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를 찾아서...(Ⅰ) 흥법사,법천사,거돈사지

왕마구리 2009. 3. 10. 02:38

◀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를 찾아서... ▶ 

 

▲ 1000년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거돈사지 느티나무(보호수)를 배경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치악산국립공원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장목(금강송) 숲길이 이어지는 영서지방의 대찰인 구룡사와 원주지역 100여 군데의 폐사지 중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 등 3대 폐사지를 돌아 보고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문화재와 고풍창연한 법당, 그리고 주변의 절경과 어우러진 산사가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던 명찰만을 찾아가다, 이번에는 절은 사라지고 건물을 떠받들던 기단과 석축, 그리고 한두 개의 탑들만이 남아 번성했던 옛 시절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계절만큼이나 황량함을 더해주는 폐사지를 함께 찾아보았다. 

이 폐사지들의 방문이 천년 세월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절터 한켠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고목 한그루가 겨울 찬바람과 함께 인적마저 드물어 더욱 쓸쓸한 마음을 자아내지만 '고독'을 즐기며 쓸쓸함에 취하여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 또 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번 기행은 원주지역의 현존하는 대표적인 사찰 '구룡사' 편과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를 찾아서... 흥법사, 법천사 그리고 거돈사' 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전국에 남은 폐사지는 2000여 군데로 추정되며, 이 중 충청도에 700여 곳, 경상도에 600여 곳, 경기도에 160여 곳이 분포되어 있다(이지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서). 유명한 폐사지는 주로 경주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어 수도권에서는 먼 거리라 쉽게 방문하기가 어렵지만 강원도 원주지역은 당일 답사지로는 마음만 먹으면 초행자에게도 별 부담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원주지역에만 100여 곳의 폐사지가 있으며, 그 중에서 이번에 답사한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 3대 폐사지는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으며, 섬강(흥법사지)과 남한강(법천사, 거돈사지)변을 끼고 달리는 경치가 운치가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 일 정 표 】2009년 3월 2일(월)

                         구룡사 탐방-구룡소-자연관찰로 산책→흥법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갈 때 >> 부천-(도시외곽순환도로)-조남분기점/서서울요금소-(영동고속도로)-새말I.C.→구룡사주차장→새말I.C.-(영동고속도로)→문막I.C.-(42번국도)-(88번지방도/간현유원지방향)→흥법사지(16:06~16:23)-(88번지방도)-(42번국도)-문막읍-(49번지방도/부론면방향)→법천사지(17:12~17:27)-부론면-(531번지방도)-정산리-(11번군도)→거돈사지(17:50~18:20)

<< 올 때 >> 거돈사지-(갈때의 역순)-부론면-(49번지방도/충주,앙성방향)→단암삼거리-(335지방도)-(84번지방도)-(37번국도)→여주I.C.-(영동고속도로)-(갈때의 역순)→부천

 

【 흥법사(興法寺) 소개 】

▲ 흥법사지 입구에서...

 

♧ ♧ 흥법사지(興法寺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 흥법사지

 ▲ 흥법사지 동쪽 축대와 출토된 석재들

 

영봉산 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적연국사 영준이 고려 태조15년(932)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곳에 있었던 진공대사탑비에서 진공대사가 고려 태조23년(940)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탑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숙종19년(1693) 이곳에 도천서원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하였다.

이 절은 1탑식 절 배치를 하고 있으며, 유물로는 흥법사지 3층석탑과 보물 제463호인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귀부와 이수가 있다. 건물터로는 탑의 동쪽 10m지점 축대 위에 중문으로 보이는 터가 있고, 탑의 앞인 서쪽에 절의 중심건물인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샘과 여러 건물터가 주변에 있고, 절의 북동쪽 산기슭에는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간 진공대사탑(보물 제365호)을 모셨던 자리가 남아있다.

이 절은 고려태조가 흥법선원을 만들어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정산리 거돈사, 여주 고달사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절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흥법사지 주변에는 몇 채의 시골집들이 있고, 너른 절터는 20여평을 제외하고는 주변 농가에서 조성한 밭 두둑으로 변하여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지만, 동쪽 방향 축대가 있는 곳으로는 시야가 확 트여 쓸쓸한 분위기를 일부라도 반전을 시켜준다.

축대 우측으로 느티나무 한 그루가 흥법사의 문지기마냥 외롭게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오며 흥법사 인고의 역사를 말하는지 겨울바람에 잔가지를 흔들며 방문객을 맞이해 준다.

문막읍에서 간현유원지 방향 88번지방도를 따르면 아름다운 섬강이 운치를 더하고 있어 드라이브를 즐기며 흥법사에 이를 수 있다.

 

♧ ♧ 진공대사탑비(眞空大師塔碑):귀부(龜趺) 및 이수

*보물 제463호

 

이 유물은 신라 말 고승인 진공대사의 탑비이다. 진공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태조23년(940)에 돌아가시자 태조가 직접 글을 지었다고 한다. 글씨는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가려뽑아 새긴 것으로 왕희지체이다. 비의 본체는 파손되어 국립박물관에 있다.

스님의 사리를 모신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보물 제365호)과 석관은 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신라 말기의 퇴화된 작품에 비하여 고려초기의 패기가 넘치는 우수한 작품으로 지금은 경복궁에 있다.

비의 받침부분인 귀부는 짧은 목에 비늘을 새긴 용의 모습으로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머리위의 네모난 구멍에는 뿔을 따로 조각하여 꽂은 것으로 보인다.

거북의 등에는 인근에 있는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와 같이 이중의 6각형 속에 만(卍)자와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으며, 네 발은 받침돌을 힘차게 딛고 있다. 비의 덮개 부분인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전서체로 '진공대사'라고 새겨 놓았으며, 이 글을 중심으로 사방의 구름무늬 속에 상하좌우로 얽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노려보고 있다.

옆면의 용도 하늘을 향해 움직일 듯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당시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 ♧ 흥법사지 삼층석탑(興法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이 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몸체부를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의 모양을 하고 있다.

1층 기단에는 기둥을 새기지 않은 대신 안상(탑 연석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땅으로부터 꽃이 솟아나는 모습을 조각하여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2층기단의 면은 여러 장의 넓은 돌로 만들었으며, 모서리 기둥과 버팀기둥을 새겨 놓았다.

기둥의 갑석(뚜껑처럼 덮은 돌) 위에 탑의 몸돌과 만나는 부분은 3단으로 꺾어 놓았다. 탑의 몸돌은 한 면에 2개의 모서리기둥을 새겨 놓았다. 몸돌은 폭과 탑 몸체의 높이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줄어 탑의 윗부분이 빈약해 보인다.

탑의 지붕돌은 윗부분이 두꺼우며 몸매가 급하고, 추녀 끝을 약간 치켜올려 놓았으며 처마의 받침은 4단으로 꺾어 놓았다.

탑위의 장식물로는 노반(탑의 꼭대기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과 복발(탑의 위쪽에 주발같이 엎어놓은 장식)만이 남아 있다. 높이는 3.2m이다.

 

【 법천사(法泉寺) 소개 】 

 

▲ 법천사지로 가는 지방도 옆의 남한강

▲ 법천사지 발굴지 내 마을길에 있는 고목과 표석

 

♧ ♧ 법천사지(法泉寺址)

*사적 제466호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 법천사지 발굴현장 

 

▲ 법천사지 발굴현장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 사찰로 명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모탑비와 법당터 및 석탑의 일부 등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이곳에서 나온 석재들이 흩어져있다.

절터의 동쪽 산기슭에는 지광국사의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가 남아있다. 부도는 서울로 옮겨졌으나 탑비는 그대로 남아있다.

탑전지는 높게 쌓은 축대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왼쪽의 건물 터 위에는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 계단 사이를 장식하던 대담하고 화려한 조각의 답도석,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단인 배례석, 석탑재 등 이곳에서 출토된 석재를 모아 놓았다.

이 절에 관하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경순왕2년(928)으로, 신라 하대에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무인정권 이전까지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관웅, 지광국사, 정현, 덕겸, 관오, 각관 등 유명한 승려가 계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방선이란 학자가 이곳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 때 한명회, 서거정, 권람 등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도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폐사지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터만 79,468㎡로 산을 둘러싼 마을 하나가 사찰이었음을 생각해 보며 사찰의 규모를 짐직하고 남음이 있는 곳이다. 현재 발굴중인 현장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허균도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졌다는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워낙 유명하여 그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하여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있는 왼쪽 언덕은 개방하고 있다.

문막읍에서 부론면 방향으로 진행하면 49번지방도 우측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남한강변 산책로가 개발되어 있어 법천사로 향하다 적당한 장소에 차를 세워놓고 잠시 남한강변을 산책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 ♧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碑)

*국보 제59호

▲ 지광국사현묘탑비 가는 길

▲ 지광국사현묘탑비

 

 

이 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국조 제101호)을 세운 이후 고려선종2(1085)에 스님의 삶과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모탑옆에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스님이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해권인 것과 16세(999)에 스님이 되어 승통, 황사, 국사의 칭호를 받고 84세(1067)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비의 뒷면에는 1,370여명의 제자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탑비의 거북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의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 높이는 4.55m이다. 거북의 등에 새겨진 "王"자, 연꽃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연꽃, 구름, 용 등을 통하여 당시 조각예술의 훌륭함을 느낄 수 있다.

 

 

 

 

 

 

 

 

 

 

◀ 지광국사현묘탑

    (현재 경복궁 경내에 보관)

현묘탑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들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이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에 세워져 있다.

 

  

▲ 지광국사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

▲ 지광국사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 왼쪽 절터위에 모아놓은 출토된 석재들

 

  

 

【 거돈사(居頓寺) 소개 】

▲ 거돈사지를 배경으로...

 

♧ ♧ 거돈사지(居頓寺址)

*사적 제168호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이 절터는 현재 남아있는 3층석탑(보물 제750호)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이 절터에는 높은 축대위에 중문을 세운 자리가 있으며, 그 뒤로 3층석탑과 금강터, 강당터가 남아 있다. 금당은 절의 중심건물로 규모가 전면 6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다. 이 안에는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대좌가 있다. 금당의 오른쪽과 뒤로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으며, 우물터도 발견할 수 있다.

절 뒤편 언덕위에 지금은 경복궁에 옮겨져 있는 원공국사승묘탑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원공국사승묘탑비는 절의 오른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왼쪽에는 이 절에서 나온 각종 석재를 모아 놓았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전한다. 절터 아래 옛 정산분교 자리에 있는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당간지주를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짐작된다.

 

▲ 금강터

 

▲ 금강터의 지대석(주초석) 

 

▲ 금강터에 남아있는 부처님을 모시던 화강암 불대좌 

 

♧ ♧ 거돈사지 삼층석탑(居頓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이 탑은 2중기단 위에 3층탑을 세웠으며,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사각의 돌로 된 축대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이 땅과 닿은 부분인 지대석(기초부에 까는 받침돌)은 4개의 크고 긴 돌로 만들었고, 그 위의 기단부는 위,아래층 모두 모서리기둥 2개와 버팀기둥 1개를 새겨 놓았다. 탑의 몸돌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모서리기둥만 새겨 놓았다.

각 층 처마의 받침은 5단으로 꺾여 있으며, 탑의 추녀 끝은 약간 치켜들려 있어 날렵함을 보여준다. 추녀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탑 위의 장식물로는 노반(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모양의 장식)과 복발(탑의 위쪽에 주발같이 엎어놓은 장식)이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2,3층 몸돌의 높이가 1층에 비하여 1/3로 줄어 있는 등 폭과 높이가 줄어가는 비율이 적어 매우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으로 볼 수 있다.

 

♧ ♧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址 圓空國師勝妙塔碑)

*보물 제78호

 

절터의 동쪽에 위치한 이 탑비는 원공국사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현종16년(1025)에 건립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신라 양식을 보이나 세부적인 기법과 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대인 귀부는 꽉 다문 입에 용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귀가 물고기 비늘같이 되어 있다.

등의 바탕에는 거북등 무늬의 육각형에 만(卍)자와 연꽃무늬를 교대로 넣었다. 등 중앙에는 비석을 받치기 위한 비몸 받침을 만들고 안상(귀부 면석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을 새겼다. 지붕인 이수는 구름 위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새겨 넣었다.

비석의 글은 최충이 지었고, 글씨는 구양순체로 김거웅이 썼는데 뛰어난 글씨체로 평가된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넣었다.

이 비의 내용에 따르면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955년(광종6년)에 오월국으로 유학한 뒤 그 곳에서 불교를 강의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 왕사 등으로 모셨다고 한다.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 절터 뒷편에 있었으나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보관하고 있다.

 

♧ ♧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址 圓空國師勝妙塔)

*보물 제190호

 

 

 

▲ 원공국사승묘탑 이정표 

 

▲ 원공국사승묘탑 있던 자리에 설치된 재현품 

 

이곳은 고려초의 고승으로 거돈사에서 입적한 원공국사의 유골을 모셨던 원공국사승묘탑이 있었던 곳이다.

 

 

 

 

원공국사승묘탑은 부도의 일반 형식인 8각형의 받침돌(하대석, 중대석, 상대석)과 몸돌(탑신), 지붕돌(옥개석) 그리고 보개로 되어 있으며 높이 2.68m로 비례가 알맞고 중후한 품격을 가지고 있다.

 

탑에 새겨진 조각이 화려하고 장엄하여 1938년 10월 18일 보물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공국사는 고려 태조13년(930)에 출생하여, 현종4년(1013)에 왕사가 되었으며, 현종9년(1018) 89세의 나이로 입적한 고려초의 고승이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 일본인 집으로 가져갔던 것을 해방 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고, 해방이후 원위치로 환수되지 못하고 용산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주시에서는 2006년 12월 13일부터 2007년 11월 21일까지 국,도,시비 2억원을 들여 재현품을 제작(제작자:중요무형문화재 120호 석장 이재순), 설치하게 되었다.

 

 

 

  

 

◀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 1000년 동안 거돈사를 지키며 절의 역사를 말해주는 느티나무

 

1982년 11월 3일 보호수(지정번호:강원-원주-9)로 지정된 느티나무로 수령이 1000년이 넘는 것으로 절 입구 축대 위에 거돈사의 긴 역사를 대변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고는 20m이며, 나무둘레는 720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