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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에 세워진 개량한옥의 효시! 99칸 보은선병국가옥

왕마구리 2010. 7. 15. 23:00

◀ 보은선병국가옥(報恩宣炳國家屋) ▶

【 선병국가옥 소개 】 

*충청북도 중요민속자료 제134호(1984년 1월 10일 지정)

속리산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이 큰 개울을 이루는데, 개울 중간에 돌과 흙이 모여 삼각주를 이루니 배의 형국 같은 섬이 되었고,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중앙에 큰 기와집이 있으니 여기가 조선 말기 인근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인 선씨 댁이다.

인근의 영재들을 뽑아 사비를 들여 교육시킨 선각자의 집이기도 하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른바 개량식 한옥의 구조가 시험되던 때인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당대의 제일 가는 목수들을 뽑아 재래식 한옥으로 질박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보다 진취적인 기상으로 이상형의 환옥을 완성하려고 시도한 집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특색있게 지어졌으므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냇물이 모이는 너른 삼각주 소나무 숲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 먼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대단히 아름다운 환경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사랑채, 안채, 사당채를 둘러싸고 있는 안담 바깥으로 널찍하게 외담을 둑담으로 두껍고 높게 둘러치고 있는 점이다.

 

 

사랑채는 정남향으로 사당마당 앞에 조그맣게 예쁜 내대문이 세워졌고, 이것을 중앙으로 하고 사랑채를 둘러싸는 네모 안담을 두르고 동남쪽 모퉁이에 안에서는 시선을 피하면서 뒷간이 자리한다.

사랑채와 중문의 축을 맞추면서 남쪽에는 3칸 대문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 흔적만 남아있다. 대문간 앞은 넓은 마당이 마련되고 안산 대신 조성된 소나무 숲속에 이 집 할아버지 선씨의 효자정각(효열각)이 직각축으로 세워져서 집의 어귀를 형성한다.

 

 

 

▲ 솟을대문(정문) 바깥 남쪽에 자리한 효자정각/효열각

 

효자정각은 단칸 다포 합각지붕인 바 단칸 맞배대문을 두고 막돌 담장을 둘렀다.

 

▲ 솟을대문(외대문인 정문)

 

외대문은 3칸 솟을대문의 전형이며, 내대문은 일각대문으로서 빗장이 이중으로 되었고 둥근화반을 끼우고 위에만 소로를 받친 점이 재미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및 사당채의 세 공간으로 구획하여 내담을 둘러치고 이를 밖으로 다시 크게 둘러싸서 또 하나의 외담을 만들어 구획한 점이 특이하다.

 

 

▲ 외담

 

특히 정원은 사랑채의 경우 전통적인 맛을 잃지 않게 조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1919~1921년 사이에 지어진 이 집은 전통적인 건축기법에서 벗어나서 건물의 간살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는 경향으로 변화를 보이던 시대의 대표적 지주계층의 살림집이라 하겠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를 둘러싸고 있는 안담의 바깥으로 널찍하게 외담을 두껍고 높게 둘러 쌓았는데, 1980년 대홍수(1998년 7월 31일~8월 18일 기간중 홍수로 침수)로 피해를 입어 많이 허물어졌다.

 

▲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바라본 사랑채 전경

 

▲ 사랑채

 

▲ 사랑채 대청에 꾸며 놓은 다실

 

▲ 측면에서 바라본 사랑채(左), 사랑채 앞 마당의 멋진 소나무와 사랑채로 들어서는 내대문(右)

 

사랑채는 H자형 평면으로서 뼈대를 2고주 7량으로 처리하여 몸체가 정면 4칸, 보간 2.5칸으로 하고, 날개채가 정면 2칸, 측면 5.5칸으로 해서 앞으로 몸채보다 2칸을 내밀도록 되어 있다.

몸채에는 앞뒤로 툇마루를 두면서 날개에는 앞과 안쪽에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몸체 가운데는 너른 3칸 대청과 상하 2칸의 작은 사랑을 배치했는데 대청 앞은 분합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서쪽 날개에는 앞쪽에 서루와 뒤쪽으로는 큰 사랑을 두었으며, 동쪽 날개로 부터 골방, 약방, 구들, 마루를 시설했으며,  동쪽 측면에 쪽마루를 내달고 몸채 외진주 줄에 맞추어 쪽대문을 시설해서 앞뒤의 이용을 구분짓고 있다.

지붕은 골기와에 합각지붕이며 홑처마이다. 굴도리에 장혀를 받치고 뜬장혀를 보내서 소로를 끼웠다. 두리기둥위에 커다란 주두를 얹었고, 주초는 팔각인데 약간 높다. 기단은 세벌인데 위에만 장대석 갑석을 돌리고, 아래 2단은 네모꼴 면석으로 쌓았다. 날개쪽 툇마루 앞에는 난간을 두르고 아(亞)자 살로 장식하였다. 창문들은 비교적 살이 가늘고 장식적이어서 연약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구조기법은 안채와 같다.

 

 

 

▲ 안채

 

안채는 사랑채의 축에서 직각으로 꺾어서 서향하여 배치되며, 역시 H자형 평면을 갖는다. 이것을 'ㄷ'다형 행랑채가 넓게 둘러싸서 안마당 공간을 형성한다. 행랑채의 남쪽 끝에는 'ㄱ'자형으로 꺾어서 솟을대문을 덧달고 내대문을 시설한 바 외대문에서 'ㄹ'자로 꺾어 안채에 이르도록 계획하였다. 이것을 더욱 곡진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문 앞에는 'ㄴ'자 담장을 둘러쳐서 대문 앞을 가로 막았다.

 

▲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인 내대문가는 길 

 

▲ 안채 내담 북쪽 바깥에 위치한 장독대와 안채 북쪽문 

 

안채는 몸채가 정면 4칸, 보간 2.5칸이고 날개채가 정면 4칸, 측면 6칸으로 해서 앞은 1.5칸, 뒤는 2칸을 몸체보다 내밀도록 계획했다.

몸채에는 가운데 넓은 2칸에 대청을 배치하고 오른쪽에 상하 2칸의 안방과 왼쪽에 역시 상하 2칸의 건너방을 넣었다. 앞은 툇마루이고 뒤는 쪽마루가 시설되었고, 이것을 오른쪽 날개 뒤까지 연결시켜서 부엌마루, 부엌방과 동선을 이어준다.

오른쪽 날개에는 부엌 앞에 모방과 툇마루가 있고, 뒤쪽에는 역시 상하 2칸의 부엌마루와 부엌방이 만들어졌다. 왼쪽 날개에는 몸채 툇마루와 연결해서 조그만 대청과 창호가 시설된 마루방이 마련되고 그 앞은 반칸 크기의 곳간과 주위에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마루방 뒤에 갓방이 놓이고 그 뒤에 다시 1칸짜리 구들이 마련되며 가운데에는 뒤뜰과 연결되는 상하 2칸 크기의 부엌이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모두 광인데 상부에는 부엌까지를 포함해서 넓다란 다락이 시설되었고 이것은 뒤툇마루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구조는 대체로 사랑채와 비슷하나 특이한 점은 뒷퇴를 두지 않고 앞퇴만 두면서 7량으로 처리하고 이것을 굽은 부재를 이용하여 앞뒤 지붕의 물매와 길이를 맞추고 있는 점이다. 또한 이때의 구조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홍예보를 써서 2중으로 보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곧 장혀를 받친 종도리를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종보 위에 얹었다.

종보는 중상도리와 맞춰지며 밑의 장혀는 중도리 사이의 홍예보 꼬리와 맞춰져서 무지개를 하고 중하도리와 머리를 맞추었다. 이때 중상도리는 위동자주로 받쳐서 대들보 위에 올리는데 대청중앙이 아닌 경우, 뒤의 동자주는 앞뒤 대들보를 얹는 고주가 받쳤다.

고주머리는 가름장맞춤으로 뒷보를 끼우고 그 위에 대들보 꼬리를 긴장부로 끼워 맞추었으며 다시 앞중하도리는 홍예보와 맞추고 홍예보 밑바닥을 대들보 위에 얹었다. 앞중하도리 밑에서 장혀로 받치고 소로를 끼워서 뜬장혀를 보내고 무지개꼴 툇보의 꼬리와 맞추며 뒤중하도리는 짧은 동자주로 받쳐 뒷대들보 위로 올리고 뒷평주에 가서 평범하게 결구한다.

말하자면 상하중도리사이에 홍예보를 써서 2중보를 둔 것이 특이하고 나머지 기법은 사랑채와 같다.

조금 다른 점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두리기둥(원기둥)을 쓴 반면 안채는 전면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 안채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곳간채(행랑채)

▲ 안채와 곳간채(행랑채)를 싸고있는 내담

 

행랑채는 맞걸이 3량 맞배지붕인데 북동쪽 끝부분만 작은 합각으로 처리했다. 평면은 전면 14칸, 북쪽 날개 9칸, 대문간을 포함해서 남쪽 날개는 9칸으로 이루어졌다. 솟을 대문 옆에는 문간방이 마련되며 서남쪽 모퉁이에는 사랑채와 연결하는 중문간이 시설되었다. 나머지는 몇 개의 구들과 광칸으로 만들어졌다.

사랑채는 다시 안마당에 축을 직각으로 꺾어서 행랑채의 북쪽에 사랑채와 축을 나란히 해서 배치하였다. 3칸의 솟을 삼문을 전면으로 하고 뒤로 3칸의 사랑채가 놓였다.

 

▲ 문이 잠겨있어 출입할 수 없는 사당채

 

사당마당 서쪽에는 3칸 제수채로 구성되는데 제수채에서 사당채까지 'ㄱ'자로 꺾어진 복도채가 연결된다. 전면 삼문을 가운데로 하여 담장이 둘러 처졌다.

삼문은 맞배지붕이며 마루를 깔았다. 제수채는 남쪽에 부엌을 두고 뒤로 2칸 구들을 놓았는데 구들 앞은 쪽마루가 시설되었다. 복도채는 벽과 지붕을 갖추어 비바람칠 때도 의례를 거행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시설물이다.

【 소 재 지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

【 탐방일자 】2010년 7월 5일(월)

【 탐 방 기 】  

삼년산성 성곽 돌기를 마치고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들린 곳이다. 삼년산성에서 약 1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삼년산성 입구를 출발한 지 13분여만에 선병국가옥 주차장에 도착을 할 수가 있었다.

현재 후손들이 거주를 하고 있어 사랑채만이 개방적이었고, 안채와 곳간채((행랑채)에는 살림집과 유숙하는 손님(공부하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것으로 추정)들이 머물고 있어 앞 마당을 지나가며 전체적인 구조만 한 번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실내는 접근도 할 수가 없었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사당채 쪽의 뒷문 입구에는 '탐방객의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있어 외부 구조만 살펴 보는데도 부담이 되었다.

지은지 90년이 채 되지 않아 그런지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했으며, 기존의 옛 한옥과는 구조면에서 차이가 있어 보였다. 옛 한옥에 들어가면 상당히 비좁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선병국가옥은 개량식 한옥구조로 지어진 때문인지 방과 마루 등의 공간이 상당히 넓어 보였고, 마당 또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엇다.

내부 구조는 사랑채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옛 한옥의 갑갑하고 비좁다는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한 구조였으며, 실제 살아도 불편하지가 않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병국가옥 전체를 한바퀴 돌아 보는데 약 50여분이 걸렸는데, 이는 사랑채에 거주하고 계시는 노부인과 잠시 '파룬궁' 수련으로 건강을 찾게 되었다는 얘기를 잠시 나누며 시간을 지체했기ㅐ 때문이다,

빠르게 한바퀴 돌아 본다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 선병국가옥 주차장 앞의 전통가옥 푯말과 '전통문화마을 개안리' 표석

 

▲ 효자정각/효열각 우측의 선혜비와 공덕비

▲ 선병국가옥의 북쪽 문인 사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