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관광명소/성곽돌기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Ⅰ) 연천호로고루

왕마구리 2010. 8. 4. 17:32

이번 탐방은 경기DMZ트레킹 연천지역 3개 코스를 걷기 위해 연천군 문화관광과에 연천군 트레킹코스 안내 리플렛과 관광안내도를 신청하였는데 신청 5일만에 우편으로 집에 도착하여 그 내용들을 검토하다가 트레킹 코스 주변에 많은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 31일(토) 첫 연천 제1코스(황포돛배~숭의전)를 걸으면서 인근에 있는 유적지와 관광지를 찾을 계획이었으나 정규 도보코스의 거리가 접근거리 포함 약 24km에 달해 트레킹 코스에서 벗어나 4~5km 이상 떨어진 곳(경순왕릉과 연천호로고루)에 위치한 유적지를 추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포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정규 코스 종착지에 포함된 숭의전도 개관시간(오전10시~오후5시)에 맞추지 못해 탐방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경기DMZ트레킹 연천 제1코스의 숭의전과 다음에 탐방 예정인 연천 제2코스(숭의전~군남홍수조절지)에 포함된 고구려 유적지인 연천당포성과 강의 침식작용에 의해 생성된 임진강 주상절리 등을 별도로 미리 방문하여 탐방함으로서 다음에 걷게될 제2코스의 소요시간을 줄여 볼 예정으로 승용차를 이용하여 이번 탐방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번 탐방은 임진강 주변에 산재해 있는 유적지를 위주로 실시하였으며 고구려3대성의 하나인 은대리성만 한탄강을 끼고 위치해 있었다.

탐방기는 각 유적지별 나누어 게제를 하기로 한다.(유적지명을 클릭하면 바로 연결됨)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Ⅰ) 연천호로고루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Ⅱ) 연천당포성

- 고구려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연천 고구려3대성(Ⅲ) 연천은대리성

- 고려를 만나다! 숭의전

-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을 만나러... 신라경순왕릉

- 천혜의 자연성벽! 임진강 주상절리

 

【 탐방경로 】 신라경순왕릉/장단고랑포→연천호로고루→숭의전→연천당포성→임진강 주상절리→연천은대리성

【 탐방일자 】2010년 8월 2일(월)

소요시간 】 총 5시간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연천호로고루(漣川瓠蘆古壘) ▶ 

  

▲ 연천호로고루

 

【 호로고루(瓠蘆古壘)의 역사 】

*사적 제467호(2006년 1월 2일 지정)

*면적:21,768㎡

*소재지: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번지 

임진강은 구간에 따라 정파강, 후연강, 조강 등 수십 여 개의 이름이 있었는데 호로고루가 있는 부근은 과천, 호로하, 표강 등으로 불리었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호로고루에서는 두 시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첫번째 시기는 고구려의 남진 초기의 유구로 현재 동쪽 성벽의 하부에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는 일렬의 기둥구멍들이 확인되어 4세기 중엽 경에는 동쪽 성벽이 목책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시설로 구축되었음을 알 수가 있고, 아직 동벽과 기와 건물은 조성되지 않았다.

두번째 시기는 6세기 중엽이후 고구려 멸망시기까지의 유구이다. 서기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가 임진강을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덕진산성부터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많은 성들이 새로 신축되거나 재정비되었다.

이 때 호로고루에서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통해 재정비되었다.

남쪽 지역이 높고 북쪽 지역이 낮았던 성 내부는 북쪽 지역에 흙을 쌓아 다져서 편평하게 하고 성벽이 들어서게 될 곳은 높이 1m 정도로 판축을 하여 성의 기초를 견고하게 다졌다. 판축해서 다진 부분의 중앙에 폭 6m, 높이 10m에 달하는 동벽을 수축하는 한편, 성 내부에는 여러 동의 기와건물과 지하식 벽체건물을 신축하고 우물 등을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와 유물의 질이나 양적인 면을 고려할 때 호로고루는 주변의 고구려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계가 높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호로고루는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년간 임진강 유역을 방어하는 고구려 국경방어사령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주변의 행정과 군사를 주관하는 장단군의 읍치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이라 하여 개성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에 대한 전투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삼국간의 대립과정에서 이곳의 지명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전략적 입지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효종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도'이며 이 책에는 호로고루가 삼국시대의 유적임이 명시되어 있고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9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이다.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함께 사진을 싣고 있으며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이 기술되어 있다. 그 후 1991년부터 2003년 사이 본격적인 학술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연천호로고루는 연천당포성, 연천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임진강이 국경하천 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현재 동측 성벽 등 모든 문화재는 발굴조사 후 다시 흙을 덮어 보존 처리한 상태라 실제의 모습은 볼 수가 없으며, 석성이 아니라 마치 토성인 것으로 착각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를 없애기 위해 참고로 이곳에 일부 게제하는 사진들은 발굴 당시에 촬영한 잔존하는 호로고루 유적으로 문화재청과 연천군에서 공개한 자료 사진들임을 밝혀둔다.

 

▷ 연천지역 고구려유적의 지리적 배경

남한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유적은 93개소에 달하며 이중 대부분이 경기도 북부지역에 63개소로 집중 분포하고 있다.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유적은 크게 세 개의 권역으로 구분되는데 임진-한탄강유역, 양주분지일원, 아차산일대이다.

임진-한탄강유역의 고구려유적은 덕진산성 1개소를 제외하고 모두 연천군에 분포하며 현재까지 고구려유적으로 확인된 곳은 신답리고분(경기도기념물 제210호)과 성곽 12개소이다. 이 유적들의 대부분은 임진-한탄강의 북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울목, 나루터 등 강을 건널 수 있는 길목에 입지하고 있다.

연천군은 지리적으로 서해의 뱃길을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통해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상의 교통의 요지로 임진-한탄강을 따라 수십km에 걸쳐 15~20m 높이의 강안 절벽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요충지를 장악할 경우 신라,백제 세력의 북진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고구려의 최남단 국경방어선의 군사시설물들이 강을 따라 다수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천 고구려3대성인 호로고루(사적 제467호), 당포성(사적 제468호)과 은대리성(사적 제469호)은 동일한 입지 조건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성의 남쪽과 북쪽은 강의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높이 15m 이상의 수직 절벽이 성벽 역할을 하며 진입이 가능한 동쪽에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에 형성된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남한지역의 대표적인 고구려성들로 고구려의 임진-한탄강 방어선을 관장하는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던 곳들로 추정된다.

 

 

▷ 성의 지형적 구조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는 두께 10~30m 정도의 용암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강물이 흐르면서 용암대지를 침식하였다. 용암은 주상절리라고 하는 물리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침식이 이루어지면 수직기둥 모양으로 돌이 떨어져 나가면서 강의 양안에는 수km에 걸쳐 높이 10~15m 정도의 수직절벽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임진강은 별도의 성벽을 구축하지 않더라도 능히 적을 막아 낼 수 있는 천혜의 전략적인 요충지를 제공하고 있다.

 

▲ 임진강변에 형성된 주상절리를 자연 그대로 이용한 호로고루의 남벽

 

그런데 군데군데 이러한 석벽이 사라진 곳이 있는데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석벽을 뚫어 출입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수직단애가 사라져 방어가 취약한 지점에는 성곽이 구축되어 있다.

호로고루 역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샛강으로 인하여 석벽이 끊어진 지점에 구축되어 있다. 임진강과 샛강이 예각을 이루며 만나게 됨으로써 동-서 방향으로 좁고 길쭉한 지형이 형성되고 있는데 그 정상부의 동쪽 부분을 남북으로 막아 삼각형의 성곽을 구축하였다.

 

▷ 성의 형태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단애 위에 있는 삼각형의 강안평지성으로 전국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의 성곽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재었을 때 약 400여m이고,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이며, 동벽은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93m이고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성벽 최상부는 30m 정도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가 설치되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호로고루의 성벽의 구조와 성내부 시설물들

 

▲ 성밖에서 바라본 호로고루의 동쪽 성벽

 

▲ 발굴조사 당시의 동쪽 성벽 모습

 

▲ 현재 일부 드러나 있는 동쪽 성벽의 석축 흔적들

 

▲ 현재 일부 드러나 있는 동쪽 성벽의 석축 흔적과 동쪽 성벽의 단면 

▲ 성안 북쪽에서 바라본 동쪽 성벽

▲ 남서 방향에서 바라본 성내부와 동쪽 성벽 전경

 

동쪽 성벽은 성 내부를 평탄하게 흙을 쌓아 다져 성벽이 들어 설 곳에 높이 1m 정도 높이로 판축을 하여 성벽의 기초를 견고하게 하고 그 중앙에 폭 6m, 높이 10m의 흙둔덕을 튼튼하게 쌓아 흙둔덕에 기대어 양쪽에 석축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 성벽이 받게 되는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암반에서부터 보축성벽을 덧대어 쌓고 보축성벽을 보강하기 위해 다시 보축성벽 위에 경사지게 흙으로 판축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축성법은 아래의 판축부와 엄청난 무게의 석축성벽이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쉽게 붕괴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고구려의 높은 축성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동쪽 성벽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쪽 전경

 

▲ 동쪽 성벽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내부와 서쪽 전경

▲ 동쪽 성벽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쪽 성밖 전경

 

동쪽 성벽의 정상에 올라가면 주변에 높은 지형이 없어 사방으로 넓게 조망이 된다.

북벽과 남벽은 수직단애를 이루고 있으므로 성안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은 이 동벽의 남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벽과 북벽이 높이 15m 정도의 단애로 인하여 이미 천연의 성벽이 구축된 상태지만 방어력의 보강을 위하여 암반위에서부터 지표면에 이르는 2~3m 두께의 점토퇴적층에도 편축식의 성벽을 구축하였음이 확인된다.

 

▲ 임진강변의 남벽과 남벽위에 설치해 둔 목책

▲ 주차장에서 바라본 북벽

 

또한 북벽의 중간부분에는 남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문이 잇어 밧줄을 타지 않고 강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벽과 북벽의 지상에는 동벽과 같은 지상성벽이 당초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경우 성 내부가 남쪽이나 서쪽에서 쉽게 조망되므로 남벽과 북벽 윗부분에는 목책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 성안(上)과 밖(下)에서 바라본 동쪽 성벽의 남쪽 끝에 위치한 성 진입로

▲ 성밖에 동쪽 성벽 석축에 되었던 돌들을 모아 쌓아둔 석축모형

 

성내부에는 기와건물들과 지하식 벽체시설, 우물 등이 만들어졌고, 특히 와당, 치미, 착고기와와 전돌을 사용한 기와 건물의 존재는 남한지역의 그 어는 고구려 유적보다 높은 등급의 지휘관이 호로고루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 호로고루의 출토 유물들

 

 

남한지역이 고구려 유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매우 귀한 건축자재였던 기와는 왕궁이나 사찰, 관아, 학교 등 공공건물에만 사용되었는데, 호로고루에서 이처럼 많은 기와가 발견되다는 것만으로도 호로고루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기와는 회색이나 회청색의 백제와 신라 기와들과는 달리 붉은 색이나 황갈색을 띠고 있다. 기와의 내면에는 노끈문이나 톱날문, 격자문, 사격자문, 횡선문 등 다양한 문양이 찍혀 있고, 외면에는 좁은 판자로 만든 와통(기와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틀)의 모골흔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물지 내부와 기와폐기장에서 발견된 6엽의 연화문 와당과 치미편을 통해 치미와 막새로 치장한 매우 수준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증거들은 다른 고구려 성들보다 더 높은 신분의 장수가 거주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호로고루가 고구려의 임진강 방어선을 관장하는 국경방어사령부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이다.

기와류 이외에 동이, 접시, 시루 등 각종 토기류와 다리가 세 개 달린 벼루, 문자가 새겨진 토기들, 토제 및 석제 저울추, 관모형 토제품 등이 발견되어 고구려군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상고명 토기는 국내에서 실물로 발견된 최초의 고구려 북으로 한국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됭 것으로 예상된다.

그외에도 고구려 병사들의 식생활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각종 탄화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쌀과 좁쌀, 콩, 팥 등이 확인되었다.

육류로는 소, 말, 개, 멧돼지, 사슴, 노루 등 다양한 동물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최소한 6종 이상의 동물이 식용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