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한국의 서원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황희를 배향한 유일한 서원!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

왕마구리 2019. 10. 31. 17:13

◀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 ▶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황희를 배양한 유일한 서원!



2014년 2월20일~21일 1박2일간 '경북 북부 나드리 : 역사와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란 테마로 상주시, 안동시, 그리고 예천군의 명소들을 일부 탐방을 실시하였었다. 당시 상주시에서는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는 명소! 경천대'와 ''사벌국을 건국한 왕의 릉! 진사벌왕릉',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등 3곳의 명소만을 탐방하여, 이번에 다시 찾아 1박2일간 '상주의 역사와 자연의 소리를 찾아서...' 탐방을 실시하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철 탐방이라 피서를 대신하여 첫째날은 상주시 북부지역에 인접해 있고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잇는 3곳의 폭포를 찾아 연속적으로 탐방을 실시하고, 두 곳의 국가지정문화재 탐방을 이어 갔었다.

둘째날은 2019년 7월6일 제43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 목록으로 등제된 한국의 서원 9곳(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작하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2호로 지정된 상주 옥동서원, 조선시대 주거 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상주 양진당(방문 당시 보수공사중),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인 우복 종택, 그리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노악산 아래 자리한 천년 고찰 남장사와 남장사 게곡을 탐방하였다. 



【 일 정 표 】2019년 7월 29일(월)-7월 30일(화) 1박2일

                             ◈ 첫째날(7/29) : 옥양폭포-오송폭포-장각폭포-상오리 칠층석탑-용화사(중촌리 석조여래좌상 및 석조여래입상)

                             ◈ 둘째날(7/30) : 옥동서원-상주 양진당-남장사&남장사계곡-우복종택


상주지역 재탐방에서의 명소 소개는 내가 찾은 관광명소 '명찰을 찾아서'에 '노악산 자락에 자리한 신라 천년고찰! 남장사', '영남권'에 '경북 상주의 3대 폭포 탐방! 옥양폭포, 오송폭포, 그리고 장각폭포', '장중하며 전체적인 균형미가 뛰어난 고려 전기의 석탑!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및 좌상',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 상주 양진당' 그리고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 상주 우복 종택', 그리고 '한국의 서원'에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황희를 배향한 유일한 서원! 상주 옥동서원' 등 총 7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한다.


- 경북 상주의 3대 폭포 탐방! 옥양폭포, 오송폭포, 그리고 장각폭포

- 노악산 자락에 자리한 신라 천년사찰남장사(南長寺)

- 장중하며 전체적인 균형미가 뛰어난 고려 전기의 석탑상주 상오리 칠층석탑(尙州 上吾里 七層石塔)

-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및 좌상(尙州 曾村里 石造如來立像 및 坐像)

-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 상주 양진당(尙州 養眞堂)

-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상주 우복 종택(尙州 愚伏 宗宅)

-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은 황희를 배향한 유일한 서원!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


【 상주 옥동서원(尙州 玉洞書院) 】

*사적 제532호(2015년11월10일 지정)

*면적:4,545㎡

*소재지:경상북도 상주시 수봉2길 29(모동면)

상주 옥동서원은 고려 말 3명의 국왕과 조선 초 4명의 국왕을 모신 충신으로 조선 초 유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교 숭상 정책을 주도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인 방촌 황희 (尨村 黃喜, 1363∼1452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옥동서원은 1518년 횡당(黌堂)을 세워 황희의 영정을 모신 것이 효시로, 1580년 백옥동 영당(白玉洞 影堂)이 건립되면서 황희를 배향(配享, 신주를 모심)하였다. 1714년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전식(全湜, 1563~1642년)을 배향하였으며, 1786년 황효헌(黃孝獻, 1491~1532년)과 황뉴(黃紐, 1578~1626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789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현재의 명칭인 ‘옥동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옥동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황희를 모신 서원으로는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아 오늘날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황희 등 4현(황희‧전식‧ 황효헌‧황뉴)의 향사(享祀, 제사)가 전승되어 오고 있다.



               ▲ 문루인 옥동서원 청월루 전면(사진 上)

                  청월루 2층 누각 좌,우에 위치한 방의 1층 외부 전면에 위치한 아궁이(사진 下)

               ▲ 옥동서원 청월루 우측면(사진 左)과 후면(사진 右) 전경

               ▲ 강당인 온휘당 앞마당에서 바라본 청월루

               ▲ 청월루 2층 누각 전면 툇마루(사진 左)와 좌측면 좁은 툇마루(사진 右)


옥동서원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인 문루(門樓, 청월루), 강당(講堂, 온휘당), 사당 (祠堂, 경덕사)은 일직선 상에 놓여 있으며,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없고 지원 시설들도 비교적 적다. 이러한 점은 강학(講學, 학문을 닦고 연구함) 기능이 약화되고 향사 기능이 점차 강화되던 17~18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옥동서원 강당인 온휘당

               ▲ 청월루 2층 누각에서 바라본 강당인 온휘당


아울러 옥동서원은 황희 선생 영정 3점,「방촌선생문집」,「반간집」,「황씨세보」,「장계이고」,「만오집」등 총 5종 241책의 책판을 비롯하여 각종 고문서 300여 건, 현판 11개 등의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황희(黃喜, 1362~1452)>>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다[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지만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 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 강당인 온휘당 뒷편에 위치한 황희를 배향한 옥동서원 사당인 경덕사 전체 전경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 사당인 경덕사(사진 上)

                  경덕사 내부 전경(사진 下)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으며,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 경덕사 경내에서 바라본 옥동서원 내삼문과 보호수인 배롱나무

                  *434년 수령(지정일 기준)의 보호수인 배롱나무(지정번호 14-08-02, 2014년06월05일 지정)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黃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