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
-Ⅰ편- 이건된 4기의 신라시대 고탑들
김천 직지사는 2008년 10월 06일 부속 암자인 은선암, 명적남, 백련암 등과 함께 탐방을 한 적이 있어, 약 7년여만에 다시 탐방을 하게 되었다.
이번 탐방에서는 직지사와 청암사, 그리고 청암사의 부속 암자인 수도암, 직지사에서 청암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모성정과 방초정 등 정자 두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직지사에서 탐방한 경내의 불전 및 당우와 문화재 등은 3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게 되는데,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된 문화재들은 동계 기간 3개월은 성보박물관이 휴관을 하여 관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들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하여 함께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청암사와 청암사 수도암 등 2곳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방초정은 '영남권'에 각각 소개를 하기로 한다.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Ⅰ편- 이건된 4기의 신라시대 고탑들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Ⅱ편- 현존하는 불전과 불전 내 문화재들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Ⅲ편- 성보박물관의 문화재들
【 일 정 표 】2016년 1월 12일(화)
◈ 직지사-모성정-방초정-청암사 수도암-청암사
▲ 대웅전 앞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소개 』
백두대간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 (전)구미 장락사지 삼층석탑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직지사의 문화재들 』
- 국보 제208호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桃李寺 世尊舍利塔 金銅舍利器)
- 보물 제11-2호 사인비구 제작 동종-문경 김룡사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聞慶 金龍寺 銅鍾)
- 보물 제319호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金泉 直指寺 石造藥師如來坐像)
- 보물 제606호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 보물 제607호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670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直指寺 大雄殿 三尊佛幀畵)
- 보물 제1141호 예천 한천사 금동 자물쇠 및 쇠북(醴泉 寒天寺 金銅鎖金 및 金鼓)
- 보물 제1186호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傳 龜尾 江洛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1241호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禮念彌陀道場懺法 卷六~十)
- 보물 제1303호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白紙金泥金剛 및 普門發願)
- 보물 제1306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제1576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金泉 直指寺 大雄殿)
- 보물 제1859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金泉 直指寺 大雄殿 須彌壇)
-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직지사 석조 나한좌상(直指寺 石造 羅漢坐像)
직지사 경내에는 국내 유일의 3탑 양식의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 온 3층 석탑 3기와 (전)구미 강락사지에서 옮겨 온 삼층석탑 등 총 4기의 석탑이 이건되어 있다.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606호)은 대웅전 앞,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보물 제607호)는 비로전 앞 뜰에 이건되어 있으며, (전)구미 장락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은 성보박물관 뒷 뜰에 이건되어 있다.
♧ ♧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606호(1976년11월30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운수리)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동탑(사진 上)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서탑(사진 下)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여진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 ♧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607호(1976년11월30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운수리)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이다. 1974년 대웅전 앞 3층석탑 2기(보물 제606호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와 함께 경상북도 문경 웅창마을 북방 금강가의 옛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상륜부(사진 上)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몸돌과 기단부(사진 下)
바닥돌은 넓적하게 짜여져 있으며, 그 위로 여러 장의 석재를 조성한 2단의 높직한 괴임을 두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몇 개의 널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한 편으로 밑면의 받침을 5단씩 두었고, 날카롭게 들린 네 귀퉁이로 인해 경쾌함이 느껴진다.
탑신의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매우 높으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한 세련된 모습으로,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 한국 불교사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3탑 양식 가람! 문경 도천사지 』
-1970년 문경 도천사지서 통일신라 석탑 3기 발견, 도천사 탑지 조사 결과 창건 때부터 나란히 배치
-1탑 가람이 유행했던 삼국시대와 2탑식 가람이 성행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양식과 달리 3탑은 역사 기록에도 없어 새 가람양식 이해의 단초
▲ 문경 도천사지 석탑 발견 사진(사진 左)과 당시의 신문기사(사진 右)
1970년 1월13일자 한국일보에는 문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 3기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석탑들은 모두 무너져있으나 복원하면 8m가 넘는 국보급 석탑이라고 보도하였다. 바로 현재 김천 직지사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기의 석탑들이다.
신문에 등장하고 4년 뒤 이 탑들은 직지사에 이전 복원되었으나 원래대로 3기가 같이 있지 못하고, 2기는 대웅전 앞에, 1기는 비로전 앞에 세워졌다. 3기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안내판에는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되어있다.
도천사지 삼층석탑은 동일 규모에 동일 양식으로 제작된 3기가 존재한 점은 우리나라 사찰 가람 내 석탑의 배치 및 구성 체계상 주목할 가치가 있다. 통상 1탑 가람이 유행했던 삼국시대와 2탑식 가람이 성행했던 통일신라시대와 달리 3탑 가람의 예는 없다. 다만 충청남도 보령군 소재의 성주사지(聖住寺址)에 4기의 석탑 중 금당지 뒤로 3기의 동형 석탑이 일렬로 배치된 예가 있다. 성주사지 석탑 중 5층석탑은 금당지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문, 석탑, 금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1탑1금당의 고식배치 체계이다. ‘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석가여래사리탑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당지 뒤쪽에 일렬로 배치된 3기의 석탑은 정광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상이 다층방탑형의 석탑으로 배치된 특이한 형태라는 견해가 있다.
▲ 문경 도천사지 석탑지
그런데 성주사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들은 발굴 조사시 적심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고, 탑 하부에서 조선시대 자기가 발견되어 조선시대 이후 탑을 이건한 것으로 보여 원위치가 아니고 14세기 이후에 옮겨온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도천사지의 탑들은 모두 창건기에 조성된 것일까?
문경시에서는 도천사지가 자리잡고 있는 금천(錦川) 주변의 마을과 유적을 정비하여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우선 탑지에 대한 조사를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시굴조사 결과 석탑 3기가 있던 장소를 확정할 수 있었다. 지상의 탑은 모두 직지사로 옮겨져 아무런 흔적도 없었으나, 지하에서 탑을 세우기 위해 설치한 적심시설을 확인되어 도천사지는 명실공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3기의 거대한 석탑이 나란히 있었던 유일한 사지가 된 것이다.
문경지역에 3탑 양식이 발견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현재는 김천 직지사에 옮겨져 있어 학술적으로 탑의 역사적 가치와 배경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지금까지 연구자가 없었던 이유도 도천사지삼층석탑이 3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3탑 가람의 존재를 좀 더 심도 있게 조사해 학술적, 불교사적 가치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 ♧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傳 龜尾 江洛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1186호(1993년11월19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운수리)
강락사라고 전해지는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을 탑신(塔身)을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이다.
▲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기단 갑석 위 탑신 괴임(사진 左)
기단부 전체(사진 右)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한 돌로 짜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각 층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였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년 탑을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각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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