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경북 김천)직지사(直指寺) -Ⅱ편- 현존하는 불전과 불전 내 문화재들

왕마구리 2016. 4. 8. 19:35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

-Ⅱ편- 현존하는 불전과 불전 내 문화재들

 

김천 직지사는 2008년 10월 06일 부속 암자인 은선암, 명적남, 백련암 등과 함께 탐방을 한 적이 있어, 약 7년여만에 다시 탐방을 하게 되었다.

이번 탐방에서는 직지사와 청암사, 그리고 청암사의 부속 암자인 수도암, 직지사에서 청암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모성정과 방초정 등 정자 두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직지사에서 탐방한 경내의 불전 및 당우와 문화재 등은 3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게 되는데,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된 문화재들은 동계 기간 3개월은 성보박물관이 휴관을 하여 관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들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하여 함께 소개를 하기로 한다.

또한 청암사와 청암사 수도암 등 2곳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방초정은 '영남권'에 각각 소개를 하기로 한다.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Ⅰ편- 이건된 4기의 신라시대 고탑들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Ⅱ편- 현존하는 불전과 불전 내 문화재들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Ⅲ편- 성보박물관의 문화재들

 

【 일 정 표 】2016년 1월 12일(화)

                             ◈ 직지사-모성정-방초정-청암사 수도암-청암사

 

                      ▲ 직지사 가는 길

 

『 김천 직지사(金泉 直指寺) 소개 』

백두대간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 직지사 대웅전과 앞 마당의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직지사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주차장에서 직지사로 들어가는 정문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 직지사 대웅전 들어가는 길에 일직선 상에 자리한 네 개의 문들(일주문-대양문-금강문-천왕문)

                         일주문(사진 上左)과 대양문(사진 上右)

                         천왕문에서 뒤돌아 본 금강문과 대양문(사진 中)

                         금강문(사진 下左)과 천왕문(사진 下右)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대웅전 뒷편에 위치한 전각들

 

『 직지사의 문화재들 』

- 국보 제208호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桃李寺 世尊舍利塔 金銅舍利器)

- 보물 제11-2호 사인비구 제작 동종-문경 김룡사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聞慶 金龍寺 銅鍾)

- 보물 제319호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金泉 直指寺 石造藥師如來坐像)

- 보물 제606호 문경 도천사지 동ㆍ서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 보물 제607호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670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直指寺 大雄殿 三尊佛幀畵)

- 보물 제1141호 예천 한천사 금동 자물쇠 및 쇠북(醴泉 寒天寺 金銅鎖金 및 金鼓)

- 보물 제1186호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傳 龜尾 江洛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1241호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禮念彌陀道場懺法 卷六~十)

- 보물 제1303호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白紙金泥金剛 및 普門發願)

- 보물 제1306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제1576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金泉 直指寺 大雄殿)

- 보물 제1859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金泉 直指寺 大雄殿 須彌壇)

-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직지사 석조 나한좌상(直指寺 石造 羅漢坐像)

 

                      ▲ 직지사 경내의 약수터(사진 左)와 경내로 들어가는 길목의 두꺼비바위(사진 右)

 

창건 이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중창하고 930년(경순왕 4)에 천묵(天默)이 중수하였으며, 936년(태조 19)에 능여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당시의 중요 건물로는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대비로금당(大毘盧金堂)·극락전·원통전(圓通殿)·지장시왕전(地藏十王殿)·응진전(應眞殿)·설법전(說法殿)·선등각(禪燈閣)·대장전(大藏殿) 등이 있었다. 현재 금석문으로 남아 있는 대장전비에 의하면, 이 절의 대장전에 금자사경(金字寫經) 593함(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399년(정종 1)의 중건과 1488년(성종 19) 학조(學祖)의 중수가 있었으며, 1596년(선조 29) 왜병들이 불을 질러 43동의 건물 가운데 천불전(千佛殿)·천왕문(天王門)·자하문(紫霞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대형 5층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그 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절을 중건하였는데, 1681년(숙종 7)에 조종저(趙宗著)가 쓴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의 규모가 8전(殿)·3각(閣)·12당(堂)·3장(藏)·4문(門)에 정실(正室)만 352칸에 달했으며, 부속 암자는 26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05년(순조 5) 이후부터 사세(寺勢)가 차츰 기울기 시작하여 퇴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건에 착수하여 1966년부터 1981년 10월까지 10동의 건물을 중건하고 10동을 이건했으며, 9동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1576호)을 비롯하여 비로전, 극락전, 응진전, 관음전, 남월료(南月寮), 명부전, 약사전, 설법전, 만덕전, 조사전, 제하당(齊霞堂), 명월료, 청풍료(淸風寮), 사명각(泗溟閣), 범종각, 일주문, 금강문(金剛門), 사천왕문 등이 있다.

 

                      ▲ 천왕문을 지나 직지사 대웅전의 앞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만세루


♧ ♧ 김천 직지사 대웅전(金泉 直指寺 大雄殿)

*보물 제1576호(2008년09월03일 지정)

*소재지: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운수리) 

 

 

 

김천 직지사 대웅전은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까지는 좌측의 계곡을 끼고 지형에 맞추어 휘어져 올라온 북쪽에 위치하며, 萬歲樓에서 대웅전에 이르기까지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禪堂이 위치해 있으며, 대웅전 앞 뜰에는 2개의 삼층탑이 놓여 있는 2탑식 중정형 가람배치를 가진다.

 

                      ▲ 직지사 대웅전의 정면 공포와 현판(사진 左)과 귀공포(사진 右)

                      ▲ 직지사 대웅전의 정면 문 장식들

 

김천 직지사 대웅전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기법은 조선후기의 건축적 특징이 잘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 재건된 불전들의 경향을 보이며, 내부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영조 20년에 조성된 삼존불탱화(보물 670호) 등 아름답고 뛰어난 기법을 보여주는 내·외부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는 등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金泉 直指寺 大雄殿 須彌壇)

*보물 제1859호(2015년03월04일 지정)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은 ‘順治八年辛卯四月 大雄殿 黃岳山 直指寺’라는 1651년 墨書記가 확인됨으로써 대웅전의 중건과 함께 제작된 17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목조 불단이다. 1668년 작품으로 보이는 삼존불상과 벽화·단청, 그리고 1744년 삼존후불탱화와 함께 예배대상과 한 세트를 이루며 조성된 점에서 조선후기 불전 건축의 내부 장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예이다.

 

 

                      ▲ 직지사 대웅전의 수미단 정면 모습(사진 上)

                         수미단 측면 모습(사진 下)

 

17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편년 자료인 동시에 조선 후기 수미단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소재와 문양들을 디오라마식으로 장식한 점이라던가 내부에 조각된 고부조의 투각과 화려한 채색법을 통해 조선후기 목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수미단의 장엄과 조각적인 면에 있어 은해사, 운문사, 파계사, 운흥사 등 장엄형 수미단의 계보 형성에 있어 가장 첫머리에 둘 수 있는 당시 불교 목조각의 최고의 정수를 보여준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直指寺 大雄殿 三尊佛幀畵)

*보물 제670호(1980년08월23일 지정) 

 

                      ▲ 직지사 대웅전의 삼존불탱화(사진 左)과 일부 확대 모습(사진 右)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는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 직지사처럼 대웅전 본존불의 뒷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을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그림이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에 합당한지, 또는 법대로 그려졌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하는 스님을 일컫는 것으로, 그림을 직접 그리는 화원(화사, 금어, 출초, 편수 등)과 구분되어 사용됨 )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 직지사의 전각들 】

「 비로전 」

비로전은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경잠(景岑)이 경주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상과 1852년(철종 3)에 조성한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약사여래, 1886년(고종 23)에 조성한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모셔져 있다. 이들 천불상 가운데에는 나아상(裸兒像)이 있는데, 첫 눈에 이 나아상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 직지사 비로전

 

천불상 중 독특하게 벌거벗은 동자 의 모습을 한 불상으로 법당에 들어가 첫눈에 이 동자상을 보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직지사 비로전 천불상 중 첫눈에 발견하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벌거벗은 동자상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

정면 7간,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또한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다.


「 극락전 」

극락전은 서전(西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은 1986년 주지 혜창 화상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총 59.64평으로 비교적 큰 건물이다. 1999년 새롭게 개원을 하여 현재는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직지사 응진전(사진 左)과 응진전 현판 밑의 범어(사진 右)

 

「 응진전 」

응진전은 931년(태조 14)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불탄 후 1656년(효종 7) 관음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중수 되었다.

응진전은 고려 태조 14년(931)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임진왜란에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 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 하였다. 이건물은 그 후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중수 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번와, 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1970.3.1~1971.11.30)되었다.


「 남월료 」

남월료는 사중의 강당으로서 현재 직지사 승가대학(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직지사 성보박물관인 청풍료

 

「 청풍료(직지사 성보박물관) 」

청풍료는 1971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신축되었는데, 형태는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 ㄱ자형이다. 본래는 7칸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금단청 건물로서 크기는 총 92.76평이다. 이 건물은 현재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직지사 사명각(사진 左)과 범종각(사진 右)

 

「 사명각과 범종각 」

사명각은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사명당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5세에 이 절에서 출가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그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또 범종각에는 1981년에 만든 1,600관의 범종과 법고·운판(雲板)·목어(木魚) 등이 있다.

 

                      ▲ 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진 직지사 사명각 현판


「 만덕전과 설법전 」

만덕전은 일명 불교연수회관이며, 주지 녹원에 의하여 1991년부터 1994년에 걸쳐 건립된 직지사 최대의 건물이다. 넓이는 총 361.54평으로서 외부는 완전 목조건물이지만 내부 중량의 일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들보가 구성되어 있으며 기와는 동기와로 제작되었다.

설법전은 불법의 선양과 불자들의 수련을 위해 마련한 건물로서 주지 녹원에 의하여 1987년 3월부터 1992년 6월 20일에 걸쳐 3층으로 신축된 건물이다.

총 294.51평 넓이의 거대한 복합 건물로서 1층에는 식당이 있고, 2층에는 손님접대를 겸한 11개의 방이 있으며, 3층은 설법전이 있다.

이와 같은 만덕전과 설법전은 주로 직지사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위해 활용되는 공간이다.

 

                      ▲ 직지사 명부전(사진 左)과 명부전 내에 봉안된 故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부모님 영정(사진 右)

 

                      ▲ 직지사 관음전(사진 上左)과 약사전(사진 上右)

                         직지사 비로전 앞 황악루(사진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