1층 몸돌의 남 ·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한 쌍의 고리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기단부(사진 左)와 1층 몸돌의 문비(사진 右)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통일신라 후기 세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 ♧ 성주사지 석등(聖住寺址 石燈)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1974년09월01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앞에 놓여있는 높이 220cm의 8각 석등으로, 석탑 앞에 각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을 수리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형태는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하나의 돌로 다듬어 놓은 바닥돌과 받침의 아랫부분은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가운데기둥은 가늘고 긴 편이다. 윗받침돌은 맨아래의 받침을 거꾸로 놓은 듯 서로 대칭을 이룬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곳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 성주사지 석등의 기단부(사진 左)와 화사석(사진 右)
통일신라(統一新羅) 성주사(聖住寺) 창건기(創建期)에 세워진 신라양식(新羅樣式)의 석등(石燈)이다. 지붕돌에 비(比)해 등(燈)불을 두는 화사석(火舍石)과 받침 기둥이 가늘며 상륜부(上輪部)의 보주(寶珠)가 파손 되었으나 후면(後面)의 높은 오층탑(五層塔)과 비례(比例)가 맞아 조화감(造化感)을 주고 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쫓는 불교(佛敎)의, 공양(供養)으로 불탑(佛塔) 앞에 건립(建立) 하였다. 1971년 오층탑(五層塔) 해체수리(解體修理)때 주변에서 수습(收拾) 복원(復原)하였다.
♧ ♧ 성주사지 석계단(聖住寺址 石階段)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1984년05월17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주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 복원된 성주사지 석계단
현재 절터에는 건물의 주춧돌을 포함한 많은 석물이 남아 있는데, 이 석계단도 그 중의 하나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절내의 금당을 오르던 계단으로서, 원래는 양쪽 소맷돌에 사자상을 조각해 두었다고 하나 1986년에 도난당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도난 전 성주사지 석계단 원래의 모습
성주사 금당이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保寧 聖住寺址 石佛立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2000년09월20일 지정)
*소재지: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5번지
▲ 성주사지 석불입상의 측면(사진 左)과 후면(사진 右)
성주사지내 강당지 동편에 있는 석불입상으로 얼굴이 타원형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굴부위, 목부위, 가슴부위가 일부 훼손되어 있으며 지대석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시기에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며, 조성시기는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조각한 것으로 보여진다.
▲ 성주사지 석불입상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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