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경북 김천)직지사(直指寺) -Ⅲ편- 성보박물관의 문화재들

왕마구리 2016. 4. 8. 22:09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

-Ⅲ편- 성보박물관의 문화재들

 

김천 직지사는 2008년 10월 06일 부속 암자인 은선암, 명적남, 백련암 등과 함께 탐방을 한 적이 있어, 약 7년여만에 다시 탐방을 하게 되었다.

이번 탐방에서는 직지사와 청암사, 그리고 청암사의 부속 암자인 수도암, 직지사에서 청암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모성정과 방초정 등 정자 두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직지사에서 탐방한 경내의 불전 및 당우와 문화재 등은 3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게 되는데,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된 문화재들은 동계 기간 3개월은 성보박물관이 휴관을 하여 관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들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하여 함께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청암사와 청암사 수도암 등 2곳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방초정은 '영남권'에 각각 소개를 하기로 한다.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Ⅰ편- 이건된 4기의 신라시대 고탑들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Ⅱ편- 현존하는 불전과 불전 내 문화재들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Ⅲ편- 성보박물관의 문화재들

 

【 일 정 표 】2016년 1월 12일(화)

                             ◈ 직지사-모성정-방초정-청암사 수도암-청암사

 

                      ▲ 직지사 성보박물관인 청풍료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소개 』

백두대간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 성보박물관 앞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

 

직지사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 성보박물관 앞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성보박물관 야외 전시물인 쌍계사터 동종(사진 上)

                         목조 수조(사진 下)

 

『 직지사의 문화재들 』

- 국보 제208호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桃李寺 世尊舍利塔 金銅舍利器)

- 보물 제11-2호 사인비구 제작 동종-문경 김룡사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聞慶 金龍寺 銅鍾)

- 보물 제319호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金泉 直指寺 石造藥師如來坐像)

- 보물 제606호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 보물 제607호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670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直指寺 大雄殿 三尊佛幀畵)

- 보물 제1141호 예천 한천사 금동 자물쇠 및 쇠북(醴泉 寒天寺 金銅鎖金 및 金鼓)

- 보물 제1186호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傳 龜尾 江洛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1241호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禮念彌陀道場懺法 卷六~十)

- 보물 제1303호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白紙金泥金剛 및 普門發願)

- 보물 제1306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제1576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金泉 直指寺 大雄殿)

- 보물 제1859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金泉 直指寺 大雄殿 須彌壇)

-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직지사 석조 나한좌상(直指寺 石造 羅漢坐像)

 

♧ ♧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桃李寺 世尊舍利塔 金銅舍利器)

*국보 제208호(1982년12월07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89(운수리) 직지사 성보박물관

 

                  ▲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사진 左)와 금동 사리기 지붕 꼭대기의 연꽃 장식(사진 右)

 

경상북도 선산군 도리사에 있는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안에서 발견된 육각의 사리함이다.

사리함은 높이 17㎝로 기단, 탑몸,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면에 도금이 잘 남아 있다. 평면 육각형으로 각 면의 기단에 안상을 뚫었다. 2면의 탑몸에는 불자(拂子)와 금강저를 든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상을 선과 점으로 새겼다. 남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선으로 새겼다. 이들의 배치는 사천왕상 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상을 배치하여, 다문천이 정면이 되게 한 듯 보인다.

지붕 처마와 추녀에는 고리가 있어 장식을 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그 중심에 꼭지만 남아 있어 원래 꽃봉오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이 유행하던 시기에 6각형의 사리함이 나타났다는 점이 특이하며, 시대를 달리하는 종 모양 부도에 안치되었던 것도 특이하다 하겠다.

 

♧ ♧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金泉 直指寺 石造藥師如來坐像)

*보물 제319호(1963년01월21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89(운수리) 

 

 

직지사에 모셔져 있으며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불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세부표현을 자세히 살필 수 없지만, 둥글고 원만한 인상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옷에는 평행 계단식의 무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머리 부분(사진 左)과 항마촉지인상(사진 右)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를 들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가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온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폭이 넓어 맵시있는 모양은 아니지만 덩쿨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


♧ ♧ 사인비구 제작 동종-문경 김룡사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聞慶 金龍寺 銅鍾)

*보물 제11-2호(2000년02월15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89(운수리) 직지사 성보박물관 

 

                  ▲ 문경 김룡사 동종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조선 후기의 종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같은 해 만들어진 홍천 수타사동종(보물 제11-3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이 종은 수타산의 종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사인비구의 작품세계와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예천 한천사 금동 자물쇠 및 쇠북(醴泉 寒天寺 金銅鎖金 및 金鼓)

*보물 제1141호(1992년07월28일 지정)

*수량:일괄(4점 : 자물쇠3, 반자1)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89(운수리) 직지사 성보박물관  

이 유물들은 1989. 1. 15 한천사경내 정비 작업중 발견된 유물로 금동 자물쇠 3점과 청동 반자가 발견되었다.

1) 금동 자물쇠

 

                  ▲ 한천사 출토 금동자물쇠(앞·뒷면)

 

① 길이 30.2㎝, 폭 12.6㎝의 자물쇠는 몸체의 양 끝쪽에 덩굴무늬를 뚫어서 정교하게 만들었고, 열쇠구멍은 왼쪽부분에 설치되어 있다. 걸림쇠는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언뜻 보기에 금동비녀처럼 보인다.

② 길이 18.2㎝, 폭 4.3㎝의 자물쇠는 몸체 양 끝쪽에 덩굴무늬가 있지만, 뚫어서 만들지는 않았다. 걸림쇠는 ①번과 동일하다.

③ 길이 17.5㎝, 폭 4.4㎝의 자물쇠는 몸체 좌우 끝의 덩굴무늬들이 전체적으로 ①번과 동일하다.

이 자물쇠는 고려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매우 희귀하며, 문양이 아름답고 출토지가 분명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 청동 반자

 

                  ▲ 한천사 출토 청동반자(앞·뒷면)

 

반자란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일종의 타악기이다. 고려 반자의 일반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이 반자는 직경 39㎝, 입지름 22.5㎝로 입 부분에 약식화된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3개의 고리가 있어 달도록 되어 있으나 현재 1개는 없어 졌다.


♧ ♧ 김천 직지사 석조나한좌상(金泉 直指寺 石造羅漢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1997년09월29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89(운수리) 직지사 성보박물관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나한좌상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높이 45㎝, 무릎 폭 28㎝의 아담한 크기로, 본래 서운선사의 원불(願佛)로 전해진다.

호랑이를 어르는 모습에서 당당한 기품과 사실적인 표현기법이 돋보인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문화의 절정기인 인종(재위 1123∼1146), 의종(재위 1147∼1170)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