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경남 창녕)신라 8대 사찰 중의 하나!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왕마구리 2016. 1. 27. 13:37

◀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 ▶

신라 8대 사찰중의 하나!

 

「 경남 창녕(慶南 昌寧) 소개 」

창녕군은 경상남도 중앙 북단에 위치하며 북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상북도 고령군과 인접하고, 동쪽은 산악을 경계로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의 밀양시가 접해 있으며, 서남은 낙동강을 사이로 합천군, 의령군, 함안군, 창원시에 접하고 있습니다.

동단은 부곡면 동경 128도 39분, 서단은 이방면 동경 128도 21분으로 동서의 길이는 약 27.36km이며, 남단은 부곡면 북위 35도 22분이며 북단은 성산면 북위 35도 40분으로 남북 길이는 약 34.39km 이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나 평균기온이 여름에는 23.9℃이고, 겨울에는 영하1.2℃정도로서 한서의 차이가 심하며, 하기에는 한발과 수해가 자주있는 지역이다.

창녕군의 군 소재지인 창녕읍은 창녕군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 밀양시 무안면과 북으로 고암면, 서부에는 대지, 유어면과 남부는 계성면과 접하고 있다. 동부산악은 화왕산을 위시한 산악지대이고 서부는 평야 지대로 고온다습한 기후로 수도작을 위주로 양파, 마늘, 고추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당일 등산코스로 최적의 주변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화왕산은 봄, 가을 주말과 화왕산 갈대제가 개최되는 10월에 전국에서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으며 정상의 분지 지형의 억새 군락지와 가야시대때 축조한 화왕산성이 있으며 최근에는 MBC에서 방영되는 창사특집드라마 허준의 촬영세트장이 있어 추후로 좋은 관광자원이 될것으로 보인다

창녕읍의 특산물은 마늘과 양파가 유명하며, 옥천리 일대에서 채취되는 자연송이는 그 맛과 향이 특이하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비사벌의 얼이 숨쉬는 문화의 고장인 창녕읍의 화왕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로 유명하며 교동 고분군에 위치한 창녕박물관에는 많은 문화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현재 창녕읍에 문화재 현황은 국보2점 보물8점 사적4점 중요민속자료2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5점등 총 27점의 문화재가 있다.

 

                      ▲ 관룡산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자리한 관룡사

 

대표적인 남방식 지석묘인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 부곡면 온정리의 고인돌과 고분, 도천면 일리와 영산면 신제리의 지석묘, 계성면 사리의 사은암 등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우리군에 인류가 취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으로는 1세기 전후, 「삼국지」 변진 24국의 소개에 나타나있는 불사국이 창녕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가야시대에는 불사국(不斯國) 또는 비화가야(非火伽倻)로 존립하여 오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되어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이라 하였다.  영남의 중추인 낙동강을 자양으로 번성하여온 창녕군은 초기국가이던 옛 가야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서부터 나뉘어져 있던 여러 현이 합하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신라진흥왕 16년(555) 에 하주(下州)의 치소(治所)를 두고 군대 주둔지인 정(停)을 두었다가 同王 26년(565)에 폐지하고, 경덕왕 16년(757)에 화왕군(火王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 영산현은 본래 서화현(西火縣)이라 불렀으나 상약(尙藥)으로 고쳐서 밀양군의 현(縣)으로 되었다.

계성은 본래 신라 때 읍을 설치하였는데 옛이름은 알 수 없고, 경덕왕 16년에 계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때에 이르러 태조 23년(940) 3월 화왕군(火王郡)을 지금의 이름인 창녕(昌寧)으로 고쳤다. 그후 현종이 밀성군에 소속시켰으며, 明宗2年(1172年) 감무(監務)를 두었다. 역시 영산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밀성군에 소속시켰는데. 원종 15년(1274)에 감무를 두었다.

또 계성은 현종 9년(1018)에 밀성군에 속했다가 공민왕 15년(1366)에 영산현에 속하였으나 곧 공양왕 2년(1390)에 다시 밀성에 속하게 되는 등 변화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1394) 창녕과 영산에 현감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 9년(1631)에 창녕현은 지도(至道)의 역변(逆變)으로 인하여 현이 혁파되고 강등되어 영산현에 합하여 소속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6년후 어영군(御營軍)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인조 15년(1637)에 복현(復縣)되어 다시 창녕과 영산 양현으로 나누어 졌다.

고종 32년(1895) 5월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의 실시로 본 군은 밀양과 함께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1896) 8월 4일 13도제(道制)가 실시되자 창녕·영산군은 대구부에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고종 34년(1897) 행정의 말단조직인 방(坊)이 면(面)으로 개칭되었으며, 순종 융희원년(隆熙元年)에 통폐합을 거쳐 1910년 9월 면제(面制)가 시행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군폐치분합(府郡廢置分合)에 따라 함안군에 편입된 길곡면의 사촌(射村)·금곡리 일부(지금의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일대)를 제외한 영산군은 창녕군에 합병, 오늘에 이르고 있다. 2개군의 합병으로 창녕, 고암, 성산, 대합, 이방, 대지, 유어, 창락, 영산, 계성, 남곡, 길곡, 부곡, 도천, 장마 등 15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55년 7월 1일 창락면이 창녕면에 편입되어 14개 면으로 되었다.

1960년 1월 1일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3년후인 1963년 1월 1일에는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하게 되어 본군은 2읍 12면이 되었다.

1971년 2월 13일 창녕군조례 제175호로 남지읍 고곡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2읍 12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98년 9월 10일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되었고, 현재 139개 법정리에 285개의 행정리가 있다.

 

                      ▲ 관룡사 돌담문

 

『 탐방한 창녕군의 문화재들 』

●창녕읍내 문화재들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국보 제34호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보물 제75호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227호 창녕 인양사 조성비(昌寧 仁陽寺 造成碑)

보물 제310호 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

보물 제520호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西 三層石塔)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 창녕 술정리 하씨초가(昌寧 述亭里 河氏 草家)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퇴천 삼층석탑(兎川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창녕객사(昌寧客舍)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창녕향교(昌寧鄕校)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

●관룡사(觀龍寺) 

보물 제146호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

보물 제212호 창녕 관룡사 대웅전(昌寧 觀龍寺 大雄殿)

보물 제519호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95호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730호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昌寧 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臺座)

보물 제1816호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 觀龍寺 大雄殿 觀音菩薩壁畵)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6호 창녕 관룡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昌寧 觀龍寺 冥府殿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 관룡사석장승(觀龍寺石長丞)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관룡사부도(觀龍寺浮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관룡사 원음각(觀龍寺 圓音閣)

●창녕 영산면 문화재

보물 제564호 창녕 영산 만년교(昌寧 靈山 萬年橋)

보물 제1739호 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창녕 우포늪 천연보호구역 천연기념물 제524호

 

【 일 정 표 】2015년 12월 30일(수)-2016년 01월 01일(금) 2박3일

                             ◈ 첫째날(12/30) : 우포늪 천연보호구역-창녕 석빙고-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만옥정공원 내 문화재들(창녕객사,퇴천 삼층석탑 및 창녕 척화비)

                             ◈ 둘째날(12/31) : 관룡산&구룡산 산행-관룡사

                             ◈ 세째날(01/01) : 창녕읍내 문화재들(술정리 서 삼층석탑-술정리 동 삼층석탑-하씨초가-인양사 조성비-창녕향교-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송현동 마애여래좌상)-영산 만년교-영산 석빙고

 

                      ▲ 주차장에서 바라본 관룡사

 

경남 창녕군은 2007년04월29일(일) 부천마구리산악회 회원 35명을 인솔하여 관룡산~화왕산 연계 산행을 위해 방문한지 약 8년8개월여 만에  창녕지역의 문화재 탐방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2015년을 마무리하는 12월31일 송년산행을 2007년04월29일 산행하였던 관룡산을 택하여, 당시 산행코스였던 '관룡사~청룡암~구룡삼거리~관룡산~화왕산' 코스에서 산행들머리는 같지만 산행코스를 '관룡사~노단이마을 능선갈림길~병풍바위 암릉길~구룡산~구룡삼거리~관룡산~용선대~관룡사'로 달리하여 실시하고 관룡사 문화재를 탐방하는 일정과 우포늪 쳔연보호구역 '우포생태길' 탐방 일정이 추가되어 다른 지역과는 달리 2박3일로 실시가 되었다.

창녕에서의 탐방 명소 소개는 관룡산&구룡산 산행은 일반산행 '영남&호남권'에 산행기를,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관룡사의 문화재들을,

그리고 내가 찾은 관광명소 '영남권'에 창녕 석빙고와 창녕 영산 석빙고,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만옥정공원 내 문화재들(창녕객사, 퇴천 삼층석탑, 척화비), 창녕읍내 두 기의 통일신라 석탑(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서 삼층석탑), 창녕읍내의 문화재들(인왕사 조성비, 창녕향교, 하씨초가,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5~6세기 대형 고분군인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국내 최대의 자연늪이며 람사르협약 등록습지인 우포 늪 천연보호구역, 그리고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창녕 영산 만년교 등 총 9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창녕 석빙고와 창녕 영산 석빙고를 소개할 때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나머지 석빙고(4개소:2008년6월과 2013년5월 방문한 경주 석빙고, 2013년7월 방문한 안동 석빙고, 2013년11월 방문한 청도 석빙고, 그리고 달성 현풍 석빙고)들도 간략하게 함께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신라 8대 사찰 중의 하나!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와 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 신라 진흥왕이 순시하여 세운 기념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와 만옥정공원내 문화재들(창녕객사,퇴천 삼층석탑,창녕 척화비)

- 창녕읍내 두 기의 통일신라 석탑!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과 술정리 서 삼층석탑(述亭里 西 三層石塔)

- 창녕읍내의 문화재들!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창녕 인양사 조성비(昌寧 仁陽寺 造成碑),술정리 하씨초가(述亭里 河氏 草家),창녕향교(昌寧鄕校)

- 5~6세기 대형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 국내 최대의 자연늪! 창녕 우포늪 자연보호구역

-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창녕 영산 만년교(昌寧 靈山 萬年橋)

 

『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소개 』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산(觀龍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며, 349년 창건되었다고 하며 관룡산은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치 좋은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의 창건설화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에 전해졌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그 뒤 진평왕 5년(583) 증법(證法)이 중창하였는데, 보통 이를 창건으로 삼기도 한다.

삼국통일 뒤에는 원효(元曉)가 1,000명의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대도량을 이룩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7년(748)추담(秋潭)이 중건하였고, 태종 1년(1401)에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광해군 9년(1617)에 중창하였으며, 숙종 30년(1704) 가을의 대홍수로 금당(金堂)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여 인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뒤, 1712년에 대웅전과 기타 당우들을 재건하였다. 그 뒤 영조 25년(1749)의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룡사 입구에는 고려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주도한 신돈(辛旽 ? ~ 1371년)이 출가한 사찰인 옥천사지(玉泉寺址)가 있으며, 또 신돈이 태어났다는 일미사지(一味寺址)가 있다. 주변의 깊은 옥천계곡은 많은 피서객이 찾아온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2호로 지정된 대웅전,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 보물 제519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1730호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 보물 제1816호인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약사전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인 관룡사사적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6호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인 석장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인 부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된 원음각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약사전은 임진왜란 때 전화를 면한 관룡사 유일의 건물로서, 부석사 조사당·송광사 국사전과 함께 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이 약사전 안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약사전 앞에 있는 높이 2m의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4면에 각각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작품이다.

절의 서쪽 계곡 500m 위의 용선대(龍船臺)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불로서, 산 정상에 안치된 드문 예이다. 관룡사 입구 좌우에 마주보고 선 높이 약 2m의 석장주(石將柱) 2주는 자연석에 남녀상을 새겼는데, 관룡사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石標)의 구실도 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옥천저수지 아래에 청련암(靑蓮庵)과 삼성암(三聖庵)이 있고, 관룡사 아래에 극락암, 화왕산 자하골에 도성암(道成庵)이 있다.

 

                      ▲ 관룡사 약사전과 약사전 앞 삼층석탑

 

♧ ♧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

*보물 제146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임진왜란 때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건물 안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매우 작은 불당이다.

 

                      ▲ 약사전 내부 동편 벽화(사진 左)와 내부 가구(사진 右)

                      ▲ 약사전 동편 외벽과 가구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약사전 내 석조여래좌상과 약사전 내부 서편 벽화


♧ ♧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519호(1970년06월24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였던 관룡사의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표현기법에 있어 절의 서쪽 계곡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큼직하게 표현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머리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 있어야 할 3개의 주름은 가슴 윗부분에 표현되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겉옷 안에는 두 가닥의 접힌 옷자락이 역시 도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손은 왼발 위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 있는 독특한 손모양이며 왼손 위에는 약그릇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연속된 거북이 등모양으로 연꽃을 표현하고 있는 상대가 특이하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과 형식화된 세부표현 기법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고려시대에 이 지방의 장인이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 ♧ 창녕 관룡사 창녕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昌寧 觀龍寺 藥師殿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1972년02월12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관룡사 약사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다.

 

 

관룡사는 구룡산 중턱에 자리한 절로, 많은 문화재를 전하고 있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절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다.

석탑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했고, 가운데기둥 양 옆으로 얇고 넓직하게 안상(眼象)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1층 지붕돌이 파손이 심한 편이며,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간략화되었다.

규모도 작아졌고, 각 부분의 양식이 간략해진 모습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 ♧ 창녕 관룡사 대웅전(昌寧 觀龍寺 大雄殿)

*보물 제212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관룡사는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경치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 대웅전 내부(사진 左)와 외부 귀공포(사진 右)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

 

                      ▲ 대웅전 내부와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昌寧 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臺座)

*보물 제1730호(2011년12월23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

 

경상남도 창녕군 관룡사의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崇禎) 2년, 1629년(인조 7) 기사(己巳) 10월에 불상조성을 시작해서 그 다음해(1630년)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는 현진(玄眞),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등 8인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의 대표 격인 현진(玄眞)은 17세기 초에 경남 함양 상령대보살상, 전라남도 구례 천은사의 목조보살상, 충청남도 보은 법주사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상은 비교적 현진의 말년에 제작한 상이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조성년대를 알려주는 본존불 대좌 밑의 묵서

 

본존 석가여래불좌상은 높이가 150cm로 비교적 큰상에 속하며 양쪽의 불상들은 본존보다 크기가 작게 120cm정도의 크기이다. 불상들은 얼굴형이 네모나고 코가 유난히 높고 크며 입과 턱 사이의 간격이 좁은 편이어서 상의 인상이 약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이다. 또한 불상의 옷주름 처리가 단순하고 넓은 면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부분의 폭이 짧은 편으로 불상의 안정감과 위엄스러움이 약간 쇠퇴되었다.

조각승 현진의 초기불상에서 보이던 예쁘장함은 사라지고 대형의 법주사에서 보이던 엄숙한 표정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천진스러운 모습에서 현진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각승 승일과는 처음으로 같이 제작하였으며 승일이 제작한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석가여래삼불상, 경상남도 하동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조상과 같은 상에서 그 양식적 계승의 특징이 보인다. 17세기 전반의 불교조각으로 불상양식이나 조각승들의 사승(師承) 관계와 양식의 계보를 잘 알려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세 불상자체가 보여주는 종교적인 무게감으로도 중요하여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여야 하다고 본다.

 

                      ▲ 대웅전 내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모셔진 수미단 벽 후면에 그려진 관음보살 벽화


 

♧ ♧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 觀龍寺 大雄殿 觀音菩薩壁畵)

*보물 제1816호(2014년03월11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觀龍寺大雄殿觀音菩薩壁畵)’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서 설법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선재동재(善財童子)가 방문하여 법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벽면 전체에 관음보살을 채워 크게 부각시켜 그렸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보채(補彩)가 이루어졌지만 좌우로 넓게 퍼진 보관과 영락장식, 옅은 수묵으로 그린 기암괴석과 대나무 표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의 모습, 유희좌(遊戱座)로 단정하게 앉은 보살의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얼굴 표현에 보이는 강한 음영은 보채가 이루어지면서 다소 강렬하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불화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영락으로 장식된 쌍개머리를 하고 상의에 천의를 걸치고, 백색 바지 위에 적색 치마를 입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모습, 관음보살의 주처(主處) 보타락가산을 표현하면서도 특징적인 물가 표현을 하지 않은 것 등은 다른 후불벽 관음보살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 세상을 굽어 보는 듯 높게 자리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사진 上)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용선대로 오르는 입구(사진 下)

 

♧ ♧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95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8번지, 관룡사

 

                      ▲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관룡사 근처의 용선대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산 꼭대기 높은 바위 위에 모셔졌으며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원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약간 위축된 모습이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앉은 자세에서는 다소 둔중함이 느껴진다.

 

 

                      ▲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사진 上)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좌대(사진 下)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양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 도식적인 옷주름선, 8각 연꽃무늬 대좌의 형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 ♧ 창녕 관룡사 사적기(昌寧 觀龍寺 事蹟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1979년12월29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신라시대 때 관룡사(觀龍寺)를 건립하면서 관룡사의 유래(由來)와 재산(財産) 등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길이 보존케하고자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룡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 관룡사의 내력을 전해주는 기록으로 발간용 목판(木板) 11개와 서적 1권이 전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사적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조9년(1733)에 신유한이 작성한 본문과 산인 명학이 이듬해에 쓴 발문, 사찰 내 각 전각과 부속 암자에 보관된 경전과 기물의 목록 등이 나열된 부록이 그것이다.

사적기에는 신라시대에 관룡사를 건립하게 된 유래와 연혁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절의 중수와 그 공사를 맡은 주지의 이름, 공사에 들어간 비용 등까지 적혀있어 관룡사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적기의 저자도 후손에게 관룡사의 역사를 전해주려고 이 사적기를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 ♧ 창녕 관룡사 석장승(昌寧 觀龍寺 石長丞)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1983년08월12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로 가는 오솔길 양쪽에 서 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다.

 

 

사찰 입구에 두는 장승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남장승은 높이 220㎝ 둘레 70㎝의 크기로,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다. 툭 튀어 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이하며, 콧잔등에는 두 개의 주름을 새겨 놓았고,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다. 오른쪽의 여장승은 높이 250㎝, 둘레 80㎝로, 사다리꼴 모양의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다.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다. 두 장승 모두 몸체에는 아무런 글귀가 없으며, 육중한 몸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언제 만들어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신앙물로 민간의 소박한 미의식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 창녕 관룡사 부도(昌寧 觀龍寺 浮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1983년07월20일 지정)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번지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이 부도는 관룡사 내에 있는 7기의 부도 중 하나로 높이는 2.05m이며, 절 북쪽의 화왕산으로 오르는 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2단의 바닥돌 위로, 아래·가운데·위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쌓고,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사각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아래에 비해 윗부분의 몸집이 더 커 보인다. 아래 받침돌은 옆면마다 두 개의 공간을 만들어 무늬를 넣고,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가운데 받침돌 역시 조각을 두었으나 무늬가 뚜렷치 않고, 윗받침돌 밑면에 새긴 연꽃무늬 역시 많이 닳아있는 상태이다.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있었을 듯 하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부도의 구조와 조각솜씨들로 보아 고려시대 말이나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많이 닳아있긴 하나, 창녕군의 대표적인 부도라 할 만큼 아름답고 정교한 작품이다.

♧ ♧ 창녕 관룡사 원음각(昌寧 觀龍寺 圓音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소재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옥천리)

인조12년(1634)에 건립된 사원의 누각이다.

 

 

 

건물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39년(1763)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숙종30녀(1704) 대홍수 때 산사태로 훼손된 것을 고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들보 5량으로 조성된 이익공계 건물이다. 우물마루로 되어 있는 바닥은 대웅전 앞마당과 높이가 같아 마당에서 출입하기가 매우 쉽다. 불구를 보관하거나 설법을 하는 장소로 쓰였다. 예전에는 누각 아래 중앙 칸을 거쳐 대웅전 마당으로 출입하였으나, 지금은 아래 기둥 사이를 벽으로 막아 스님들의 공부 방으로 쓴다.

 

[ 관룡사의 전각들 〕

 

                      ▲ 관룡사 응진전(사진 上左)과 칠성각(사진 上右)

                         일주문(사진 下)

 

                      ▲ 관룡사 범종각(사진 上)

                         범종각의 호랑이상 받침대의 홍고와 범종(사진 下)

 

                      ▲ 관룡사 명부전(사진 上)

                         명부전 내부(사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