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명찰을 찾아서

안성의 3대 명찰(칠장사,청룡사,석남사)을 찾아서...

왕마구리 2009. 8. 22. 19:01

◀ 안성의 3대 명찰(칠장사,청룡사,석남사)을 찾아서... ▶

 

▲ 석남사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에서...

 

용인과 이천의 경계(용인시 백암면)에 위치한 창고에 출고업무차 내려갔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인접 안성시에 소재한 천년고찰인 3곳을 둘러보는 기회가 있었다. 청룡사는 서운산 산행으로 3차례, 칠장사는 3정맥(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남한남정맥)의 분기점이 있는 칠장산을 오르내리며 2차례 이미 방문한 경험이 있었지만 산행을 하기 위해 산행들머리나 날머리로 이용을 한 관계로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하여 이번에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석남사는 서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3차례의 산행이 모두 청룡사를 기점으로 실시가 되어 이번 방문이 첫 방문이 이었다.

3곳의 절이 모두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이고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볼거리가 다양하고, 절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석남사는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법당들이 세워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또한 청룡사는 절 들어가는 입구에 청룡호수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호수에서는 물놀이(보트 등)를 즐길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어 가족이나 연인들이 찾기에 적합한 곳이고, 석남사로 가는 길은 계곡을 끼고 있어 많은 피서객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었으며 좁은 도로 갓길에 피서온 관광객들의 차량들이 주차를 해 있어 오고가는 차량들이 교차를 할 때에 약간의 애로가 있었다.

이번 '안성의 3대 명찰을 찾아서...'에서는 3곳의 명찰을 각 사찰별로 나누어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여행기를 대신하기로 한다.

【 일 정 표 】2009년 8월 3일(월)

                         안성목장-청룡사/펑룡호수-석남사-금광호수-안성객사-칠장사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청룡사(靑龍寺) 】

 

 

▲ 청룡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청룡호수

 

◈ 청룡사 연력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 ♧ 청룡사 대웅전

*보물 재824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번지

 

 

 

 

서운산에 있는 청룡사는 고려 원종6년(1265) 명본국사가 건립하여 공민왕13년(1364) 승려 나옹에 의해 새롭게 지어진 유서 깊은 사찰로 조선 초기까지도 왕실의 원찰이었던 곳이다. 대웅전이 다시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34년(1601)에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몇차례 고쳐지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에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운 다포계 팔작집이다.
지붕가구는 7량으로 구성되었고, 내부 천장은 일반적인 불전과 달리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전을 만들어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그 위에 부처를 보호, 장식하기 위해 닫집을 달아 장엄하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부분은 원래의 생김새대로 다듬아 사용한 부재들의 치목수법이다.
특히 전면 기둥은 비교적 가지런하지만 양 측면과 후면에 사용된 기둥은 휘거나 아래가 두껍고 위는 가는 것 등 여러 형태의 기둥이 사용되었고 지붕가구에도 휘어진 대들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 불전을 고쳐지을 때 목재가 부족했던 형편을 반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부재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주의 미학과 비정형의 부재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목수의 기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자연목 그대로를 사용한 나무기둥들

  

  

 

또한 지붕에 왕실사찰임을 나타내는 청기와 한 장이 남아 있어 옛 왕실의 보호를 받던 사찰(통상적으로 3장의 청기와를 얹어 왕실사찰임을 표시했는데 중수 과정에서 2장은 사라지고 현재 1장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이었음을 알 수가 있고, 대웅전 풍경이 설치된 처마 모서리(전면 양쪽)에는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나옹화상이 절을 지을 때 사천왕문을 짓지 않고 대웅전의 양 모서리에 사천왕상을 그려 이것으로 사천왕문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실제 청룡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 대웅전 좌측 처마에 그려진 사천왕상

 

▲ 대웅전 우측 처마에 그려진 사천왕상 

▲ 왕실사찰이었음을 나타내는 지붕의 청기와 1장

 

♧ ♧ 청룡사 동종

 *보물 제11-4호 

 

이 종은 검은 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서 원래는 1674년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도 매일 행해지는 예불의식 때마다 종을 치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용 모양의 종을 거는 고리(용뉴)가 있다. 그 아래에 배가 불룩한 포탄모양의 종신이 있다.

종신의 표면을 보면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進言)'을 한줄씩 새기고 그 아래 사다리꼴로 된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든 4구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패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같은 구성법은 17세기 전반기에 정통 승장계 장인들이 주로 썼던 방식이다.

 

이 종은 숙종 대에 경기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장 사인비구가 30대 중반에 지준, 태형, 도겸, 담연, 청윤 등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보이는 전통 계열의 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종들 가운데도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범종 연구와 승장들의 사회 및 사원경제 구조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룡사의 동종은 현재 명부전에 보관중이다.
 
 (참고) 사인비구가 제작한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으며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11-1호 :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
         *보물 제11-2호 : 문경 김룡사 동종
         *보물 제11-3호 : 홍천 수타사 동종
         *보물 제11-4호 : 안성 청룡사 동종
         *보물 제11-5호 : 서울 화계사 동종
         *보물 제11-6호 : 양산 통도사 동종
         *보물 제11-7호 : 의왕 청계사 동종
         *보물 제11-8호 : 강화 동종
 
 

♧ ♧ 청룡사 감로탱

*보물 제1302호

 

감로탱은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이나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그린 불교 그림인 탱화를 말한다.
조선 숙종18년(1692)에 제작된 가로 200cm, 세로 237.5cm 크기로 3단 화면 구성을 이루고 있다. 청룡사 감로탱은 국내에 전하는 감로탱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사례가 드문 17세기 것으로 의미가 있다.
상단은 아미타삼존, 관음지장보살, 인로왕보살 등을 그렸고, 중단에는 성반의식을 그렸으며 하단에는 속세의 여러 장면을 함께 표현하였다. 특히 불,보살의 몸에 금니를 칠하여 다른 불화에서는 거의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주목할 만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중단부의 산과 수목의 표현은 당시 유행하던 일반회화 화풍과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단의 여러 장면들은 17세기 이후 풍속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회화사적 의의가 높다.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그리고 선명한 색채로 격조 높은 이 작품은 미술사적 의의와 함께 중생제도와 효사상 강조에 의의 또한 찾을 수 있다.
 

♧ ♧ 청룡사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257호

 

 

 

괘불탱이란 야외에서 불교의식을 행할때 높이 걸어 놓아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만든 커다란 의식용 불화를 일컫는 말이다.
이 괘불은 가로 6.56m, 세로 9m의 화폭에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의 모임인 영산회를 명옥 등의 화원이 그린 것이다. 짙은 녹색과 적색이 주로 채색되어 전체적으로 무거운 감이 있으나 상단의 화려한 천상세계와 하단의 상서로운 구름과 꽃 문양이 복잡한 구도를 여유있게 보이게 한다.
이 괘불은 전형적인 영산회상도로서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괘불의 화면 중앙에는 결가부좌한 부처가 있고 양옆에는 부처의 수제자인 아난과 가섭이 있다. 앞쪽 양옆으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있다. 그 뒤로 각각 화불과 정병을 들고 있는 자비의 보살인 관음보살과 광명과 지혜의 상징인 대세지보살이 부처를 향해 몸을 약간 든 채 서있다. 이들 좌,우에는 각 방위를 우호하는 사천왕이 그려져 있고, 화면 중앙의 양끝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 제석천과 범천이 호위를 하고 있다.

부처의 윗부분에는 10대 제자와 백지불, 사찰의 입구를 지키는 4구의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고, 그 보다 작은 크기로 용왕, 용녀, 팔부신장 가운데 야차, 겅달바, 아수라, 가루라가 그려졌다. 부처의 이마에서 퍼져나오는 상서러운 기운 속에 보개와 보살 모습을 한 화불이 있고 양쪽에 있는 원안에는 7구의 화불이 있다.

 

♧ ♧ 청룡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9호

*소재지: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번지 

 

 

이 탑은 높이가 2.38m로 평면 사각형의 단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지대석 위에 3단의 받침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4장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각 면에 모서리 기둥(우주)과 버팀기둥(탱주)이 새겨져 있다. 탑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으며 탑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1층 탑신에 비해 2층과 3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져 비례가 흐트러져 보인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다가 전각에 이르러 살짝 반전되었으며 합각선이 뚜렷하다.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석탑에도 훼손이 있다. 

 

 

 

 

 

  

 

 

 

 

 ♧ ♧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이 보살상은 원래 관음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조선 경종2년(1702)에 만들어진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는 보살상으로서 양감도 비교적 풍부하고 청동으로 주조되고 화려한 영락, 보발 표현 방식, 얼굴과 신체의 사실성 및 단아한 분위기 등에서 고려 후기 조각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신체는 다소 장대해진 느낌이 들고,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단순화된 영락장식 등을 고려할 때 조선 초기인 15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청룡사의 기타 전각 및 볼거리

 

▲ 명부전

▲ 범종각

▲ 산신각

▲ 벼락맞아 고사하였다 살아난 경내 앞마당의 층층나무 한그루

 

 

 

▶ 층층나무의 달마 형상

 

 

 

 

 

경내 앞마당에 층층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고사하였다가 나무 중간에 달마 형상이 있어 달마대사의 신통력으로 다시 살아 소생하게 되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청룡사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꼭 앞마당 층층나무의 달마상을 꼭 찾아보시기 바라며, 대웅전의 양쪽 처마밑에 그려진 사천왕상과 지붕위에 얹어 넣은 청기와 한장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니다!!!

 

 

 

 

 

 

 

 

 

 

【 칠장사(七長寺) 】

 

◈ 칠장사 연력

 

 

 

경기도 칠현산(七賢山)에 있는 칠장사는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7세기 중엽(신라 진덕여왕 648년경)에 자장율사가 창건 하였으며 10세기경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넓혀 세웠는데 ‘칠장사’와 ‘칠현산’이라는 이름도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선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해소국사가 입적한지 6년후인 고려 문종14년(1060)에 왕명으로 태자보소 김현이 지은 국사의 행적비와 9층 사리탑이 현재의 비전자리에 세워졌다. 충렬왕34년(1308)에 국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홍제관이 세워지면서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우왕9년(1383)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는 고려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1389년 다시 개천사로 복장하였다(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으며 또한 칠장사도 이때 병화로 건물이 소전되었다.
조선중종원년(1506)에 흥정대사에 의해 삼창이 되어 경기도에서 몇 안되는 큰 사찰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혜소국사 9층 사리탑이 망실되고 방화로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또한 명종(1560년경)때에 생불로 추앙받던 병해대사는 칠장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는데 유명한 임꺽정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그때 임꺽정은 스승을 위해 목불을 조성하였는데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조 원년(1623)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아서 크게 중수하였으며 5불회괘도 1점, 친필 금광명최승왕경 10권 1질, 친필족자 1축을 하사하여 지금도 전한다. 이후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 세도가들이 또 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29년(1703)에는 탄명스님이 비전 개울옆 바위위에 나한전을 짓고,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삼불회괘불을 조성하여 명복을 빌었는데 이런 연유로 칠장사는 2점의 괘불을 보관하는 유일한 사찰이 되었다.
숙종30년(1704)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에 선진, 두한대사가 원통전을, 이듬 해에는 윤영, 처휘스님이 원통전에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고, 사간스님이 명부전을 짓고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모셨으며 천왕문과 해탈문을 건립하였다.
또 절 북쪽에 미타전과 벽응대사 진영당을 세웠다. 진영당 앞에는 정두경이 지은 비명과 9층사리탑, 제월당사리부도탑, 흥정대사부도탑이 있었는데 현재 9층사리탑은
 망실되었다. 영조12년(1736)에는 설영, 도정스님이 법당과 천왕문을 중수했고, 1751년 유선대사가 명적암을 창건했으며 암자 아래에 탄명스님이 53불상과 53불명호비를 조성했는데 현재는 53불명호비만 남아있어 칠장사로 옮겨져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2동의 건물과 혜소국사탑과 탑비, 철제당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 ♧ 칠장사 대웅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공포형식은 기둥 상부이외에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각 칸마다 2개의 간포가 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이 되어 있고, 중앙에는 석가삼존불을 모셨다.

 

♧ ♧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 제488호

 

 

▲ 혜소국사비 비신 양측에 새겨진 쌍룡 문양 

 

 

▲ 혜소국사비 이수 

 

▲ 혜소국사비 귀부 

 

헤소국사는 고려 광종3년(972)에 출생하여 10세에 입산하였고,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고승으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며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83세가 되던 문종8년(1054)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이 비는 고려 문종14년(1060)에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가 썼다.

비신의 높이는 241cm, 폭은 128cm이고 비신의 양측에는 쌍룡이 새겨졌으며 그 솜씨가 극히 뛰어나다.

 

♧ ♧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

* 보물 제983호

 

 

이 석불입상은 원래 죽산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겼다가 1980년경 칠장사로 옮겨온 것이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66.5cm, 총 높이는 206cm이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의 화불을 새기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교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 ♧ 죽림리 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부재를 죽림리 강성원목장에서 관리하여오다 강성원선생의 기증으로 2005년 11월 28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설치하였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75cm이고, 상대갑석은 하나의 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한 면에는 둥근 문고리를 조각하였으며 탑신마다 모서리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돌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상륜부에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오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 칠장사 철당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당간은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지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총 높이는 9.7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으며, 아랫 부분은 화강암으로 된 2.9m 지주 사이로 버티고 있다. 이 철당간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칠장사외에 청주 용두사지와 공주 갑사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어 매우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 ♧ 칠장사 사적비

 

 

칠장사로 들어가는 입구 철당간 옆에 위치한 화강암 석비이다. 비좌는 자연석의 상면을 고르게 다듬어 마련하였으며 비신은 상부를 둥그렇게 활모양으로 깎았다.

비신의 앞면에는 중수기록이 음각되어 있다. 이 사적비는 칠장사의 창건연대와 중수과정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건립시기는 비신의 전면 우측에 음각되어 있는 명문을 통해 현종12년(167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안명노가 짓고, 이석징이 글을 썼으며, 이구가 전액하였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223m, 폭 106m, 두께 28cm이다.

 

칠장사 철당간과 칠장사 사적비는 칠장사 주차장/일주문 전 칠장사 들어오는 도로 좌측 길가에 위치해 있다.

 

♧ ♧ 칠장사 나옹송

 

 

나한전 뒷편에 있는 이 소나무는 나옹스님이 심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나옹스님(1320~1378)은 고려 말 왕사로서 휘는 혜근, 호는 나옹이며 본 이름은 원혜이다.

나옹송의 높이는 약 8m, 둘레는 2.1m로 1997년 8월 30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 칠장사의 기타 불전 및 문화재들

▷ 국보 :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 보물 : 삼불회 괘불탱

▷ 경기도 지정 문화재 : 소조사천왕상, 인목대비 친필족자 등

 

▲ 칠장사 일주문

▲ 사천왕문

▲ 누각

▲ 범종각

 ◀ 원통전과 원통전의 편액

 

 

【 석남사(石南寺) 】

 

 

◈ 석남사 연력

 

 

 

안성시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서운산 동쪽 기슭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있다. 서운산 북쪽의 석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절 입구에서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까지 오르는 돌계단의 경관이 볼 만하다.

통일신라 문무왕20년(680) 고승 석선이 세웠고,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가 크게 중건 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 렀던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곳으로 임진왜란때 불타 나중에 화덕이 중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석남사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두 불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누각, 탑, 부도, 마애불 등이 있는데 이들 유적과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으나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사역 근방에 남아 있고, 조선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석탑 등으로 미루어 법등은 꾸준히 계승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쳐마 맞배지붕 으로 단촐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대웅전 바로 아래 학이 나는 듯한 팔작지붕집이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풍겨난다. 영산전은 정 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팔작지붕집이다. 날렵한 지붕 끝이 숲속에 살포 시 가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더한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적 의의가 크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

 

♧ ♧ 석남사 대웅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 대웅전 편액

 

 

 

 

 

 

 

 

 

 

 

 

 

 

 

 

 

 

◀ 대웅전 내부의 휘어진 보

 

 

 

 

석남사는 퉁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고, 고려 초기 혜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 태종7년(1407)에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절인 '자복사'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영조1년(1725) 혜원선사가 대웅전과 영산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으로 18세기경에 대웅전이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1978년에 옮긴 것이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전면 귀공포의 형태로 보아 원래 지붕은 팔작 형식이었으나 후에 맞배지붕으로 고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중앙에는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고 그 위에 보기드문 2층 구조의 닫집이 있다.

이 불전은 내부에 휘어진 보 등을 사용하였으며, 건립된 후에는 여러 번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 ♧ 석남사 영산전

*보물 제823호

 

 

 

영산정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시는 불전의 명칭인데 이곳은 16나한을 함께 봉안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팔작집인데 칸수에 비해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민홀림기둥(기둥 뿌리가 굵고 위로 올라가면서 굵기가 줄어드는 기둥)을 세우고 지붕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내부를 보면 불단은 건물 뒷 벽에 붙여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그 위에 부처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해 닫집(궁전안의 옥좌 위 또는 법당의 불좌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을 매달아 장엄하게 꾸몄다.

중앙의 불단 좌,우에는 'ㄱ'자형으로 불단을 구성하여 16나한상을 모셨다. 이 영산전은 1562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 청룡사 석탑

*향토유적 제19호

 

 

대웅전 앞, 영산전 좌측에 세워져 있는 이 석탑은 절 아래쪽에 잇던 것을 1970년대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쌍립중 우측의 탑은 1매의 판석으로 지대를 마련하였는데, 1단의 괴임이 돌출되어 있고 기단부를 받들고 있다. 상면의 갑석은 탑신부 괴임대가 없는 평범한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1층 옥신석에는 장방형의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좌측의 탑은 하층기단 갑석에 3단의 괴임이 있고 1층 옥신에는 양우주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이 쌍탑은 옥신, 옥개석의 조성 수법과 그 형식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우측 탑이 232cm, 좌측 탑이 225cm이다.

 

♧ 석남사의 기타 부속시설들

 

▲ 석남사 들어가는 진입도로 입구의 표석

▲ 일주문을 대신하는 '금광루' 누각

▲ 석남사 경내의 약수터

 

석남사 경내 탐방을 마치고 사역 근처 산자락에 위치해 있는 마애불을 방문하려다 포기를 하여 아쉬움이 남는 일정이 되었다.

안성시에는 이상에서 소개한 3곳의 명찰이외에도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죽주산성, 안성향교, 안성성당, 양성향교, 덕봉서원과 정무공오정방 고택 그리고 고삼호수 등이다. 다음에 기회를 보아 나머지 관광지들을 방문하여 안성시의 볼거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