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경기 양주)묻혀있던 조선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지(檜巖寺址)

왕마구리 2016. 1. 3. 01:09

◀ 경기 양주 회암사지(陽州 檜巖寺址) ▶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최대 왕실사찰!

미래의 열정과 역사의 숨결이 공존하는 절터!!

 

                      ▲ 발굴조사중인 회암사지

 

『 양주 회암사지(陽州 檜巖寺址) 소개 』

*사적 제128호(1964년06월10일 지정)

*수량/면적:333,233㎡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번지 일원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 사신이 화암사를 들렀다는 기록이 있어서 12세기 후반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하였는데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하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때까지는 기록에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하므로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지금의 회암사에 대웅전·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이 있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 회암사지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사진 左)와 출토 유물인 전시된 회암사지 박물관(사진 右)

 

경기문화재연구원에 의해 1997년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제10차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화암사는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되며, 일반적인 사찰건축과는 달리 궁궐건축의 건물구조나 방식이 나타난다.

또한 왕실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용무늬기와, 봉황무늬기와, 청기와, 잡상 등의 기와류와 왕실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에서 제작된 도자류 등 당시 왕실과 불교문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 일 정 표 】2015년 08월 24일(월)

회암사지는 천보산과 칠봉산 산행 때 하산로로 내려선 적이 있었고, 몇차례 인근 지역을 지나치기만 했지 직접 방문하여 1977년 중건한 화암사 주변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을 찾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화암사지에 내려섰을 때에는 발굴조사를 하면서 출토된 문화재들을 가건물과 콘테이너 등에 임시 보관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박물관을 세워 보관, 전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암사지에서 출토된 문화재들을 전시해둔 화암사지박물관은 방문일이 월요일인 관계로 휴관이어서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 회암사지 전망대(사진 左)와 현재의 회암사로 올라가는 길(사진 下)

 

현재 발굴조사중이 회암사지에는 모습을 드러낸 건물지와 석축, 회암사지 가장 북쪽에 부도탑 1기, 그리고 당간지주, 남북으로 남아있는 맷돌 등이 있으며,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 등은 회암사지에서 북쪽으로 500여m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한 현재의 회암사 부근에 위치해 있다.

회암사지 발굴 현장을 가로 질러 회암사지 발굴 현장이 조망되는 회암사지 전망대를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회암사가 나타난다.

 

                      ▲ 선각왕사비가는 삼성각 앞 산길 입구와 선각왕사비로 오르는 돌계단길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1963년09월02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회암사(귀부),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불교중앙박물관(비신)

 

                      ▲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화재로 비가 파손되기 전의 원래 모습(출처:문화재청)

                      ▲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모조비

                         뒷편의 받침돌인 귀부만 남아있는 원래의 자리 앞에 원형을 본떠 만든 모조비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 몸돌은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받침돌인 귀부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전체 높이 315cm, 너비 106cm, 두께 22cm이며,

이수 부분의 높이는 82cm, 거북 받침돌 높이 71cm, 가로 171cm, 세로 222cm, 비석 받침 높이 16cm, 폭 124cm, 두께 50cm이다.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비, 무학대사탑 앞 석등, 그리고 무학대사탑

 

♧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塔)

*보물 제388호(1963.09.02 (1963년09월02일 지정)

*소재지: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회암사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指空), 나옹(懶翁)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탑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탑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기단부(사진 左)와 탑을 보호하는 난간석(사진 右)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옥개석의 용두 문양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탑은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 315cm, 너비 106cm, 두께 22cm이며, 이수 부분의 높이는 82cm, 거북받침의 높이는 16cm, 가로 124cm, 세로 222cm이며, 비석 받침 높이 16cm, 폭 124cm, 두깨 50cm이다.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그 앞의 석등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화사석의 창을 통해 본 무학대사탑

 

♧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塔 앞 雙獅子 石燈)

*보물 제389호(1963.09.02 (1963년09월02일 지정)

*소재지: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회암사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懶翁)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중간 받침돌인 쌍사자상(사진 上)

                        쌍사자상의 등 문양(사진 下)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화사석과 지붕돌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1974년09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회암사터에 세워져 있는 무학대사의 묘비로, 바로 뒷편에는 그의 묘탑(보물 제388호)이 함께 서 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조선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이고,무학은 그의 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이라는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 받들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指空禪師 浮屠 및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1974년09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회암사에 놓여 있는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다.

 

                     ▲ 회암사지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 회암사지 지공선사 부도(사진 左) 및 부도 앞 석등(사진 右)

 

회암사에 서 있는 이 부도는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많이 사용된 양식으로,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3단으로 올렸는데 그 중 가운데받침돌만 배가 볼록하다.

 

                     ▲ 회암사지 지공선사 부도 탑신과 지붕돌(사진 左) 및 기단부(사진 右)

 

아무런 장식이 없는 탑신(塔身)은 둥근 공모양이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이 두툼하며 처마의 각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머리장식들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 회암사지 지공선사 부도 앞 석등의 화사석(사진 左) 및 받침돌(사진 右)

 

석등은 모든 부재가 4각으로, 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에 등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은 앞뒷면 2곳에만 창을 내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운 것이다.

 

 

 

♧ 양주 회암사지 지공선사부도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2004년11월29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8-1

지공선사 부도 앞에 있는 이 부도비는 지공선사의 유래를 기록한 비이다.

 

 

원래의 부도비는 이색이 찬하고 한수가 글씨를 써서 우왕4년(1378)에 건립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부도비의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사무자오월 일립'으로 기록되어 있어 순조28년(1828)에 중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도비 옆에는 비의 귀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지공선사부도비의 귀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도비의 형태는 옥개석, 비신, 지대석의 구조이며, 규모는 옥개석이 140x78x50cm, 비신이 96.7x27.5x23.8cm, 비좌가 147.5x78.5x63cm, 지대석이 165x211x19cm로 총 높이는 370cm이다.

 

 

                     ▲ 회암사지 지공선사 부도비 앞 김삿갓 풍류길 입구(사진 上)

                         김삿갓 풍류길 이정표(사진 下)

 

지공선사 부도비 앞에는 회암사 숲길이 있으며, 김삿갓 풍류길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 회암사 숲길의 회암사약수터(사진 上)

                        회암사 숲길인 김삿갓 풍류길(사진 中)

                        회암사 숲길 입구(사진 下)

 

김삿갓 풍류길인 회암사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회암사약수터를 지나 회암사 진입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짧은 길이지만 약수터와 계곡이 일부 포함되어 있어 쉬어가기 안성맞춤인 길이다.

회암사 진입도로 회암사 숲길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이 길을 따라 회암사로 오르내리면 좋을 듯 하다.

 

♧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儺翁禪師 浮屠 및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1974년09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회암사 경내의 지공선사 부도 위쪽에 있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본명은 혜근이다.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렀고, 공민왕에게 설법을 하였다. 회암사의 주지가 된 후 절을 중창하였고, 우왕 2년(1376)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부도는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8각을 기본형으로,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3단을 이루는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은 배가 불룩한 북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조각없이 간결하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갔다. 지붕돌 위로는 하나의 돌로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 회암사지 나옹선사 부도(사진 左) 및 부도 앞 석등(사진 右)

 

석등은 4각을 기본형으로, 3단의 받침 위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화사석은 앞 ·뒷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처마는 느린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 회암사지 부도탑(檜岩寺址 浮屠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1974년09월26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1번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회암사터의 가장 북쪽에 서 있는 이 부도는 그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우 스님이나, 회암사 중창에 힘쓴 처안의 부도탑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상·중·하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에 휩싸인 말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고, 윗받침돌은 8부신장(八部神將)과 덩굴무늬로 장식한 후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윗받침돌과 둥근 탑신의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로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여러 머리장식들이 포개져 있다.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작품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화려함이 느껴져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회암사지 맷돌(檜岩寺址 맷돌)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호(1978년10월10일 지정)

*소재지: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1번지

회암사터에 남북으로 나란히 남아 있는 2기의 화강암 맷돌로, 곡식을 가는데 쓰이며, 위·아래 두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 회암사지 북쪽(사진 左)과 남쪽(사진 右) 맷돌

 

주둥이가 길어 타원형에 가까워서 주둥이가 짧았던 조선시대 맷돌과는 차이가 있다.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고,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아 놓은 모습 또한 특이하다.

맷돌의 정확한 제작년대는 알 수 없으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 회암사의 불전들 」

 

 

                     ▲ 회암사 대웅전의 삼존불(사진 上左)과 내부 전경(사진 上右)

                        회암사 대웅전(사진 下)

                     ▲ 회암사 관음전(사진 左)과 삼성각(사진 上)

 

♧ 양주 회암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6호

회암사 경내 조사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50.2cm의 불상이다.

 

 

불상은 약간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로 얼굴과 신체의 비례가 알맞은 편이다. 오른손과 윈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다.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하여 1755년 3월 청평 용흥사 상선암에 봉안하기 위해 상정, 유순, 우학, 칭숙 등의 조갃ㅇ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양주 회암사 목조여래좌상은 제작년대와 제작자 등을 알 수 있고, 보전상태가 좋아 조선 후기 불교조각 연구에 기준작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보문화재이다.

복장물은 2종의 분철된 '묘법연화경'과 다라니, 황초복자에 쌓인 후렴통 등이다.

 

                     ▲ 회암사 조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