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
2019년7월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한국의 서원 9곳 세계문화유산 목록으로 등재
2018년 1월 새로운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한 이후 약 1년 반 동안 자문기구의 심사를 받은 결과, 2019년 5월 마침내 이코모스는 ‘등재 권고(Inscribe)’ 의견을 제시했다.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소수서원 등 9개 서원을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서원은 2011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2015년 1월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하 이코모스)의 ‘반려(Defer)’ 의견에 따라, 2016년 4월에 신청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후 국내외 전문가의 의견을 거쳐 유사한 국내외 유산들과의 비교 연구를 보완하고, 9개 서원이 갖는 연속 유산으로서의 논리를 강화한 등재신청서를 새롭게 작성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 소수서원(1543년 건립, 사적 제 55호/경북 영주)
▲ 소수서원 전경
▲ 남계서원(1552년 건립, 사적 제 499호/경남 함양)
▲ 남계서원 전경
▲ 옥산서원(1573년 건립, 사적 제 54호/경북 경주)
▲ 옥산서원 사당
▲ 도산서원(1574년 건립, 사적 제 170호/경북 안동)
▲ 도산서원 전경
▲ 필암서원(1590년 건립, 사적 제 242호/전남 장성)
▲ 필암서원 강당 앞 전경
▲ 도동서원(1605년 건립, 사적 제 350호/대구 달성)
▲ 병산서원(1613년 건립, 사적 제 260호/경북 안동)
▲ 병산서원 강당인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 무성서원(1615년 건립, 사적 제 166호/전북 정읍)
▲ 무성서원 전경
▲ 돈암서원(1634년 건립, 사적 제 383호/충남 논산)
▲ 돈암서원 전경
등 총 9개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이 서원들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 서원 탐방기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9개의 서원 중 2007년 11월8일 경북 영주 소수서원(2012년, 2018년 등 여러 차례 탐방)을 시작으로 2008년 6월13일 경북 경주 옥산서원, 2012년 12월11일 경남 함양 남계서원, 2014년 2월21일 경북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2016년 11월16일 충남 논산 돈암서원,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이후 2019년 8월2일 전남 장성 필암서원과 8월3일 전북 정읍 무성서원 등 대구 달성 도동서원을 제외한 총 8개의 서원을 탐방하였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서원들을 포함하면 탐방을 한 서원의 수는 경북 구미 금오서원, 경북 상주 옥동서원, 경남 함양 청계서원 등 10여개가 넘는다. 향후 탐방한 서원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 다시 탐방기를 작성하여 게재할 계획이다.
◆ 서원(書院) 이란?
서원은 조선 시대의 유학 교육기관. 서원은 지방에서 유학 교육을 통해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으로,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일향 사림들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는데 본읍이나 인근 지방관이 서원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경우도 많아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 서원 정자 중 가장 오래된 정자인 소수서원의 경렴정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것으로 안향을 봉사 대상으로 하고 학규는 주희가 세운 백녹동서원의 것을 본받았다. 그후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여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초기의 서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액은 편액뿐만 아니라 서원의 유지 관리를 위한 토지와 노비, 다량의 서적이 부수되는 것이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사설 교육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공인 하에서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은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미 명종 때까지 거의 20개에 가까운 서원이 세워졌으나 선조 때에는 50여 개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 가운데 21개의 서원이 당대에 사액을 받았다.
「 한국의 성리학 」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성리학 교육은 한국 고유의 성리학적 학맥이 형성되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성리학의 연구가 더욱 심화되고 발전하여, 조선시대의 다양한 분야에 기초가 되었다. 향촌 지식인들은 보다 효과적인 교육 수행을 위하여 교육 체계와 유형적 구조물을 창조하였다. 성리학 경전과 연구를 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이상적 인간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훌륭한 스승이 죽고 난 후 제자들은 존경의 표현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성리학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을 건립하여 돌아가신 스승을 위해 제향을 올리고 스승이 추구했던 훌륭한 성리학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강학활동을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획일적으로 건립한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학교이기 때문이다. 향촌사회의 선현들을 제향하였고, 제향인물을 통해 강한 학문적 계보를 형성하였다. 또한, 향촌 지식인들은 서원을 통해 다양한 사회 및 정치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홉 개의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장소였으며, 한국적으로 해석한 유학 교육시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각 서원이 배향하고자 하는 인물의 연고지에 입지하였으며, 성리학적 교육에 적합하도록 경관이 수려하다. 제향영역, 강학영역, 회합과 유식영역으로 구분되었으며, 각각의 영역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뚜렷한 하나의 서원 건축 전형을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하고 특출한 가치를 갖는다. 또한 강학과 제향, 회합 및 유식의 영역에 대표적인 건축물인 강당, 사우, 누마루를 구성하였다.
한국의 서원은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던 성리학이 지역화되고 변형된 독특한 과정을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한국 서원의 특성과 발전을 나타내며, 서원이 건축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하였는지 각각의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 소수서원 강학당인 명륜당(보물 제1403호)
▷ 서원의 구성원
한국의 서원은 사림이라는 향촌 지식인 집단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림들은 지방사회를 주도하는 지배계층으로, 도덕성•청렴함•사회모범적인 태도로서 사회 지배의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근거의 기준은 성리학이었으며, 성리학을 토대로 모범-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이 사림의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재생산 활동인 교육과 모범적인 인간을 기리는 제향은 중시되었고 이를 서원을 통해 구현하였다.
사림들은 서원에서 교육자와 피교육자로서 활동하였다. 사림 중의 일부는 후대 사림들에 의해 제향인물로 선정되었으며, 후대 사림들은 사우에서 제향된 인물들을 기렸다.
서원의 구성원은 교육과 관리의 주체인 원장(院長)·원임(院任)과 피교육자인 원생(院生)으로 구분된다. 서원의 원장은 원사(院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서원을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이자 관리 주체이다. 원장의 임기는 1~2년으로 서원의 형편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대체로 연임이 허용되었다. 원장을 도와 서원 운영해 나가는 담당자는 임원을 원임(院任)이라 한다. 원임은 도감(都監), 장의(掌議), 유사(有司)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각 원임의 역할에 따라 세분화된다. 원임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원내(院內) 규찰 및 재정적인 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 구성은 각 서원의 제반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이들은 서원에 관련한 운영뿐만 아니라 수업을 준비하고 원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임원의 자격·임기·직임은 서원마다 차이가 있다. 신청유산에는 원장과 원임의 임명과 재직, 그리고 활동과 관련한 『원장안』, 『원임안』 등의 자료들이 남아있다.
원생은 서원을 구성하는 가장 높은 비율의 구성원이다. 원생은 지정된 천거자의 추천을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서원의 운영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의 하나인 도동서원 원규에 의하면 원생은 20세 이상인 자로 선발하였고,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천거하였다. 선정된 원생들은 일종의 입학자격 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원생에 선발되었다. 입학 과목은 성리학의 경전을 중심으로 시험이 이루어졌다. 신청유산에는 원생의 명단을 기록한 『입원록(入院錄)』이 존재한다. 『입원록』에 의하면, 16~19세기까지 신청유산에는 약 10여명 내외의 유생들이 매년 입원(入院)하였다. 선발 과정은 각 서원이 자율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입원생의 숫자는 서원별·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 도산서원 강당인 전교당
▷ 서원의 교육 이념
유학은 공자(BCE551-479)에 의해 중국에서 창시된 정치철학이다. 유학은 인간의 선한 본성과 이를 근거로 한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이상 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성리학은 11세기경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유학 사조의 하나이며, 12세기에 이르러 송나라에서 정립되었다. 성리학이 발전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은 주희(1130-1200)였다
성리학은 유학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존재론, 우주론까지 체계화하면서 한 단계 발전시켰다. 성리학은 합리주의적 인식론이나 근본주의적 도덕론과 같은 가치체계를 규정하고 재평가하였으며, 이것이 공공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은 한국에 전래되어 13세기경부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성리학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인간 본성과 자연 및 우주에 대한 이해, 국가 및 사회 구성에 대한 관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지식인의 역할과 성리학적 이상 사회로의 지향 등 개인, 가족,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인 기준으로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 남계서원 풍영루에서 바라본 강학공간
▷ 서원의 주요 기능
서원은 강학, 제향, 교류와 유식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이라는 유학교육기관으로서 가지는 보편적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보편성 속에서 서원은 제향에서 공자가 아닌 동시기에 활동한 지역의 선현을 배향하였고, 사림의 정치・문화・교류의 중심지로서 서원이 기능함으로써 교류와 유식이 강조되어 다른 교육 유산과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건축적으로 배치와 정형에서 구현됨으로 서원의 기능과 건축 유형이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서원은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이라는 기능에 의해 공간구성·배치수법이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다. 즉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東齋)·서재(西齋)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러한 중심건물 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이를 보관하는 서고, 서원의 관리 및 유생들의 식사준비 등 생활전반을 뒷받침해주는 교직사(校直舍), 제사에 필요한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택지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에 따라 적당한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의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가 많다.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內三門)을 만들어 통행하도록 했다. 교직사는 강당 서쪽에 따로 담을 쌓아 배치하고, 제기고는 사당 앞 옆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당의 구조는 익공식(翼工式)의 단층팔작집이 일반적이며 동재와 서재는 민도리집 형식인 단층맞배집, 사당은 익공식 단층맞배집으로 건축되어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담장을 높지 않게 세우고 그 일부를 터서 내부에서 밖의 자연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조경식물도 적절히 심어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
① 서원의 강학
서원은 사립 성리학 교육 기관으로서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을 기본 목표로 한다. 따라서 각 서원에는 성리학 교육과 관련된 독자적인 운영과 교육의 규정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교육 규정은 각서원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한국 서원의 교육 방법은 개별학습과 공동학습의 병행을 들 수 있다.
개별학습과 공동학습의 병행은 독서와 강회(講會)라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의 교육에 의해 시행되었다.
독서는 개인별 수준과 연령에 따라 교재와 진도, 평가방식까지 달리하며, 자발적으로 수행되는 철저한 개별학습 과정이었다. 또한 개별 독서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월1회 실시하여 해당 학습량을 성취하지 못한 경우 다음 달에 다시 평가하여 반드시 통과한 뒤에 다음 진도를 나가도록 하였다.
▲ 무성서원 강당(사진 左)과 필암서원 강당(사진 右)
강회는 서원의 다수의 인물들이 함께 모여 집단적인 학습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정기적으로 스승과 제자가 강당에 모여 모두 정해진 책을 함께 강독하고 토론하는 공통학습의 형식을 취했으며, 특별한 이벤트로써 쟁점이 되는 성리학과 관련된 학설이나 학문적 주제에 대해 집단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강회는 10일에 1번, 15일에 한번, 1달에 한번으로 나뉘어서 시행되었다. 평가 후에는 이에 대한 성적을 기록하여 학생들의 지속적인 학습이 단계별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강회 후에는 강회록을 작성하여 원장에게 보고하였다.
독서 및 강회에서 사용되는 교재는 성리학 관련 서적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서적들은 주희와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성리학 경전 주석서이다. 경우에 따라 제향인물이 작성한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이나 제향인물의 문집을 강독하기도 하였으며, 교재뿐만 아니라 당시에 성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학설들을 토론하고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② 서원의 제향
서원의 독보적 기능으로 전승하고 존속하여왔다. 특히 한국의 전통 관립 유학교육 시설인 성균관, 향교나 중국, 일본의 전통 유학교육 시설들과는 달리, 공자를 제향하지 않고 서원과 관련된 선현만을 제향하는 것은 한국서원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 이는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학맥을 정립하고 계승하는 과정에서 서원의 제향을 통해 지역 지식인에 대한 존숭을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제향 대상을 지역의 지식인들로 대체한 점은 전래된 문화가 정착되는 가시적인 증거이자 독자적 발전과정을 의미한다. 기복적 성격을 드러내는 제향 시설들과 달리 민간신앙과 관련된 대상이나 자연 등을 제향 대상에서 배제하였다는 점도 서원 제향이 가진 순수성을 보여준다.
서원은 향촌 지식인들은 지역 선현들을 제향하며 지역학파를 정립하고 계승하였으며, 향촌사회의 교육과 교화를 통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신청 유산은 성리학의 계보와 발전 단계를 입증하는 주요한 인물들을 제향하며, 제향의례의 독특한 전통이 현재까지 지속 전승되고 있다. 서원에서 제향 되고 있는 인물들은 한국 지성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서, 이들은 한국 성리학의 역사와 발전을 상징한다. 지역의 사림들은 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자신들과의 연계성을 근거로 해당 지역의 대표・상징적인 학맥과, 그들의 거점과 근거지를 확보하여 지역과 학파에 따른 전통과 독특성을 유지하였고, 그들이 이상으로 삼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상호 경쟁하며 발전해 갔다.
▲ 소수서원의 사당인 문성공묘(보뭉 제1402호)
서원의 제향은 정기적으로 매년 봄・가을로 지내는 춘추 향가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는 삭망해, 정월초 5일이나 6일에 행하는 정알례가 있다. 이러한 의례행위는 농경사회의 제향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기적인 제향 이외에 특별한 경우에 행하는 비정기적인 제향의례도 있었다. 비정기적 제향에는 서원에 일이 있어 위패를 임시로 다른 곳에 옮겼다가 다시 제자리에 모실 때 행하는 이안제와 환안제, 불시의 재난을 입었을 때 올리는 위안제, 위패를 새로 봉안하거나 제외할 때의 예성제, 사액을 받았을 때 올리는 사액해, 국가에서 제관을 보내어 지내는 치제 등이 있었다.
봄과 가을에 지내는 향사를 각서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제향의례는 일반적으로 제향행사 전날 준비하는 절차부터 진행되므로 총 2일이 소요된다. 대체로 제물 준비, 성생례, 집사분 정, 사축을 첫째 날 진행하고, 둘째 날 향사의 진행 순서를 적은 홀기를 낭독하면서 향사의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된다. 제관들은 홀기에 기재된 순서에 따라 맡은 임무를 행하며 제향의례를 수행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9개 서원은 개별적으로 한국서원의 독특한 제향의례를 존속해왔다. 제향의례는 한국서원에서 가장 중시되는 기능 중 하나로 신청 유산은 창건부터 현재까지 독특한 제향의례를 끊임없이 지속하여 왔다. 제향의례를 통해 서원의 구성원들은 선현의 학덕과 행의를 추앙하고, 그 정신을 이어나갈 것을 다짐할 뿐만 아니라,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 도산서원 제향공간인 상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인 부정문(보물 제211호)
제향은 스승의 정신과 서원의 전통을 함께 계승하는 고귀한 의식이자, 예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정신과 문화를 널리 확산, 정착시키는 사회교육의 역할도 하였다. 이러한 제향의 지속성은 신청 유산이 가지는 진정성을 가장 탁월하게 나타내주는 사례이다.
서원의 제향은 정기적으로 매년 봄・가을로 지내는 춘추 향가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는 삭망해, 정월초 5일이나 6일에 행하는 정알례가 있다. 이러한 의례행위는 농경사회의 제향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기적인 제향 이외에 특별한 경우에 행하는 비정기적인 제향의례도 있었다. 비정기적 제향에는 서원에 일이 있어 위패를 임시로 다른 곳에 옮겼다가 다시 제자리에 모실 때 행하는 이안제와 환안제, 불시의 재난을 입었을 때 올리는 위안제, 위패를 새로 봉안하거나 제외할 때의 예성제, 사액을 받았을 때 올리는 사액해, 국가에서 제관을 보내어 지내는 치제 등이 있었다.
▲ 도산서원 사당인 상덕사(사진 左)와 필암서원 사당 전체 전경(사진 右)
봄과 가을에 지내는 향사를 각서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제향의례는 일반적으로 제향행사 전날 준비하는 절차부터 진행되므로 총 2일이 소요된다. 대체로 제물 준비, 성생례, 집사분정, 사축을 첫째 날 진행하고, 둘째 날 향사의 진행 순서를 적은 홀기를 낭독하면서 향사의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된다. 제관들은 홀기에 기재된 순서에 따라 맡은 임무를 행하며 제향의례를 수행한다.
▷ 서원의 경제기반 및 폐해
서원의 경제기반은 토지와 노비를 바탕으로 했는데, 본래 각지의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학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보장책은 없었다. 단지 국가가 승인하는 형식인 사액의 경우 면세전 3결(結)과 노비 1구(口)의 사여가 따랐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 당초부터 그 지방의 사림으로부터 토지나 노비가 기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이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자 면세를 목적으로 납입되는 토지, 면역을 목적으로 투탁하는 양인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서원은 대체로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 향촌 자치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그 후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의식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의 설립에 중앙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상은 숙종대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각지에 서원이 남설(濫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설되는 서원은 봉사 대상 인물의 선정이 원칙에서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시기에 강화되어가던 가문의식이 서원의 남설을 초래하기도 했다.
▲ 남계서원 서재 앞 연못과 풍영루
후손이나 문중에 의해 설립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러한 서원은 교육기구로서의 1차적 기능이 흐려지고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진 상태에서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에 대해서는 1714년(숙종 40)에 첩설(疊設)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의 제재조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금령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1727년(영조 3)부터였다. 이때 처음으로 금령을 어기고 첩설된 것들에 대한 철회조치가 단행되었다. 그 후 영조·정조 때를 통해 서원의 남설에 대한 억제정책이 계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에 따라 신설 사액되는 것도 있었다.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정권의 기반이 사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설 사액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그 문란은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서원의 문란에 제동을 건 것이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였다. 그는 당시 679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서원들은 대한제국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47개소에 해당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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