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양 진전사지(襄陽 陳田寺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이 출가한 사찰!
「 강원도 양양(江原道 襄陽) 소개 」
강원도 중부 동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인제군과 홍천군, 남쪽으로는 강릉시, 북쪽으로는 속초시와 접하고 있다. 총 면적은 628.82㎢이고 동서의 거리는 약 31 km, 남북의 거리는 약 34 km에 달한다.
양양군의 행정 구역은 1읍 5면으로 법정리 124개, 436개 반이다.[14] 양양군의 면적은 629.32 km²이며, 인구는 2015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2만7479 명, 1만3374 가구이다. 이 중 42.6%가 양양읍에 거주한다. 양양군의 남녀 성비는 1.03 : 1이다.
동쪽은 동해안을 따라 2∼4㎞ 폭으로 좁고 긴 평야가 전개되고,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대부분의 지역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 서남부에 매복산, 약수산, 북부에 설악산, 점봉산등이 있어 인제군, 홍천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이들 산지에서 남대천, 서림천, 물치천, 화상천, 오색천 등이 발원하여 흐르며 39.5㎞에 달하는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고 해안의 모래사장은 해수욕장으로 적합하다.
동해에 면하고 서쪽 태백산맥이 겨울에 북서 계절풍을 가로막아 푄 현상(Föhn)으로 기온을 높여 같은 위도의 서해안에 비해 연평균 2.5 °C 높고, 특히 1월 평균 기온은 3°C나 높다. 또 가을에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것도 특색이다. 연평균 기온은 11.8 °C, 1월 평균 기온은 -2.2 °C, 8월 평균 기온은 24.3°C이고, 역대 최고 기온은 39.2 °C(1939년 7월), 역대 최저 기온은 -19 °C(1944년 2월)였고, 연평균 강수량은 1,400 ㎜이다.
손양면 오산리에서는 한반도 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어 이 지역에서의 인간의 오랜 거주를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전에 예(濊)나라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점령하면서 이문현(伊文縣) 또는 익현현(翼峴縣)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익령현(翼嶺縣)으로 개칭되어 수성군(守城郡 : 고성)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1018년(현종 9)에 5도양계제 실시에 따라 현령이 파견되고 동계(東界)에 속했다. 이때 동산현(洞山縣)을 속현으로 병합했다. 1221년(고종 8)에 양주(襄州)로 승격했으나 1254년에 양주현, 1257년에 덕령현(德寧縣)으로 강등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1260년(원종 1)에 다시 양주로 복구되었다. 조선초인 1397년(태조 6)에 태조 이성계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양주(襄州)도호부로 바뀌었다. 1416년(태종 16)에 양양으로 개칭되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잇고 있다. 1783~92년에는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양양의 별호는 양산(襄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강릉부 양양군, 1896년에 강원도 양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서면·현북면·현남면은 그대로, 군내면·위산면·부남면이 군내면으로, 동면·남면이 손양면으로, 강선면·사현면이 강현면으로, 도문면·소천면이 도천면으로 통합되었다. 1917년 군내면이 양양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19년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개칭되면서 토성면·죽왕면이 양양으로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국토가 양단되자 북위 38。선이 군의 중앙을 가르고 있는 양양군은 현북면의 일부 지역을 현남면에 이관하면서 현남면과 서면 일부를 강릉군에 넘겨주고, 나머지 지역은 북한에 속하게 되었다.
1951년에 군 전역이 수복되고,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현남면이 명주군에 이속되고 현북면과 서면은 양양군에 환속되었다. 1937년에 도천면에서 속초면으로 바뀌었다가 1942년에 읍으로 승격된 속초읍이 1963년에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죽왕면·토성면을 고성군으로 환원하고 명주군에서 현남면을 환속받았다. 1979년에 양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강현면 상복리 일부가 속초시로 편입되었고 1989년 손양면 가평리와 송현리 일부가 양양읍에 편입되었다.
*문화제
현산 문화제는 원래 1007년(목종10)부터 성내리에 성을 쌓고, 매년 서낭제를 올려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였으나 그 뒤 명맥만 유지하다가 3·1운동 당시 가장 치열했던 항쟁지이며 많은 열사가 순국한 점을 기려 '현산 문화제'로 확대·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주요 행사로 횃불제등행렬, 기미만세추모제 및 민속놀이, 문예행사 등이 있다.
*민속
-패다리 놓기
두 마을이 개울 하나를 사이에 놓고 함께 힘을 모아서 어느 편이 신속하게 다리를 놓는가를 겨루는, 이는 지형적으로 개울이 많아 다리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 밖에도 '귀애파기 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고장의 산골짜기에서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하여 큰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수로를 '귀애'라 한다. 이 귀애를 만드는 일은 놀이 겸 마을의 큰 행사이다. 매년 한식을 전후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귀애를 파고 이를 산골 논에 설치하며 하늘에 제를 올려 풍년을 기원했다.
-동 제
임진왜란 후 매년 5월 5일 단오에 장군 서낭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현산서낭제를 지냈다가 일제 강점기에 폐지되었으나 1968년 부활되었고 현재는 그 시기가 단오 5일 전후의 현산문화제 때 거행되고 있다.
*축제
문화관광부 지정 지역문화축제 “송이축제”는 청정한 양양의 울창한 소나무숲에서 자생하는 신비의 버섯인 “송이버섯”을 직접 채취할 수 있는 체험의 장을 마련, 세계 어느 곳에서도 경험 할 수 없는 송이채취의 신비한 체험이다. 또한 송이생산이 전국 생산량의 60∼80%를 차지하며, 10월초에 송이 축제가 열린다.
또한 남대천에서는 해마다 11월초가 되면 어머니의 강을 찾아 회귀하는 연어들을 맞이하는 연어축제가 열린다. 거친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의 몸부림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온가족이 참여하여 환경의 중요성과 인성교육의 메시지도 전달할 수 있다.
『 탐방한 양양군의 문화재들 』
●양양 진전사지(襄陽 陳田寺址)
강원도 시도기념물 제52호 양양 진전사지(襄陽 陳田寺址)
국보 제122호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襄陽 陳田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 陳田寺址 道義禪師塔)
●양양 선림원지(襄陽 禪林院址)
강원도 시도기념물 제53호 양양 선림원지(襄陽 禪林院址)
보물 제444호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襄陽 禪林院址 三層石塔)
보물 제445호 양양 선림원지 석등(襄陽 禪林院址 石燈)
보물 제446호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7호 양양 선림원지 승탑(襄陽 禪林院址 僧塔)
●양양 오색리
천연기념물 제529호 양양 오색리 오색약수(襄陽 오색리 오색약수)
보물 제497호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襄陽 五色里 三層石塔)
●양양 낙산사 일원(襄陽 洛山寺 一圓)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일원(襄陽 洛山寺 一圓)
명승 제27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襄陽 洛山寺 義湘臺와 紅蓮庵)
보물 제499호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襄陽 洛山寺 七層石塔)
보물 제1362호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襄陽 洛山寺 乾漆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723호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襄陽 洛山寺 海水觀音空中舍利塔·碑 및 舍利莊嚴具 一括)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 홍예문(洛山寺虹霓門)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4호 낙산사 원장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8호 의상대(義湘臺)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낙산사 홍련암(洛山寺 紅蓮庵)
【 일 정 표 】2016년 04월 26일(화)-2016년 04월 27일(수) 1박2일
◈ 첫째날(04/26) : (양양)오색리<주전골·성국사 오색리 삼층석탑·오색약수>-낙산사 일원
◈ 둘째날(04/27) : (양양)진전사지-선림원지-(강릉)강릉대도호부·임영관삼문-신복사지-굴산사지-보현사
강원도 양양군과 강릉시는 이미 여러 차례 방문을 한 지역으로 이번에 탐방한 오색 주전골과 오색리 삼층석탑은 201년 11월03일 고교동창 산악회 회원 19명과 함께 「(흘림골)흘림골지킴터~여심폭포~등선대~등선폭포~십이폭포~용소폭포갈림길~(주전골)금강굴~선녀탕~독조암~성국사/오색리 삼층석탑~약수터탐방지원센터」 코스로, 낙산사 일원은 화재 전과 후 수 차례 탐방을 하였었다.
이번 탐방에 상기의 관광명소 이외에 강릉지역의 경포대 일원(강릉 해운정, 선교장, 경포대), 오죽헌, 강릉향교, 대창리와 수문리 당간지주 등을 탐방 할 예정이었으나, 원거리 지역에 주전골 탐방과 낙산사 일원을 전부 둘러보게되어 시간적으로 부족하여 다음에 탐방을 하기로 하였다.
양양과 강릉에서의 탐방 명소 소개는 오색 주전골과 오색리 삼층석탑, 강릉대도호부·임영관삼문은 내가 찾은 관광명소 '영남&호남권'에,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양양의 낙산사 일원, 진전사지, 선림원지, 그리고 강릉의 신복사지, 굴산사지, 보현사의 문화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양양군의 탐방지는 오색 주전골과 오색리 삼층석탑, 양양 낙산사 일원, 양양 진전사지 및 양양 선림원지 등 총 4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한다.
- 시원한 폭포와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 오색 주전골과 오색리 삼층석탑(五色里 三層石塔)
- 선명한 단청과 풍경소리! 양양 낙산사 일원(襄陽 洛山寺 一圓)
-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이 출가한 사찰! 양양 진전사지(襄陽 陳田寺址)
- 900년 전 대홍수와 산사태로 매몰된 사찰! 양양 선림원지(襄陽 禪林院址)
▲ 진전사지 중창 복원 계획 조감도
『 양양 진전사지(襄陽 陳田寺址) 소개 』
*강원도 기념물 제52호(1982년11월03일 지정)
*면적:27,131㎡
*소재지: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번지
▲ 복원중인 진전사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 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에 있는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진전사지 삼층석탑 입구
♧ ♧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襄陽 陳田寺址 三層石塔)
*국보 제122호(1966년02월28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번지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진전사는 8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 상층기단의 팔부신중과 초층 탑신의 사방불
▲ 1층 몸돌의 다양한 모습의 사방불
▲ 상층기단의 팔부신중
▲ 아래층 기단의 천인상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天人像)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八部神衆)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에서 마을 안쪽 800여m 떨어진 산 중턱에 새로 중창된 진전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절 입구 산속 작은 언덕위에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이 있다.
진전사 절터에 자리한 삼층석탑과 도의선사탑이 약 800m 떨어진 곳에 각기 위치해 있어, 절이 창건된 통일신라시대 때는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가는 길 입구
♧ ♧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 陳田寺址 道義禪師塔)
*보물 제439호(1966년02월28일 지정)
*소재지: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1번지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으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된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탑은 일반적인 다른 탑과는 달리 8각형의 탑신(塔身)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基壇)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 탑신부와 구형상륜(사진 上左)와 하층기단 짜임새(사진 上下)
도의선사탑 기단부(사진 下)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탑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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