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고18회/추억의 앨범들

2008년 가을 가족야유회 및 18산우회 강원도 1박2일 여행-제4편-

왕마구리 2008. 11. 29. 22:05

◀ -제4편- 설악산 신흥사와 권금성에서... ▶

 

▲ 권금성 정상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촬영

 

솔비치 숙소 정리와 해변가 산책을 마치고 1박2일 강원도 여행 일정의 이틀째 관광을 위해 숙소를 떠난다. 늦은 출발로 예정하였던 낙산사와 하조대 관광을 취소하고 설악산국립공원 내 신흥사와 권금성 케이블카 관광만을 하기로 한다. 설악산국립공원 설악동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낙산사주차장 인근의 건어물 상가에 들러 약 30여분간 쇼핑시간을 가지고 설악동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1시를 넘긴 늦은 시간.

불황과 경기 침체의 여파로 가계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모두들 지갑을 닫고 필요없는 지출을 줄이며, 어렵게들 살아간다고 연일 메스콤에서는 떠들어 대고 있지만 이곳 설악동 주차장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차들로 빼곡히 들어 차 있고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관광철도 아닌데 이곳 상황만 본다면 불경기가 아니라 경기가 호황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설악동 입구로 진입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어 아까은 시간만 버스 속에서 낭비할 것 같아 중간에 하차하여 도보로 매표소에 도착을 하니 '케이블카 대기시간 '현재 1시간30분' 이란 안내판이 보이고, 입장권을 구입하고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예약을 하니 승차 예약시간이 오후 1시35분이다. 문화재 관람료 \2,500에 케이블카 이용권 \8,500으로 1인당 \11,000이란 거액이 투자된 관광코스인데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 본전 생각이 들지 않을지 모르겠다. 

2시간여의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울산바위나 흔들바위를 다녀오기는 시간적으로 부족할 것 같아 신흥사 관광을 우선 하고 비선대 방향의 산책로를 따라 왕복 1시간(왕복 약 2km) 정도 트레킹을 하기로 한다.

 

▷ 설악산 신흥사(雪嶽山 新興寺)

♣ ♣ 신흥사 소개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설악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 본사 중 제3교구의 본사이다. 신라 진덕여왕6년(652) 자장율사에 의해 향성사로 창건된 사찰로, 당시 계조암과 능인암을 함께 지었었다. 향성사란 이름은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인데 중향성은 금강산 철위산을 의미하며, 불토국은 부처님께서 교화 할 대상적 국토라는 의미와 정치적 형태의 국가라고 하는 뜻과 어울린 말이다. 창건 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이며 그 당시 구층탑이던 향성탑이 현재는 호텔 앞 3층(향성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43호)만 남아 옛 향성사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창건 당시 자장율사는 구층탑을 만들어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하나 이 구층탑이 어느 탑인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신라 효소왕7년(698) 향성사는 능인암과 함께 화재로 불타버렸고 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701년 의상대사가 자리를 능인암 터로 옮겨 향성사를 중건하고 절 이름을 선정사로 개명하였다. 이때 의상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3존불을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 동안 번창하였으나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파괴되었고, 인조20년(1642)에는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644년에 운서, 연옥, 혜원 등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이 소림암으로부터 나타난 신인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년이 지나도 3재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고, 선정사 옛 터 아래쪽 약 10리 지점에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를 점지해 주어 흥왕하게 되었다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1647년애는 대웅전이 건립되었고, 현종2년(1661)에는 해장전을 짓고 '법화경' 등의 판본을 두었으며, 숙종41(1715)에 설선당이 불에 타버리자 1717년에 취진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영조1년(1725)에는 해장전을 중수하였고, 1737년에는 명부전을 창건하고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순조1년(1801)에는 벽파 등이 용선전을 짓고 열성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13년에 불이문과 단속문을 주운 등이 세웠고, 벽파 등은 보제루를 중수하였다. 1821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철종9년(1858)에는 벽하, 명성 등이 16나한을 구월산 패엽사로 부터 해장전으로 옮기고 해장전의 이름을 응진전으로 고쳤다.

 

 

그 뒤 1909년에는 용선전이 헐리고, 1910년에는 응진전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1912년에는 건봉사의 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설선당 후각 32칸을 중수하였다. 6.25전쟁으로 고성군 건봉사가 전소되어 영북지방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어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원력으로 신흥사를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 절의 주지를 지냈던 성원이 대소의 당우들을 거의 모두 중건 또는 중수하였고, 범종을 새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락보전, 명부전, 영산전, 보제루, 천왕문, 일주문, 불이문, 적묵당, 설선당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1644년에 세운 건물로서 중앙의 공포와 단청이 지극히 아름답다. 현재 봉안된 삼존불은 의상이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보제루는 휴정 등 60여인의 진영이 안치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효종이 하사한 향로와 김정희의 친필이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청동시루, 범종,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경판 277매, 사천왕상 등이 있다.

청동시루는 순조의 하사품으로 벽파가 역대 왕조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것이고, 경판은 효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자, 한글, 범어가 혼합되어 있는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높다. 경판의 종류로는 '은중경' 전질과 '법화경' 일부 등이 소장되어 있다.

범종은 경내 보제루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종은 1400여년 전 향성사의 종이라 전한다. 향성사가 불탈 때에 깨어졌던 것을 1748년에 원각이 개주하였으나 소리가 완전하지 못하여 1758년에 홍안이 다시 개주하였다. 이 종은 6.25 전쟁 때 총상을 입은 뒤 1963년 수리하여 보존 중이다.

부속암자로는 선정사 옛 터에 세워진 내원암, 655년에 건립한 개조암, 정조9년(1785)에 창건한 안양암 등이 있다.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여러가지 중요한 불사를 전개해 나가 지역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신흥사가 과거 신흥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흥사가 되었다며 신흥사의 사명을 귀신 신(神)자를 시대에 맞게 새로운 신(新)자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신흥사(新興寺)로 바꾸게 되었다.

 

▲ 신흥사 경내에서...

 

♣ 신흥사 극락보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

▲ 신흥사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모신 신흥사의 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끝은 우진각지붕과 같다. 맞배지붕과 함께 한식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형태)의 다포(공포를 여러개로 받침) 단층집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25년(1647) 영서, 연옥, 혜원 세 스님이 창건하였고, 영조26년(1750) 각증 등이 중수하였다. 순조21년(1821) 거관, 근민, 부총, 승기, 창오 등이 중수하였고, 순조27년(1827)에는 단확하였으며, 최근에는 1977년 보수하였다.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 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의 아름다움과 단청의 다양한 문양은 다른 건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공포는 3출목이며, 쇠서는 끝이 위로 올라간 양서로 되었고, 소로와 첨자의 아랫 부분이 직면으로 사절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면어칸 사분합문의 꽃살문양과 협칸의 빗살문양이 돋보인다. 극락보전을 올라가는 석조계단은 하나의 돌로 된 층계인데, 영조37년(1761) 홍징, 홍운 등이 쌓았다.

1977년 보수 때 계단을 3조로 개조하였다. 계단 하단 양쪽에 용두를 조각하였고, 측면에 귀면상을 조각하였다. 축대 정면 왼쪽에는 길상초와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전내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 신흥사 보제루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소재지: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170

▲ 신흥사 보제루

 

신흥사의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장방형의 큰 누각이다. 장대석으로 쌓은 2단의 축대 위에 정면 7칸(22.4m), 측면 2칸(8.5m)의 누마루식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보제루 내부에는 직경이 2m에 이르는 비자나무통에 황소 여섯마리 분의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법고와 3m 남짓한 크기의 용머리를 취한 목어, 신흥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현판 특히 네 벽에 시판과 추사의 친필이 있어 유명하며, 6.26전쟁 당시의 총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종이 보관되어 있고 재건 이전 건물외벽에 그려진 탱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 신흥사 경판

신흥사에 소장된 경판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을 비롯하여 '법화경' 경판 일부. '다라니경' 경판 일부와 기타 흩어져 있는 몇 매의 경판 등 총 277매이다. 이 중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은 3,4,13,14쪽의 경판이 빠져 있다.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을 함께 싣고 있으며 중요한 부분은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

19종의 목판으로 한자, 한글, 범어가 혼합되어 있는 희귀한 것으로 그 가치가 크며, 현종2년(1661)에 지어진 해장전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858년 응진전으로 바뀐 후 현재는 보제루에 보관되어 있다.

이 경판 끝장에 "순치15년 강원도 양양부 설악산 신흥사 개간" 이라는 연대 기록이 있어 효종9년(1658)에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보제루는 1985년 9월 1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영조46년(1770년)에 세워진 것으로 누각식으로 되어 하층 중앙칸은 극락보전으로 가는 통로가 되고, 상층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본래 사찰의 본전 앞에 세워지는 누각은 각종 법회를 거행하던 곳이었으며, 사방이 개방되어 있다. 현재는 그 기능이 사라졌으며, 세살의 분합문을 달았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제루가 세워져 있으며 왼쪽으로는 종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 신흥사 일주문

▲ 신흥사 일주문

 

사찰의 구조물에는 각각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통해 우리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점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배열되어 있다. 사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승원과 당(堂)이다.

당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이 되는 불당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금당' 또는 '법당' 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 당이란 불상을 봉안한 불당이나 법당 뿐만 아니라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과 강당 등도 포함된다.

또한 불당은 불상을 봉안하고 불교의 각종 행사를 봉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강당은 경과 율을 강설하고 연구하는 장소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사찰구조는 탑을 중심으로 건축물이 배치되었다고 하며, 그 건축물들의 이름은 그곳에 모셔진 부처님에 따라 다르게 이름지어 부르고 있다.

 

▲ 일주문을 배경으로 윤창희 동기 부부

▲ 일주문을 배경으로 서영호 동기 부부

▲ 일주문을 배경으로 천영면 동기 부부

 

사찰의 문-일주문은 산문이라고도 하는데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 절 이름이 적힌 현판이 결려 있다.

일주문을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이곳을 기준으로 승과 속,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가 나누어진다. 절 입구에 있는 첫번째 정문이며, 경내와 경외를 구분하는 문이기도 하다.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만 세워서 만든 문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절에 따라서는 양쪽에 기둥을 하나 이상씩 세운 것도 있으므로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건축물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다.

 

♣ 신흥사 사천왕문

▲ 신흥사 사천왕문

 

세심교를 건너면 굵직굵직한 돌로 쌓아 올린 돌담사이로 사천왕문이 나타난다. 사천왕문은 순조11년(1811)에 주운스님과 철수스님이 창건하였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972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통 사찰에는 경내외를 구분하는 문으로 해탈문 혹은 불이문을 두고 있으나 신흥사는 사천왕문이 경내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다.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신 문으로 이곳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웠다. 사천왕은 33천 중 6천의 첫번째인 사천왕천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은 동쪽을 수호하는데,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 또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은 악인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고 하며, 칼을 들고 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 그리고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은 북쪽을 수호하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

사천왕은 4곳의 방위에 따라 배치되어 각 방위에 따라 주제하는 역활과 내용을 다르게 지니고 있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동서남북 4중에 위치해 있으며 각각의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사천왕은 그 위치와 지닌 물건 즉 지물로써 구별하고 있지만 사찰에 따라 천왕과 지물이 일률적으로 일치되어 있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불교입문서를 기준으로 하여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동쪽:지국천왕=손에 칼을 들고 있으며, 인간의 감정 중 기쁨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서는 봄을 관장한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의 향기만 맡는다는 음악의 신인 건달바와 부단나의 신을 거느리고 동쪽 하늘을 지배한다.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을 띤다.

*서쪽:광목천왕=손에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으며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면서 가을을 관장하고 용과 혈용귀로 불리는 비사사 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을 다스린다. 얼굴색은 백색이다.

*남쪽:중장천왕=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여름을 관장하며 구반다(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고 있다)와 아귀를 거느리고 남쪽 하늘을 다스린다. 남쪽을 상징하는 적색을 띤다.

*북쪽:다문천왕=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겨울을 관장하며 야자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 하늘을 지배한다. 얼굴색은 흑색이다.

 

♣ 통일대불

▲ 신흥사 입구에 봉안된 '통일청동대불좌상'

 

민족통일 비원을 안은 청동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1987년 8월 30일 착봉하여 10년간의 통일청동대불좌상 조성불사를 마치고 1997년 10월 25일 점안 대법회를 봉행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한 청동대불은 좌대 높이 4.3m, 대불 높이 14.6m, 좌대 직경 13m, 아파트 6층 높이에 소요 청동이 108톤이나 된다. 8면 좌대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16나한상이 섬세하게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화려한 것은 지름 10cm의 인조 큐빅 1개와 8cm짜리 8개로 된 미간 백호는 중생계의 무명을 밝혀주듯 찬란한 광채를 발광한다. 1997년 점안식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3과와 다라니경, 칠보 등 복장 유물도 함께 봉안되었다. 20세기 불상 양식으로 기록될 신흥사 통일대불은 불상의 대가인 전 동국대 총장 황수영, 교원대 박물관장 정여호, 전 동국대 교수이신 故 홍정식, 한림대 교수 김정기가 자문하였다.

불교미술관장이신 김성호와 자문위원들은 수시로 만나 청동대불의 석고, 주물, 조립을 비롯한 모든 과정을 점검하여 제작에 헌신하였다.

1987년 8월 공사를 시작한 청동대불 법사는 4년 동안 석고로 불상의 원형을 만들었고, 1994년에는 주물작업을 끝냈으며, 1995년에는 청동조각조립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0년간의 조성기간동안 전국 각지에서 30만명이 동참하여 무사히 봉안될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인종과 종교, 종파를 떠나 우리 민족 최대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뜻이 불상 조성에 녹아 들었으며, 특히 실향민이 많고 북한과 인접한 신흥사에서 통일대불이 봉안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 속담에서 강 같은 세월은 청동대불이 봉안되기 까지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스님이 세 분이나 바뀌었고, 종교의 벽을 넘는 대역사는 불교사에 큰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현대는 철기시대라 한다면 철기시대의 유산으로 후대에 기억될 것이다.

 

▲ 설악동 입구에서 김가연 모녀(김경암 동기 가족)

▲ 설악동 입구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단체 기념촬영

 

신흥사 관광과 비선대로 향하는 산책로 탐방을 마치고 권금성 케이블카 탑승장에 오후 1시 20분경 집결, 앞으로의 일정을 협의하고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권금성 관광에 들어갔다. 김광훈 동기가 신혼여행 때 이곳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신혼설계를 하였다 하고, 이종익 동기 부부도 신혼여행을 설악산을 다녀 갔다고 옛 추억을 더듬으며 그 때를 회상하여 이번 일정이 두 부부의 추억여행의 한 코스가 된 것 같아 나머지 일행들은 두 부부의 추억여행 들너리가 된 꼴이 되었다.

회비 똑 같이 내고 누구는 옛 추억을 회상하며 부인에게 점수 따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머지는 왜 이곳에 와서 찬바람 쌩쌩 부는 권금성 꼭대기에 올라야 하는지 모르겠고 집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별도로 추억여행을 떠나자고 선수를 치던지 그렇지 않으면 권금성의 찬바람은 모두들 집에 돌아 갔을 때 시베리아의 혹한을 동반한 매서운 강풍이 변하여 집안 분위기가 썰렁한 겨울나기를 해야만 될 것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아무도 모르게 이번 여행코스를 차리리 우리 집사람하고 즐거운 추억 만들었던 여행지로 변경하여 옛 추억이나 되돌아 볼걸... 괜히 몇 번이나 왔던 이곳에 다시 와서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게 옛날에 우리 마누라 좋아했던 곳을 코스로 잡아 이번 여행을 계획했더라면, 집에 가서 우리 추억여행에 많은 친구들이 함께 축하해 주는 것이라고 뻥이나 쳤으면 약발이 한 6개월은 갈건데... 아! 아쉽고 아까운 기회를 놓친 여행이 되었구나...

그래도 광훈이는 케이블카 타고 내려와서 선두그룹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오뎅꼬치라도 샀다는데 종익이는 뭐야? 추워 죽겠는데 오뎅도 안 사면서 후미에 내려서 마누라 손 잡고 혼자 신나서 탱자 탱자 제일 꼴지로 내려와 오뎅 안 먹은 나를 열 받게 만든다.

"종익아! 평소에 잘해라. 신혼여행 추억, 약발 길어야 너는 일주일이다. 평소에 나처럼 잘하면서 분위기 띄워야 약발이 6개월 이상 가지, 너는 평소에 죄 지은게 많아 약발 길게 안간다. 너는 약발 받게 할려면 마누라 모시고 매주 여행 다녀야 한다. 알았지!"

 

▷ 설악산 권금성

▲ 권금성 전경

 

♣ 권금성(權金城)

전설에 따르면 권씨와 김씨 두 장사가 난을 당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적들과 싸우기 위하여 하룻밤 만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고려 고종41년(1254) 몽고의 침입 때 백성들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해발 850m의 정상인 봉화대를 중심으로 길이 2.1km의 산성이 펼쳐져 있으며, 정상에 서면 서쪽 방향으로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인 공룡의 등을 닮았다 하여 이름지어진 공룡능선의 기암들이 절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동해바다와 속초시의 경관이, 북쪽으로는 울산바위가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주변의 전경(1)

▲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주변의 전경(2)

▲ 권금성에서 바라본 공룡능선(뒷쪽의 능선) 전경(1)

▲ 권금성에서 바라본 공룡능선(뒷쪽의 능선) 전경(2)

▲ 권금성에서 조망된 울산바위

 

남쪽 방향으로는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은 집선봉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대신 중청이 조망되고, 공룡능선과 화채능선 사이의 깊은 계곡이 조망되는데 1969년 2월 한국산악회(당시 회장 이은상) 해외원정대 훈련 중 폭설로 20명의 대원 중 10명의 대원(주로 대학 산악회 소속)이 조난되어 전원 꽃 다운 청춘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던 죽음의 계곡(현재 위험구간으로 입산금지)이다.

또한 대한뉴스 및 TV 방송사 애국가 영상의 배경 무대가 되었던 천불동 계곡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

 

 

▲ 권금성 정상에서...

▲ 권금성 암봉 정상까지 오른 무서운 두 부부

 

▲ 권금성 암봉까지 오른 외로운 기러기들

 

 

▲ 권금성 암봉을 내려서는 모습들

 

권금성 최정상인 봉수대가 있는 암봉 끝까지 총 11명이 올랐는데, 가족 중 단 한명도 오르지 않은 겁많은 가족과 부부는 김광훈 부부, 김상수 부부, 김정두, 이성규 부부, 그리고 이현동 가족이다. 이 명단을 별도로 밝히지 않더라도 위에 게재된 사진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굳이 밝히는 이유는 본 여행기를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지 별 다른 의도는 없음을 밝혀 둔다. ㅋㅋㅋㅋㅋㅋㅋ

권금성 관광을 끝으로 이번 1박2일간의 2008년 가을 가족야유회 및 18산우회 강원도 관광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예상보다 교통 체증이 곳곳에서 일어나 의도한 만큼의 충분한 관광지를 탐방하지는 못하였지만 재경 동기회 사상 최대의 인원이 1박2일이라는 긴 여정동안 웃고 즐기며 함께 한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다.

끝으로 함께 한 동기 및 가족들에게 이번 여행이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고, 여행을 진행하며 본인이 원하였던 여행지가 빠져 섭섭하였거나, 방문한 여행지일지라도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더라도 전문가가 아닌 초보자의 계획과 얄팍한 여행 지식으로 인하여 빚어진 잘못이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충분한 사진을 찍어 보다 많은 볼거리와 즐거움을 여행에 동참한 친구나 가족들, 그리고 바쁜 일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선사해 줘야 하는데 디카 탓만 하며 제대로 준비하여 여행기에 올리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4편에 걸친 1박2일 여행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형편없는 타자 실력으로 오타가 있더라도 질타를 마시고, 문맥상의 흐름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