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구룡사(龜龍寺)/강원 원주

왕마구리 2009. 3. 8. 14:17

◀ 구룡사(龜龍寺) ▶

▲ 산책로인 구룡사 근처의 자연관찰로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치악산국립공원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장목(금강송) 숲길이 이어지는 영서지방의 대찰인 구룡사와 원주지역 100여 군데의 폐사지 중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 등 3대 폐사지를 돌아 보고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문화재와 고풍창연한 법당, 그리고 주변의 절경과 어우러진 산사가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던 명찰만을 찾아가다, 이번에는 절은 사라지고 건물을 떠받들던 기단과 석축, 그리고 한두 개의 탑들만이 남아 번성했던 옛 시절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계절만큼이나 황량함을 더해주는 폐사지를 함께 찾아보았다. 

이 폐사지들의 방문이 천년 세월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절터 한켠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고목 한그루가 겨울 찬바람과 함께 인적마저 드물어 더욱 쓸쓸한 마음을 자아내지만 '고독'을 즐기며 쓸쓸함에 취하여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 또 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번 기행은 원주지역의 현존하는 대표적인 사찰 '구룡사' 편과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폐사지를 찾아서... 흥법사, 법천사 그리고 거돈사' 편으로 나누어 소개를 하기로 한다.

【 일 정 표 】2009년 3월 2일(월)

                         구룡사 탐방-구룡소-자연관찰로 산책→흥법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갈 때 >> 부천-(도시외곽순환도로)-조남분기점/서서울요금소-(영동고속도로)-새말I.C.→구룡사주차장→새말I.C.-(영동고속도로)→문막I.C.-(42번국도)-(88번지방도/간현유원지방향)→흥법사지(16:06~16:23)-(88번지방도)-(42번국도)-문막읍-(49번지방도/부론면방향)→법천사지(17:12~17:27)-부론면-(531번지방도)-정산리-(11번군도)→거돈사지(17:50~18:20)

<< 올 때 >> 거돈사지-(갈때의 역순)-부론면-(49번지방도/충주,앙성방향)→단암삼거리-(335지방도)-(84번지방도)-(37번국도)→여주I.C.-(영동고속도로)-(갈때의 역순)→부천

 

【 구룡사 소개 】

백두대간의 주맥이 오대산 두로봉에서 서쪽 방향으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까지 한강기맥이란 산줄기를 분기시키고, 이 한강기맥의 산줄기가 태기산 인근에서 남북으로 또 하나의 산줄기인 영춘지맥(영월 태화산~춘천 새덕봉)을 분기시키는데 이 영춘지맥이 태기산을 지나 남진하여 영춘지맥의 대표 산인 치악산국립공원에 이르게 된다. 거기에 영서의 대찰 구룡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8년(668) 의상대사가 창건하셨으며, 통일신라말과 고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의 하나로 수 많은 고승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명찰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 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은 천하의 승지"인 치악산 구룡사는 황장목(금강송) 숲길을 따라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에 들어서 구도의 계단길을 올라 보광루 밑을 나오면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는 경내에 이르게 된다.

대웅전을 기준으로 좌측으로 천불전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천불전 뒷편으로 삼성각이 있다. 우측으로는 관음전, 그 뒷편에는 응진전, 그리고 응진전 우측 언덕배기에 담장이 쳐진 조사전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웅전 마당 앞에는 보광루가 위치해 있으나 현재 해체,보수공사(2008. 6. 17.~2009. 6. 30.)중이라 터만 사천왕문 뒷편에 남아 있는 상태이다.

 

▲ 조사전에서 내려다본 구룡사 경내 전경

 

구룡사 역사 및 유래

천삼백년전 메마른 폼이 학같은 노스님 한 분이 원주지방에서 절자리를 고르고 있다가 치악산으로 향해 떠났다.

이 스님이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원주서 치악산을 향해 육십여리의 길을 가던 스님이 그 곳에서 십오리를 더 가서 발길이 멈춘 곳이 지금의 구룡골이다.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지른데다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워 절을 세울만한 적지라 생각하고 대웅전을 세우려면 연못을 메워야하기에 연못으로 발을 옮겨 살펴보니 큰 연못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연못을 메우자니 용이 사는 것을 쫓아야겠고 참으로 난감한 일이구나"라고 스님이 말하는 것을 용들이 듣고 스님을 향해 "스님께서 벌써 우리를 내어 쫓을 생각을 하시니 우리도 마음이 안 놓여 살 수가 없오. 스님과 우리가 서로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스님이 이곳에 절을 못 지을 것이고, 우리가 지면 선뜻 자리를 내어 드리리다"고 했다.

 

스님이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하느냐?" 했더니

"그것은 잠시 두고 보면 알게 됩니다"고 대답한 용들이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우박같은 비를 쏱아놓았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스님 또한 물속에 빠져 죽는가 했으나 스님은 태연하게 앉았다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치악산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현재 '배넘이재'가 있다)

 

한참동안 비를 퍼부은 용들은 이만하면 스님이 물속의 귀신이 되었겠다 생각하고는 비를 거두고 내려와 보니 뜻밖에도 스님은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홉마리의 용들이 다 내려오자 부시시 일어난 스님이 "너희들의 재주가 고작 그 것 뿐이냐?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것인즉 너희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아라"하고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 속에 넣으니 얼마 안있어 연못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끓기 시작을 했다.

물속에서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용들이 뛰쳐나와 한다름에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아홉마리의 용 가운데 한 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서 미쳐 달아나지를 못하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용들이 달아나자 스님은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

눈이 멀어 도망하지 못하고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살던 한 마리 용은 지난 왜정때까지 살다가 그 해 여름 장마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아홉구(九)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게 된 연유

조선시대에 들어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품질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럴즈음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고 거북바위를 쪼개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는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이 점차 줄어들어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 때 도승 한 분이 또 찾아와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하고 말하였다.

주지스님이 "그건 무슴 말씀이지요?" 하고 물으니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동강내어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라 답하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주지스님이 재차 물으니, 도승은 거북은 이미 죽었으니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자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현판에 새겨진대로 치악산 구룡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 구룡사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용 모양 장식이 있는 구룡교

 

【 구룡사의 불전과 문화재들 】

 ♧ ♧ 구룡사 일주문

세속과 절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두 기둥위에 지붕을 얹은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고 기둥이 한 줄로 세워져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한다.

원통문이란 편액에 걸려있는 치악산 일주문에는 두 기둥에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恒萬歲以長今(항만세이장금)"이란 글귀가 새겨져있다.

이 글귀는 "천겁이 지나도 낡지말고, 만년동안 항상 오늘같이 길이 남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 구룡사 일주문

 

♧ ♧ 구룡사 대웅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971년 12월 16일에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전면으로 보아 기둥위에 공포(주심포)를 두고 주심포 사이에도 공간포를 이조씩 배치한 다포계 양식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로 되어 있다.

공포의 외부 제공은 양활형이 중첩되었고 앙성 윗몸에는 각각 연꽃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내부 제공은 하나로 연결하여 당초무늬를 조각하였다. 특히 불상위에 있는 보개는 중층으로 되어 특이하다. 천장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둘레에는 빗천장을 가설하되 연꽃과 봉황, 운문, 비천상 등을 채화하여 금단청과 함께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다.

창호는 정저살창을 짜 각각 사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오른쪽에는 미래불인 아미타불상, 왼쪽에는 과거불을 상징하는약사불좌상을 협시불로 현재불을 상징하는 석가불좌상을 모신 삼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의 오른쪽 벽면에는 신중탱화, 좌측 벽면에는 감로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주존인 석가불은 연화좌에 결가부좌하여 향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사각형의 얼굴에 눈은 반개하고 둥근 육계에는 계주가 박혀있다. 양쪽에서 협시를 이루고 있는 불좌상은 손가짐만 반대 방향으로 같은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불전은 공포 내,외부의 장식적인 조각솜씨 및 구조수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초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6년 보수, 단청하였다.

 

▲ 구룡사 대웅전 

 

▲ 대웅전의 풍경 

 

▲ 대웅전 앞 당간지주 

 

신중탱화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을 도상화한 불화를 말한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신중탱화는 일반적으로 제석과 하늘의 군사인 천룡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한 신중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이 신중탱화의 역할은 그 범위를 넓혀 참배자의 심성에 내재한 온갖 잡신을 쫓음으로써 심성을 청결하게 하여 이것이 곧 또 다른 호법과 호신의 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감로탱화

조상 숭배 신앙이나 영혼 숭배의 신앙이 그림으로 펼쳐진 것이다.

이것은 '우란분경변상도' 라고도 부르며, 혹은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 영가가 놓인 영가단에 걸기 때문에 '영단탱화' 또는 '감로왕탱화' 라고도 부른다.

 

 ♧ ♧ 용다사 동종(龍茶寺 銅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이 동종은 정조11년(1787) 화천 용화사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고종16년(1879) 양구 심곡사에 시주되어 사용되었다.

그 뒤에 언제 옮겨졌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주 구룡사에서 보관해오고 있다.

 

종의 전체 높이는 54cm, 입지름은 33cm이다.

종의 정상부에는 한 몸체에 용머리가 서로 반대쪽으로 있는 오메가(Ω)형(일체쌍두형)의 용뉴가 있다.

천관(종의 윗부분)은 반구형으로 종 몸통과의 사이에는 한 줄의 띠를 돌려 구분하고 있는데, 용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를 돋음새김하였다.

종의 몸통에는 세 줄의 띠만 돌려 4개의 부분으로 나누었을 뿐, 별 다른 장식이 없어 조선시대의 종중에서도 매우 퇴락한 형식이다.

 

종의 몸통에는 한자와 한글로 새긴 명문이 있다.

아랫부분의 한자는 종을 처음 만들 때의 것으로 1787년(건륭52) 낭천(지금의 화천) 용화산 용다사에서 주조한 사실을 가는 선(오른쪽 첫 2줄)과 점선으로 찔러 새겨(나머지 8줄) 기록하여 놓았다.

윗부분의 한글은 종이 다시 시주될 때의 것으로 1879년(광서5) 경성(서울)에 거주하는 청신녀 황씨가 양구군 동면 팔량리의 심곡사에 시주했다는 내용을 굵은 글씨로 잘 새기고 붉은 칠을 한 것이다.

이 내용은 1928년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쓴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의 '심곡사사적'에서도 확인된다.

 

이 종은 조선시대 종 중에서도 양식적으로는 퇴락한 형식이지만 원명(처음 만들 때의 명문)과 추명(뒤에 추가로 새긴 명문)이 있고, 이 시기의 종으로는 한글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좌측의 사진은 구룡사 범종루에 보관중인 종을 촬영한 것임)

 

▲ 구룡사 범종각

 

♧ ♧ 구룡사 보광루(普光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구룡사는 치악산 능선 밑의 급경사지에 동향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이후 산지에 건립된 사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룡사의 출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아랫부분의 트여 있는 가운데 칸을 통로로 삼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누하진입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경사진 지형에 조성된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보광루는 구룡사의 가람배치에서 불이문의 성격을 가진 건물로 공간의 위계를 구분함과 동시에 누각 아래를 통한 진입으로 전이공간 역할을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집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이 있는 든실한 원형기둥을 세워 아래 층을 구성하고 있다.

 

출입통로로 사용되는 가운데 1칸을 제외한 나머지 옆 칸은 판벽으로 막아 창고 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창고 안쪽으로도 기둥을 세워 놓았으며, 각 칸마다 두 줄씩 가로, 세로로 보를 놓았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 공간을 향해 벽채가 없이 개방시켰으나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처리하였고, 정면의 각 칸 사이에는 2짝 판문을 달았다.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하고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고, 이익공 형식으로 연꽃과 봉우리를 장식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봉황머리를 장식하였다.

누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이다.

 

◀ 현재 보광루는 실측조사와 해체보수로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공사기간:2008년6월17일~2009년6월30일

    *보광루 편액은 공사관계로 보광루에 함께 걸렸던 '치악산구룡사' 편액과 함께 대웅전뒤편에 떼어 놓아 보관중이다.(사진 上)

    *해체보수전 사천왕문을 통과하고 촬영한 예전의 보광사 전경(사진 下)

 

▲ 보광루 해체보수 안내문

▲ 해체보수로 터만 남은 보광루

 

♧ ♧ 구룡사 부도(浮屠)

구룡사 경내에 있는 승려들의 묘탑을 모아 놓은 곳으로 이곳은 비교적 넓은 곳에 말끔한 조경을 하여 환경도 좋고 보존 또한 양호하다.

일주문인 원통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대지에 9기의 석조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후기의 것으로 보이며 석종형과 석비형의 부도이다.

9기 가운데 주인공이 명시된 것은 6기이고, 건립연대가 명시된 것은 2기 뿐이다.

이 가운데 건룡10년 을축은 조선 영조21년(1745)에 해당되며, 승정후삼계사는 조선 영조49년(1773)이다. 이 2기의 석조부도에 절대연대가 있어 주목된다.

부도는 부처를 뜻하는 붓다에서 유래한 말로써 도력이 높은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묘탑이다. 처음에는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많이 세워졌으나,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재정의 부족 등의 이유로 석종형부도가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 구룡사 부도

 

♧ ♧ 구룡사 기타 불전들

▲ 사천왕문

▲ 천불전/대웅전 좌측에 위치

▲ 삼성각(삼신각)/천불전 뒷편에 위치

▲ 관음전/대웅전 우측에 위치

▲ 응진전/관음전 뒷편에 위치

▲ 조사전/응진전 우측 언덕에 위치

 

【 기타 구룡사 주변의 볼거리와 전경들 】

♧ ♧ 황장금표(黃腸禁標)

*강원도 기념물 제30호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황장금표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의 벌채를 금지하는 표시로 설치된 것이다.

대게 돌에 새겨 표시하게 되는데 이로써 표석이 위치한 일대가 황장목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예부터 왕실에서 소요되는 각종의 필수품은 전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 가운데 가장 양질의 것을 진상케 하였는데 황장목도 그 중의 하나이다. 황장목이란 나무의 중심 부분이 누런 색깔을 띠며, 나무질이 단단한 질좋은 소나무로 그 용도는 매우 다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질 좋은 목재의 확보를 위해 황장목 관리에 특별히 관심을 썼는데 치악산에는 질이 우수한 소나무가 많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이 가까워 관리에 유리하고, 뗏목을 만들어 섬강과 남한강을 거쳐 서울로 운송하기에도 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전국 60개소 황장목 봉산(널빤지로 사용하는 품질좋은 큰 소나무가 있는 국가지정 보호국유림) 가운데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다.

 

이 표석은 조선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매표소 왼쪽에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100여m 떨어진 도로 아래쪽에 또 하나의 표석이 남아있다.

 

처음에 발견된 제1금표는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데, 각자(刻字)의 크기는 대략 가로 11cm, 세로 14cm이다. 나중에 발견된 제2금표는 흙속에 일부가 묻혀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가로 24cm, 세로 25cm의 공간에 "黃腸禁標"라고 새겨져있다.

 

 

♧ ♧ 보호수

수종은 은행나무로 1982년 11월 13일 보호수(고유번호:강원-원주-38)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200년이며, 수고 19m, 흉고직경이 125cm이다. 구룡사 사천왕문 우측 약 20여m 떨어진 구룡사 절입구에 있다.

 

 

♧ ♧ 구룡사계곡

은혜 갚은 까치의 전설로 친숙한 치악산(비로봉 1,288m)계곡 가득히 사시사철 가득히 넘쳐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가 인상적이며, 구룡계곡은 깊고 평탄하면서도 무성한 수림으로 덮여 있어 수량이 많고 사철 독특한 멋을 자랑하여 특히 유명하다.

뛰어난 경관과 함께 아름다운 전설도 지니고 있어 구룡폭포의 9마리 용과 의상대사의 전설이 구룡사의 창건내력을 전해주며, 어진 선비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갚은 까치의 전설에서 유래된 치악산의 맑은 공기와 싱그러움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 ♧ 구룡소

예전에는 폭포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소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구룡사를 창건할 당시 이 절 연못에 살던 9마리의 용을 물리치고자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었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어 이중 8마리의 용은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나머지 한 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 이곳 소에서 살고 있다가 후에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지닌 곳이다.

 

 

♧ ♧ 치악산 연리지

가까이 사는 두 나무가 맞닿은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합쳐서 한 나무로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사랑에 비유하여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 ♧ 자연관찰로/산책로

구룡소를 지나면 좌측 계곡쪽으로 자연관찰로가 있다. 이곳 호젓한 산책로를 따르면 쭉쭉 뻗은 소나무숲이 이어져 구룡사 경내를 관광하고 한 번쯤은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구룡사에서 정면의 계곡 건너편에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이 산책로는 구룡사 입구로 다시 나오게 되어있어 산책거리가 길지않아 누구에게나 부담이 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